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15
12월25일[주님 성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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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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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vlGPnJiqE4
[의정부교구 김종민 F.하비에르 신부님 집전(신곡2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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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낮 미사)
<(1)아기 예수님께서는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삶 속에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의 성탄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성인이 한 분 계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자신의 한평생 화두로 삼았던 예로니모(AD 340-420) 성인이십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히브리어나 희랍어로 된 구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성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고행중의 고행이었던 성경 번역 작업에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임했는데, 그 작업은 바로 아기 예수님 탄생지로 추정되는 예수 탄생 성당 옆에 있는 동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 예수님의 성탄과 관련해서 신앙의 후배들인 우리들에게 남긴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리 성탄이 수백 번 계속된다 해도 여러분 각자 마음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주 서울 갈 일 있어 고속 터미널 근처를 지나갔었는데, 정말 대단했습니다. 번쩍번쩍, 시끌시끌, 와글와글, 캐럴송이 크게 울려 퍼지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 안에,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지 않으신다면 다 헛것입니다. 그저 세상의 상술에 우리까지 덩달아 놀아나는 것뿐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의 말씀처럼 이 예수님의 성탄 전야,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핵심적인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는 일입니다.
잠깐만 우리 마음 안을 한번 같이 들여다보실까요? 태어나실 아기 예수님을 위한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우리들 내면이 너무 많은 것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어서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어떤 분 마음을 살펴보면 자신에게 심한 상처를 안겨준 그 누군가를 향한 분노의 마음으로 꽉 차 있습니다. 어떤 분 마음속에는 오로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비롯한 다양한 걱정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위해 조금 비집고 들어오시려고 해도 워낙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요란한 광란의 성탄 파티에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더 이상 휘황찬란한 도시 한 가운데서 탄생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우리 각자의 영혼 안에, 번뇌와 슬픔, 고독과 상처로 가득한 우리 각자의 상처받은 인생 안에 탄생하고자 우리 옆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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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 내려오신 하느님!>
4년 전 근처 낚시터에 유기된 작고 예쁜 믹스 강아지 두 마리를 구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언니 강아지는 뒷다리에 큰 부상을 입어 동물병원에서 큰 수술과 재활을 마친 후 입양을 보냈습니다.
동생 강아지는 저희 수도원에서 입양했는데, 이곳에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안정되고, 영양 섭취도 잘 되서 그런지 인물도 살아나고 털에 윤기도 반질반질합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서울로 입양간 언니 소식이 없길래, 잘 지내고 있는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언니 강아지의 부고장이 날아온 것입니다. 예쁜 꽃들 한 가운데 언니 강아지의 영정 사진이 있는 걸 봐서 장례식까지 잘 치렀나 봅니다.
4년 여간 행복하게 지내던 언니 강아지가 얼마전 산책나갔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해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고 합니다. 장례를 잘 치렀고 화장해서 납골당에 잘 모셨다고, 사별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겨 있노라고...
언니 강아지의 부고를 들은 저는 갑자기 저희 집 식구가 된 동생 강아지 바둑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도 유일한 혈육인데,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둑이를 불렀습니다. 품에 안고 알아 듣든지 말든지 상관없이 제가 그랬습니다.
“바둑아! 이제 너 어떡하냐? 서울 간 언니가 며칠전 세상을 떠났단다! 교통사고로. 누구든 언젠가 다 떠나는거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여기서 잘 살아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냐?”고 몸을 흔들었지만, 바둑이는 어색한 표정으로 그저 멀뚱멀뚱 저를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내가 바둑이하고 말이 좀 통했으면 참 좋을텐데...참 안타깝다. 내가 강아지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으면, 보다 적극적으로 소통을 할 수 있었으면...내가 사람이 아니라 강아지가 되었으면...그럼 언니 소식도 전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었을텐데...
만일 말이 통하게 되면 언제나 궁금했던 질문 한 가지, 털도 그리 많지 않은 바둑이가 강추위에도 지붕 있는 집에 절대 안들어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볼 수 있을텐데...
