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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정몽주의 죽음
황 원 갑
공양왕 2년, 경오년(1390년)에 정몽주(鄭夢周)의 나이 어느덧 쉰네 살이었다. 새해가 되었어도 정권을 잡은 이성계(李成桂) 일파는 한번 뻗친 살기를 거둘 줄 몰랐다. 윤소종과 이첨이 변안열 ․ 홍영통 ․ 우현보 ․ 왕안덕 ․ 우인영 ․ 정희계 등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 가운데 변안열은 정몽주와도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원래 중국인으로 심양 출신인데 원나라 말기에 난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무인이었다. 그는 귀화해서 고려를 위해 홍건적을 물리치는데도 공을 세웠고, 정몽주가 조전원수로 출전한 황산전투에서도 왜구를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정몽주와도 각별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이성계 일파에게 미운털이 박혀서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변안열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정몽주는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안타까워했다.
2월이 되자 이성계 일파는 이번에는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를 처형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정몽주가 도당(都堂)에서 이색을 죽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주장한 덕에 이색은 가까스로 죽임을 면하고 귀양지를 함창으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같은 날 정지는 황천으로, 우인열은 청풍으로 유배되었다.
이색을 탄핵한 정도전(鄭道傳)과 정몽주 사이에서 이런 말이 오갔다. 도당에서 밖으로 나온 다음에 정몽주가 정도전을 불러 세웠다.
“여보게 삼봉(三峰), 자네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심한 한 게 아닌가?”
삼봉은 정도전의 호이다.
“포은(圃隱) 형, 내가 무엇을 너무했다는 거요?"
“이 사람아!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목은(牧隱) 선생은 자네의 스승이 아니신가?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자기 스승을 탄핵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흥! 난 또 무슨 말이라고…. 나는 사제지간의 의리보다도 사직의 안위가 더욱 걱정돼서 그런 거요!”
“아니, 이 사람이! 그래 목은 선생이 사직에 무슨 해가 된다는 말인가?”
“그 이유는 상소문 안에 자세히 적혀 있으니 다시 읽어보시구려!”
“어허, 갈수록 태산이군! 내가 조정에 남아 있는 한 목은 선생은 반드시 지킬 터이니 그렇게 알아 두게나!”
“흥! 어디 마음대로 한 번 해보시구려!”
그렇게 해서 정도전과는 완전히 등을 돌리고 말았다. 하지만 만사는 이성계 파의 중심축인 조준(趙浚)과 정도전의 뜻대로 돌아갔다. 비록 몸은 조정에 있지만 정몽주의 마음은 단 한시도 편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해 11월 6일 정몽주는 수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발령장 대로 하면 ‘판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判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 영경영전사(領景靈殿事) 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었다. 비로소 정1품 최고의 품계에 오른 것이다. 정몽주는 또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에 봉작되었다.
정몽주는 수문하시중으로 재직 중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며, 의창(義倉)을 다시 세워 농촌에 풍년이 들 때에는 여유분의 곡식을 저장하여,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토록 했다. 이때 의창을 전국적으로 설치하면서 효과를 보았으므로 이것이 뒷날 정식 제도로 정착한다.
다시 해가 바뀌어 공양왕 3년(1391년) 신미년이 되었다. 쉰다섯 살이 된 정몽주는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어 인재 선발을 주관하였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하였다. 그 뒤 <대명률大明律)> · <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하여 새로운 법령인 신률(新律)을 제정, 공포하여 국법 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조정은 이제 이성계 일파와 그 반대편에 선 반 이성계 파로 갈라섰다. 반 이성계 파의 중심에는 자연히 정몽주가 서게 되었다.
