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전
상세정보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천경자(1924–2015)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여성 작가 22명의 작품과 자료로 전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을 개최합니다.천경자 작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당시 정규 미술학교가 없던 조선을 떠나 미술 공부를 하고자 1941년 일본 도쿄에 있는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는 재학 중인 1943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조부상(祖父像)〉으로 입선했고, 태평양 전쟁(1941–1945)으로 수업 연한이 단축되면서 그해 가을 졸업했습니다. 일본에 남아 활동하고자 했으나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귀국해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 미전》에서 〈노부(老婦)〉로 입선했습니다.
1945년 봄, 천경자는 귀국 시 도움을 준 이형식과 결혼하고 8월 고향 전라남도 고흥에서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학력과 집안 사정을 사실과 다르게 말하고 결혼해 가장 역할을 하지 않던 이형식으로 인해 그는 모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면서 어머니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젖을 먹이며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러다가 학교에서 조촐하게 마련한 개인전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셋방에 기자들을 초청했는데, 여기서 김남중을 만나 오랫동안 일방적이고 고통스러운 사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형식은 소식이 끊겼고, 못 먹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영양부족으로 여동생 옥희가 폐병이 재발해 결국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처절하게 슬프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디기 위해 〈생태〉(1951)를 그렸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그렸으며, 이를 전남 곳곳을 돌아다니며 팔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되면서 정부의 서울 환도를 앞두고 당시 학부장이던 윤효중의 권유로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전임강사가 되었습니다. 다음 해 그는 6월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10월 제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하면서 작가로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당시 동양 화단은 한국 고유의 특성을 반영한 ‘한국화’ 형성이 당면 과제였습니다. 조선 시대 이래로 동양화는 남화 양식의 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일본이 일제강점기에 문화정치 일환으로 시행한 《조선 미전》에서 사실적인 사생(寫生)을 강조하면서 이는 일본화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광복 이후 왜색을 탈피하고 한국 고유의 회화, 한국화 수립이라는 정답 없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한국적인 재료, 소재, 기법 등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틀에 얽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천경자는 다른 작가와 달리 처음부터 자기 작품을 동양화,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채색화는 곧 일본화라는 편견으로 대부분 작가가 수묵화를 그릴 때도 꿋꿋하게 채색화에 정진했습니다.
천경자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어떤 틀을 제시하거나 강요하지 않았고, 제자들의 성향과 작업 방식을 존중했습니다. 그의 자유로운 태도와 교육 방식은 그가 제자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작가가 어떤 틀에 갇히지 않고 그림을 배우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되었습니다. 이들만이 아니라 전시에 참여한 많은 작가가 그의 작가적 태도에 큰 감화를 받았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천경자는 1961년 11월 9일 자 『조선일보』 기사 「한국화는 형성될 수 있을까」에서 이상범, 고희동, 박노수와 달리 동양화에 관해 “세계 조류상으로 보아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다. 동양화 역시 변해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유행성(流行性)만 찬양하거나 시대 조류에 아부해서도 안 되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얼굴을 돌려서는 안 된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화’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일본화’란 것이 국수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대두된 것인데 한국화를 운운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쇄국적이고 협소한 굴레에 매어 달리는 격밖에 안 되는 것이다. 화가가 자기 나라에 사는 이상 성격이나 감정도 물론 자기 나라의 생태를 나타내게 마련인 데 ‘한국화’해가지고 담을 쌓아 놓으면 작가의 자유로운 개성이 오히려 죽어 버리기 마련이다. 현대에서 동양화나 서양화의 구분이 재료로써 갈라놓게 되는데 지금 ‘한국화’ 운운한 것은 난센스다. 그리고 동양화를 묵화로 그려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강서벽화만 보더라도 색채가 있었고 인도화도 그렇다. 동양화에서 묵화도 있을 수 있고 채색화도 있을 수 있다. 자유로운 창작적 개성 속에서 한국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한다면 그것이 곧 한국의 독특한 미가 생기는 것이지 굳이 ‘한국화’라고 이름 붙여 좁은 울안에다 집어넣을 필요가 없다.”라고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생각을 밝혔습니다.천경자는 이러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남다른 감수성과 감각으로 유년기의 기억, 음악, 문학, 영화에서 받은 영감, 연인과의 사랑과 거기에서 오는 고통, 그리고 모정(母情)을 자기만의 개성적 필치로 작품에 담았습니다. 1963년 미술사학자이자 전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던 최순우(崔淳雨, 1916–1984)가 신문화랑에서 개최된 그의 여섯 번째 개인전 작품을 보고 난 뒤 말했듯이, 그는 “현대(現代)를 멋있게 걸어가는 작가”였습니다.
