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산 3085안타의 ‘안타제조기’. 4살 때 화상후유증으로 네째, 새끼 손가락이 붙어버리게 된 오른손과
원폭피해자라는 신체적 어려움과 함께 귀화하지 않고 재일 한국인으로 활동하며 받았던 차별이라는 정신적인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정상에 선 의지의
인물. 1959년 도에이에 입단, 데뷔 첫 해 신인왕 수상. (.275, 13홈런 115안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공을 쳐내는 ‘광각타법’의
대명사로 1974년까지 수위타자 7회, 최고출루율 9회 차지. 1976년
요미우리로 이적, 왕정치와 ‘O-H포’로 활약. 1980년 통산 3000안타
기록. 1959~1981년 통산 9666타수(역대 2위), 3085안타(1위), 504홈런, 1676타점(4위), .319(3위), 319도루. 시즌 통산 타율 3할 이상 16회, 20년 연속 시즌 100안타 이상,
16년 연속 시즌 두 자리 수 홈런과 같은 일본 기록들을 보유하여 통산 타율 3할-500홈런-300도루를 달성한 유일한 선수가 됨. (메이저리그의 윌리 메이스와 장훈, 두 명만 달성) 손가락 장애 때문에 수비는 약했음.
세기의 홈런왕. 일본 태생으로 대만 국적 소유. 고시엔 우승 투수로 1959년 요미우리에 입단하였으나 바로 타자로
전향. ‘외다리 타법’을 시행한 1962년부터 성적이 급상승, 1962년부터 은퇴하는 1980년까지 매 시즌 30홈런 이상을 기록함. (일본기록) 1964년 55홈런으로
일본기록을 세우고, 1973, 1974년에는 2년 연속 타격 3관왕에 오름. 1977년 9월 3일, 756홈런으로 행크 아론의 홈런 세계기록 경신. 리그 MVP 9회, 수위타자 5회, 홈런왕 15회, 타점왕 13회, 베스트나인 18년 연속 수상. 1959~1980년 통산 9250타수(역대 4위), 1967득점(1위), 2786안타(3위), 868홈런(1위), 2170타점(1위), 볼넷 2390(1위), 고의사구
427(1위), 출루율 .446(1위), 장타율 .634(1위),타율 .301. 장훈과는 달리
당겨치기를 많이하여 타구의 절반이상이 오른쪽으로 침. 수비력은 타력과 비견될 정도로 뛰어났음.
63. 카게야마 카즈오 (蔭山和夫) : 3루수, 등장명 <카게 카즈미 (鹿毛和美)> 와세다 대학에서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1950년
난카이에 입단, 1951년 .315, 97득점으로 신인왕
수상. 탁월한 수비력과 타력으로 입단과 동시에 주전 3루수로
활약. 은퇴 후 츠루오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명참모 역할을 하다
1965년 말 츠루오카 감독에 이어 감독직을 맡았으나 나흘만에 급사하여 최단명 감독이 됨. 3시즌
연속 리그 최다 3루타, 경기 최다 3루타 (3개, 일본기록), 경기 최다 루타 (17), 연속타석 최다 루타 (7타석, 21) 기록 보유.
64. 고토 오사무 (後藤修) : 투수
야구계의 ‘집시’. 프로 활동 11년 동안 소속팀을 일곱 번이나 바꾼 선수. (일본프로야구 최다기록, 쇼치쿠-다이요-도에이-다이에이-요미우리-긴테츠-난카이-니시테츠) 소속팀을 바꿀 때마다 모두 입단테스트를 거쳤으면서도 계약교섭에 능해 매 번 연봉이 올랐음. 통산 성적 169경기 18승 31패, 방어율 3.81. <주: 쇼치쿠-다이요의 경우는 쇼치쿠가 시즌 3할 승률이 안돼 당시 협약에 의해 해산, 다이요에 합병된 케이스>
유일한 양 리그 수위타자.
1959년 주니치에 포수로 입단했으나 바로 1루수로 전향.