그해 5월 13일에 정몽주는 조정 인사를 개편했다. 문하시중 이성계가 공양왕이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직서를 내고 집에 들어앉아서 시위를 하는 바람에 이성계 일파가 힘을 잃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아우 왕우(王瑀)를 영삼사사에 임명하고, 이성계를 판문하부사, 심덕부를 문하시중, 자신은 그대로 수문하시중, 정지를 판개성부사, 유구를 예문관대제학, 이거인을 경상도관찰사, 하륜을 전라도관찰사, 변옥란을 이조판서, 우홍득을 전교령, 정희를 사헌집의, 그리고 정도전은 평양부윤으로 삼아 외직으로 쫓아버렸다. 정도전은 계속 말썽이었다. 언사가 매우 불손한 상소문을 올려 경상도 봉화로 유배를 당했다. 그러자 정몽주 편을 들던 김진양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정도전과 조준의 무리는 발본색원해야만 할 만악(萬惡)의 근원입니다. 거기에 남은 ․ 윤소종 ․ 조박 ․ 남재 등은 정도전과 조준에게 빌붙어 날뛰는 무리이니 모조리 목을 쳐야 합니다.”
정몽주가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왕에게 관대한 처분을 하도록 권했다. 그 결과 정도전은 나주로 이배하고, 그 아들 정진과 정담을 서인으로 만들고, 조준은 이산으로 귀양을 보냈다. 반면 그 동안 이성계 일파에 의해 벼슬이 떨어지거나 귀양살이를 하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면되거나 복직되었다. 세상은 변하는 듯했다.
이색과 이종학 부자, 이숭인(李崇仁)과 우현보 등도 귀양이 풀리고 복권이 되었다. 이색은 한산부원군, 우현보는 단산부원군이 되었다. 이성계와 심덕부는 정몽주와 더불어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올랐다. 그런데 그해가 다 가기 전에 시중에 ‘이씨개국(李氏開國)’이란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목자득국(木子得國)’에 이어 이씨개국이라니, 참으로 심상치 않은 요설이었다.
그해 신미년은 그렇게 어수선하게 저물었다.
해가 바뀌어 공양왕 4년(1392년) 운명의 해 임신년이 밝았다.
정몽주의 나이 어느덧 쉰여섯 살이었다. 정몽주는 새해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성계 일파의 위협으로부터 사직과 조정을 지켜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풀을 쳐서 독사를 놀라게 한다고 섣불리 이성계 일파를 흔들어 반발을 사는 위험은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조정의 진용을 다시 짰다.
이성계 파의 좌장 격인 조준을 삼사좌사로 임명하고, 권중화를 문하찬성사에, 유만수를 판개성부사에, 박원을 밀직사에, 이숭인을 지밀직사에, 안익을 문하평리 겸 상호군에 각각 발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정몽주는 썩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자들이 어쩌는가 보려고 그 초대에 응했다.
주안상을 마련하여 정몽주와 대좌한 이방원이 입을 열었다.
“포은 선생님. 늘 한 번 모신다 모신다 하고 마음먹은 지 오랜데 이제야 모시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어허, 이렇게 초대해줘서 고마우이.”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마음껏 술을 드시지요?”
“그렇게 하세나.”
두 사람은 서로 술잔을 권하며 한 잔 두 잔 술을 마셨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오르자 이방원이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이 자리가 술자리고 하니 제가 오늘은 좀 실례되는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허허허, 그럼 무슨 말이든 사양 말고 해보게나.”
“제가 듣기에 선생님께는 세 가지 허물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생님께서도 아시는지요?”
“난 모르겠는데…. 어디 자네가 들은 대로 한 번 말해보게나.”
“그럼 염치 불구하고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은 술을 너무 좋아하신다고 말이 많습니다. 어디 술자리가 있으면 남들보다 먼저 마시고 남들보다 나중에 나오신다고들 합니다.”
“그건 맞는 말일세. 난 젊어서부터 술을 매우 좋아했다네. 그리고 지금은 집안에 늘 손님이 찾아오고, 또 집에 술이 언제나 떨어지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겠는가? 허허허!”
