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 서울의 고개-서초구
서낭당고개 (방배동)
서울고등학교에서 방배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낭당고개라 하였다. 고개에 큰 소나무가 있었고, 그 옆에 서낭당이 있었다 하여 서낭당고개라 불리어졌다.
가꿀고개 (방배동)
서초구 방배동의 옛 자연부락인 가꿀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꿀고개라 하였다.
도구머리고개 (방배동)
서초구 방배동의 옛 자연부락인 도구머리로 건너가는 고개를 도구머리고개라 하였다. 도구머리는 도구두(都口頭)라 하기도 하였는데, 옛날 남태령으로부터 한양으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에 있던 마을이름이었다.
뒷굴고개 (방배동)
서초구 방배동의 옛 자연부락인 사복촌의 뒷고개를 뒷굴고개라 하였다.
서랫고개 (방배동)
서초구 방배동에서 반포동의 자연부락인 서래마을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서랫고개라 하였다. 서래마을은 반포동 64번지 서울팔레스호텔 뒤쪽 일대의 마을이었다. 서애(西涯)마을 또는 서릿개마을로도 불리어진다. 지금 이 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주민들이 20호 이상이나 된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르므로 해서 불리어지게 되었으며, 지금 반포동(盤浦洞) 동명도 이 마을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자로 서애(西涯)라는 마을이름은 이웃 매곡동(梅谷洞: 지금의 조달청 일대) 마을사람들이 이 마을이 서쪽 물 가에 있으며 마을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솟아있으므로 불리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서래마을은 원래 반포 한신15차아파트가 있는 자리에서 살던 주민들이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수해를 입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긴 마을이다.
서래마을에는 도당(都堂)이 있었으나 현재는 한신아파트(반포동 산523)가 들어섰다. 반포동 535번지 31, 35호 궁전연립아파트 안에 있는 은행나무고목에서 동제(洞祭)를 지냈었다. 한신아파트 자리는 본래 야산으로 산 마루턱에 수령이 오랜 전나무가 있었으므로 이를 도당이라고 칭했으며, 매년 음력 10월에 동민들이 추렴하여 동제를 지냈다. 지금은 전나무가 말라죽었으므로 궁전연립아파트 안의 은행나무고목에서 동제를 지낸다. 이곳에는 할아버지 신주(神主)를 모셨고 한신15차아파트 경로당에서는 할머니신주를 제사지냈다.
예전에 도당제를 지낼 때면 일단 이 마을에 들어온 사람은 제사가 끝날 때까지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만일 마을 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신주가 발을 묶어놓아 발을 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동제를 지내던 은행나무는 지금 반포동 539번지에 있다. 수령 300년, 높이 20m, 흉고둘레 315㎝로서 서초구 구나무로 지정되어 있다.
성뒤고개 (방배동)
서초구 방배동의 옛 자연부락인 성뒤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를 성뒤고개라 하였다. 성뒤마을과 남태령 사이에 성(城)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망경재望京峴 (양재동)
지하철3호선 양재역 부근을 흔히 말죽거리(馬粥巨里)라고 불렀다. 여기에 조선초기부터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다. 이곳은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전라도 방면으로 가기 위해 한강나루를 건너 대로를 따라 가자면 첫 길목이 되는 곳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사상(私商)들의 상업활동이 활발하던 지역 중 한 곳이었다. 그러니까 양재역은 과천·낙생·수원 그리고 삼남지방을 오가는 사람들이 거치던 곳이었다. 양재역은 서울을 떠나 첫 밤을 자는 지점이며, 지방에서 서울에 드는 마지막 밤을 자는 지점이어서 무척 붐볐다고 한다.
지금은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지형이 변해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손들이 여기에 와서 바라보면 한양이 훤히 보인다는 고개를 넘으면 양재역마을이 나왔다. 이 고개를 글자 그대로 ‘서울을 바라보는 고개’라는 뜻으로 망경재(望京峴)라 하였다.
양재역은 한양 이남 경기도 내의 역(驛)을 통할하던 곳으로 종6품 찰방(察訪)이 배치되었을 만큼 중요한 역이었다. 찰방 아래에는 역장(驛將)·역리(驛吏)·역졸(驛卒)이 있었다. 양재역의 위치는 망경재를 이루고 있던 야산 밑둥의 지명을 ‘말똥구리’라 하였던 것으로 보아 이 일대로 추정된다. 양재역마을은 가고 오는 길손들과 귀한 손님을 마중 나오고 배웅하는 사람들로 꽤나 붐볐다 한다. 수다 떠는 여인을 흔히 ‘양재역 주모’라고 빗대는데, 양재역 주모들이 어찌나 수다스럽고 요염하였던지 한번 말려들면 주머니를 털리게 마련이었다 한다.