1964, 1965년수위타자 타이틀을 획득한 후 1970년 롯데로 이적, 1971년 수위타자에 오름. 양 리그 12개팀을 전부를 상대로 홈런을 쳐낸 최초의 선수. (교류전이 생기기
전까진 세 명만이 달성) 18년 통산 .287, 2057안타, 1189타점, 367홈런.
연투의 대명사. 사회인
팀을 거쳐 1961년 주니치에 입단, 데뷔 첫해 69경기 등판 (선발등판 44회) 투구이닝 429 1/3, 35승
19패 (완투 32회, 완봉 12회), 310탈삼진, 방어율 1.70로 투수 4관왕, 신인왕에 사와무라상까지 수상. 연투를 거듭하는 곤도를 가리켜 ‘곤도, 곤도, 비, 곤도’라는 유행어가 생겨났음. 이듬해인 1962년에도 연투를 계속하여 61경기 등판, 투구이닝 362 1/3, 30승
17패, 212탈삼진, 방어율 2.33을 기록하나, 혹사로 인해
1963년 10승, 1964년 6승으로 성적이 급락. 1965년부터 타자로 전향하지만 결국 1968년 투수로 복귀 후 바로 은퇴. 5시즌 통산 82승 60패, 667탈삼진, 방어율 2.69.
일본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1962년
난카이에 입단, 1964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산하 싱글A팀
프레스노로 야구유학. 당초 3-4개월 예정이었지만, 뛰어난 성적을 거두자 유학 생활을 계속하고, 8월 31일 1군으로 승격됨. (당시
노무라, 히로세, 스기우라등으로 이루어진 난카이의 전력이
충실했기 때문에 귀환요청을 하지 않았음) 9월 1일 뉴욕
메츠전에 일본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등판, 9월 29일에 최초
승리투수가 됨. 데뷔 첫 해 9경기 1승 1세이브, 방어율 1.80이라는 호성적을 거두자 샌프란시시코에선 독단적으로 이듬해 계약을 체결,
분쟁 끝에 1965년 시즌 종료 후 일본으로 복귀하기로 합의. MLB 2년 활동 기간 동안 5승
1패 9세이브, 방어율 3.43 기록. 일본 복귀 후 17년간 103승 82패 30세이브, 방어율 3.64 기록.
양 리그 분리 후 노히트 노런을
3회 (퍼펙트게임 1회 포함) 달성한 유일한 투수. 1965년 프로 첫 승리를 노히트 노런으로
장식한 후 히로시마의 선발 에이스로 활약. 1968년 최우수 방어율상을 수상하고, 1975년에는 시즌 20승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최다승, 최다탈삼진, 최우수 투수상, 리그 MVP, 사와무라상 수상. 이후 어깨 부상으로 내리막길. 15년 통산 131승 138패 3세이브, 1678탈삼진, 방어율 2.88. 주무기는 강속구와 커브.
현역으로 활동하는 메이저리거로는 최초로 일본 프로야구 진출. 1950년 프로입단 후 1958년 볼티모어에서 메이저 승격하고 1963년 주니치로 이적. 3년간
.268, 402안타, 78홈런의 용병으로선 평범한 성적 기록. 요미우리에 특별히 강했고, 번트안타에 능했음. ‘잃어버린 홈런’ (幻のホームラン, 홈런을 쳤으나 인정되지 않은 사례) 을 1회 기록.
70. 야마우치 신이치 (山内新一) : 투수
1968년 드래프트 2위로 요미우리에 입단하여 별다른 성적을 거두지 못하다 1973년 난카이로 이적, ‘노무라 재생공장’에서 20승 투수로 변신. 이후 1984년까지 311경기 연속 선발로 등판. (일본 기록) 현역기간 후반에는 기록을 위해 선발 등판시킨다는 비난을
듣기도 함. 17년 통산 143승 142패, 774탈삼진, 방어율 3.74.
첫댓글 계속 너무나 수고해 주시네요. 개인적으론 여태까지 올린신거 다 공략방으로 옳겨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