제가 이 웃기는 체험을 말씀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성탄 신비의 열쇠가 제 작은 체험 안에 어느 정도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가련한 우리의 처지가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시려고, 우리와 보다 원활하게 소통하시려고, 우리를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시려고...아마도 그것이 육화강생의 이유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또 다시 성탄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탄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바둑이를 사랑한다 할지라도, 정말로 강아지가 되고 싶냐고 물으신다면, 고개를 가로로 흔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고개를 세로로 흔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한 나머지 정녕 당신 자신을 포기하셨습니다. 이 은혜로운 시기,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허리를 굽히셨습니다. 당신 키를 극도로 낮추셨습니다. 바로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을 포기하시고 나와 하나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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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Hqdlron_V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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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뱀의 본성을 거스를 두 노를 젓고 있는가?>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개자란 뜻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표현되지 않는 말은 생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표현될 때는 생각과 분리되어 소리로 진동합니다. 이는 큰 희생입니다.
말을 하지 않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말을 하려면 생각을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때 상당히 위험합니다.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당할 때는 그 말을 한 사람도 무시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기 전에 ‘율법’이 있었습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율법은 목적지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러나 원죄의 영향으로 우리의 본성은 사랑과 반대로 흐르는 강물 위에 떠 있는 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아는 것만으로는 율법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라보기만 할 뿐 뒤로 후퇴할 뿐입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노가 필요합니다. 한 개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두 개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총과 진리입니다. 은총은 보는 것이고 진리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들음으로써 우리는 동물의 본성을 거슬러 창조자의 본성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들음은 말씀의 전례와 같고 말씀을 봄은 성찬의 전례와 같습니다.
윌마 루돌프의 삶은 역경을 극복한 감동적인 이야기로 어머니 블랑쉬 루돌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940년 6월 23일 테네시주 세인트 베들레헴에서 조산아로 태어났습니다.그녀는 22남매 중 스무 번째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윌마는 4살 때 근육 약화를 일으키고 심한 경우 마비를 일으키는 질병인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이 질병으로 그녀의 왼쪽 다리와 발은 약해지고 기형이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녀가 다시는 걷지 못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블랑쉬는 인종적,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의료 서비스가 제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간 치료를 위해 윌마를 업고 50마일 떨어진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집에서 그녀는 또한 윌마의 약한 다리를 하루에 네 번 마사지하는 등 물리 치료 기술을 배우고 적용했습니다. 그리고 윌마에게 신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12세가 되자 그녀는 다리 보호대를 벗어났고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농구를 하고 육상 경기를 하며 빠른 속도로 주목받았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100, 200, 400미터 육상 경기에서 3개의 금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녀는 단일 올림피아드에서 이 위업을 달성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율법이라는 사랑으로 가려면 반드시 필요한 게 있습니다. ‘감사’입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반드시 은총과 진리를 요구합니다. 블랑쉬는 딸 윌마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이 은총입니다. 그리고 말로도 믿음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윌마는 이 은총과 진리를 흘려버리지 않고 ‘감사’의 감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없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불만이라는 지옥에서 빠져나올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노를 잡고 젓기만 하면 완전한 감사와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매일 단 5분씩이라도 양쪽 노를 저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계속 후퇴합니다.
은총과 진리로 감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숙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의 두 노가 되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우리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탄생하신 주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저희 성당에서 구유를 감사 일기로 꾸민 이유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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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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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탄 낮 미사)
복음: 요한 1,1-18: 사람이 되신 말씀과 볼 수 있는 영광
생명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다. 잃어버린 생명을 다시 찾아주기 위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바로 이분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알아듣게 되었으며 참 주님으로 고백했다.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가지신 분이며, 생명을 주시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으로 고백했다. 잠깐 밤 미사에서도 언급했지만, 부활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삶을 보기 시작했으며, 이 성탄도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그 참된 의미를 보기 때문에, 지금 탄생하신 그분은 힘없는 한 아기의 모습이 아니라, 진정 주님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하느님이신 그 말씀이, 그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것도 바로 당신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당신의 생명에 함께 하려 하심이다. 즉 우리를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모습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올바로 가져야 한다. 그분은 바로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나를 구원해 주시는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큰 축일이기 때문에 참여하는 미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며, 이제 우리가 말씀으로 변화되어 가야 한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리라 믿으셨던 마리아,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믿은 목동들의 모습을 본다.
