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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7일 주일 [(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수도회] 주님을 환대하는 제자의 좋은 몫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창세 18,1-10ㄴ
○ 제2독서 콜로 1,24-28
† 복음 루카 10,38-42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이며 농민 주일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집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드는 환대의
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형제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섬기고 있습니까? 이 시대의 가난한 이들이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시중드는 일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 오늘의 묵상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필요한 덕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신들이 이집트에서 이방인이며 노예로
살았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신앙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을 방문하십니다.
마르타는 음식을 잘 준비해서 예수님께 맛있게 대접하려고 했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손님을 맞아들이고 가장 잘 대접하는 것은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첫 번째 자세는 바로 듣는 것입니다. 손님의
뜻을 먼저 듣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차리는 것은 대접이 아니라 자기
과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접대는
자신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변화되기를 바라시는 그분을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삶의 공간을 ‘조금’ 내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그분의 가치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삶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우리가 이웃이
되어 주고 봉사해야 할 이들이 보입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노인이든,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든, 삶의 의미를 상실한 노숙자든 모두
다 우리가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이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초대요
부르심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제1독서
"나리,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8,1-10ㄴ
제2독서
"과거의 모든 시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이제는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 1,24-28
복음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오늘 새벽, 성당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참 좋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성당, 자그마한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
속에서의 주님과 만남은 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이 자리에 계속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그런데 기도를 마칠 즈음에
9월부터 있을 일정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9월부터는 정말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성지의 일도 만만치가 않지만,
신학교에서의 강의와 성지에서 있을 토요특강 그리고 이미 많이 들어온
외부 특강과 라디오 방송까지 정신없는 일정이 제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또한 써야 할 글들도 많아서 과연 이 모든 것들을 다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몰려듭니다. 그래서 순례객이 그래도 적어서 조금
여유로움을 지내고 있는 7월과 8월이 계속되었으면 싶더군요.
바로 그 순간 모기한테 물린 것입니다. 제가 있는 곳이 바닷가이다 보니
모기가 다른 지역의 모기와 달리 조금 셉니다. 특히 한번 물리면 통통
붓기 때문에 가렵기도 하지만 벌써 한 가득인 모기한테 물린 상처로
사람들에게 보이기 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곧바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빨리 이 여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에 곧바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방금 전에 한가한
7, 8월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해놓고는, 모기한테 물리자마자 여름이
지나가고 모기가 사라지는 가을이 되길 원하고 있으니까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왔다 갔다 합니다. 즉, 지금의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영원한 마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히 분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보면 더욱 더 마음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작
해야 할 것들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시중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요. 참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마르타이지만, 예수님과는 어떤 행동도 또 말도 함께 나누지 못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처음으로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소중한 대화 시간을 마르타는 동생이 자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평으로 보내버리고 말지요.
복잡한 세상에 맞춰서 복잡하게 살아가는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했으며, 부정적인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던
마리아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여유와 함께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주히 살아가는 내 삶 안에서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시간은 얼마나 있었을까요? 마음이 복잡했던 이유,
걱정이 많았던 이유, 부정적인 불평불만이 가득한 이유는 바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 말씀을 듣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라 질문하는 여행이다(브라이언 그레이저).
마르타와 마리아.
한 번만 과 한 번 더(정완채, ‘완두콩’ 중에서)
"한 번만" 이라는 얘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지 떠올려 보세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도 없이 되뇌는 것이 바로 그 "한 번만"이라는 단어가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게 많이 되뇌던 "한 번만"이라는 얘기는 언제나 거짓말이
되어버리곤 합니다. "이번 한 번만" 이라고 얘기했으면서 다음에 또
힘이 들면 "이번 한 번만"을 내뱉곤 하니까요.
이제는 "한 번만" 이 아닌 "한 번 더" 로 생각을 바꾸어야겠습니다.
거짓말을 하느니 차라리 염치없음을 택하렵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게 되면 "한 번만" 그 사람을 쳐다보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그 사람을 쳐다봐야겠습니다.
"한 번만" 이라고 섣불리 행동하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해보고
행동해야겠습니다.
"한 번만" 그 사람을 사랑하고 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야겠습니다.
저도 정말로 ‘한 번만’이라는 말을 많이 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번 더’라는 표현이 더 멋진 것 같네요.
