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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철기 이범석 장군의 생애 편저자 : 정 준 (丁 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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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석 ,장군은 1900년10월20일(음력)서울용동(현재의 명동 중국대사관 터)에서 「전주이씨 광평대군(조선왕조 세종임금 5남)의 17대손 정안부정공파」문중에서 출생했으니 이른 바 조선왕조의 후예이다. 부친의 고향인 충남 천안과 강원도 이천에서 소년시절을 보냈으며 우등생추천으로 경성고보(현재의 경기중학)에 입학했다.
1916년 애국지사 신규식 선생의 주선으로 중국의 손문(孫文 : 중화민국 대 총통역임)선생 특별추천을 얻어 운남성 독군(督軍 : 지방군 사령관)인 당계요(唐繼堯)장군의 신원보증으로 나이를 두 살 올리고 해외화교(海外華僑) 이국근(李國根)이라는 가명으로 중국군 정규사관학교인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입학했다. 서투른 중국어와 낯 설은 중국관습 등등 온갖 어려움을 각고(刻苦:뼈를 깎는)의 노력으로 극복하고 마침내 1919년 중국 운남육군강무학교 기병과 12기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편저자주(註)중국군 성검영(葉劍英)원수와 동기 동창】중국군 견습사관이 되었다. 수석졸업을 기념하여 기병과 구대장이던 서가기(徐家驥)가 "「강철같은 천리마」와 같은 인물이 되어라"하는 격려의미로 자신의 이름중 「천리마(驥)」자 앞에 철(鐵)자를 덧붙여서 철기(鐵驥)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신문보도를 읽고 즉시 운남성 독군인 당계요장군에게 특별청원서를 제출하여 중국군 근무를 사퇴하고 서간도로 떠나 만주 동삼성 소재 신흥무관학교로 달려가서 교관 겸 교성대장(敎成隊長:유격대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김광서(金光瑞)【편저자註:일명 김경천(金擎天),일본 육사졸업후 중국망명, 그가 바로 진짜 김일성(金日成)의 원조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와 훗날의 광복군 총사령관이 된 지청천(池靑天)【일명:李靑天】장군등이 함께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신흥무관학교에는 무기가 전혀 없어서 사관생도들을 목총으로 훈련하고 사격훈련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못하는 참담한 실정이라서 이범석 장군은 좌절과 울분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김좌진장군의 지명 초청으로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교관 겸 교수부장에 부임하여 독립군 사관을 양성했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大倧敎)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신민회(新民會)계통의 민족주의자들이 합작한 독립운동 단체였으며 사령관은 백야 김좌진 장군이었다. 3·1운동직후 편성된 30여 독립군 단체중에서 독립군편성과 동시에 처음부터 무관학교(사관연성소)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장교를 양성하고 사병들을 강 훈련시킨 독립군단체는 북로군정서 뿐이었는데 사령관 김좌진장군이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철기 이범석 장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북로군정서는 러시아에 출병했다가 철수하는 체코 정규군에게서 중화기를 포함한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헐값에 입수하여 완전무장을 갖추었다. 곧 이어서 일본군 토벌부대가 출동하여 만주군벌 장학량군의 간청에 따라 근거지를 이동하던 중 길림성 청산리에서 일본 정규군부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범석 장군은 완전무장을 갖춘 제2제대(梯隊)연성대장으로 임명받아 1920년 10월 22일 3일동안 600여명에 불과한 독립군 사관생도들을 진두지휘하여 청산리 산악험지(山嶽險地)에 매복하여 일본 정규군병력 3,000여명을 기습 격파하는 대첩을 달성하여 시들어가던 한민족의 한일투혼을 일깨웠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여 일시 고려 혁명군의 기병대장으로 항일전을 지속하다가 러시아 적군파가 갑자기 한국 독립군을 무장해제하자 경박호(鏡泊湖)를 헤엄쳐서 러시아를 탈출, 중국으로 귀환했다. ※김좌진장군과 이범석 장군
