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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말이지 힘든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순명의 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하라시니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하게 접는다는 것, 분명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는 것, 타인의 생각과 계획에 내 삶을 종속시킨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그러한 정황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참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 장상들도 회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때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 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굳이 장상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부탁하기에 앞서, 수도자들은 미리 장상의 괴로움을 파악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장님,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관구장님, 어디 힘든 자리로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집회서와 바오로 사도가 건네는 권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 3,19~21)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성가정의 핵심은 각자의 확고한 사명 인식에 달렸다>
복음: 루카 2,41-52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성가정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성인식이 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모습만 보면 일치하는 가족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부모 말을 안 듣고 성전에 남아있었고 성모님과 요셉은 아들이 자신들과 함께하지 않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발견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거룩한 가정이라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로 각자 다른 확고한 사명의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 ‘미스터 앤 미세스 스미스’를 떠올려 봅시다. 이 영화는 일상에 갇히고 권태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하지만 부부가 공동의 사명을 발견하고 함께 외부의 어려움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가 회복됩니다. 이는 가족이 각자의 욕망을 넘어선 공동의 목표를 발견할 때 비로소 살아난다는 진리를 반영합니다. 공공의 적이 생기면 싸우다가도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 가족의 공통된 목적이 무엇일까요?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모두가 천당 가는 게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 가운데서도 가족이 서로 분열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가 가진 ‘욕망’ 때문입니다.
영화 ‘17 어게인’은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묵상해보게 합니다. 고등학교 때 유망한 농구선수였던 남자는 여자 친구의 임신으로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당장 결혼하고 아이를 키워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년이 되고 회사에서는 능력이 없어 명퇴하고 아내는 이혼하자고 합니다. 자녀들도 무능한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깨어보니 다시 17살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운동 잘하고 인기 있는 학생이 됩니다.
주인공은 학교에서 자기 딸과 아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각자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대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녀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자신이 얼마나 소홀했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에 대한 탓을 가족에게 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다시 농구로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아내를 선택해야 할 것인가의 상황에서 그는 주저 없이 아내를 다시 택합니다.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다른 욕망이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게 가정은 다시 정상화됩니다.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사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사명을, 성모님은 이 사건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묵상해야 하는 사명을,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침묵하고 순응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각자 다른 사명이지만, 같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명이기에 가족은 하나가 됩니다. 예수님은 다시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모님은 “아버지와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지 아니?”라며 남편을 앞에 둡니다. 요셉 성인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사명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기도’라고 합니다. 기도는 나의 청을 알리는 시간만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각자에게 주어지는 사명이 가족을 하나로 묶어줍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아버지, 어머니, 자녀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절대 하나인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서로에게 불만만 쌓여갈 것입니다.
존과 아일린 크롤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엑스트라오디너리 메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세 자녀 중 두 자녀가 폼페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10대 초반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습니다. 존은 절망으로 일에만 전념합니다. 아일린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 싫습니다. 둘은 한참을 싸웁니다. 그러다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장 해야 할 일을 깨닫습니다. 어떻게라도 해 보자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치료제를 찾겠다고 합니다. 아내는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그렇게라도 해보라고 합니다. 존은 치료제를 개발하던 사람을 만나 결국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치료제를 개발하게 됩니다. 두 자녀가 완벽히 치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병의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성공했고 이 치료제는 덕분에 전 세계의 모든 폼페병 환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부부의 같은 사명이 있고 각자의 다른 사명이 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 때만 가정에 화목이 있습니다. 함께 오래 바라보기만 한다고 사랑이 커지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명에 각자의 방식대로 깨닫고 참여할 때 그 가정은 그 뜻 안에서 성가정인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항상 서로 간에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한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는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 사목에 중점을 두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에 속한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51-52절)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구하는 대목이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 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콜로새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 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예전에 아는 청년들과 야구장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경기는 흥미로웠고, 역전에 역전을 거쳐 응원하던 팀이 이겨서 너무나 기분 좋은 경기였습니다. 함께했던 청년들도 모두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이렇게 말합니다. “솔직히 뭐가 재미있는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재미있는 경기였는데 왜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일까요?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몰랐고, 그날이 야구를 처음 본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미국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는 미식축구를 저는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관심도 없습니다. 예전에, 교구청에서 생활할 때, 인천교구 초대 교구장님이신 고(故) 나 굴리엘모 주교님과 함께 미식축구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주교님께서는 너무나 신나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위해 친절한 설명도 계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재미가 없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이런 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르면 관심도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주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주님을 모르면 신앙이 재미없고 지루하게만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게 되면 열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잘 모르겠다고 그래서 신앙이 지루하다면서 주님을 멀리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기에 계속 모르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든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고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일행 가운데 있으려니 하면서 하룻길을 간 것입니다. 하루가 지나서 부모는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고,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요? 그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대답을 하십니다.
이 말에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한 자녀를 혼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보통은 가족 모두가 성당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면 성가정이라고 하지만, 더 큰 의미를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이 이룬 가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서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봉사함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서로를 알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과연 성가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서로를 알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봉사하고 있나요?
오늘의 명언: 세상이 몰라주는 죽음이라고 그 삶이 잘못 산 것은 아니다(호라티우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성탄은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태어나시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마리아처럼
하느님 말씀을 잉태하고 출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로운 요셉처럼
하느님 말씀을 내 안에서 조력하며 양육해야 합니다.
이제 성탄은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별로서 이 세사에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하느님은 드러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네 삶은 강생하신 가난한 그리스도가
삶의 궁극적 목표여야 하고
그분을 닮아가는 끝없는 도정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은
빛의 증인,
생명의 운반자,
악을 거슬러 싸우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3,12-21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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