그 말씀이 이제 사람이 되셨고, 다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이사 52,7)하는 말씀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며,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우리를 통해 계속해서 태어나시게 해야 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진 우리의 모습이 그분의 모습과 같이 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으며, 우리를 보는 이들이 “그 안에 생명을 가진 자”라고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다 되었을 때, 당신 외아들을 통하여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당신 아들의 모습을 닮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다. 그 말씀이 구체적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사업을 즉 구원사업을 바로 우리 자신을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잉태하며, 낳아주기 위해서는 고통의 신비인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면 어렵게 된다. 자신의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체험이 바로 말씀을 낳아주는 마리아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이 될 것이다. 여기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자신을 이겨보려는 끝없는 노력이다.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께 진정한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우심을 청하자. 이 용기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 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삶이 이 성탄의 신비를 언제나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하자.
레오 교황님의 말씀을 듣자.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머리와 어떤 몸의 지체인지 생각하고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나라와 광명으로 옮겨졌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세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다시는 마귀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의 더러운 행실로써 그 성전에 거하시는 고귀한 손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의 비싼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
이 미사를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봉헌하며,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 사는 삶을 살도록 우리의 결심을 봉헌하자.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제물은 번제물이 아니라 자선이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의 삶이며, 사랑의 제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감사의 생활이며, 말씀을 낳아주는 삶이며 성탄의 삶이다. 봉헌 예절을 통해 이러한 결심을 함께 봉헌하도록 하며 주님께 도우심을 구하자.
“여러분 가정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신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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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내리는 한 줄기 빛에 모든 이가 감사하고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밤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우리가 이 밤을 보내며 더없이 기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마침내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에게 빛이시며 은총이신 분, 바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에 따르면, 그는 ‘놀라운 경륜가’이자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며, 다윗 왕좌에 앉아 공정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릴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그런 위대한 분의 탄생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왕궁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나름 편안하고 아늑한 환경에서 태어나실 법한 기대와 달리, 여관방조차 얻지 못하여 마소의 여물을 담아 두는 구유를 첫 안식처로 삼아야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탄생하신 임금께서 앞으로 걸으셔야 할 길이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이처럼 당신 백성을 섬기러 오신 메시아께서는 세상에 오시는 순간부터 열악하고 비천한 환경을 택하시어 가장 낮은 자리, 곧 섬기는 자리에 머무셨습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여관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을까요?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려 온 구원자께서 이제 막 세상에 오셨는데, 그들은 여관의 작은 방조차 내드리지 않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성탄절에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기쁜 날, 세상일과 걱정에 사로잡혀 주님께 우리 마음속 작은 공간 하나 내드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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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성탄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5.9-14)
하느님의 구원 사업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은 인간들이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야기로 시작해서(창세 3,23), 죄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끝나는 책입니다.(묵시 22,3)
<창세기 3장을 보면,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창세 3,17), 묵시록 22장을 보면,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묵시 22,3) 이것은 ‘죄’로 시작해서 ‘해방’으로 끝나는 구원 사업의 처음과 끝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의 머리글은, 그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 주는 증언이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요약한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와 요한복음이 똑같이 ‘한처음에’ 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입니다.
