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38]구자열 회장님과 <보보담> 이야기
구자열 회장님께
꼭두새벽입니다. 제가 딱 한번 잠깐 뵌 회장님께 이런 편지를 쓰게 될지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얼마 전 인사동 친구의 공방에서 우연히 처음 뵈었는데, 수수하고 푸근한 인상이 좋았습니다. 저보다 네 살 위이시니, 큰 형뻘이더군요.
말수도 많지 않으시고, 진중하게 보이시더군요.
제 명함을 건네니 찬찬히 보시더니 <전라도닷컴>이 어떤 곳이냐고 물었지요.
2000년 1월 전라도 광주에서 창간한 월간잡지로 오직 <전라도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만을 다루는 토종잡지>라고 설명을 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독자로 출발해 광팬이 되었고 ‘홍보이사’를 자청했다고 하니 웃으셨지요.
저는 2020년에 회장님 회사가 발행하는 사외보 <보보담步步譚>을 1년 동안 구독신청한 적이 있어서 회장님 성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날 처음 뵐 때 숫제 감격이었습니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신 225/0827]LS네트웍스의 사외보 ‘보보담步步譚’ - Daum 카페
‘걸어 다니며 나누는 이야기’라는 이름도 특이하고,
잡지 성격도 확실한 무료 계간지로 오랫동안 각인돼 있었습니다.
대기업의 회장님이 순전히 개인의 의지로 우리 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이런 고급진 사외보를 ‘끈질기게’ 내신다는 것이 믿기가 어려웠거든요.
기업은 일단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일진대,
들어가는 예산을 얘기하는 것은 뭣하지만,
전국의 수많은 애독자들에게 일일이 우편으로 배포하는 비용만 생각해도,
제작비는 물론이거니와 천문학적인 돈이 들 테니까 말입니다.
회장님은 그것을 딱 한마디로 정리해 말씀하셔 더욱 놀랐습니다.
“제가 ‘한 곤조’합니다. 직원들이 무슨 소용이냐고 반대하는데, 꼴통이니까 가능하겠지요”
10분도 안된 짧은 만남 가운데, 제가 한두 마디 말씀드린 것은,
회장님이야말로 70년대 후반 <뿌리깊은 나무>라는 획기적인 월간잡지를 만든
한창기 선생님의 분신같다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역사에 길이 남은 잡지일 것입니다.
전면 가로쓰기, 순우리말 표기, 당시로는 심지어 ‘미친 짓’이라고 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창간호 표지를, 늙은 농부가 금방 찧은 햅쌀을 두 손에 가득 담으며
미소짓는 사진으로 장식한 것을 기억합니다(53호까지 펴냈다던가요).
전두환정부의 폭압적인 폐간조치는 당시 대학생인 저에게도 가슴이 너무 아프고 화가 났습니다. <씨알의 소리> <창비>도 없앴으니, 말 다 했지요.
회장님은 바로 그런 잡지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2011년 창간하여 지금껏 활자매체로 이어오고 있는 LS네트웍스의 사외보 <보보담>는
이미 너무나 뚜렷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입 발린 말씀이 아니고, 진정 훌륭한 일을 해오셨고, 앞으로도 계속 하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단어가 퍼뜩 떠올랐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회장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손수 편집주간이 되어 기획회의를 주재하고 머리말을 쓰며 열정을 쏟겠습니까?
<보보담> 영인본 40권과 2022년부터 올 여름호까지 발간한 13권 등 통권 53권을, 제 고향집으로 즉각 보내주실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툇마루에 놓인 <보보담> 전집(?)을 보고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제가 뭐라고 이런 배려를 해주셨을까요? 한번쯤 뵐 수 있다면 한 말씀이라도 듣고 싶었습니다. 평소 글을 좋아해 이런저런 인문교양서를 읽고 생활졸문을 쓴 지 20년이 다 되었습니다. 어줍잖은 글로 맺은 지인들이 제법 됩니다만, 회장님과 이런 인연은 도저히 설명이 안됩니다.
과거가 중요하고 현재가 중요한 까닭은 다가오는 미래가 있기 때문이라는, 사외보가 추구하는 편집제작 방향도 제 마음에 딱 듭니다. 제 고향 <전주>편도 다 읽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한양도성> <왕릉> 이야기는 제가 오랫동안 탐구해오는 주제로,
인문학특강도 어설프게나마 수십 번 했기 때문에, 더욱 와닿았습니다.
<보보담>을 가슴에 안은 게 여러 번입니다. 전국을 지역별로 순회하다시피(울진, 여수, 남원, 안동, 경주 등) 한 특집호들은 자료의 가치도 영구히 남을 것입니다.
그 고장은 이런 특집을 보고 고향이 얼마나 자랑스러웠겠습니까? 정말로 큰일을 하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문사들과 프로 사진기자들의 시원한 사진편집 등
어느 것 하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데 어찌 잊혀지겠습니까?
80년대 한창기 선생이 기획한 야심작 <한국의 발견> 그 이상이랄 수 있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제 고향 <임실任實>도 이런 특집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 고장 곳곳을 흔히 말하는 트래킹(산책)을 하면서 ‘도란도란’ 걸으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들을
집성集成한 <보보담>이라는 사외보는
제가 탐익하는 <전라도닷컴>과 발걸음(보조)을 맞추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사외보와 잡지 하나도 세상을 얼마든지 따뜻하고 영양가(가치) 있게 바꿀 수 있다는 게
제 오랜 지론입니다. 응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느 발행인이, 그것도 대기업의 회장님이, 돈을 주고도 어디에서도 살 수 없는, 이 어마무시한 귀한 잡지 53호까지를 몽땅, 어느 시골의 낙향거사에게 일괄 보내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무게가 30kg가 넘어 한 택배회사에서 접수 거부를 당했다지요. 고속버스 택배를 이용하고, 도착지에서 일반 택배회사에 맡겨 툇마루까지 가져다주는 수고로움은 뭘까요? 제가 전주로 도착시간 맞춰 찾으려 가려 했는데, 그 100%가 넘는 친절한 전화를 받고 너무 놀랐습니다. 주위의 지인들에게 마구마구 자랑했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더니 사진으로 남겨놓아야 한다며 휴대폰을 들이댔으니, 제 어깨가 얼마나 으쓱했겠습니까? 가히 가보라 하겠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책선물을 받았지만, 오세창 선생의 <근묵>(성균관대 출판부 펴냄, 100만원) 5권을 선물받아 이고지고 올 때 다음으로 최고의 선물입니다. 미담이라고 하면 '한 미담'도 되겠지요.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신 226/0828]‘모태효자母胎孝子’인 정조正祖임금 - Daum 카페
회장님, 정말 고맙습니다. 황공무지할 따름입니다. 회장님으로 인해 LG그룹과 LS네크웍스가 어떤 회사인지 검색도 해보았습니다. <프로스펙스>가 브랜드사업인 줄도 처음 알았답니다. 여느 대기업 재벌집안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이 사회에 모범 중의 모범, 선대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우애를 3대, 4대째 이어받으며 보여주고 있는, 그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기업과 기업인이라는 것도 제대로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거듭 고맙습니다. 한 권 한 권 틈나는 대로 읽고, 제 모든 상식과 교양 그리고 지식을 넓히는데 힘쓰겠습니다. 이 졸문의 편지를 회장님께 보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이 글조차 써놓지 않으면 제가 '나쁜 사람'일 것같아서 쓰는 것입니다. 기록은 역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염천지하 삼복지절입니다. 하시는 사업 날로 번창하시고, 늘 건강하시고 건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4. 8. 4.
전북 임실의 우거(구경재)에서 최영록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