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봉낙타
김승희
해인이와 왕인이가
내 등 위에 올라타 앉아 있다.
엄마는 낙타,
목이 말라도 몸이 아파도
뜨거운 모래 위를
무거운 짐을 지고도 걸어가야만 한다.
낙타의 등에는 큰 혹인 육봉(肉峰)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일 동안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지방과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답니다. 이 혹이 하나 있는 것은 단봉낙타라고 하며 두 개 있는 것은 쌍봉낙타라고 합니다.
쌍봉낙타는 단봉낙타보다 힘이 세서 250kg 정도의 짐을 지고도 시속 4km로 하루에 40km를 갈 수 있답니다.
(<엄마랑 아기랑> 1988년 7월호 33~34면)
우울증에 신경질에 죄악망상
파라노이아 증상까지 겹쳤어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가는 것은
내 등 위에 짐 지워진
두 개의 육봉 때문일까.
오, 라후라라고
부처님께서 부르신,
부처님께서 버리신 피의 인연으로
나는 힘센 쌍봉낙타가 되어
뜨거운 사막 속을 가고 있다.
다락처럼 무거워도
야근처럼 피로해도
엄마는 낙타.
쌍봉낙타는 더 힘이 세다.
<달걀 속의 생>(198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비유적, 서정적, 의지적
◆ 표현
* 비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모성애를 형상화하고 있다.
* 콜라쥬 기법을 차용하여 시의 관습을 해체하고 있다.
* 콜라쥬(Collage) → 화면에 종이, 인쇄물 등을 붙여 표현의 의외성을 구현하는
초현실주의의 한 기법이다. 근대 미술에서 화면에 종이, 신문지, 인쇄물, 사진 등을
오려 붙이고, 일부에다가 가필을 하여 작품을 만드는 일로, 광고, 포스터 따위에
많이 활용된다. '붙이기'로 순화해서 쓸 수 있는 말이다.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뜨거운 모래 위 → 어머니가 헤쳐나가야 할 고통의 현실과 세계
* 무거운 짐 →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의 책임
* 잡지의 내용 → 단봉낙타와 쌍봉낙타에 대한 정보를 통해, 이 시대의 엄마들은
쌍봉낙타만큼이나 더 큰 모성애와 책임감이 필요한 상황임을 강조함.
* 잡지의 정보를 시에 삽입한 효과 →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하여 '엄마'라는
존재의 특성과 의미를 독자에게 비유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 죄악망상 → ( = 죄업망상 ) 미소 망상의 하나로, 스스로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
* 파라노이아(편집증) → 심각한 우려나 과도한 두려움 등의 특징이 나타나는
이상심리학적 증상을 일컫는다. 대개 비이성적 사고나 착각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 두 개의 육봉 → 해인이와 왕인이(=자식)
* 라후라 → 십대 제자 중 한 사람이면서, 부처님의 출가 전 출생한 아들이다.
부처님께서 아들의 탄생을 들으시고 "장애가 생겼구나."고 탄식한 데서 '라후라'라는
이름을 가졌다. 일찍부터 출가의 뜻을 품고 계시던 부처님께서는 후계자를 얻음으로써
출가의 조건은 갖추어졌지만, 반면 자식에 대한 애정 때문에 출가의 결심이 무디어질
것을 걱정했던 것일까? 출가하는 데 장애가 생겼다고 말씀하셨고, 그런 중얼거림이
그대로 '라후라'라는 이름으로 되었다.
◆ 제재 : 쌍봉낙타(=모성애)
◆ 화자 :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어머니들의 목소리
◆ 주제 : 모성애의 위대함 예찬, 자식을 위해 사는 어머니의 희생적인 삶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낙타와 같은 엄마의 운명 - 무거운 삶의 무게를 지니고 사는 삶
◆ 2연 : 쌍봉낙타의 뛰어난 힘과 능력 - 잡지에 실린 쌍봉낙타에 대한 정보
◆ 3연 : 엄마로서의 의무감과 모성애 - 죽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삶
◆ 4연 : 자식에 대한 희생과 모성애의 위대함 - 힘을 내며 사는 고된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작품은 자식이라는 짐을 지고 고단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삶을 노래한 시로, 사막을 걸어가는 고단한 낙타의 생리를 통해 자식이라는 짐을 지고 고단하며 희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삶을 노래한 시이다. 어느 날 문득 잡지에 소개된 쌍봉낙타의 이야기를 보면서 화자는 그 모습이 두 자녀를 둔 자신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적 화자인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며 낙타로 표현되고 있다. 낙타는 힘겨운 사막을 지나가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이 시대 우리들의 어머니 또한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도 자신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식의 운명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힘겨움을 사막의 현실로 형상화하고, 그것마저도 이겨내는 모성애의 힘을 찬양하고 있다. <엄마랑 아기랑>이란 잡지의 내용을 콜라쥬하여 쌍봉낙타의 속성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식에 대한 모성애의 위대함과 희생의 강인함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3연에서 '오, 라후라'라는 석가모니의 외침까지도 부정하면서 오히려 어머니의 숭고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연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1연> : 이 시의 화자는 해인이와 왕인이라는 두 아이를 둔 엄마이다. 두 아이의 엄마롯 이들을 등에 태우고 살아가야 하는 삶은, 낙타가 그러하듯이 목이 아무리 말라도 몸이 아무리 아파도 이겨내고, 뜨거운 모래 위를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야만 하는 고통 그 자체이다.
<2연> : 한 잡지에 실린 쌍봉낙타에 대한 생물학적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쌍봉낙타는 수일 동안 먹지 않앋 견딜 수 있는 영양분이 저장된 육봉이 두 개이기 때문에 단봉낙타에 비해 힘이 세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아마 화자는 어느 잡지의 이 구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나 보다. 두 아이의 엄마로서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성애의 힘을 쌍봉낙타의 힘으로 표현하고 있다.
<3연> : 화자는 우울증, 신경질, 죄악망상, 편집증 등 여러 정신적인 한계로 정상적인 삶을 살기가 힘들어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을 이겨내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두 개의 육봉, 즉 해인이와 왕인이라는 두 자녀에 대한 모성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자신이 출가하려 할 때 태어나 자신의 장애물이 되어 라후라라고 불렀던 혈연(아들)을 버리고 출가했지만, 화자는 그 짐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의무감과 그들에 대한 본능적인 사랑으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4연> : 뜨거운 사막 속을 이겨 나가는 힘 센 쌍봉낙타처럼 모성애로 충만한 화자는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겁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아무리 피로하다 할지라도 당당히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쌍봉낙타인 우리의 어머니들의 사랑은 더 힘이 센, 위대한 것이다.
[작가소개]
김승희 Seung Hee Kim시인, 대학교수
출생 : 1952.
소속 : 서강대학교(명예교수)
학력 : 서강대학교 대학원 문학 박사
수상 : 2021년 제36회 만해문학상, 2021년 청마문학상
경력 :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999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작품 ; 도서 76건
김승희 시인은 전남 광주 출생으로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시집 「태양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달걀속의 생」,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빗 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산문집 「33세의 팡새」, 「남자들은 모른다」,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 소월문학상,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첫댓글 쌍봉은 도시락 두 개와 같군요
감사합니다
무공 김낙범 선생님
댓글 주심에 고맙습니다.
싱그런 오월도 여름을 재촉하고
있네요. 건필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