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사실주의는 낭만주의의 지나친 주관주의와 감성적 접근에 거부감을 느끼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려 한 미술 유파이다. 이 유파는자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개념 차이를 명쾌하게 구분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자연주의는 19세기에 한참 세를 얻던 다원주의적 자연관이 반영돼 있는 사실주의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넓은 의미에서 사실주의는 단순히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 유파만을 지칭하는데 쓰이지 않고, 외부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모든 미술적 시도에 다 적용된다. 라스코 동굴벽화 같은 선사시대의 통물 그림에서 그리스 · 로마시대의 조각들, 르네상스 이후 사실적인 표현을 발달시켜온 다 빈치 · 미켈란젤로 · 카라바조 · 렘브란트· 다비드· 앵그르· 들라크루아 등의 그림에는 사실주의의 정신이 면면히 깔려 있다. 자연을 감각이 경험한 대로 모방하는 행위에 대해 사실주의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쓰일 수 있고 또 쓰여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형상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형상을 거부하느냐를 놓고 추상미술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까닭에 형상미술 일반을 가리켜 사실주의 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사실주의의 폭은 매우 넓다.
19세기 중반 도미에, 쿠르베, 밀레 등의 그림에 처음으로 사실주의라는 이름이 사조로서 주어진 것은 이들의 작품이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모!사하되, 그것을 수단이 아닌 최고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실주의 화가들은 고전주의가 추구한 이상이나 규범을 거부하고 낭만주의가 추구한 주관과 감정의 세계와도 맞서며 오로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자연히 그림의 대상은 객관화가 가능한 당대의 현실이 됐다. 이 무렵의 사회 현실은 사회적 격변과 민주주의의 확대, 기계의 발달, 다원주의에 기초한 과학적 결정론의 확산 등을 내포하고 있어서 예술가들의 작품에서도 다분히 자연주의적인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연주의를 사실주의와 엄밀히 구별하는 사람들은 '자연주의는 과학적 결정론을 신봉해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가치에는 신뢰를 갖지 않고 세계를 오로지 우연적이고 생리적이며 물리적인 실체로만 이해하고 접근하려는 태도'라고 말한다. 과학의 급속한 발달을 이룬 근대의 유물론적 가치가 반영된 태도라는 뜻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쿠르베와 밀레, 도미에 세 사람의 사실주의자 가·운데서 쿠르베가 가장 자연주의적인 특징이 강했던 화가라고 할수 있다.
크레스피(Giuseppe Crespi). [벼룩 잡는 여인].
캔버스에 유채, 50×40.5cm.
넓은 의미에서 사실주의는 외부 세계를 충실히 재현하려는 모든 미술에 적용될 수 있다. 형태·에서뿐만 아니라 내용에서도 주제의 상황이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포착된 크레스피의 [벼룩 잡는 여인]. 18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크레스피는 종교화나 초상화도 그렸지만, 이런 장르화를 자연·주의적이고 산문적인 붓길로 감칠맛 나게 표현했다.
