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 전나무 숲 속에 봉황이 울었다고 하는 명봉사,
예천읍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지방도를 따라 약 30분 정도 가면
소백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 명봉사(鳴鳳寺)가 나타난다.
명봉사(鳴鳳寺)는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의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헌강왕 원년인 875년에 승려 두운(杜雲)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창건 당시 산속에서 봉황이 울어서 명봉사로 명명했다는 설화가 있다.
그러나 17세기까지의 내력은 전하지 않고, 이후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창한 기록이 있다.
또한 명봉사에는 문종대왕의 태실비가 모셔져 있으며 함께 명봉사 사적비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명봉사(鳴鳳寺) 같은 절집이 아직도 불타지 않고 건재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아니 한국전쟁때 불탄 것을 다시 재건하여 세운것에 대하여 예천군민들의 생각은 '보편적인 대한국인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들게 됩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압잡이가 되어 친일행각에 앞장서온 명봉사와 소속 중들! 다행히도 한국전쟁때 전각이 모두 불타 없어져 법맥이 끊기는가 했는데, 참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나 이제는 새 일주문까지 떡하니 세워놓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끈질긴 생명력이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명봉사 경내 대웅전 옆에는 커다란 비석 두개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입간판을 보면 경북 유형문화재 187호 '문종대왕태실비(文宗大王胎室碑)와 명봉사 사적비(小白山鳴鳳寺事蹟碑)입니다. 문종대왕태실비는 뒷산에 있는 것을 일제강점기에 태실을 도굴하며 비석은 명봉사로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라 헌강왕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무엇하나 특별난것 없던 명봉사(鳴鳳寺)라는 절의 사적비라니 어울리지 않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원래 이 두개의 비석은 모두 뒷산에 있던 것으로, 또 하나는 정조임금 시대에 건립한 '사도세자태실비(思悼世子胎室碑)입니다. 역시 일제강점기에 '사도세자태실'도 도굴한 일제가 옮긴 것입니다.
이때 일제(日帝)는 우리나라 왕가(王家)를 능멸하고, 조선의 민족혼을 없애려고 경복궁을 훼손하는 등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때 일제의 도움으로 명봉사 주지는 비석의 글씨를 깍아내고 '명봉사 사적'을 새겨 넣은 것입니다. 사적비의 글을 쓴 사람은 권상로(權相老)라는 일제시대 손꼽을 수 있는 친일승(親日僧)입니다. 안동권씨인 그는 재빨리 창씨개명하여 '안동상노(安東相老)'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악행(惡行)은 1940년 불교시보에 '승려 지원병에 대하여'라는 글을 올리고, 이곳 저곳 다니며 '중들도 대일본제국을 위해 군대에 지원해야한다'는 요지의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문경 김룡사에서 출가한 그는 지역적으로 명봉사와 관련이 많았습니다. 글씨를 쓴 '고영찬(高永贊)'도 친일파로 안동권씨 문중에서는 '고영찬(高永贊)'이 쓴 비석을 묘하(墓下)에 매몰하기도 하였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비석을 지고있는 귀부(龜趺)는 투박한듯 하며, 대체적으로 도톰한 것이, 일반 중(僧)들의 비석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수(?首)와 비석(碑石)이 한개로 되어있는 일체형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지금은 절마당의 오른쪽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새로 만든 오층석탑이 흰 살색을 빛내는 가운데 높은 축대위에 금당(金堂)이 있습니다. 금당은 무량수전(無量壽殿)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주불(主佛)로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을 협시불로 하였습니다. 어딘가 기록에 '금당에 있는 '대세지보살'만 한국전쟁에 파괴되지않고 남았다,'하였는데 지금 보니 모두 새로 만든 불상입니다. 새 집에, 새 불상, 그래서인지 어느 절에서나 볼 수 있는 안내판하나 없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무량수전(無量壽殿) 앞에서 보니 절마당 가운데 있는 탑과 건너편의 운화루(雲和樓)가 한 선으로 연결된게 건너편 산등성이와 선(線)이 아름답게 맞아 떨어집니다. 최순우 선생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이름의 책으로 소백산 부석사를 이름내었는데, 명봉사 무량수전기둥에 기대서서 보는 경치도 아름답습니다. 앞으로는 운화루 누마루 아래에서 계단을 올라 탑과 함께 무량수전을 보는, 그런 동선을 만들어 봐야 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절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는 '개집'과 절마당을 가로질러 깔려있는 '중국제 맷돌석'의 천박함은 아무래도 지금 이 절을 관리하고 있는 중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절집의 수준과 맞지않는 중(僧)은 스스로 떠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무량수전(無量壽殿) 옆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아직도 페인트냄새가 날 것 같은 건물은 약사전(藥師殿)입니다. 정면 삼칸, 측면 일칸의 맞배지붕의 단정함이 있는 건물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안에는 엊그제 공장에서 나온듯 생생하게 잘 보존되고 있는 약사불이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서 광배(光背)고 뭐고 없습니다. 