“잘 알겠습니다. 두 번째는 좀 우스운 이야깁니다. 선생님은 여색을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원, 싱거운 사람 같으니! 나도 여색을 좋아한다네! 사내로 태어나서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게 어디 사낸가? 또 일찍이 공자님께서도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건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여쭙니다. 선생님은 중국 물품을 상대로 한 무역을 곧잘 하신다고 들었는데 어떠신지요?”
“사람들이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별 말을 다 하는군!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늙도록 재물에 어두워서 여유는 없는데 자식은 많다네! 그 애들 혼사를 치르는데 남들처럼 중국 물품을 쓰자니 난들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쪽의 여유 있는 물품과 그쪽의 여유 있는 물품을 서로 바꿔 보충하는 것이지, 내가 뭐 큰 이문이라도 남기려고 장사를 한 건 결코 아니라네!”
술자리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그러다가 이방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제가 오늘 노래 한 곡을 뽑아볼 터이니 흉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거 좋지!”
이방원이 이렇게 읊었다.
-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
조용히 듣고 나서 정몽주가 이렇게 답하여 읊었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이것이 뒷날 사람들에 의해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유명한 시조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와 그 일파가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불변하는 심경을 시조로 읊어 보인 것이었다. 정몽주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한 이방원은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고 작정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3월에 마침내 일이 벌어졌다.
하정사(賀正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맞이하기 위해 왕제 영삼사사 왕우와 이성계를 황주로 보냈는데, 이성계가 해주 근처에서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드러눕는 일이 생겼던 것이다. 정몽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이성계 일파를 모조리 제거하려고 했다. 그는 심복인 간관 김진양으로 하여금 이런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 정도전은 천한 출신으로 당상(堂上)에 오른 자로서 자신의 천한 뿌리를 은폐하기 위해 온갖 죄상을 꾸며대어 많은 사람을 모함하고 함정에 빠뜨렸습니다.
조준은 몇몇 재상에게 원한을 품고 정도전과 뜻을 합쳐 원한을 선동하고 권세를 농락하고 여러 사람을 위협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비슷한 부류를 모아 작당했는데, 그 가운데서 남은 ․ 남재 등은 선동 작란의 우익이 되고, 윤소종 ․ 조박 등은 후설이 되어 서로 어울려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 형벌을 가했다.
… 이 자들의 간악함이 이와 같으니 원컨대 조준 ․ 남은 ․ 윤소종 ․ 조박 등은 담당 부서로 하여금 직첩을 몰수하고 국문하여 전형(典刑)을 밝게 하시고,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처벌토록 하소서. -
이 상소에 따라 조준 ․ 남은 ․ 남재 ․ 조박 등은 벼슬이 떨어져 귀양 가고, 정도전은 유배지 봉화에서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또 이성계의 심복인 오사충도 벼슬을 떼고 귀양을 보냈다. 이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조준과 정도전을 당장 죽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성계는 아들 이방과(李芳果)와 아우 이화(李和)의 사위인 이제(李濟), 심복인 황희석(黃希碩)과 조규(趙珪) 등을 대궐로 보내 조준 등의 무고함을 밝히게 했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공양왕은 정국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라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 정국은 정몽주와 이성계의 전쟁으로 번졌다. 하지만 힘없는 선비 정몽주가 당대의 장군 이성계를 당해낼 수 있을 것인가. 조정 안팎의 사람들은 사태의 귀추를 주시했다. 공양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의 정황을 두고 <고려사절요> 공양왕 4년 4월조는 이렇게 썼다.
- 정몽주가 우리 태조(이성계)의 위엄과 덕이 날로 성해짐에 조정과 민간에서 마음을 그곳으로 돌리자 이를 꺼려하였다. 조준 ․ 정도전 ․ 남은 등이 태조를 추대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태조의 병이 위독한 것을 이용하여 도모코자 하였다. 이에 대간(臺諫)을 사주하여 조준 ․ 정도전 ․ 남은 및 평소에 태조에게 마음을 돌린 사람 5~6명을 탄핵하여 죽이고 태조까지 미치게 하려고 하였다. -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나 모두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에 지어진 역사책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입장에서 고려 말의 정세를 그리지 않았겠는가.