<‘한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의 영원함을, 즉 창조 이전의 영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첫 등장을 나타내는 말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인데(창세 1,3), 요한복음서 저자는 그 ‘말씀’이 곧 예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말씀’과 ‘하느님’은 ‘한 하느님’으로서 한처음부터 함께 계셨고, 하느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서 저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 즉 예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방황하고 있는 인간들을 그곳으로 다시 데리고 들어가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에게로 오신 날”이고, 종말과 재림의 날은, “인간들을 에덴동산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일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죄’ 라는 것은 한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 후에 생긴 것입니다.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신비’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예수님은 죄 때문에 망가진 세상을 죄가 생기기 전의 상태로 복구하기 위해서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어떤 사람을 고쳐 주셨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라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이고,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 때의 ‘좋은 상태’로 회복시키시는 분,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어떤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셨을 때,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루카 7,16)
이 말은,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고, “그곳에서 영원한 행복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힘으로는(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에게로’ 오셨습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수련을 하고 수행을 해서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면, 메시아 강생은 필요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예수님께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수련과 수행을 통해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구원도 아니고, 영원한 생명도 아닙니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도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죄를 짓고 나서 자기 마음대로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24-25)라고 고백합니다.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것을 감사드리는 날이고, ‘참 해방과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예수님의 뒤를 더욱 충실하게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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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김종수 아우구스티노 주교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찬미 예수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 성탄을 축하드리며, 교구민 한분 한분 모두에게 주님께서 탄생하시듯, 충만한 은총을 누리시기를 빕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어주시기 위하여, 아주 긴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믿음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그 후손인 다윗에게 구원자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를 당신과 다시 화해시켜주시고 구원을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긴 시간을 기다려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의 비참한 노예 생활에서의 기적적인 탈출과 황량한 광야에서 40년 힘든 여정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양식을 베풀어주시면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새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고, 주변의 나라가 부러워할 만한 문화를 이루어주시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충분히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의 뜻에 등을 돌리고 타락한 역사에 빠져 유배의 고통을 겪게 되지만, 그 고통의 시간에, 지난 긴 역사에서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권능을 돌아보고 깊이 회개하여 하느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들 몸속 깊이 새겨져 있던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던 시절에도, 부유함을 누리며 하느님의 뜻을 잊고 살던 때에도, 하느님께서 자신들에게서 눈을 돌린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유배의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자신들이 왜 이렇게 비참해졌는지 반성하면서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오래전부터 주님께서 해주신 약속 곧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다윗 가문에서 영원한 왕권을 세워주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태어날 한 아기에게 왕권이 주어지고 그 이름이 용맹한 하느님이요 평화의 군왕으로 불릴것이라며,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고 예고합니다.(이사 9,5-6)
그런데 그 아기는 화려한 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아이를 낳는데, 여관에 빈방이 없어서 아기는 말구유에서 태어납니다. 이미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리에서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낮추어 오신 주님은 그 태어나신 자리도 이렇게 낮은 곳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려고 하다 보면,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렇게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면, 이 땅에는 그분의 탄생을 겸손되이 받아들인 두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되리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의심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비천한 자신이 주님의 어머니로 선택되었다는 말에 더할수 없이 놀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에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는 데에서, 마리아가 평소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종이라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 탄생에 관해 목동들이 전하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리고 어린 예수님이 성전에서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했을 때, 그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이 모든 것을 마음에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루카 2,19.49-51)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사이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간음한 여인처럼 이스라엘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도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였습니다. 요셉이 그렇게 한다 해도 그를 비난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리아가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보내 주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보다 더 착한 사람이 없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달랐습니다. 마리아가 아이를 잉태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천사의 말을 듣고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여기에서 인간의 선한 생각도 하느님의 뜻에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기꺼이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마리아를 통해 하실 일에 자신의 삶을 봉헌합니다. 이렇게 마리아는 구원자 그리스도를 세상에 낳아주는 도구로, 요셉은 이 일에 꼭 필요한 협력 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자비를 믿고 사는 우리는 구원의 역사에서 마리아로 혹은 요셉으로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거룩한 도구로, 요셉과 같이 협력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형제자매님들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사십니다. 그분에게 시선을 주십시오. 고해성사 안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에게 가십시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그분에게 달려가십시오.