본 전시는 그간의 전시나 연구와 달리 천경자 작가의 이런 현대적 사고방식을 부각하고 그가 미친 영향, 그리고 당시 그와 동시대를 살았지만, 천경자와 달리 일제강점기로 인해 동양화에 씌워진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았던 여성 작가들을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가 전공한 동양화에 부과된 의무만이 아니라,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듯이 가사와 양육의 의무를 다해야만 했습니다. 가정과 작업 사이에서 늘 죄책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시간이 부족해 실컷,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게 유일한 바람이었습니다. 작가로서 진보적 사고를 지녔던 천경자 작가 역시 여성으로서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기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자신의 호적에 올리지 못했고 당장 먹고살게 없는데 작품을 판매할 기회를 남성 작가에게 빼앗겨 아이를 데리고 간 그 자리에서 통곡한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예술을 파괴하지 못했던 것처럼, 시대적 난관과 가정적 어려움이 이들의 열정을 식히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림을 그렸고, 단체활동으로 전시를 이어갔고,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 양식에서 벗어나 결국 각기 다른 조형언어로 자기 삶과 긴밀하게 연결된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은 공통으로 일제강점기(1909–1945), 8·15광복(1945), 한국전쟁(1950–1953), 4·19혁명(1960), 5·16군사정변(1961), 군사독재(1961–1979), 12·12군사반란(1979), 5·18 광주민주화운동(1980), 신군부 정권(1980–1993),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민주화 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격변의 시대를 살아냈습니다. 사회, 개인의 삶, 예술은 결코 분리될 수 없기에 본 전시는 일제강점기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정치 사회적 흐름과 미술의 흐름을 한데 묶고 그 연관성을 찾아 당시 동양 화단 전체를 조망하고자 했습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교육기관, 《조선 미전》의 전개, 광복 이후 교육기관, 《국전》의 전개와 그사이에 이루어진 정치, 사회적인 개입, 동양화의 흐름, 단체활동과 업적 등 많은 자료와 각 작가의 연보를 객관적 시각으로 체계를 잡고 상세히 정리해 이들의 작품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고, 이들이 어떻게 비슷한 소재와 기법으로 그림을 그리던 ‘여류 동양화가’에서 지금의 ‘작가’로 성장해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특히, 천경자 작가의 진솔한 자서전, 각종 기사와 글, 작품 등 다양한 자료를 심도 있게 연구, 이를 토대로 그의 삶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을 찾고 이들과의 관계를 탐색해 상세히 정리한 연보를 통해 그간 그에 대한 오해와 오류를 바로잡고 향후 보다 심화한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합니다.
본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선구자인 천경자 작가를 기리는 동시에 '격변의 시대'를 살아내고 다양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에 이바지한 정찬영, 이현옥, 정용희,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 박인경, 금동원, 문은희, 이인실, 이경자, 장상의,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윤애근, 이화자, 심경자, 원문자, 송수련, 주민숙, 김춘옥, 차명희 작가의 작품세계를 어떤 경계도 제한도 없는 동시대 미술 흐름 속에서 재조명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