어쨌든, 그동안 이성계는 황주에서 개경 인근 벽란도까지 와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해 병석에 누워 있었다. 이방원이 달려와 지금 개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자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끝에 가서 이렇게 덧붙였다.
“정몽주를 진작 처단했어야 하는데 일이 결국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 자를 그냥 내버려두니까 우리 집안을 아주 몰살시키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이성계가 이렇게 대꾸했다.
“죽고 사는 것은 각자의 명(命)이 있으니, 다만 순리대로 받아들 일 뿐이다.”
그때까지는 이성계도 정몽주의 정치적 비중을 생각해서 그에게 손을 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성계가 가까스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내가 말을 탈 수 없으니 가마를 가져오너라.”
이성계는 그날 밤 네 명이 메는 가마를 타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4월 3일의 일이었다. 정몽주가 그 소식을 들은 것은 그 이튿날이었다. 아아,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가.
운명의 날 4월 4일이 밝았다.
자남산 기슭 정몽주의 집. 그날 아침에 정몽주는 조상들의 신주에 배례하고 나서 부인 경주 이씨와 종성(宗誠) ․ 종본(宗本) 두 아들을 불러 앉히고 입을 열었다.
“너희 형제는 잘 들어라. 지금 나라 형편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너희도 잘 알 것이다. 이 아비는 이제 모든 것을 나라를 위해 바치고자 한다. 쓰러져가는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다. 혹시 내게 불행한 일이 닥치더라도 너무 놀라지 말고 너희가 잘 수습하기 바란다. 이것은 나의 유언이다. 내가 죽거든 내 묘비에 고려 수문하시중이란 관직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쓰지 말기 바란다. 잘 알아들었느냐?”
그러고 나서 정몽주는 이렇게 덧붙였다.
“혹시 내가 죽더라도 그 일은 내 한 몸에 그칠 것이다. 너희는 혹시 새 조정에서 벼슬을 주거든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서 백성들을 위해 일 해라. 알겠느냐?”
부인과 두 아들은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정몽주의 유언을 들었다.
낮에 정몽주를 따르는 변중량(卞仲良)이 찾아와 이방원 일당의 음모를 알리고 피신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미 사세(事勢)가 기운 것을 절감했다. 내가 이제 여기서 어디로 피할 것인가. 한때의 안전을 위해 피신한다 해도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먼 뒷날 역사는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에 떳떳해야 한다. 후손들을 위해 바른 길을 가야 한다. 이 일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정몽주는 나라를 위해 한 목숨을 바칠 결심을 굳혔다.
그러고 나서 그날 오후에 정몽주는 평생을 따라다닌 시종 우보(牛步)와 녹사(綠事) 김경조(金慶祚)를 불러 외출할 차비를 갖추게 했다.
“대감마님. 어디로 행차하실 작정이십니까?”
우보가 말을 대령하며 물었다.
“이 시중의 집으로 가자.”
“이, 이성계 시중의 집으로요?”
김경조가 놀라며 물었다. 정몽주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가자.”
“대감마님. 이 시중의 집엔 가시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소인이 듣기에 그 아들 방원이 무뢰배를 모아 대감을 해치려 한다는데 어찌 적당(敵黨)의 소굴로 들어가시겠다는 말씀인지 요?”
“허허허… 범을 잡으려면 범굴에 들어가야 않겠느냐? 너희는 이 러쿵저러쿵 여러 말 할 것 없이 나를 따르도록 하라!”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그 무렵 이성계의 집 사랑채에서는 이방원과 그의 수하들이 모여 일을 꾸미고 있었다. 방원이 조영규(趙英珪)에게 말했다.
“우리 가문이 조정에 공로가 많은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소인배의 모함을 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우리가 먼저 나서지 않고 이렇게 당하고만 있다면 저 흉악한 무리는 반드시 우리 문중에 대하여 악평을 뒤집어씌울 것이니, 뒷세상에서 누가 능히 이 사실을 알겠는가? 그대들 장사(壯士) 가운데 아무도 우리 가문을 위해 힘 쓸 사람이 없는가?”