가난한 이웃 형제들에게 손을 내미시는 그분의 손이 되어주십시오. 형제자매님들 안에 주님께서 태어나시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강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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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방성수 야고보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 성탄의 기쁨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 성탄을 두고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네.”(요한 1,14)
오늘 우리도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누추하고 냄새나고 비좁은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하느님을 봅니다. 저는 구유에 잠든 이 연약한 아기를 바라보면서, 어째서 전능하신 분이 이토록 보잘것없는 탄생을 택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그 해답은 오래지 않아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요한 1서 4,16)라는 말씀 안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영적 가난과 비참한 조건 속에 놓여 있든 간에,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하기 위하여 이렇듯 우리와 같은 가난과 비참 속에서 태어나시길 마다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한동안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인해 여러 실패와 상처를 마주하였고, 불확실성의 체험으로 인해 절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구유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 안에서 다시금 희망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절망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끊임없는 사랑으로 지지해주시는 분임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약하고 여리게 태어나셨지만,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가장 강하고 영광스럽게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길수 있다면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로마서 8,35 참조)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구유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의 방식 말고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이 나와 같이 걱정과 고통에 놓인 모든 이웃을 향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당대 천대받던 이들의 밤을 비춘이 사건은 하느님의 사랑이 낮은 곳에서부터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녀들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이야기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궁핍하게 태어나셨습니다. 바로 우리가 당신과 같은 처지에 놓인 이웃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태오 복음서 10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께서 거저 주셨던 그 방식대로, 우리도 우리 자신을 기꺼이 하느님과 이웃에게 선물로 내어줄 때 주님 탄생의 기쁨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모든 사랑에 담긴 그 무상(無償)을 묵상하고 감사드리며, 그 사랑을 돌려드리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겠다고 기도해봅시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 인생의 모든 날을 밝고 아름답게 비추어주기를 빕니다.
필리피서 2장 5절의 말씀으로 마치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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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
(주님 성탄 대축일 낮 미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신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주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님의 빛 안에 모두가 충만한 기쁨이 넘치는 성탄이 되기를 바라며,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그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이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구약의 모든 백성들이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현재를 사는 우리도 특별히 대림 시기를 지내며 차별, 대립과 갈등이 가득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오실 구세주의 탄생을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큰 사건입니다.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 모두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성탄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 미사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서 2,1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는 이렇게 성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은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시고, 영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인간 영혼과 결합 되십니다.”
이처럼 성탄의 의미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도 “말씀은 이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려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공동번역성서』 1요한 4,9)”(458항)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 구세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은 단순히 코로나19 감염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이들이 코로나19로 인해 야기된 인간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코로나19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나만 잘하면, 우리나라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 세계 모든 이가 형제자매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서로 도와야 함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향한 사랑의 연대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돌봄의 중요함을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전 인류에게 위협으로 다가온 감염병 확산은 공동의 집을 살아가는 우리가 한 형제임을 느끼게 해 주었고, 교황님의 말씀처럼 형제애만이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의 소리를 뒤로 하고 자신만의 이익, 자국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형제애가 아닌 무관심이 더욱 점철되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안위나 소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문화는 서로의 인간관계를 어렵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양극화 현실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못하고 있고, 말을 한다 하더라도 그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모두가 소통 부재로 인한 불만과 화만 가슴에 쌓아두고 살아가는 실정입니다. 그래서인지 점차 우리는 이웃이 외치는 고통의 소리에 귀를 닫으려 하고, 같은 마음으로 함께 슬퍼하지도 못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지 않는 세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 빛은 소수의 몇몇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비추는 참빛이십니다.
