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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2일(현지시간, 일부 지역 시차 감안하면 13일) 특유의 '깜짝 쇼'를 펼쳤다. 한동안 뜸을 들이던 푸틴 대통령과 이날 1시간 30분간에 걸쳐 전화통화를 한 뒤 우크라이나전 종전 협상을 개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전화 통화를 시작으로 전세계 언론은 14~16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안보회의(뮌헨 안보회의)까지 숨가쁘게 전개되는 미-유럽(EU)-러-우크라 4자간의 '외교 전쟁'을 취재, 송고했다.
트럼프, 젤렌스키 대통령 등 주요 인사들의 거침없는 발언과 전문가 해석및 전망, 숱한 뒷얘기들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졌다. 이미 나온 내용이 뒤늦게 새로운 내용처럼 국내 언론에 전달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이슈들이 살타레 처럼 엉켜 주요 언론들도 정갈하게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탓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트럼프 집권 2기 행정부 주요 인사들의 발언들은 기존의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판들을 보기좋게 깨부수고, 향후 전개될 협상에 대해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만들었다.
미-러-우크라 간의 종전 협상은 곧 시작될 모양이다. 모든 협상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게 기본. 하지만 작은 개천이 모여 큰 강이 되는 법이다 앞으로 전개될 큰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미-러-우크라 정상들 간의 전화통화 이후 쏟아진 기사들을 날짜별(13, 14, 15일)로 알기쉽게 정리한다/편집자.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전화 통화이후 드러난 트럼프 행정부의 종전 구상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를 계기로, 전쟁 종식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미국의 사소한(?)실책도 부인하지 않고 있다. 전임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곤혹스런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화 통화 이튿날인 13일(시차에 따라 14일)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이 가능하다는 바이든 전 대통령의 발언이 전쟁을 촉발시켰다"고 전 행정부의 대(對)우크라 정책을 직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물론, 2014년 이전 국경으로의 영토 회복은 현실성이 없다'고 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에게 발언을 철회하라고 권했는지 여부를 묻는 질문에 "아니다. 어제(13일) 그의 발언은 좋았고 오늘도 좋다. 조금 더 부드럽게 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의 발언은 꽤 정확하다고 생각한다"고 답변했다. 나아가 "러시아 입장으로서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허용하지 않을 터이고, 또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지 않다"면서 "바로 그것이 전쟁을 촉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 전쟁 원인에 대한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발언을 감쌌다/사진출처:페이스북
그는 "바이든 전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며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내가 옳았다. 내가 대통령이었다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전쟁"이라고 기존 주장을 되풀이했다. 또 "러시아를 주요 7개국(G7)에서 제외시킨 것은 실수였으며, 다시 참여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G8(G7+러시아)의 복귀에 러시아는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며 "국제 현안을 해결하는 데 G20 포맷이 더 낫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선(先) 우크라 합의, 후(後) 러시아와의 협상'을 요구한 젤렌스키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고 푸틴 대통령과 먼저 전화통화를 한 이유도 명쾌하게 밝혔다.
"(협상에 대한) 러시아의 의중을 파악하는 게 필요했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과 먼저 통화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
그는 나아가 "모든 것(전쟁)이 진정되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을 만날 것으로 기대한다"고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언짢은 기분을 감추지 않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러-우크라 간 3자 접촉 계획을 알렸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미국과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내일(14일) 뮌헨에서 회의를 갖는다"며 "누가 참석할 지는 모르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함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단은 뮌헨 안보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래서 회담장 밖에서 미-러-우크라 대표단의 비공식 접촉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다.
◇루비오 국무장관의 지각과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도발
뮌헨 안보회의를 앞두고 미국에서는 예기치 않는 사건(?)이 발생했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탑승한 비행기가 이륙 1시간 만에 급히 회항했다. 전면 유리창에 금이 간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 즈음, 유럽에서는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의 '우크라이나 방위 연락 그룹'(UDCG) 회의 연설이 큰 파장을 부르고 있었다. 전날(12일) 이 회의에서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병합한) 2014년 국경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한 도발적인 발언이 유럽을 뒤집어놓았기 때문이다.