이 양재역 부근을 말죽거리라고 부르는 연유는 두가지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조선초기부터 양재역 근처에는 주막이 적지 않아 먼길을 걸어 한양으로 가려는 길손들이 타고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 이곳에서 하룻밤 묵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인조 2년(1624)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피하여 인조가 남도로 피난을 떠날 때 이 양재역을 지나게 되었다. 기갈이 심하던 차에 유생 김이 등이 죽을 쑤어 바치자 갈길이 급한 인조가 말을 탄채로 죽을 먹었기 때문에 말죽거리라 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 보다 이 곳 양재역이 역사상 더욱 기억되어 왔던 것은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연장인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이곳에서 발단되었기 때문이다. 1546년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으로 국권을 좌우하였다. 마침 명종 2년(1547) 9월 어느날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그의 딸을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에 갔는데,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執政)하고 간신 이기(李) 등이 권력을 농락하여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니 이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방이 양재역사의 벽에 붙어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때 이기(李), 정명순(鄭明順) 등이 “이것은 지난번 을사사화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증거이다.”라고 주장하여 봉성군(鳳城君)·송인수(宋麟壽)·이약빙(李若氷) 등을 처형하고 이언적(李彦迪)·권벌(權)·노수신(盧守愼) 등 20여명을 유배하였다. 이로써 선비들이 다시 화를 입게 됨에 이를 정미사화라 하고, 일명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의 옥(獄)’이라고 한다.
이 양재역벽서사건은 집권하고 있던 윤원형(尹元衡)일파가 벽서가 반대파의 소행임이 틀림없다 하여 조정에 남아 있는 반대세력을 대부분 죽이거나 유배시켜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다. 양재역의 벽서는 그것이 정말 역사(驛舍)의 벽에 붙어 있었는지 아니면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실권을 잡고 있던 윤원형일파의 음모로 조작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후세 선비들 간에 ‘양재역벽서’라 하면 정치적 음모나 공작을 뜻하는 말로 통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음모였을 가능성이 짙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양재역 일대에는 그 옛날 양재역 주모는 없으나 강남대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이다.
산꿀고개 (원지동)
서초구 원지동 원터마을에서 산꿀로 넘어가는 고개를 산꿀고개라 하였다. 산꿀은 들판이름인데 원래는 산골로 불리어지다가 세월이 가면서 산꿀로 변한 것이다.
원터마을은 청계산 제1야영장과 청계산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마을로서,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원(院)이 있었기 때문에 원터마을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한다. 원이 있었던 곳은 원지동 400번지 일대로서 1970년의 취락구조개선사업 시행 이전만 해도 석축(石築)이 있었지만 현재는 비닐하우스가 들어섰다. 원터마을은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주민의 일부가 이전하고 그 일대가 현대식 주택지로 바뀌었다.
길마재 (원지동)
서초구 원지동 청계산 제2야영장 정상에는 모양이 길마(짐을 싣기 위해 소의 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는 이름의 고개가 있다. 야영장 오른쪽에 거인의 손자국과 머리자국이 찍혀 있어서 장사바위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으며, 그 옆에는 바위가 넓적하다 하여 넓적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다. 그리고 야영장 북쪽 산을 부엉배라 하는데, 그것은 이 산에 부엉이가 많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 한다.
달래고개 (원지동)
서초구 원지동과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성남시로 통하는 2차선 포장도로 상에 달래고개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삼남으로 통하는 중요한 길이었는데, 달래고개를 넘으면 너더리(板橋)를 거쳐 용인이나 수원으로 갈 수 있었다.
광명고개 (원지동)
서초구 원지동에서 서울대공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광명고개 또는 굉맹이고개라 하였다.
박석고개 (내곡동)
헌릉
서초구 내곡동 헌인마을 서쪽의 헌릉로에 있는 고개를 박석고개라 한다. 그 명칭 유래는 조선시대에 헌인릉(獻仁陵)에 참배하는 왕의 행차에 대비하여 고개에 네모난 돌을 깔아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헌릉(獻陵)은 조선 제3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의 능이며, 헌릉의 오른 쪽에 있는 인릉(仁陵)은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의 능이다. 흔히 헌릉과 인릉을 합쳐서
헌인릉이라 부르는데, 이 두 능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내곡동 산131번지에 위치한 헌릉은 능역의 면적이 411,014평이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의 개국에 공이 컸으나 세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궁궐과 관아를 건설하고 관제(官制) 개혁, 신문고(申聞鼓) 설치, 호패법(號牌法) 실시 등 조선왕조의 기초를 다졌다. 재위 18년만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준 뒤 4년간 상왕(上王)으로 머물다가 세종 4년(1422) 5월 56세에 승하하여 동년 9월 왕후 옆에 봉릉(奉陵)되었다. 태종의 비 원경왕후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딸로 세종을 위시하여 4남 4녀를 낳고 세종 2년(1420)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릉
순조는 정조 14년(1790) 6월에 탄생하여 1800년 7월 왕위에 올랐다. 1834년 11월 재위 34년 45세로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파주교하구후(坡州交河舊後) 장릉국(長陵局) 내에 초장(初葬)하였다가 풍수지리상의 이유로 철종 7년 (1856) 10월 현위치로 이장하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에 즉위하였는데, 정순왕후(貞順王后)가 섭정하고 김조순(金祖順)이 국구(國舅)가 되어
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함으로써 신유박해·을해박해 등 천주교 탄압이 있었고, 홍경래(洪景來)의 난 등 민란(民亂)으로 민심이 불안하였다. 순원왕후 김씨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로 정조 13년(1789) 5월 탄생하여 철종 8년(1857) 8월 세상을 떠나 동년 12월 인릉에 봉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