빛으로 오신 구세주는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모두와 함께 이 기쁨을 느끼기를 원하십니다. 모두가 함께 그 빛이 주는 희망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성탄을 통해 주시는 당신의 사랑을 깊이 느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을 깊이 느끼는 이 성탄에 우리 모두 구세주의 사랑을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형제애를 나누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경제적인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이들, 자신만이 옳다는 생각에 갇혀있는 이들에게는 만나고 대화하는 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빛의 자녀다운 행동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안의 한 형제로서 함께 기쁜 성탄을 보냈으면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탄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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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듣다가 고등학생 때 즐겨듣던 팝송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시에 이 노래가 너무 좋아서 카세트테이프 이 한 곡만 담아서 일주일 내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명곡이라고 생각했고, 특히 이 노래의 기타 전주가 너무 멋져서 잘 치지 못하는 기타 실력이지만 계속 연습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랑했고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할까요? 지금도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예전만큼은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은 유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의 젊음과 열정을 나이가 찬 지금에도 가지고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과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까요? 그토록 좋아했던 물건을 지금도 간직하면서 애지중지하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자기 몸만 보더라도 유한성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영원히 필요한 것처럼 착각하고,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오직 주님의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인 사랑 실천에 집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가진 이 세상에 영원하신 분께서 오셨습니다. 단순히 2,000년 전에 단 한 번 함께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려고 새롭게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라고 하십니다. 유한한 세상에 영원함을 불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순간의 사랑이 아닌, 무한한 사랑을 담아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어렵고 힘들다면서 한숨짓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한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 사랑에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한한 것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대신 무한한 하느님 사랑에 모든 것을 걸고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 충분히 가능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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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밤 아기 밥님 오시네>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밤 아기 밥님 오시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포대기에 싸여계시니
갓난아기요
밥그릇에 담기시니
밥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하느님이시니
하느님 밥이요
밥 하느님이시네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신
갓난아기 밥님은
참사람이시니
사람 밥이요
밥 사람이시네
오늘밤
하느님 사람 밥이신
밥 사람 하느님이신
아기 밥님 오시네
오늘밤
믿음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믿음으로 뜸들일
믿음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믿음의 뜸들이네
오늘밤
희망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희망으로 뜸들일
희망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희망의 뜸들이네
오늘밤
사랑에 주린 이에게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당신 몸소
서른 세 해
사랑으로 뜸들일
사랑의 아기 밥님 오시니
나 기꺼이
그분의 밥그릇 되어
사랑의 뜸들이네
오늘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어
포대기에 싸여
밥그릇에 담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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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축하의 인사를 하시겠습니다.
마음의 구유 안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해 오신 모든 분께 축하와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실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 양식을 충만하게 채웠으며, 성경 통독과 감사 노트 쓰기를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지길 노력했습니다.
주일 학교는 은총 잔치로, 젊은이는 음식 나눔을 통해서 가난한 이웃과 함께했으며, 모두가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그러기에 그만큼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앞으로도 매사에 열성과 정성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더 큰 사랑을 담아서 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비추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고 성탄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 만질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드러내 준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 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 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을 자주 부르시길 바랍니다. 한번 불러보실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마음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주님을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박대 하였을까요?
그분은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리고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눕혀진 아기의 모습이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 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매번 차려져도 매일 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철없이 구는구나)라고 기록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구유에 뉘어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 주는 겁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하고 주님의 탄생에 대한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마침내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찬양했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백성이 주님의 구유를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 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희망합니다. 매일이 거듭 태어나는 성탄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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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화이트 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말씀이 사람이 되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신다.”
흡사 오늘 주님 성탄의 기쁨을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 말씀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구원자 탄생을 갈망하는 영적 예루살렘이요 주님의 사제인 저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전령입니다. 오늘은 참 기쁜 날,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새벽 눈뜨자 자비의 집 숙소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온 흰눈 가득 덮인 풍경이었습니다. 저절로 터져나온 온누리 모든 분들과 피조물들에게 드리는 인사말입니다.
“White Christmas, Merry Christmas”
(화이트 크리스마스, 메리크리스마스)
어제에 이어 오늘 성탄대축일 낮미사 화답송 후렴도 참 흥겹습니다.
“땅-끝마다 우리 주의 구원을 모두가 우러러 보았도다.”
어제처럼 오늘 하루도 이 화답송 후렴을 노래하면서 지내려 합니다. 어제의 화답송 후렴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이었습니다.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기에 오래 살고 싶습니다. 마지막 임종시에도 유일한 아쉬움이 있다면 주님을 더 사랑하지 못한 아쉬움일거란 어제의 고백을 다시 확인합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를 여는 순간 어제 대림 제4주일 로마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후 교황님 강론 말씀 제목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대로 주님 성탄 대축일 우리 모두를 향한 권고 말씀처럼 들립니다.
“너희 마음들을 하느님의 사랑에 열라, 모두에게 친절을 보여라!”