사조로서 19세기 사실주의는 그리 오래 존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주의의 영향은 이후에도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현대인의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과 잘 어울리는 까닭에 '거짓과 허황됨이 없는 미술'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졌고, 더불어 더 이상 종교나 신화, 역사적인 교훈, 주관적인 감상이나 정념에 기대지 않고 과학적으로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술이 현실을 비판하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새 지평을 열어준 셈이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가치를 중시한 사실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초에 와서는 사회적 사실주의(social realism)와 사회주의 사실주의 (socialist realism) 같은 새로운 사실주의 운동의 뿌리로 기능한다. 사회적 사실주의란 도시화, 산업화 등 현대사회의 여러 문제를 비판적으로 혹은 냉소적으로 다룬 미국과 영국 쪽의 미술을 지칭하며, 사회주의 사실주의란 사회주의 혁명의 시각에서 현실속에 '역사적 구체성'을 담아 표현한 옛 공산권의 미술을 가리킨다. 여기서 역사적 구체성이란 노동계급을 사회주의 정신으로 교화하고 개조하는 일을 적극 고무 ·찬양하는 제반 시도를 가리킨다. 사회주의 사실주의는 이렇듯 철저히 이념 지항적인 미술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념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사회주의 사실주의가 사실주의 미술로서 실패하는 원인이 된다. 사실주의의 힘은 이념이 아니라 사실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쿠르베의 사실주의
예부터 화가는 주로 서민 계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왕후장상과 교회, 귀족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자기 출신 계층의 관심사나 이해를 대변하기보다는 지배 계층의 취향과 이해, 지배 이념을 표현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야 했다. 근대적인 시민사회가 움트고 형성되자 낭만주의 화가들은 지배 계층의 이해와 이념에서 벗어나 개인의 내면에 자리한 주관과 감정을 적극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서민 일반의 계층적인 이해나 관심사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7~1877)는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예술작품을 제작한 최초의 화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꽤 넉넉한 농촌 집안 출신이었는데, 경제적 환경이야 어떻든 농투성이의 아들이라는 자각과 자긍심 속에서 귀족이나 부르주아이 범절과 이상을 철저히 경멸하는 태도를 취했다. 서민출신으로서, 서민들의 생활을 작품의 주제로 삼고, 서민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그런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배이념에서 벗어나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확실히 피력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사회주이자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자요 공화주의자이다. 한마디로 말해 혁명의 지지자이며, 무엇보다 사실주의자, 곧 진실의 참다운 벗이다. "
쿠르베, [석공들](1945년 망실)
이렇듯 쿠르베에게 사실주의란 회화적 진실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정치적 반항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생생히 묘사한 그의 역작 [석공들]은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망실되어 현재는 사진만 남아 있는 작품이다. 아깝게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가 잘 드러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작품의 등장인물은 단 두 사람이다. 왼편의 어린 석공과 오른편의 나이 든 석공. 어린 석공은 아직 이 일을 하기에 힘이 딸려 보이고, 나이 든 석공은 이 일을 하기에 힘이 부쳐 보인다. 그럼에도 두사람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쿠르베는 이 두사람을 자신의 고향인 오르낭 근처 메지에레 마을로 마차를 몰고 가다가 발견했다고 한다. 큰 돌을 깨뜨려 건축이나 도로 포장에 쓰는 작은 돌로 만드는 일은, 당시 농사로는 생계가 어려운 최하층 농민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다. 그들의 힘겨운 노동에 릴은 인상을 받은 쿠르베는 그들을 화실로 불러 이 그림의 모델로 서게 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의 모델들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위해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만큼 이 그림에서는 현실과 투쟁하는 가난한 서민의 모습이 생생히 되살아 난다. 당시 프롤레타리아치 냉엄한 현실이 정확히 포착돼 있는 그림이라고 하겠다. 고전주의를 지지하던 비평가들이 이처럼 정치의식이 뚜럿한 그림을 좋아할 리 만무했다. 한 비평가는 다음과같이 비꼬았다.
"그 어떤 예술가도 이렇게 대단한 거장의 솜씨로 예술을 빈민굴에 처넣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쿠르베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다고 한다.
"아무렴, 예술은 빈민굴에 처넣어져야 하는 것이지."
지금까지의 미술이 지배 계층을 즐겁게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면, 이제부터는서민들의 목소리가 가감없이 반영되는 통로가 돼야 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다.
쿠르베, [오르낭에서의 매장]A Burial at Ornans
1849-50,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석공들]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오르낭에서의 매장] 또한 사실주의자 쿠르베의 면모가 잘 드러난 걸작이다. 이 작품은 오르낭의 고향집 다락방에서 제작한 대작으로, 이를테면 사실주의의 선언서 같은 작품이다. 원제가 "군중도, 오르낭에서의 매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인 이 작품은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일상을 위대한 역사화 형식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당시 미술 애호가들에게 큰 충격을주었다. 길이가 6미터가 넘는 이 그림은 그 크기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뭔가 위대하고 거창한 혹은 이상적인 이야기를 전해주리라 지레 짐작하게 했다. 역사화라는 것이 전부 종교적 신화적 혹은 역사적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 그림을 마주한 당시의 프랑스 관객들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기릴 만한 영웅이 그림에 단한 사람도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내용 자체가 평범한 촌부들의 평범한 일상사라는 것을 알고는 분노를 금치 못했다. 죽은 사람이 뭔가 위대한 일을 하다 죽었다든지, 죽은 영혼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 신의 영광을 찬미한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 죽었으니 묻고 슬퍼한다는 평범한 내용이었기에 관객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냉철하게 묘사하면서 쿠르베는 이렇게 말했다고한다.