첫 국제무대 등장부터 도발적인 발언으로 유럽을 뒤집어놓은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사진출처:페이스북
헤그세스 장관은 13일 브뤼셀 나토 본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전날 발언에 대한 비판과 충격을 의식한 듯, 러시아를 겨냥해 "협상 과정에서는 러-우크라 양측이 모두 양보해야 하며, 푸틴 대통령도 원래 원했던 모든 것을 얻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속 가능한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양측에 가장 효과적인 인센티브나 제재를 결정할 것"이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평화 구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전 세계와 미국이 추진하는 평화 프로세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유럽은 트럼프 대통령의 전화 통화로 시작된 미국의 일방적인 종전 협상 주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이마르+ 그룹(영국, 독일, 스페인, 폴란드, 프랑스, EU)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늘리고 독립과 주권, 영토 보전을 수호할 준비가 되었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은 모든 평화 협상에 참여해야 하고, 우크라이나에는 신뢰할 수 있는 안보 보장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야 칼라스 EU외교 최고 책임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협상도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트럼프-푸틴 대통령이 합의한 평화안을 우크라이나가 거부할 경우, 유럽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유럽 측의 이같은 반발은 트럼프-푸틴 전화 통화가 사실상 우크라이나와 유럽을 협상에서 제외시켰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시작된 것이다. '유럽 암흑의 날', '푸틴에 대한 항복', '새로운 뮌헨 협정'(193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일부를 히틀러에게 양보한 뮌헨 협정/편집자)이라는 비판이 전날부터 '유럽 패싱' 주장과 맞물려 쏟아진 바 있다.
미-라-우크라 3자 협상을 시사하는 이미지/사진출처:M24.ru
특히 영국 측의 비판은 가시가 돋혀 있었다. 영국 국방부의 한 소식통은 일간지 '더 타임스'에 "우크라이나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꺼져라'고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난 3년 동안 러시아와 싸우면서 아들과 딸을 잃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미래 논의에서 제외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나(혹은 영국)라면 트럼프 대통령에게 흑해 뱀섬 주둔 우크라이나 방어 병사가 다가오는 러시아 군함을 향해 했던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쟁 발발 초기에 우크라이나 뱀섬 방어 군인이 러시아 군함을 향해 손가락 욕을 하면서 "꺼져라"고 소리친 상황에 빗댄 비판이었다.
◇크렘린의 협상 준비
미-유럽이 협상 참여 여부를 놓고 투닥거리는 사이, 러시아에서는 협상 준비설이 흘러나왔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미국과의) 고위급 회담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사우디아라비아 회담설은 확인하지 않은 채 "장소와 시기는 추가 논의 후 발표될 수 있을 것"이라고 피해갔다. 또 "러시아와 미국 간의 실무 접촉이 앞으로 며칠, 혹은 몇 주 안에 더 폭넓게 확대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트럼프-푸틴 간의 전화통화 내용도 일부 확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는 어떤 식으로든 협상에 참여할 것"이라며 미-러-우크라 3자 회담설을 인정한 뒤 "푸틴 대통령이 통화에서 공식 임기가 지난해 5월로 이미 끝난 젤렌스키 대통령의 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통화에서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의 인정 문제와 대러 제재 문제도 논의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주목을 끈 것은 트럼프 대통렁의 러시아 승전기념일(5월 9일) 참석 희망 발언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을 포함한 국가 정상들이 러시아 승전 기념일 축하 행사에 참여하고 싶다면, 모스크바는 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젤렌스키 대통령은 다음날(14일) 이를 '속이 뻔히 들여다 보이는 러시아의 정치 쇼'라고 비판했다.