어제는 난생 처음 잠들었다가 수도형제가 깨주어 밤미사에 가까스로 참석할 수 있었으니 수도생활 41년째 초유의 체험입니다. 평생 벨소리 없이 일어났는데 어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늘 밤 12시쯤 일어나 눈붙이지 않고 하루를 지내다가 저녁에 잠들면 밤 12시후 일어나는 것이 습관화된 까닭에 10:30분 밤미사전에 못 일어난 것 같습니다.
미사중에도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순간 지금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루하루 온힘을 다해 써왔던 산더미처럼 쌓인 강론이 짚더미처럼 참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제 그만 멈출까하는 유혹도 잠시 들었습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도 천상체험후 자기가 쓴 모든 글들이 지푸라기 같다는 자괴감에 그 이후로는 글쓰기를 중단했다는 일화도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저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강론 쓰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의 표현이자 살아 있음의 표현이요, 사랑 나눔의 기회이니까요. 오늘 역시 일기쓰듯 전개되는 강론입니다. 어제 밤미사시 제2독서 성 레오 대 교황의 강론 노래후 응송이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오늘 우리를 위해
참된 평화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늘은 어디서나 꿀을 흘러내리게 하는도다.
오늘은 세상 구원의 날이 되어
옛적부터 마련된 영원한 행복의 날이 빛나는도다.”
주님 성탄 대축일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런지요! 어제 저녁식사를 앞둔 수도원 식탁 분위기가 흡사 잔치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잔치날이 사라진 작금의 시대, 성탄 대축일 잔치날이야 말로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이요 이런 하느님께 25년전 성탄절에 썼던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시를 오늘 헌시(獻詩)로 하느님께 바칩니다. 수차례 인용했습니다만 늘 새롭고 좋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언뜻 "난 하느님께 가스라이팅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흰눈 덮인 온누리가 ‘화이트 사일런스(white silence), 하얀 침묵중에 주님 탄생을 축하합니다. 어제 가난한 목자들이 주님 탄생을 체험한 루카복음 내용이 “아래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below)”을 뜻한다면, 오늘 요한복음의 주님 탄생에 대한 진리는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Christology from above)”을 뜻합니다. 오늘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요약하는 요한복음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히브리서 서간 말씀 역시 위로부터의 그리스도론을 말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체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를 통해 존엄한 품위의 참나-참사람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아니곤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첫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일치가 깊어질수록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생명을 찾는, 빛을 찾는 인간들에게 말씀이신 그리스도만이 그 답입니다. 충만한 생명, 환한 빛속 의 삶의 길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다음 요한복음의 말씀이 은혜롭습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참생명, 참빛이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합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참빛이요,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의 생명이 되게 하는 참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참생명이자 참빛이신 주님과의 일치가 명실공히 우리를 참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참으로 영예로운 우리의 신원, 하느님의 자녀됨을 확인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은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은총과 진리가 충만한 삶입니다. 요한 사도의 기쁨에 넘친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마느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새삼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최고의 사랑 선물이 바로 오늘 우리 마음의 구유에 탄생하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아기 예수님이십니다. 생명을, 빛을, 길을, 진리를, 은총을 잃어 존엄한 품위를 잃고 방황이요 전락입니다. 구원의 행복은 선택입니다. 오늘 탄생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생명이자 빛이요 진리이자 은총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날로 일치를 굳건히 할 때 참나의 실현이요 구원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참으로 존엄한 품위의 진선미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답은 하나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이 “예닮의 여정”에 충실함으로 이런 주님을 닮아감으로 날로 생명과 빛, 은총과 진리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존재이유입니다. 이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문득 떠오르는 부활의 봄과 더불어 생각난 “민들레꽃” 시로 강론을 마칩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볓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아기 예수님 탄생으로 하늘은 땅이 되었고, 주님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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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내게 어둠이 있다면>
오늘 복음은 아기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빛으로 얘기하면서 빛과 어둠에 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지금 어두운 것은, 빛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와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빛과 어둠의 이치는 사실 간단합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이는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빛의 반대는 없고 빛의 반대말도 없습니다.