"사실주의란 다른그 무엇이 아니다. 오로지 이상을 거부하는 것일 뿐이다. "
죽음이라는 자연적 현상과 그것을 슬퍼하는 사회적 현상을 넘어 이상화 신비화하거나 도덕적 교훈부터 찾는 것은 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 쿠르베의 생각이었다. 촌부의 죽음이 영웅의 죽음보다 못하다고 볼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게 화가란 정직하게 자신이 경험한 사실을그리는 이였다. 이처럼 전통적인 관념의 이술가가 아니라 냉정한 해부학자의 시선으로 사실을 표현한 까닭에, 그가 죽은 뒤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갈 때 "[매장]을 루브르에 들이는 것은 모든 미학에 대한 부정" 이라는 격렬한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쿠르베의 그런 태도를 자기 시대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 애쓴, 진실로 근대적인 투쟁으로 보고 있다.
도미에와 밀레의 사실주의
쿠르베가 자연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현실을 냉정하게 표현했다면 도미에와 밀레는 여기서 더 나아가 각각 주관적인 풍자의 정신과 서사시적 시정을 담은 작품을 만들 었다. 이 두 사실주의자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표현을 중시하면서도 낭만주의의 주관성을 나름의 방식으로 이어받은 셈이다. 사실주의가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에서 나왔다고 하나, 낭만주의를 완전히 극복했다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들의 그림에 깔려 있는 이런 낭만주의적 요소 때문이다.
오노에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의 풍자정신은 당시 사회의 중심세력이 된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 행정, 관습 따위를 희극적으로 폭로한 데서 그 진가를 발휘했다. 그 역시 쿠르베처럼 작품에 의도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담았는데, 스스로 석판화로 시사만화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는 점에서 그 직접성과 노골성이 훨씬 더 두드러졌다. 그런 까닭에 그의 그림에서는 사실성의 표현보다는 현실을 비트는 풍자의 태도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곤 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무엇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기층 농민들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림으로써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담아낸 화가이다. 정치적 의도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정직함과 소박함을 서사시적으로 노래한 그의 예술은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 성토의 대상이 되곤 했다. 과거에 한 번도 영웅으로 표현된 적이 없는 익명의 농부들이 예술을 통해 서사시적 영웅성을 획득한 것 자체가 기존사회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밀레의 작품이 담고있는 인간에 대한 외경과 인간존엄에 대한 찬미는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힘이 되고 있다.
오노에 도미에의 [삼등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
oil on canvas,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먼저 도미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삼등열차]를 보자. 이작품은 판화처럼 선묘가 매우 뚜렷해 언뜻 보면 채색한 만평처럼 보인다. 그림 구석구석에서 오래 갈고 닦은 만평가의 손맛이 드러나지만 만화적 유머에 경도된 그림은 아니다.
도미에의 [세탁부]
시대의 무거운 그림자가 장중한 곡조로 퍼져나가면서 깊은 문학적 울림을 전해준다. 가난한 이들로 가득 찬 열차의 무거운 분위기와 그들의 침묵이 자아내는 우울한 시대의 울림은 도미에가 아니고선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탁월한 경지이다. 바로 이 탁월한 시대의 표현이 두려워서 당대의 비평가들은 일부러 그를 폄하했는지 모른다.