좌대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앙련(仰蓮)이 새겨진 팔각형의 낡은 좌대를 구해서 앉아 있으나 좌대아래의 중대석은 여태까지 보도듣도 못한 새로운 형식의 돌입니다. 마치 두줄의 염주를 꿴듯한 모습으로 중대석에 흔히 나타나는 문양은 아닙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그런데, 아까 절마당 한쪽에 있는 샘터에서 이런 기둥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기둥위에 앙증맞은 돌거북을 올려 놓았는데, 지금은 약사여래가 올라가 앉아 있습니다. 샘터 돌거북이 약사여래와 동격(同格)입니까? 아니면 약사여래가 샘터 돌거북과 동격(同格)입니까? 아무래도 지금 절을 지키고 있는 중은 품격이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참 저 산위에 있는 '내원암'에도 사진의 것과 거의 같은 수조(水槽-물함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두환씨가 만들어 주었다는 것인데, 명봉사의 저것은 전두환씨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지....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한번 튕겨 보았습니다. 워낙 이 절의 내력이 권력자에게 잘 들러붙었기 때문에......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산신각 앞에 있는 부도입니다. 사실은 부도의 몸돌과 갓만 남아있습니다. 팔각형의 몸돌에는 금강역사가 조각되어 있고, 보이지 않는 다른 쪽에는 문비가 단정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과연 누구의 부도탑이었을까요? 따져 보는 것은 의미없는 일인것 같습니다. 한세상 열심히 도(道)를 닦다가 드디어 열반의 기쁨으로 서방정토로 떠났는데, 남아있는 육신을 오랫동안 부여안고 있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부도는 어느 것이나 '이름을 잃어버린 중의 것'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그럼에도 명봉사를 찾는 이유중의 하나는, 절 오른쪽 언덕을 조금 올라가 있는 '자적선사 탑비'를 보기위해서 입니다. 얼마전 보물 1648호로 지정된 이 탑비는 '예천 명봉사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醴泉 鳴鳳寺 境淸禪院慈寂禪師陵雲塔碑)는 기다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귀부의 아랫 부분은 시멘트에 파묻혀 있는데, 머리가 잘려져나간 귀부는 조각도 뚜렷하지 않아 음침하기 까지 합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고려 태조 24년(941)에 건립되었다고 하지만 국왕이 내려준 비석 치고는 간소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수(?首)는 이수라고 할 수 없고 그냥 '비갓'이라고 해야할 정도로 간소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안내문에 의하면 이 비석에는 '고려 최초의 이두문자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이 문자는 '신라시대 이두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전된 체계를 갖춘 최초의 본격적인 문서라는 점에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비문 전체가 이두문이 아니라 탑비 조성과정에 관하여 기록한 10행(行) 정도의 글에 이두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또 글씨체는 중국 해서의 명필인 '구양순'의 글씨를 집자하였다고 합니다. 글쎄 탁본을 구할 수 있다면 좋은 자료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이런 귀중하다고 하는 문화재를 넣어 놓은 비각(碑閣)이 너무 비좁다는 것입니다. 비석하나 들어가고 그 옆으로 한사람 제대로 돌아볼 수 있는 공간마져 없습니다. 보통 좁다고하는 보호각에서도 이렇게 광각렌즈를 졸여가면서 사진을 찍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도대체 비각좀 널찍하고 시원하게 지으려면 그 비용이 얼마나 더 들어가기에 이렇게 궁색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전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다보면 항상 느끼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 숨쉬고 움직이는 것만 넓은 장소를 필요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숨을 쉬던 안쉬던 상관없이 자신의 크기에 맞는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명봉사 입구, 새로지은 일주문에서 조금 들어선 곳에 안내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글씨가 새겨진 이 바위에 관한 것입니다. 글씨는 있지만 맨눈으로는 읽기 어려운 이 바위글은 '경모궁태실감역각석문(景慕宮胎室監役刻石文)'으로 사도세자 태실건립시 일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이 각석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내용으로 최근 경북도문화재 6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5년 12월 8일 경북 예천
명봉사는 한국전쟁때 불탄 당우들을 지금 열심히 복원해가고 있는 사찰입니다. 과연 일제강점기에 행했던 자기의 죄과를 뉘우치며 그 반성위에 절집을 세우는 것인지는 모르겟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른 절집이 있다면 잘못을 저지른 죄과가 어떤지 보여주는 의미에서 폐사(廢寺)시켜 일벌백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붓다'가 과연 정의(正義)라는 것을 아는 신(神)인지는 두고볼 일이겠습니다.
PS. 명봉사가 있는 계곡은 전나무가 우거진 좋은 계곡으로 예천군민들의 여름철 피서지입니다. 외지 분들도 명봉사를 답사할 때면 절만 생각하지 마시고, 계곡에서 잠시 쉬었다 가는 것으로 계획을 짠다면 좀더 재미있는 답사여행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