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포도, 희망의 포도-김창욱
1982년 12월,
한인 안병찬씨는 아버지와 함께 맨해튼 187스트릿
워싱턴하이츠에 '안스 그로서리'를 오픈한다.
당시 나이 20세. 새파랗게 젊은 나이였다. 그는
팔팔한 젊음을 무기로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기
시작했다. 영하의 혹한 속에서도 새벽 4시면
헌츠포인츠 시장으로 달려가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골랐다. 매일 밤 10시까지 기계처럼
일했다.
'손님을 가족 처럼…' 겨울이면 단골 손님의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워 주고, 펑크난 자동차 타이어
를 갈아 주기도 했다. 막힌 화장실 배수구 뚫어
주기, 에어컨 달아 주기 등 궂은 일을 마다 하지
않고 도와 줬다. 이 같은 훈훈한 인간성 탓에
가게는 늘 가족 같은 손님으로 북적였다. 매상은
급증했다. 그러나 2001년 9·11테러가 터지면서
손님들이 발걸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이라크·아프간 전쟁,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으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매출은 급감했다.
호황 때 3만딸러를 웃돌았던 매출이
1만2000달러 선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인건비
절감을 위해 종업원 숫자를 7명에서 2명으로
줄이며 안간힘을 썼지만 경영난은 점점 심각
해졌다.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던
안씨는 결국 폐업을 결심한다. 그리고 지난 연말
30년 가까이 분신처럼 키워 온 그로서리의 셔터
문을 내렸다. 그날 밤 그는 밤새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쓰린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눈물의 폐업-. 지난 5일자 본지 A-1면은 안씨의
가슴 아픈 사연을 이 같은 제목으로 보도하고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불황의 터널이 이어지면서
한인사회에 '눈물의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도산, 부도, 실직 등으로 가장의 수입이 끊기면서
집마저 빼앗기고 거리로 쫓겨나는 가정이 늘고
있으며 가족 간, 이웃 간의 갈등, 불화, 반목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1930년대
대공황의 고통이 재현되고 있다며 불투명한 미래
에 대한 걱정, 불안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공황의 회오리가 미국을 강타했던 30년대,
미국사회 분위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는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 상황을 잘 전해
주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인 30년대 미국사회
분위기는 처절했다. 거리엔 실업자의 행렬이
이어졌고, 은행과 공장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중부지역에는 지독한 가뭄과 모래 폭풍이
몰아쳤다. 흉년이 들어 은행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한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고 이주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분노의 포도'는 바로 이같이
암울한 시대를 살았던 '굶주린 농민들'의
이야기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소설의 주인공
조드의 가족이 고향을 버리고 서부를 향해 가던
길 '루트 66'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일리노이-오클라호마-캘리포니아 등 7개 주를
관통하는 '루트 66'의 길이는 장장 2000마일.
미시시피강과 오클라호마의 대평원을 거쳐
애리조나주의 사막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여정-.
30년대에만 21만 명의 농민들이 이 길을 따라
서부로 향했다. 소설 속 조드의 가족 또한 낡아
빠진 고물 트럭에 남루한 이삿짐과 끓어오르는
분노를 싣고 황토 먼지 날리는 이 길을 달렸다.
그러나 우여곡절끝에 도착한 서부는 그들이
동경했던 '희망의 땅'이 아니었다. 농민들은
포도농장 주인들의 착취와 억압, 인간적 멸시와
학대로 신음해야 했다.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굶주리는 농민들의 가슴 속에서 분노는 가을
햇살 속 포도알처럼 영글어 가지만 그들은
생존을 위해 분노를 삼키며 비굴하게 연명해야
했다.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인간성과 자존심까지
버리는 비굴한 생존욕과 추악한 이기심-.
가난의 고통이 심해지면서 인간성은 황폐해지고
인심은 삭막해지고, 가족 간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하지만 조드의 가족은 이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따뜻한 가족애로 가난의
고통을 극복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산다.
존 스타인벡은 조드 가족의 삶을 통해 30년대
미국사회를 지배 했던 억압과 착취, 폭력과
광기에 저항하면서 '분노의포도'를 '희망의
포도'로 가꾸어 가는 인간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2000년대 불황의 고통은 30년대에 비하면
견딜만한 고통입니다. 굶주리는 사람은 없으니
까요. 따뜻한 가족애로 불황의 한파를 녹이며
가정을 지키세요. 가정의 해체는 가난보다 더
큰 고통을 안겨 줍니다. 부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의 포도 씨앗'을 뿌리세요. 혹한의 겨울이
가면 봄은 반드시 오는 법이니까요…'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를 통해 어둡고
긴 불황의 터널을 지나는 우리에게 이 같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출처: [중앙 시론] 분노의 포도, 희망의 포도
김창욱/객원 논설위원(뉴욕 중앙일보, 2012.1.11)
2012.1.15
동강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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