흔들리며 기차를 타고 가는 승객들은 모두 말이 없다. 아기를 안은 젊은 어머니는 오로지 아기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고, 그 곁의 노파는 허공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있다. 노파에게 기댄 소년은 많이 지쳤는지 조용히 잠에 빠져 있다. 뒤로 보이는 손님들도 하나같이 입을 굳게 다문채 서로의 시선을 피한다. 이곳에는 교감도 나눔도 없다. 이들이 함께 나누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같은 기차를 타고 함께 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들의 머리속에는 각자의 관심과 걱정거리만이 스치고 지나간다. 그들은 서로에게 외로운 섬이다. 이렇게 서로에게서 소외되고 서로를 소외시키면서 승객들은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으로 빠져든다. 그런 까닭에 도미에의 그림에 그려진 대상은 가난한 서민들이지만, 그림의 실질적인 주제는 이들의 소외를 조장하는 사회이다. 누가 이들을 이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는가? 사회를 향한 비판의 칼날이 만평 못지않게 날카롭게 살아 있는 작품이다.
도미에는 집안이 가난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법률 사무소의 사원으로, 서점의 점원으로 돈벌이에 발벗고 나서야 했고, 냉엄한 현실에 일찍부터 눈떠야 했다. 1830년 [카리카튀르]라는 잡지의 창간과 더불어 시사만화가로서 고정적으로 기고를 하게 된 그는 물고기가 물을 만난듯 탁월한 석판화 작품을 양산했다. 1832년에는 국왕 루이 필리프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렸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는데, 비판과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그의 작품은 당시 서민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뚫어주었고, 그들이 역사의 진정한 주인임을 선포했다.
밀레의 [씨뿌리는 사람]
밀레의 그림 [씨 뿌리는 사람] 은 낮음을 통해 높음을, 천함을 통해 귀함을, 고통을 통해 평화를 노래하는 작품이다. 밀레는 "노동은 순교"라고 말했다. 따라서 밀레의 그림이 죄다 힘겹게 노동하는 농민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그림은 순교자로서의 농민상을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밀레의 농민들을 볼 때마다 왜 거룩하고 고귀한 인상을 받는지, 왜 잔잔한 평화를 느끼는지 이로써 알수 있다.
그림은 다소 경사가 진 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밭의 경사와 같은 각도로 한 농부가 터벅터벅 걸으며 씨를 뿌리고 있다. 해는 뉘엿뉘엿 져가는데, 농부는 아직할 일이 많아 보인다. 그의 거칠고 남루한 옷은 그가 얼마나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천대받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저 넓은 땅은 그에게 힘겨운 노동의 장이지만, 그는그 땅을 단순히 고통의 깊이로 계산하지 않는다. 땅은 그에게 숭고한 어머니이며 자신의 존재 근거이다. 그는 땅을 사랑하고 땅을 아낀다. 지금 씨를 뿌리면 이 땅은 씨를 품었다가 풍성한 결실로 되돌려 줄 것이다. 설령 자기 몫이 얼마 되지 않는다해도 그렇게 끝없이 되갚아 주는 땅이 고맙고 고마울 뿐이다. 이 땅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자신임을 알기에 농부는 힘겨운 노동 속에서도 이렇게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밀레의 작품에서는 도미에와 달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선명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그리는 농부가 왜 어려운 처지가됐는지, 그런 조건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문제와 관련이 없는지, 밀레는 그다지 세심하게 묻지 않는다. 밀레의 주인공들은 결코 외부를 탓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인내심과 의지, 신앙으로 극복하려 한다. 처절한 가난이나 노동의 힘겨움은 오히려 이런 농부들의 태도를 더욱 위대해 보이게 할 뿐이다. 갈등이 심했던 당시 프랑스사회에서는 이런 가난과 고통의 솔직한 표현과 그 안에 숨은 휴머니즘의 표현마저 시빗거리가되곤 했다. 그래서 보편적인 인간애를 감동적으로 퍼올린 밀레의 그림도 정치적으로는 의혹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풍자화의 전통
도매에는서양 풍자화웨 정점에 서 있는 화가라고 할수 있다. 풍자화는 도미에 이전에도 제작됐고 도미에 이후에도 제작됐지만, 그는 근대 이전의 풍자 전통을 근대적 풍자 전통으로 끌어올린 핵심적인 대가랴고할 수 있다. 풍자화는 기지와 냉소 등을 섞어 사후 일반이나 특정한 개인의 실수, 결함, 죄악 등을 풍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림을 말할다. 비판정신이 중요한 그림이므로 특정한 양식으로 구별된다기보다 주제 의식과 제작 의도에 따라 구별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히 만화와 같은 장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순수 회화나 판화,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장르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장르 측면에서 보면, 장르화의 발달이 풍자화의 발달을 크게 도왔음을 알수 있다. 대표적인 장르화가였던 보스(Hieronymus Bosch ; 1450년경-1516), 피테르 브뢰헬, 호가스 등은 대표적인 풍자화가이기도 했다. 풍자화는 근대에 들어와 저널리즘의 발발에 힘입어 시사만화의 형태로 발전했으며,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정치현실이나 정치권력의 배후에 작용하는 여러 가지 모순과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쉽게 대중적 공감을 얻어내는수단이 됐다.