그러자 조영규가 대답했다.
“감히 공의 명령에 따르지 않겠습니까?”
조영규는 조영무(趙英茂)· 고여(高呂)· 이부(李敷) ․ 조평(趙評) 등과 더불어 정몽주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은 정몽주가 귀가하는 길에 선지교(選地橋)에서 암살한다는 것이었다.
이성계의 집을 찾아가자 이성계는 자리에 누운 채로 정몽주를 맞았다.
“정 공이 웬일이오? 우리 집까지 다 왕림해주시고?”
이성계가 그대로 누운 채 입을 열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문병차 찾아뵈었습니다.”
“으흠! 국사에 바쁘실 텐데도… 어흠!”
이성계는 계속 말을 비비 꼬았다.
“어서 쾌차하셔서 조정에 나오셔야지요?”
“글쎄올시다. 늙은 몸이라서 쉬 나을까 모르겠소이다. 어흠!”
정몽주는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주고받을 말도 없었고, 또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몽주는 이성계의 문병을 마치고 그의 집을 나섰다. 이성계의 집 대문을 떠나 얼마 가지 않았는데 말 탄 무사 서너 명이 길을 앞질러갔다.
“아니, 저런 고얀 놈들을 봤나!”
녹사 김경조가 노해서 소리쳤다. 재상의 앞길을 가로질러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례한 짓이었다.
“그냥 둬라! 갈 길이나 계속 가자.”
정몽주는 그래도 기분이 언짢아 조금 가다가 주막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내 아무래도 술을 한 잔 마시고 가야겠구나.”
주막집에 들어가서 술과 안주를 시켜 김경조와 더불어 한 잔씩 마셨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말에 올랐다. 사방에 어둑어둑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선지교에 올라섰을 때였다. 갑자기 다리 밑에서 웬 사내 하나가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곧 이어 다리 양편으로 저마다 손에 무기를 잡은 괴한들이 나타나 앞뒤에서 길을 막았다. 정몽주가 다리 밑에서 튀어나온 자를 보니 조영규였다.
“너는 조영규가 아니냐?”
위기를 감지한 우보가 호신용으로 허리에 찬 장검을 빼들었다. 그러나 우보는 뒤에서 달려온 이부와 조평이 휘두른 칼에 맞아 쓰러졌다. 녹사 김경조도 그들의 칼질에 이내 쓰러졌다.
조영규가 정몽주에게 달려들어 철퇴를 휘둘렀다. 정몽주가 고개를 숙여 피하자 철퇴가 말머리를 쳤다. 말이 놀라 히히힝!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번쩍 들었다. 그 바람에 정몽주가 말에서 떨어졌다. 그 다음 순간 고여가 덤벼들어 정몽주에게 칼을 휘둘렀다.
정몽주는 그렇게 비명에 갔다. 그것이 500년 고려사의 최후를 비장하게 장식한 비극의 장면이었다.
일세의 충신 정몽주는 그렇게 갔지만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남았다. 그는 한 번 죽음으로써 우리 역사에 불멸의 이름을 남겼던 것이다.
그때 정몽주가 흘린 피가 선지교의 교각을 붉게 물들였다. 그 뒤 선지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올라 정몽주의 붉은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선지교에서 선죽교(善竹橋)로 바뀌어졌다.
정몽주를 암살한 조영무가 돌아와서 이방원에게 보고하자 방원은 또 아비 이성계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때 이성계가 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방원을 꾸짖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느냐?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그 자식이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자 방원이 이렇게 대답했다.
“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안을 멸문하려고 하는데, 우리라고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오히려 효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결국 일은 다 끝난 것. 그 이튿날인 4월 5일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심복 황희석을 보내 이렇게 보고토록 했다.
“정몽주가 대간(臺諫)을 꾀어 여러 충량(忠良)을 모함하기에 처단하였습니다.”
