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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리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기 성찰과 기도, 희생과 봉사가 요청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과 보편적 상식을 지녀야 합니다.
작은 이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갑작스레 위로 툭 튀어 오르다 보니, 지금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나 무속에 깊이 빠져 백성들을 혼돈상태에 빠트렸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들, 무고한 사람들을 단체로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았습니다.
엉뚱하거나 그릇된 지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페스트나 콜레라보다 더 무섭습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 부끄럽게도 그런 지도자가 한두명이 아니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똑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 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헤로데로 인해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노력이 아닐까요?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에게 대신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그때 아기 예수님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영혼들은 교회에서 순교자 지위에 오릅니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아기들이 자기 의지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경받을 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산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차를 비트는 바람에 길가에 있던 어미 새를 치어 죽였습니다.
내려보니 둥지에 새끼 새들이 있습니다. 어미가 없으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 잡아먹힐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새끼 새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어야 했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미 새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독사는 새끼들도 잡아먹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어야 그 보상을 받게 되는지 잘 깨닫게 해줍니다.
나에게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그 보답을 해줄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내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대신 죽어주고 싶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 놓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트릭스’(1999)란 영화에서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모피어스란 자가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이전처럼 침대에서 깨어나겠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리란 것입니다.
네오는 진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빨간약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을 때 믿지 못할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는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조작된 세상이었고, 기계들이 인간들이 그렇게 허상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인간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오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아라는 기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기계의 세력과 맞서 싸웁니다.
나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과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값을 되돌려줄 대상인지 명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아는 나를 이용할 뿐 나에게 자신을 위해 일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내 죽음의 값을 되돌려줄 수 있는 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분이란 나를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무덤에서 외롭지 않도록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아빠의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사는 장 리용씨와 딸 신레이의 사연입니다.
리용씨 딸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지중해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중해빈혈’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중증의 경우 적극적인 수혈 요법이 필요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리용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딸의 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간 치료비로만 10만 위안(약 1680만원)을 사용했지만, 딸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리용씨 부부는 의사에게 “제대혈(탯줄혈액) 이식을 통해 딸을 살릴 수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 둘째 아이를 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엄마 뎅민 씨는 “우리에겐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습니다.
부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용씨는 딸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직접 무덤을 팠습니다.
이후 리용씨는 딸과 함께 이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딸이 죽은 후에도 이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리용씨는 “궁지에 몰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라며 “2살 딸아이가 묻힐 이곳에 데려와 같이 놀면서 익숙해지게 하는 일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이곳을 동행하는 것”이라며 “딸이 무덤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용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피어 비디오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퍼졌고 사연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신레이의 치료비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딸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 마음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나라를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신조를 위한 죽음을 수도 있으며, 가족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목숨을 바치는 대상이 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비록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는 대상이라면 나의 삶과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에 나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삶으로 되돌려줄 사랑과 능력이 있는 분이 하느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심장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심장을 하느님을 위해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혀와 성대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른손과 발이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하기 위해 그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받아들여 온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찮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죽였어도 그 새끼들에게라도 보답을 해준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나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해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크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뇌과학의 관점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은 도파민을 분비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때 도파민이 분비될까요? 사실 우리의 뇌는 아주 큰 욕심쟁입니다. 그래서 늘 ‘더 많이’를 추구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삶에서는 결코 도파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지금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면 도파민을 분비할 새로운 일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면 좌절과 절망이 나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종종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있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불행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당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어서 조금 쉬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쳤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그 안에서 새로운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주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일을 계속 찾는 일,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도 너무나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저의 경우는 책 읽고 글 쓰는데 새로움을 얻습니다. 똑같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책을 계속 읽고 있고,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글을 쓰고 있으니 새로움을 얻고 그 안에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항상 똑같은 기도를 하고 있다면 기도 안에서 행복을 느낄까요? 아닙니다. 매번 다른 기도를 하는 사람만이 다양한 주님을 새롭게 느끼면서 행복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기준안에만 살면 새로움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준안에서 사는 사람은 늘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간의 만족을 벗어나 계속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헤로데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 사는 아기들을 무자비하게 죽입니다. 왕의 위치에서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유다의 왕이 되시리라는 예언을 듣고는 제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안에서 생각하고 판단했기에, 이런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자기 왕위를 유지하려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과연 행복했을까요? 정적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잠시의 평화와 기쁨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최악의 왕으로 기록될 뿐입니다. 당연히 하느님께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헤로데 왕처럼 세상의 기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늘 새로움으로 지금을 기쁘게 살 수 있는 주님의 기준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차지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닫힌 문만 너무 오랫동안 바라보는 바람에 우리를 위해 이미 열려있던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헬렌켈러).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예수님의 고통의 밤과 예수님의 투쟁의 밤은
강생의 마지막 확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고통의 골짜기와
역사를 뒤흔드는 모진 고난 안으로
우리를 찾으러 내려오십니다.
우리의 손과 발, 입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쓰여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손이 폭력을 휘두르는 도구로,
발이 헛된 곳으로 빠져드는 수단으로,
입이 다른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도구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제 손과 발, 입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쓰이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그렇게 될 때 제 삶이 기적이 될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소중한 생명의
새싹을 무참히
짓밟는 너무나
아프고 슬픈 사건이
우리의 역사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반성하지 않는
역사는 똑같은
아픔을 반복합니다.
성찰(省察)속에서
성탄이 빛납니다.
살인으로도
막을 수는
없는 구원의
강생입니다.
살인의
역사 안으로
우리의 역사 안으로
하느님께서
탄생하십니다.
사랑으로 가는 길은
이토록 아프고 힘겹고
고통스럽습니다.
하느님 모상을
닮은 사람이
하느님을 잃어버리면
한없이 잔인한
살인자로 추락합니다.
하느님의 소중한
하느님의 생명은
우리의 욕망을 위한
희생물이 결코 아닙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살인의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성탄을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올바른 믿음이
허황된 욕망을
정화합니다.
우리모두는
생명을 위한
사람이 될 의무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다시금 생명으로
돌아가는 성찰과
감사의 시간입니다.
역사의 과오를
멈추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를 기억합시다.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가 우리를
회개로 이끄는
눈물겨운 성탄입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아기를 잃은
부모들의 통곡 소리를
기억합니다.
성탄은 이와같이
인간의 역사를
비추어줍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2,16)
'죄 없는 아기들의 순교!'
오늘 복음(마태2,13-18)은 '아기 예수님께서 부모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하신 말씀'과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는 말씀'입니다.
왜, 헤로데는 베드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을까?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데,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2,2)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헤로데가 자신의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 사건으로서,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학살 행위입니다.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은 아기 예수님 때문에 죽은 순교이며, 아기 예수님을 대신하여 희생된 순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래전부터 억울하게 죽은 아기들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성대한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는 헤로데와 같은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정적 죽이기 행위를 서슴지 않으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헤로데와 같은 대통령들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헤로데와 같은 사람들과 싸우셨고, 끝까지 그런 그들과 싸우시다가 마침내는 그들 손에 의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직무 대리자로 살아가는 사제들이 세상의 불의에 맞서 싸우는 이유이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이들의 잘못에 대해 외치는 이유입니다.
그런 사제들에게 좌파니 종북이니 빨갱이니 하는 헛소리를 하면 안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한다는 신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그런 소리를 쉽게 듣습니다.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독재자들의 손에 죽어간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복음말씀
제1독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