한일합방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제에 발각되어 1911년부터 1913년까지 2년6개월동안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마침내 필생의 숙원사업이었던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북로군정서 사령관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강군육성을 위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던 중국군 정규사관학교 졸업생인 이범석 장군을 지명하여 초빙했고 청산리 항일대첩이후 두분은 서로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아끼는 지기(知己)이자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평생 동지가 되었다. 두 분간에 두터운 신뢰를 나타내는 에피소드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해졌다. 러시아를 탈출하여 중국으로 귀환한 후 흑룡강성의 해림(海林)지역에서 독립군 재건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몹시 추운 어느날 며칠동안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김좌진장군이 이범석 장군의 안위가 걱정되어 숙소로 직접 찾아갔다. 당시 이범석 장군은 양식이 떨어져 며칠동안 굶은 것은 물론 함께 전쟁터를 누비면서 생사를 같이했던 애마까지 굶기는 상황이라 좌절감에 집안에서 칩거(蟄居)하고 있었다. 이 참담한 상황을 살펴 본 김좌진 장군이 아뭇 소리 없이 떠나더니 잠시 후 양식과 함께 마차에 건초(乾草:말 먹이)더미를 가득 싣고 되돌아 왔다. 그러나 되돌아온 김좌진장군은 최초에 입고 왔던 두터운 털 코트를 입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입고 있던 털 코트를 팔아서 이범석 장군에게 양식과 건초를 사다 준 것이다. 두 분간에 남다른 정리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이다. "김좌진 장군은 칠척 거구에 만인을 위압하는 태산같은 위엄과 형형한 안광 그리고 도도한 웅변력을 가진 진정한 영웅호걸이엇다"라고 이범석 장군은 후일 회고했다. 항일독립군 재건에 어려움을 겪게되자, 1928년 중국 동북항일군에 참가하여 작전과장(중국 지방군 소장)으로 항일전을 지속하다가 일본군 토벌대에 쫓겨 러시아로 이동했고 중국과 러시아 정부의 협상결과 중국군 마점산(馬占山)장군과 함께 유럽 군사시찰 단원으로 선발되어 유럽각국을 시찰하고 중국으로 귀환했음으로 당시 실정에는 희귀한 선구자(先驅者)주의 한 사람이었다. ※이범석 장군과 장학량(張學良)장군의 기연(奇緣)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장개석(蔣介石)정부에 특별히 요청하여 창설된 낙양(洛陽)군관학교의 한적(韓籍)군관대의 생도장으로 취임하여 근무하고 있었다. 한때 사분오열(四分五裂)로 존폐의 위기에까지 몰려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를 전기(轉機)로 기사희생(起死回生)하게 된 것은 물론, 중국 장개석 정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제공 받았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상해의 홍커우 공원기념식장에서 상해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폭사(爆死)시키자 그동안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장개석 장군이 "4억의 중국인이 못 해낸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고 이후 한국 임시정부의 열렬한 후원자로 돌변 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변하자 임시정부에서는 "차제(此際)에 한국인 사관학교 생도중 지원자를 꾸준히 선발하여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뒤 이을 무력항쟁에 전념하자"는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미래의 역군이 될 동량지재(棟梁之材) 즉 인재 육성에 중요성을 통찰한 이범석 장군은 "미래의 역군이 될 동량지재인 사관생도는 훗날의 독립과 건국에 대비하여 군사훈련에 주력해야지 귀중한 인재를 무모하게 희생시켜서는 안된다"고 사관생도 보호와 지속적인 육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의견대립이 빌미였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원리 원칙 고수를 주장하는 이범석 장군의 존재가 부담스럽게 느껴진 반대파 중 누군가가 지난날 러시아 연해주에서 고려혁명군 기병대장으로 근무했던 전력을 들어 "이범석은 위험한 공산주의 사상 신봉자"라고 중국정부에 모략·중상했다. 당시 이범석 장군을 크게 신뢰했던 낙양군관학교 교장(性名未詳)이 어느날 밤 이범석 장군을 은밀히 불러 "공산주의 혐의가 있는 이범석 장군을 즉시 해임하고 비밀리에 암살하라"는 중앙정부의 비밀지령서를 보여주며 "뒤 책임은 내가 질터이니, 즉시 이곳을 탈출 피신하라"고 귀띔해 주어 휘하 장교와 훈련중인 생도들에게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낙양군관학교를 탈출했다. ※안춘생(安椿生)전 광복회장은 "이범석 장군이 왜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이 낙양군관학교를 떠났는지 지금도 의문이다"라고 술회했었다고 이기호(李琪鎬)전 태극단장이 증언했다.