공양왕이 이미 허수아비 임금인지라 이렇다 저렇다 뭐라고 말할 형편이 아니었다. 고려조는 그렇게 기울어갔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역적’으로 몰린 정몽주의 주검은 목이 잘려 개경의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그러나 참혹하게 모살(謀殺)당한 정몽주의 시신은 방치되다가 우현보(禹玄寶)와 천마산의 중 김석(金釋) 등에 의해 수습되어 염습한 뒤 개경 인근 해풍 땅에 가매장되었다가 뒷날 경기도 용인으로 이장되었다.
공양왕 4년(1392년) 6월. 최영(崔瑩)에 이어 마지막 기둥인 정몽주마저 참살당하고 천하가 이성계 일파의 손안으로 들어가자 공양왕은 국사고 뭐고 자신의 목숨부터 건져야 할 위기를 절감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만고에 없던 국왕과 신하의 동맹 제의였다. 그때 공양왕이 만든 교서는 이런 내용이다.
- 경(이성계)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경의 공덕을 내가 어찌 잊으랴. 황천후토(皇天后土)가 위에 있고 곁에 있으니 세세자손이 서로 해를 끼침이 없으리라. 내가 경에게 빚진 것이 많아서 이와 같이 맹약하노라. -
고금에 없던 동맹이요 맹약문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 맹약문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등극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하니 1392년 7월 17일이었다. 그때 태조 이성계의 나이 58세.
이로써 태조 왕건(王建)이 창업한 고려조는 34대 474년 만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정몽주를 모살한 주인공이 바로 이성계를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건국 세력이었다. 그들은 <태조실록> 태조 원년 12월 임술 조에서 정몽주를 이렇게 ‘간신’이라고 폄훼했다.
- 간신 정몽주는 전하(이성계)의 비호 덕분에 총재(冢宰)가 되었음에도 손수 나라의 정권을 잡고서는 왕씨의 뜻에 맞추어 대간(臺諫)을 사주하며 신(조준)과 정도전 ․ 남은 등이 전하의 심복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틈을 이용하여 계책을 부리고 죄를 꾸며 법강(法綱)에 끌어넣어 먼저 내쫓은 뒤, 전하를 도모하려고 하였습니다. -
하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정국도 바뀌었다. 또한 정몽주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다.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숙청되고,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정국이 변화하였던 것이다.
태종(이방원)은 즉위 직후 정권의 안정을 위해 산림의 선비들을 등용하고, 여러 정치 세력을 포용하였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정몽주에 대한 평가도 점차 충의와 절의지사로 바뀌게 된다. 비록 나라는 바뀌었지만 왕실이 신하들의 충성심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모살한 전조(前朝)의 충신도 돋보이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태종실록> 태종 원년 1월 갑술 조의 기록이다.
- 삼가 살펴보건대 전조(前朝)의 시중인 정몽주는 본래 한미한 선비로 오로지 태상왕(太上王 : 이성계)이 천발(薦拔)한 은혜를 입어 대배(大拜)에 이르렀으니 그 마음은 어찌 태상왕에게 후히 갚으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재주와 식견이 밝았으니 어찌 천명과 인심이 돌아가는 바를 알지 못했겠고, 어찌 왕씨의 위태하고 망해가는 형세를 알지 못했겠으며, 어찌 자신의 몸을 보존함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섬기던 곳에 마음을 오로지하고 그 절조를 변치 않아 목숨을 잃는데 이르렀으니 이것은 이른바 큰 절개에 임해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후세 사람들을 권면하소서. -
나중에 편찬한 <고려사> ‘열전’에서 그들은 정몽주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이 기사는 전과 비교하면 훨씬 공정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정몽주. 자는 달가, 영일인이다. 지주사 정습명의 후손이다.