살롱의 자연주의
쿠르베의 [오르낭에서의 매장]이 불러온 파장에서 알 수 있듯 자연주의는 엄청난 저항을 받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한 세대쯤 지나자 공식적인 국가적 전람회인 살롱이 마침내 자연주의 미술에 문을 열기시작했다. 역사나 신화 주제 그림, 상류층의 초상화와 더불어 노동자 계층을 그린 그림도 공식적인 행사에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쿠르베가 작고한지 5년 된 해에 프랑스의 최고 명문 미술학교인 에콜데보자르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린 것 또한 변화하는 시대상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살롱으로 입성한 자연주의자들은 쿠르베나 도미에보다 밝고 온화하며 정형화된 그림들을 선보였다.
비스티앙 르파주Jules Bastien-Lepage의 [건초 만들기]
1877, 캔버스에 유채, 180-195cm
쿠르베나 밀레의 농촌에 비해 좀더 근대적인 인상이 돋보이는 농촌 풍경이다. 인상파에서 밝은색채와 다소 거친 붓터치를 차용했다.
278. 피테르 브뢰헬, [하품하는 사람], 16세기, 나무에 유채.
그림에 풍자적 시선과 유머를 적절히 구사했던 브뢰헬의 작품이다. 만화적인 표정묘사가 일품이다.
바르비종파(Barbizon波)
밀레가 그린 유명한 농민화들은 대부분 바르비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파리 근교에 있는 바르비종은 퐁탄블로 숲과 사이l 들판사이에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피리에서 파리에서 가까우면서도 경치가 좋은 곳이 많아 19세기 중반부터 화가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특히 1830~1875년 이곳에서는 밀레를 비릇해 루소(Rousseau , 1812~1867), 디아즈 드 라 페냐(Diaz de La Pena; 1808~1876), 코로, 샤를 자크(Charles-Emile Jacque ; 1813~1894), 바리에(Barye; 1796~1875), 도비니, 트루아용(Constant Troyon ; 1810~1865) 등이 될발히 작업활동을 펼쳤다. 바르비종 화화들이 그린 숲이나 바위, 들판의 풍경은 무척 친숙하고 평범해서 어떤 때는 너무나 '비시적(非時的)'으로 보인다. 대단할 것도 없고 내세울것도 없는 그런 풍경인 것이다. 이는 인물을 즐겨 그린 쿠르베 영웅이 아니라 범인들을 그린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엔 인물이든 자연이든 일상적인 것을 택하는 일종의 민주적인 정신이 담겨있다.
사회적 사실주의
현대 도시화는 사람들의 관계를 매우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적인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더불어 계층 사이의 불화로 인한 갈등이 늘 긴장을 불러온다. 과거의 온정주의는 점차 설자리를 잃고 첨예한 이해 대립만이 판을 친다. 사회적 사실주의는 이런 현대 도시사회의 문제점을 사회악과 부정의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회화이다. 앞에 '사회적'이라는수식어가 붙은데서 알수있듯, 개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며, 이를 사실적 객관적으로 표현한다는 예술적 목표를 갖고 있다.