그리하여 낮에는 고량(高梁:수수)밭에 숨고 밤에만 이동하는 잠복생활을 지속했으나 중국 중앙군이 총동원되어 가족과 친지를 체포, 심문하는 등 압박을 계속했기 때문에 몸둘곳이 없어지자 지난날 자신의 목에 거금 50만량의 현상금을 내걸었던 장학량(張學良)장군이 당시 지역사령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한구(漢口)로 탈출했다. 【편저자 註:장학량 장군은 일본 관동군 사주(使嗾)로 열차여행중 폭살된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아들이며, 부친의 뒤를 이어 동북3성 지방군사령관으로 근무했었으나 장해석 장군이 지방군벌의 해체를 위하여 한구(漢口)지역 사령관으로 전보 시켰다. 나중에 "북벌(北伐:공산군 토벌)을 중지하고 항일 전쟁에 전념하라"고 장개석 장군을 연금(軟禁)시킨 이른 바 서안사변(西安事變:쿠데타)을 일으켜 중국정부에 대일 참전을 촉구했던 장본인이 바로 장학량 장군이다.】 이범석 장군은 마침내 :"난국돌파(難局突破)를 위하여 정면승부를 결심"하고, 대담무쌍하게도 지난날 자신의 목에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었던 당사자인 장학량 장군을 비밀리에 찾아가 직접 담판을 벌였는데 이 면담은 쌍방간에 깊은 신뢰를 받던 분이 중재했지만 그 분의 이름은 종내 밝혀지지 않았다.묵묵히 이범석 장군의 얘기를 듣던 장학량 장군은 "내가 그대를 가장 미워했던 사람이니 그대를 가장 아낄 수 있다. 무고한 모략중상으로 한 몸을 숨길 수 조차 없는 사면초가 신세라니 이제부터 내가 그대를 보호해 주겠다."고 흔쾌히 말하며 이범석 장군을 다른 지방군에 천거해 주었다. 장학량 장군과 이범석 장군 두분 모두의 대담무쌍한 배포와 지인지감(知人知鑑)을 나타내는 비화(秘話)가 아닐 수 없다. ※증언자 이동식(李東植) : 육사8기 출신, 예비역 육군대령, 전 국방부 총무과장, 이범석 장군 최 측근,(현)경동고등학교 총동창회장, (현)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 부회장 •중국 지방군 소장(37세),중앙훈련단 한인부대장(41세)
는 원대한 포부를 세우고 국가지상(國家至上)과 민족지상(民族至上)의 기치를 내걸고 민족청년단(民族靑年團)을 창설했다. 이 뜻에 공감한 젊은이들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름같이 모여 들어 불과 2년반 사이에 총수가 100만명을 초과하는 거대한 전국 조직이 되었다. 【편저자 註 : 2년반후 해산시점의 등록회원이 130만 여명에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민족 청년단에서 훈련받았던 젊은이들이 훗날 기라성(綺羅星)과 같이 학계와 군부를 포함한 정치·사회 각분야 지도자로 성장하여 국가와 사회에 헌신했다. ※민족청년단 출신 인물명단 학계:김준엽 고려대총장,조일문 건국대 이사장. 군부:국방장관 최영희 장군,민병권 장군,군사령관 박임항 장군, 참모총장 노재현 장군, 국회의장:이재형, 백두진. 국회부의장:김재광, 김영록. 행정부:유창순 국무총리, 김정례 보사부장관. 광복회장:안춘생 장군, 장철 애국지사. 정치계:장준하 선생, 김철 사회당 당수. 사회단체:서영훈 적십자사 총재, 사상계 부완혁 발행인, 노태준 태양신문사 사장.... 기타 행정부 각료와 도지사 및 국회의원 등등. ※이승만 건국대통령과 이범석 장군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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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稟)이자 진면목(眞面目)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의하여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 발탁되었다. 국군창설에 동분서주하는 등 혼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피땀흘려 창설하고 조직한 민족청년단을 해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대북첩보 수집(蒐集)부서인 국방부 제4국 창설문제로 미국 고문관들과 심각한 갈등을 빚어서 국방장관 자리를 물러났고, 허무 맹랑한 모략중상과 유언비어때문에 크나큰 경륜(經綸)을 채 펴지도 못한 채, 6.25동란 발발 수개월 전에는 국무총리 자리에서마저 물러났다. •미래를 통찰(洞察)한 형안(炯眼), 국난(國難)을 사전대비 단기간의 국방장관 겸직 중, 북한의 도발과 남침가능성을 우려하여 「호국군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예비역 장교 인력을 확보했고, 육군사관학교 생도 숫자를 대폭적으로 증강시켜 초급장교를 양성(養成)했다. 【편저자 註 : 육사7기생 숫자는 200여명에 불과했는데 대한민국 수립 후 모집한 육사8기생 숫자를 총 1,600여명으로 대폭 증원시켰다.】 6 · 25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중 · 소대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육사 8기생들이 단위 전투부대를 진두 지휘했고 국난을 온 몸으로 지켜내어 전쟁중 육사 8기생의 희생이 가장 컸다. 이러한 사례가 미래를 통찰하고 국난을 사전 대비한 이범석 장군의 형안을 웅변으로 입증하는 실례(實例)로 지적되고 있다.