…하늘로부터 받은 지고(至高)함이 호매(豪邁)하고 절륜(絶倫)하여 충효의 큰 절개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않았고 성리학을 궁구함에는 깊이 얻은 바가 있어 태조(이성계)가 평소 기중(器重)하게 여겨 매번 전쟁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그와 함께 갔고,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때는 나라에 변고가 많아 기무(機務)가 번거롭고 많았는데도 몽주는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심을 결단하는데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도 좌우에 응답을 얻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시속(時俗)이 상제(喪祭)에서 오로지 불문(佛門)의 법을 숭상함에 처음으로 사서(士庶)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모방하여 가묘(家廟)를 세우고 선사(先祀)를 받들게 하였다.
…또 금곡(金穀)을 출납하는 도평의사사가 백첩(白牒)을 시행하여 일에 외람됨이 많아지자 비로소 경력 ․ 도사를 설치하여 출남을 기록하게 하였다. 또 도성 안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술(儒術)을 일으켰다.
그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함을 진휼하고, 수참(水站)을 세워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하니 이 모두는 그가 계획한 것이다. -
개성 선죽교 위에서 붉은 피를 뿌리고 56세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친 포은 정몽주의 묘소와 사당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있다. 모현(慕賢)과 능원(陵院)은 정몽주의 충성과 절의를 추모하는 한편, 그의 산소가 있음으로써 생긴 지명이다.
묘소 경내 오른쪽으로 약간 낮은 언덕에는 조선조 세종 때의 명신 이석형(李石亨)의 묘가 있다. 이석형은 연안 이씨이다. 묘소 안내문에는 정몽주가 이곳에 묻히게 된 사연이 이렇게 적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선생이 순절하신 뒤 풍덕군에 묘를 썼다가 고향인 영천으로 천묘(遷墓)할 때 면례(緬禮) 행렬이 용인시 수지읍 경계에 이르자 앞에 세웠던 명정(銘旌)이 바람에 날려 이곳 현 묘소 위치에 떨어져 안장했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와 합장한 묘소 앞의 비석에는,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묘소는 경기도 지방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덕(正德) 12년에 태학생(太學生), 즉 성균관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몽주를 공자(孔子)의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고 나무하는 사람들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돌을 세워 경계를 지었으며, 조선왕조에서 내린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적지 않은 것은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선생의 뜻을 받든 것이라고 새겨져 있다. 정덕 12년은 조선 중종 12년(1517년)이다.
선조(宣祖) 때 개성에 있는 정몽주의 옛 집터에 서원(書院)을 짓고 임금의 친필인 숭양서원(崧陽書院) 현판을 내렸을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신하들이 정몽주의 위패(位牌)에 무엇이라고 쓰면 좋겠느냐고 묻자 선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인데 어찌 우리 조정의 관작(官爵)을 받을 수 있겠소? 일찍이 영의정으로 추증했다고 하지만 포은선생(圃隱先生)이라고만 쓰도록 하오.”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이 뒷날 왕위에 오른 뒤 양심의 가책 때문인지 정몽주에게 영의정 벼슬과 문충공이란 시호를 추증했다. 하지만 만고충신의 후손들은 조선왕조 500년 내내 그 벼슬과 공신 호를 쓰지 않았다.
<아세아문예> 201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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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정몽주의 생애를 통하여, 다시 한 번 절개와 충절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글쎄요..이런씩의 해석은 자제을 했으면 합니다
이성계 vs 정몽주 라는 해석을 할 정도로 역사 기록에서 정몽주는 일정기간에선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정도전의 유배, 이성계의 낙마로 인한 공백. 정도전과 조준, 남은을 제거 해야 한다는 탄핵상소문이 올라와 있었고.
공양왕이 주저하는 기간에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합니다..
한마디로 정몽주의 과장된평가는 상대적으로 정도전을 깎아 내리는 의도를 밑바탕에 깔려 있죠..
정몽주의 과장된평가가 정도전을 깎아내리는 의도가 아니라고 해도..고정관념속엔 정몽주 와 정도전의 비교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쿠테타에 대한 비하가 있으니..평가를 하더라도..조심스럽게 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