19세기 후반 영국에서 사회적 사실주의 그림이 많이 그려진 것은 당시 영국이 산업화와 근대화, 도시화의 최선봉에 서 있었던 점과 무관하지 않다. 루크 필즈(Luke Fieldes; 1843~1927)가 그린 [노숙자 수용소 입소 지원자들] 은 도시 빈민들의 혹독한 현실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한 잡지에 실을 삽화로 그렸던 판화를 다시 유화로 옮긴 것이다. 필즈는 판화가 실린 잡지에 그림의 소재를 어떤 경로로 얻었는지 직접 소개하는글을 게재했다.
"1863년 런던에 온 첫해 겨울, 밤거리를 걷다가 이 장면을 발견하고는 스케치를했다. ‥‥‥‥ 디너 파티에 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어찌하다 경찰서 앞을 지나 되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마침 경찰서 앞에는 노숙자 수용소 입소 허가를 얻기 위해 빈민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우선 그 자리에서 그 모습을 기록하고는 그 후로도 그곳에 자주 찾아갔다. 경찰들과는 친구가 됐고, 빈민들과도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됐다‥‥‥이 그림의 인물들은 최근에 입소 허가를 받은실제 인물들이다. "
그림은 벽에 기대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바닥에 쌓인 눈에서 알 수 있듯 몹시 추운 겨울날, 습도마저 높아 사람들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오로지 인내심 하나로 견뎌내고 있다. 어른들도 하나같이 움츠러들었는데, 추위와 배고픔에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그림 맨 왼쪽 아래에서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리는 개는 이런 빈민들의 삶을 외면하고 저주하는 냉혹한 현실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 개 뒤로 한 노인이 경찰의 안내를 받고 있는데, 아마도 입소 허가를 막 받은 듯하다. 두 손을 꼭 쥐고 거의 동태가 되다시피 한 몸을 추스르는 노인 곁에서 경찰이 허가증을 들고 안내를 해준다. 그 앞의 모녀는 노인에 앞서 막 설명을 들었는지 이제 지친 몸을 이끌고 수용소를 향해 힘겹게 걸어가고 있다. 몸을 붙일 곳이 생겼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헤어나올 길 없는 궁핍으로 어머니는 거의 심신이 해체 상태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아무런 죄도, 잘못도 없는 딸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서글픈 표정으로 어머니의 걸음을 좇는다.
빈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강조하다 보니 감상적인 느낌이 크게 부각됐는데, 화가는 벽면의 게시판에도 그런 요소를 의도적으로 삽입했다. "미아 찾음. 2파운드 사례"라는 글이 쓰여진 벽보와 '발발이 개 찾음.20파운드 후사'라는 글이 쓰여진 벽보를 나란히 배치해 강아지 한 마리보다 못한 인간의 몸값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가치가 전도된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화가는 인간성 상실이 현대사회의 문제이자 가진 자들에게 돌아갈 부메랑이 될 것임을 통렬히 꼬집고 있다.
20세기 서양문명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미국 역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겪었고 이를 사실주의적인 미술로 표현했다. 미국의 사회적 사실주의는 나름의 지역적 색채를 짙게 풍기는데, 애시캔 화파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재떨이 혹은 쓰레기통을 뜻하는 애시캔은 이 화파 화가들이 도시생활의 추하고 혐오스러운 모습을 즐겨 표현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존 슬론(John Sloan; 1871~1351), 로버트 헨리(Robert Henry; 1865~1923), 조지 벨로스(George Wesley Bellows; 1882~1925), 조지 룩스(George Luks; 1867~1933) 등이 그 대표적인 면면이다. 물론 이 화가들은 자기 화파의 이름에 걸맞게 사회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그림도 그렸지만, 그저 평범하고 일상적인 미국 도시민들의 생활을 미국적인 색채로 표현하기도했다.