1961년에는 충청남도에서 참의원에 압도적으로 당선되었지만 곧 이어 발발한 5 · 16 군사혁명 발발로 국회가 해산되자 정계를 은퇴했다. 1963년이는 통합야당인 「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최고의원으로 야당지도자의 가시밭길을 걷다가 1972년 5월11일 서울 성모병원에서 한마디 유언(遺言)도 남기지 못한채 哀惜하게 急逝하여 波瀾萬丈한 生涯를 마감했으며 동년 5월17일 서울 남산공원에서 성대한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이범석 장군은 문무를 겸비한 근세(近世)의 명장이자, 미래를 통찰하는 형안을 가진 민족의 영도자로 조국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한 위업으로 역사와 후손들에게 귀감(龜鑑)이 되는 귀중한 교훈을 남겼다.
중국 운남성 곤명시 당국이 운남육군강무당(소재지 : 중국운남성곤명시 취호서로 22호)개교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전시돤을 확장보수하고 졸업생중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상을 전시하기 위한 별도공간이 마련되며, 철기장군의 활약상과 자료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그동안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沿邊 朝鮮族 自治州)에서는 이념이 다른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대한민국 건국 원훈(元勳)이자 초대 국방장관 겸 국무총리를 역임한 철기장군 업적을 "당시 약관 21세의 청년장교가 도대체 무슨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겠느냐?"고 고의(故意)적으로 무시하고 폄훼(貶毁)해 왔다. 따라서 청산리 항일대첩은 공산주의 신봉자인 홍범도(洪範圖)장군이 주도적으로 첫 전투를 개시했고 마지막 마무리를 한 것으로 왜곡(歪曲)하여 전파 시켜 왔으나 금번 철기장군의 위업 재조명으로 조만간 오ㅔ곡된 역사의 기록이 올바르게 정정(訂正)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철기 이범석 장군은 일찍이 약관(弱冠) 20세부터 조국 광복의 일념으로 총탄의 빗발 칼날의 수풀속을 헤쳐가며 풍찬노숙(風餐露宿), 이역만리에서 싸웠고, 중국과 국내에서 항상 인재 양성에 전심전력으로 헌신했으며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일편단심 가시밭길을 걸었다.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사업회가 출범한지 어언 30여년의 장구한 시일이 경과 되었지만 독립기념관에 장군의 "어록비(語錄碑)"하나가 세워져 있을 뿐 아직것 국내에 번 듯한 기념관이나 동상(銅像)조차 세우지 못한 역부족을 자탄하고 있다.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거창한 구호를 내 걸었던 지난날의 정부는 물론이고 관광진흥 명목으로 실존여부가 불투명한 "홍길동(洪吉童)이 자기 고장 출신이라고"고 타투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은 있으나 우리 역사상의 실존인물인 자기고장출신 순국선열(殉國先烈)에 대한 예우에는 소홀한체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충성의 산 교육을 시키겠노라"고 공염불(空念佛)을 읊조리고 있다. "뜻이 있는자에는 능력이 없고 능력이 있는 자에게는 뜻이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철기 장군의 유훈(遺訓)을 계승하려는 갸륵한 포부로 금번 출범한 젊은이들의 조직인 「광복청년 아카데미」가 향후 눈부신 활약을 벌여서 장군 위업의 "살아있는 기념비"가 되고 나아가서는 국내에도 하루속히 장군의 위업(偉業)이 올바르게 재 평가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2006년 4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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