어둠은 빛의 반대가 아니라 밝음의 반대이고, 어둠이나 밝음은 그저 빛의 상태들일 뿐이며 빛이 없는 상태가 어둠이라면 밝음은 빛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둠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내가 빛이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빛이 이 세상에 왔는데도 나만 빛이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은 그 빛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고, 깨닫지 못하기에 거부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요한복음 얘기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모두 빛을 비추시고, 빛에서 오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모두를 비추는 참빛이신데 그러나 선한 사람은 그 빛을 선으로 깨닫고 사랑하고 받아들여 어둠이 없지만 악한 사람은 그 빛을 악으로 깨닫고 미워하고 받아들이지 않아 빛이 없습니다.
그러니 빛을 선으로 깨닫는 선한 사람과 같은 빛을 악으로 깨닫는 악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탈렌트의 비유에서 한 탈렌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주지도 않고 거둬들이는 모진 분으로 이해한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한 탈렌트가 선도 은총도 아니고 한 탈렌트 주신 것이 사랑도 아니었으며 그러니 한 탈렌트 주신 분은 모진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이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빛을 비추지 않는 빛은 참빛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빛을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일지라도 참빛이 아니고 선택적으로 그러니까 편애하여 빛을 주는 사람도 참빛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들을 빛으로 생각했던 사람에게는
참빛에 대한 오해가 형성되어 있을 것입니다.
몇 번 믿었다가 배신당한 사람이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빛으로 희망을 걸었던 인간들에게서 실망을 여러 차례 한 사람은 이 세상에 참빛이 왔고 모든 사람을 비추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믿지 못할 놈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참빛이 아닙니다.
빛이, 빛이 아니라고 믿는 데는 방법이 없습니다. 선이, 선이 아니라고 믿는 데도 방법이 없습니다.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고 믿으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확신까지 하면 더더욱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요한처럼 빛과 선과 사랑을 증언해도 그는 어둡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에게 주님 성탄을 축하 드리며 빛으로 오신 주님이 앞길을 밝혀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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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2,14)
<성탄의 기쁨!>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티토 2,11)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의 은총을 받았습니다."(요한 1,16)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1-12)
성탄의 기쁨은 '모두의 기쁨'입니다. 그래서 종파를 초월해서 온 인류가 함께 이 성탄의 기쁨을 노래합니다.
성탄의 기쁨에서 어느 누구도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려고, 모두의 구원을 위해, 특히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축일 중의 축일'인 "이 날은 담벼락도 고기를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고기를 먹일 수 없으니, 그 겉에다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크신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하늘 왕국의 계신 분이 가장 초라한 마굿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니 성탄의 기쁨을,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큰 사랑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면, 내가 낮아져야 하고, 내가 작아져야 하고, 내가 더 초라한 곳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주님의 성탄을 함께 기뻐하고, 이 성탄의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눕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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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U7KFPNnbD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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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 11)
마침내
성탄입니다.
잠깐만이라도
하느님의 탄생을
생각하는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하늘의
맑은 사랑이
구유에
내려앉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부족한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성탄입니다.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탄은
가장 뜨거운
하느님과의
만남입니다.
세상을
바꾸시는
아기
예수님의
이름을 뜨겁게
불러봅니다.
작은 것을 위하여
조그만한
행복에서
당신 사랑을
시작하십니다.
삶을 묻는
우리들에게
맑은 감사로
인사하십니다.
참된 사랑을
만나면
또 다른 사랑이
탄생합니다.
참된 사랑이
그리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아기 예수님을
통해 배우는
성탄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고향은
우리들 마음
여기입니다.
하느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가족으로
오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가족이시기에
평화이며
영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모두의
아기가
되십니다.
덮어주고
감싸주어야 할
사랑입니다.
가장 춥고
가장 아프고
가장 외로운
이들의
구원자이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우리는
만납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우리들에게
기쁘게
태어나시는
하느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드립니다.
감사의 성탄이
막힌
우리
사랑의
숨구멍을
끝내 열듯
하느님 탄생을
뜨겁게 만납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와 기쁨의
성탄을
성모님과
성요셉
목동들과
가축들과
그리고
우리모두
함께 축하드립니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
우리에겐
성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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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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