벨로스의 [뎀시와 피르포]
1924, 캔버스에 유채,129.5*160.6cm
조지 벨로스는 20세기 초 미국 서민층의 활력과 에너지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가운데 한 사람이다. 벨로스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의 매우 보수적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붓 끝은 늘 사회의 그늘진 곳을 향했다. 그의 대표작 [뎀시와 피르포]는 권투시합을 통해 격렬하게 요동치는 미국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림은 링에서 흰 트렁크를 입은 권투선수 뎀시가 보라색 트렁크를 입은 아르헨티나인 피르포의 주먹에 맞아 링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벨로스는 이 시합을 제대로 관람하려고 앞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마침 뎀시가 맞고 떨어지면서 벨로스를 덮쳤다고 한다. 화가 난 벨로스는 욕을 한마디 하고는 다시 뎀시를 떠밀어 링 안으로 돌려보냈다. 뎀시는그전까지 피르포를 일곱차례나 다운시켰기 때문에 링 밖으로 떨어져나간 것은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런데 다시 정신을 가다듬은 뎀시가 다음 라운드에서 피르포를 케이오시켜버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셈이다. 어쨌든 벨로스는 뎀시가 떨어지는 장면을그림의 소재로 택해 매우 역동적인 장면으로 재현했다.
당시 뉴욕에서 권투시합에 돈을 거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일부 클럽에서는공공연하게 이런 시합이 벌어졌다. 이때는 오로지 남자들만 관전할수 있었다고 하는데, 죽일 듯이 싸우는 권투선수들의 모습에서 관객들이 본 것은 당시 미국 사회에서 벌어진 처절한 생존경쟁의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신문에 그림을 기고하는 일을 했던 벨로스도 바로 이 처절함을 잡아내려 클럽을 찾았으며, 1907~1924년 여러 점의 권투시합 그림을 그렸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강력한 이민 규제법이 있었음에도 수백만의 값싼 노동력이 이탈리아와 동유럽에서 쏟아져 들어와 너저분한 빈민촌을 형성했다. 뉴욕은 바로 이들의 노동력에 의지해 교량과 터널, 지하철 등 도시 교통망을 확장하고 의류산업과 인쇄업, 가내공업 등에 기반을 둔 경제 붐을 일으킬 수 있었으나, 격렬한 노동운동과 급진주의의 몸살 또한 앓아야 했다. 벨로스가 그리려 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 "두 사나이가 서로를 죽이려고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이었다. 이전까지는 예술작품의 소재로 그려지지 않던 권투시힙이 20세기의 새로운 시대상으로서 화포를 채우게 된 것이다.
로버트 콜러(Robert Koehler), [파업]
1886. 캔버스에 유채,249×279.4cm.
피츠버그 철강 공장의 파업을 생생히 묘사한 이그림에서 오른쪽의 노동자 한 사람은 돌을 집어들고 있다. 왼편의 실크 해트를 쓴 사람이 철강공장의 주인이다. 현대 도시사회의 문제점을 파헤친 사회적 리얼리즘 미술은 다큐멘터리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시위나 파업 같은 경우 인상적이고도 반향이 큰 소재로서, 저널리스트적 붓길로 생생히 묘사됐다.
신즉물주의(신객괸주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사실주의의 전통은 1920~1930년대 독일에서 신즉물주의(신객관주의) 운동을 낳았다. 신즉물주의는 대상을 즉물적으로 파악해 현실을 하나의 감각적인 실체처럼 느껴지도록 제작하는 경향을 말한다. 신즉물주의는 명료하고 세부적이고 고도로 사실주의적인가 하면, 때때로 그로테스크하고 풍자적이기도 하다. 사회적 사실주의의 한 변형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 즉물성미 워낙 강렬해 마술적 사실주의라고도 불린다. 용어 자체는 1923년 만하잉 미술관의 관장 하르트라우프(Hartlaub)가 기획한 전시회 이름에서 유래했다. 1차대전 이후 혼란한 독일 사회를 비판하거나 인간의 추악하고 비참한 단면들을 주로 묘사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막스 베크만(Max Beckmann ; 1834~1950), 오토 딕스(Otto Dix; 1891~1969),게오르그그로츠(George Grosz ; 1893~1953)등이 있다.
283. 베크만, (시에스타(낮잠)) 1947 캔버스에 유채.
벌거벗은 몸을 스스럼없이 드러낸 이 여인들은 아무래도 창부 같다. '망중한'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에서 현대 도시사회의 음울한 그림자를 엿보게 된다.
첫댓글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기왕이면 사조별로 연재해주심이 어떨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