◇몰리는 젤렌스키 대통령 입지, 협상 거부 전망도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사이트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13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 내용을 추가로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거래(평화협정)를 원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내가 뮌헨에서 밴스 부통령과 루비오 국무장관을 만나는 것이 평화협상을 위한 외교 과정상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중략) 그는 나에게 언제든지 전화하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미국의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Axios)는 두 정상 간에 오간 대화를 이렇게 정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여전히 협상 의지를 갖고 있는지 물었고, 젤렌스키 대통령은 거래를 하고 싶지만, '푸틴은 당신(트럼프)이 강하기 때문에 당신을 두려워해서 거래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먼저 알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에 대한 당신(젤렌스키)의 우려를 이해하지만, 외교적 노력을 성공시키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푸틴 대통령과 대화할 수 밖에 없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을 달랬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먼저 통화한 데 대해 서운감을 감추지 않았고, 여차하면 3자 접촉을 거부할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우크라이나 종전 등 미국의 향후 세계 전략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우크라이나 특사로 지명된 키스 켈로그(예비역 장성)는 13일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발트 3국(리투아니아와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예를 들면서 "협상에서 우크라이나으 영토 포기 (가능성)에 대한 합의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굳이 이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소련이 발트해 연안 국가(발트 3국)들을 정복했을 때, 서방은 소련 영토이라고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며 "우리는 단순히 소련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가 포기한 동부 지역 영토도 일시적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국제적으로 러시아 연방으로 공식 인정하지 않겠다는 구상으로도 들린다.
그는 "무엇보다도 모든 당사자 간의 장기적이고 지속 가능한 안보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실질적이고 안정적인 평화 협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 CNN 방송은 이날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라는 기사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세계 전략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CNN은 트럼프 대통령의 자국 우선주의 정책 방향과 이에 순응하는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탈(脫)유럽 발언 등을 인용하면서 "미국과 유럽 관계에 금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유럽 소식통을 인용해 "우크라이나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분단과 유사한 (강대국들의) 결정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 소식통은 CNN에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은 서독처럼, 동부지역은 동독처럼 남겨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CNN은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소련 정보국(KGB) 장교로 근무하며 소련-동유럽 블록이 붕괴되고, 동독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던 푸틴 대통령이 미국의 도움을 받아 21세기 유럽에 새로운 동독을 건설하려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했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동결된 러시아 자산으로 미국 무기를 구매하려는 우크라이나와 일부 유럽 국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3,000억 달러 규모의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몰수해 미국의 무기를 사겠다는 일부의 주장을 거부했다는 것. 러시아 자산의 대부분은 현재 유럽에서 동결된 상태인데, 독일과 룩셈부르크, 벨기에 등 일부 국가들의 반대로 러시아 몰수 여부에 대한 합의가 유럽에서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G7 국가들이 지난해 10월 동결된 러시아 자산을 이용해 우크라이나에 500억 달러 규모의 대출을 제공하는 방안에 합의했으나, 이는 러시아 동결 자산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블룸버그 통신은 또 트럼프-푸틴 전화 통화 이후 예상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 시나리오 3가지(가장 유력, 최선, 최악)를 제시했다.
(현실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는 러시아군이 점령된 영토가 여전히 불확실한 상태로 남고,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우크라이나가 점령한 러시아 쿠르스크주 일부 영토와의 교환도 일정 부분 가능하다.
우크라이나 안보는 앞으로 정치 지도자들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크라이나가 스스로 (방어) 역량을 키울 때까지 미국이 지원하도록 유럽은 트럼프 대통령 설득에 나설 것이다.
그나마 나은 시나리오로는 러시아가 공격을 재개할 경우, 서방은 개입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은 늘리고,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는 방안이 제시됐다. 우크라이나는 이를 통해 10년 안에 나토 가입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역시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손을 떼는 것.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미래에 대한 관심을 잃고 군사 및 재정 지원을 중단하면, 우크라이나 사태는 유럽에게 맡겨지고,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차단된다. 점령된 우크라이나 땅은 러시아 연방에 속한다. 그러나 휴전(종전) 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전쟁이 재개될 가능성이 있다.
블룸버그는 유럽이 앞으로 10년간 감당해야 하는 국방비는 3조 1,0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국방비의 대부분은 유럽 (나토) 회원국의 군사력 강화에 투입된다. 전체 국방 예산은 GDP의 약 3.5%에 가까워질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해온 GDP의 5% 목표 선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블룸버그 통신의 예측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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