오늘은 제21회 농민주일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주님을 환대하는 제자의 좋은 몫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루카 10,38-42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Martha and Mary
주님을 환대하는 제자의 좋은 몫
나그네 인생길에서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진다는 것만큼
인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신성을
상실해가고 인간의 존엄성마저 소홀히 여기는 이 시대에는 진심에서
우러나와 하느님을 드러내고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상호간의 환대는
귀한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는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리고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하여 무엇을 중요시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녀야 할 으뜸가는 태도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환대가 아니라 마르타처럼 ‘마음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10,38).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오시어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어 구원의
길로 이끄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실생활에서 우리는 인종과 피부색, 언어, 신분, 학벌, 성격 등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죄 중에 있거나 실수한 사람을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모두를 품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 불법을 저지르는 불쌍한 이들의 잘못을
고발하되 그들 또한 주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다음으로 제자다워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내가 맞아들이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면서 친구나
사업을 위해 만나는 손님으로 맞아들여서는 안 되겠지요. 자신이
맞아들이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 생각한다면 그분을 맞아들이는데
온 마음과 정신을 다 쏟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보지 못한 채 그저 겉모습의 보잘것없는 인간을 보곤 합니다. 주님보다는
나에게 잘해주고 이익을 안겨주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중요시 여기기도
하지요. 그러나 모든 이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보며 그 주님을 환대하고
극진히 모시도록 해야겠지요.
끝으로, 오시는 분을 환대하기 위하여 그분 곁에 머물러야 합니다. 오시는
분과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시선을 두고 귀를
기울이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환대하는 사람의 도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무는 것이고 그분의 생명을 호흡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선택한
좋은 몫은 바로 주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에 여인들이
말씀을 선포하시는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은 종교질서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녀의 차별을 뛰어넘어 주님 곁에 머물러 그분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야말로 그분을 공경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신성을 품고 가장 인간다워지기 위하여 서로를
환대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몫, 곧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필요한 한 가지(10,42)를 지녀야겠지요. 그것은
하느님을 받아들여 차지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삶이야말로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다운 모습임을 상기하는 은총의 날이었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루카 10,40)
사람은 무척 다릅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답니다.
아무리 일란성 쌍둥이라도 생각까지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착각에 빠집니다.
사람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냐고... 어찌 그럴 수 있냐고...
한 자매인 마리아와 마르타도 그랬습니다.
두 사람의 스타일과 성향이 그렇게 다릅니다.
언니 마르타는 활동적이고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이라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책 읽기를 좋아하고 일하는 데는 깡통입니다.
여러분은 마르타 성향이세요?
아니면 마리아 성향이세요?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 성향 다 가지고 있으세요?
가끔 중도형도 있지만 어째든 한쪽이 더 강할 거예요.
어떤 성향이 더 좋은가요?
아마도 보통은 내 치우친 성향에 조금은 불만일 거예요.
마르타형이라면 가끔은 마리아형이 부럽고
마리아형은 가끔은 마르타형이 부럽지요.
그러면서도 가끔은 서로에게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마르타처럼 말이죠.
예수님이 마치 마르타를 나무라고 마리아 편을 드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지만 원래의 의미는 각자의 몫이 다르다는 것이겠지요.
활동 수도자가 있는가하면 관상수도자가 있습니다.
보수적 성향의 사람이 있는가하면 진보적 성향의 사람도 있답니다.
외향적인 사람이 있고 내성적인 사람이 있답니다.
그걸 어쩌겠습니까?
하느님도 뜯어 고칠 수 없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바꾸려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서로 다르게 만드신 것을 억지로 같게 만들려고
헛되이 애쓰지 말고 서로 존중하고 배우고 협력하라는 것이
그분의 뜻이겠지요.
오늘 나와 다른 성향 때문에 혹 갑갑해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나를 보완해 주기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구나 하며
한 번 바라보십시오.
우리 사회가 다름을 축복으로 여길 때
진정한 하느님 나라가 오게되지 않을까요?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기쁘고 자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처럼 모두가 좋은 몫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문제는 좋은 몫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삶이란 귀한 생명과 함께 호흡하는 우리의 소중한 시간입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라고 열매맺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가지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랑의 시간입니다.
흔들리는 신앙을 굳건히 지키게 하는 것은
농민들의 땀방울처럼 정직한 노동의 실천입니다.
가장 구체적인 손길로 생명에 봉사하는 이들이
바로 농민들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마음은 생명을 맛있게 먹이는 마음입니다.
성체성사의 삶에 가장 가까운 삶은 언제나 농민들의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땅의 소출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깊은 울림의 소리를 듣는 농민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고된 농민들의 시간이 더이상 경제적인 논리로 폄하되지 않고
존중받고 존경받는 이 땅의 주역으로 뿌리내리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좋은 몫은 주님과 함께 생명을 가꾸는 삶임을 믿습니다.
하루하루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지를
이 땅위에서 다시 성찰하여 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 10,38-42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
최근에 와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루카복음 10장 42절)며 기도생활, 관상생활 쪽으로 손을 들어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한 동료 사제들과 수도자들을 바라봅니다.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기도생활과 영적 생활, 특히 깊이 있는 묵상과 관상생활에
맛을 들인 분들은 달라도 뭔가가 크게 다릅니다.
