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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이시영선생 년보
개요(1869.12.3 ~ 1953.4.17) 서울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김홍집의 사위. 본관 경주(慶州) 자 성흡(聖翕) 호 성재(省齋) ·시림산인 (始林山人)
활동분야 독립운동, 정치
출생지 서울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1885년 1885년 관직에 나아가
10년간 형조좌랑·홍문관 교리·승정원 부승지·궁내부 수석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85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1886년 가주서(假注書) 1887년 형조좌랑(刑曹佐郞)
1888년 세자익위사익위(世子翊衛司翊衛)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1891년 (고종28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승지(副承旨)에 이어 우승지(右承旨)에 올라
내의원(內醫院) ·상의원(尙衣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하고,
다시 참의내무부사(參議內務府事) ·궁내부(宮內部) 수석참의(首席參議)를 역임.
1896년 장인인 김홍집(金弘集)이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905년 외부교섭국장(外部交涉局長)에 재등용.
1906년 평남 관찰사 1908년 한성(漢城)재판소장 ·법부 민사국장(民事局長) ·고등법원 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자 집안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항일 독립군의 핵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청산리 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류허현[柳河縣]에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신흥 무관 학교, 신흥군관학교)를 설립,
민족 해방을 위한 청년장교 육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독립군양성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시) 이동녕·조완구 등과 함께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를 조직
4월 상하이 임시 정부 수립 후에는 법무와 재무 총장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가,
초대 감찰위원장에 피선. 1933년 임시정부 직제개정 때
국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계속.
1945년 8 ·15광복과 더불어 귀국하였다.
그 후 대한독립촉성회(大韓獨立促成會) 위원장으로 활약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부통령에 당선. 1951년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고,
국정 혼란과 사회 부패상의 책임에 대한 대국민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을 사임
1952년 제2대 대통령선거에 민주국민당 후보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국민장으로 정릉(貞陵) 남쪽에 안장되었다. 1964년 묘소를 현 수유리로 이장.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대한 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장)이 추서되었다.
신흥 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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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답사를 위하여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1910년 7월). 그 뒤 토민의 배척이 심하여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았으나, 1911년 봄에는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것을 목적으로 1911년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등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소장은 이동녕, 교관은 김창환(金昌煥)·남상복(南相復)·이장녕(李章寧)·이세영(李世永) 등이었다. 1911년 4월까지 제1기 졸업생으로 변영태(卞榮泰)·성준용(成駿用)·김련(金鍊) 등 유수한 애국 청년 40여명을 배출하였다. 그런데 삼원보는 교통이 번잡하였기 때문에 국제적 이목을 피하기 위해서도 신흥학교를 인적이 드문 벽지를 택하여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이 모아짐에 따라 통화현(通化縣) 제6구 합니하(哈泥河)로 옮겼다. 광활한 토지를 매수하고 신흥강습소 본관을 세우는 데에는 방대한 경비와 수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는데, 그 경비는 이회영·이시영(李始榮) 등 독립운동가족 6형제 중의 둘째인 이석영(李石榮)의 소유전답 6,000석 토지를 매각한 돈(당시 40만원,현재 약 600억원)으로 충당하였으며, 선생과 학생이 노동을 하여 마침내 거대한 신흥강습소의 본관과 사옥을 준공하였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했다. 교육과정은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각지에서 애국 청장년들이 모여들어 합니하에서는 도저히 전부 수용할 수 없게 됨에 따라 1919년 5월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발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부민단이 개편되어 조직된 한족회 산하의 학교로 발전했다. 신흥중학교 설립 당시 교장은 이세영(李世永), 부교장 양규열(梁圭烈), 학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 이장녕, 교관으로는 본교 졸업생인 박두희(朴斗熙) ·성준용 ·백종렬(白鍾烈) ·오상세(吳祥世) ·원병상(元秉常) 등이었다. 그리고 통화현 쾌대모자(快大帽子), 린장현 토애(臨江縣土崖), 하이룽현(海龍縣) 성수하자(聖水河子)에 분교를 두었다. 교육과정으로는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 과정 등을 두었고, 폐교될 때까지 2,100여 명의 독립군을 배출했다. 이들은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주구배(走拘輩) 주살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다. 3 ·1운동 뒤에는 지청천(池靑天),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입학지원생도 늘어났다. 그러나 일제의 가중되는 박해와 잇달은 사고로 1920년에 폐교되었다. 신흥강습소부터 1920년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될 때까지의 10년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역사이며 피눈물겨운 시련의 역사였다. 신흥무관학교가 탄생한 다음해부터 2년간의 대흉작, 윤치국(尹致國)이라는 학생이 지방색으로 피살된 사건, 없어서는 안될 중견간부 윤기섭 등이 마적에게 납치된 사건 등과,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가고, 이동녕은 노령으로 가는 등 권위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며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인 신흥무관학교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사라질 뻔하였다. 그러나 절망속에서도 윤기섭·김창환·여준(呂準) 등은 굴하지 않는 기백과 인종(忍從)으로 각 촌락을 전전하면서 구걸을 하여 학생들의 굶주림을 달래며 학교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3·1운동이 종식된 다음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특히 만주황야에서 대적 무력항쟁을 서둘렀다. 이때 일본 육군사관학교출신으로 육군중위 지청천(池靑天)·윈난(雲南)사관학교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이곳으로 왔으며, 그들은 청년들에게 인기가 있어 입학지원생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도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일제의 가중되는 박해와 잇달아 발생하는 사고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폐교된 그날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하고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고,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여기에서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동녕 외에 명문거족 경주이씨 6형제인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 서간도 삼원보에 세운 사관학교의 효시로서 1911년부터 1919년까지 3천5백명의 20대 초반의 한국청년을 집중 육성한 애국의 군사학교였다. 뒤에 동교장이 된 임정요인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는 곧 우리 민족이 군인정신을 길러낸 최초의 사관집단 육성소로서 그 정신이 곧 애국애족의 효시요 요람인 것이다. 이처럼 이동녕·이시영으로 이어지는 사관학교의 역대 교장출신들은 무장독립전쟁론을 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서 40년을 죽마고우로 뒷날 대한광복군 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함께 수립, 정성스럽게 민족을 이끌어 갔다.
경학사
부민단
비상국민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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