관상(觀想)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던 제게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진정한 의미의 관상은 내가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넘어 하느님께서
나를 바라보신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측은지심 가득한 자비의 눈길로 가련하고 죄 많은 나를
바라보는 것을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너무나 감사해서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이 관상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 특히 내 안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현존하시고, 그분께서
나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순간순간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주심을 의식하는 것이 관상이라고 하는 말씀에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애써 의식적으로 기도하려고
발버둥치지 않습니다. 순풍에 돛단배처럼 그저 그분 사랑의 손길에
내 온 존재를 내맡깁니다. 그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며 행복함을 느낍니다. 그분께서 이글거리며 불타는 사랑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에 만족하며 그분만으로 충분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관상의 본질입니다.
그런 관상기도에 맛을 들인 사람은 지나가는 세상 것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습니다. 명예도 높은 자리도, 세상의 부귀영화도 값나가는
보화들도 다 부질없습니다. 그저 주님 현존만으로 충분합니다.
뿐만 아니라 관상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긴밀한 통교의 결과로 동료
인간들과도 잘 지냅니다. 애써 경쟁하려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잘 되면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예의 바르고 균형 잡힌 소통의 결실로 동료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삶이 편안하고 풍요롭습니다. 관상기도가
가져다주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와 반대로 영적생활이나 관상생활로부터 점점 멀어져 아예 담을 쌓고
살아가는 냉담 봉헌생활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의 영적생활과
기도생활은 그저 해치워야할 의무요 요식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쩌면 봉헌생활의 핵심이요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영적생활이
허물어지니 남은 것은 그저 자신의 낡은 육신 그것뿐입니다. 그런
봉헌생활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께 민폐요
모독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한 번 하느님 사랑의 우물가로 나아갈 때입니다.
깊고 맑은 하느님 사랑의 샘 속으로 죄와 냉담함과 갈증으로 얼룩진
내 가난한 두레박을 드리울 때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복음 10장 41절)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6주일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마르타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38-42
개성공단 폐쇄, 사드배치의 원인은 ‘북한’때문이라고 합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하고, 남한을 위협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성공단 폐쇄로 북한에 경제적인 압력을 주려고 합니다.
사드배치로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막으려고 합니다. 북한이 핵실험을
포기할지, 사드가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줄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부의 주장을 들으면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기업 활동이 위축되는 것은 기업에 대한 규제가
심해서라고 합니다. 세계 경제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업들이
신규 사업에 대한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풀면, 세계
경제가 살아나면, 기업들이 사내 보유금을 풀면,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비정규직을 늘리면 경제가 발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들도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잘되면 내 탓이고,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통과
시련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좋은 점들이 있습니다. 지금 나와 우리의
잘못을 말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공공의 적을 만들어서 비판과
불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하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고, 남이
하면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카인은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는 것은 동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을 죽인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시지
않았습니다. 동생에게 탓을 돌리기 전에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으면
좋았습니다. 동생과 대화를 하면 좋았습니다. 문제의 해결은 남을 탓하고,
남을 죽여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운동은 예수님께서 죽으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들은 감옥에 가두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과
풍요를 나누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르타도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식사를 준비하는 것,
예수님을 위해서 집안 정리를 하는 것, 예수님을 위해서 시장을 보는
것도 중요한 몫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수고와 노력을 알아 주셨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작가는 소설을 읽어주는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은 영화를 보아주는 관객이 있어야 합니다. 마르타가
준비한 잔치에 마리아는 독자가 되었고, 관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마리아도 좋은 몫을
택하였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찾아온 손님을 따뜻하게 대하였습니다. 음식을 준비했고,
머물 수 있도록 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천사였던 손님은
아브라함에게 선물을 약속하였습니다. ‘내년 이맘때면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원망하고, 남을 탓하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선지가면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
이라고 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자비의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자비’는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헌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슬픔과 번뇌(煩惱),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삶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자들의 심금(心琴)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신자들의 단체가
인간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모여 성부의
나라를 향한 여정(旅程)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
오늘의 알렐루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욕심의 숲 피할 길 하느님뿐
2016년 다해 7월17일 연중 제16주일
욕심의 숲 피할 길 하느님뿐
조선지도자들이 재산 권력욕의 숲 길러 백성을 일본, 북한에 바쳤어요.
6.25전란 세대가 굶고 일하며 평화와 자유와 먹고 살 세상 희망했고요.
서로 도움 나눔 봉사 협조하는 백성 되자고 간절히 바라며 살았었지요.
허나 정치인들 경영인들이 또 다시 조선지도자들과 같아지고 말았네요.
그러니 뱃속에 권력씨앗 재물씨앗 길러야 산다고들 모두가 생각했지요.
이제 그 씨앗이 자라나 욕심의 숲으로 사회를 만드니 피할 길 하느님뿐.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41~42)”
개미 쳇바퀴 도는 걸 보면 우습지요. 우리가 바로 그렇다는 생각 안
들어요? 이젠 중국 북한 미국 마귀에게 바치지 말고 하느님께 바칠
나라로 키웁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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