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가득한 것
-김정임-
세례를 받은 지 어느새 20여 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성년을 넘어선 것이다. 그러면 이제는 좀 더 어른스러워지고 제대로 살아가는 틀이 잡혀야 하는데 여전히 주님 앞에서는 철없는 아이마냥 버둥거리며 살고 있다.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보다 기도도 안 하고, 봉사도 못하며 어정쩡하게 성당만 오가며 살고 있다. 에고, 한심한 일이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욕심과 쾌락에 의지하는 나약함을 버리고, 주님의 따뜻한 사랑과 배려하는 마음과 나누는 지혜로움으로 나의 영혼을 채워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삶은 왜 내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지….
갑갑한 마음에 눈을 감으니 한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때 성서모임에 열정적이었을 때 만났던, 내 신앙에 커다란 힘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시다. 그분께 들었던 수많은 말씀은 아직도 내게 큰 힘이 되곤 하는데 오늘도 그분의 말씀이 나의 마음을 채워준다.
“내 마음이 작은 그릇이라면 하느님의 사랑은 커다란 항아리라 할 수 있다. 작은 그릇으로 물을 담아 커다란 항아리에 담으려고 애쓰지 말고, 작은 그릇을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항아리에 넣어라. 그러면 작은 그릇에 물이 가득 찰 것이다.”
내 작은 그릇으로 사랑을 담으려고 버둥거리지 말고, 그냥 주님을 믿고 따르며 주님의 사랑에 푹 젖을 수 있도록 나를 주님의 커다란 항아리에 집어넣으라고 하셨다. 애써 내 안의 악함을 없애버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님께 맡기면 우리 주님께서 모두 해주신다고 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오늘은 참 그립다. 내 안에 주님을 담으려 하지 말고, 나를 주님께 온전히 봉헌하라. 그러면 내 안에 주님의 사랑이 충만히 넘치리라.
노동 - 하느님의 뜻
-경규봉 신부-
테살로니카 교우들 가운데에는 일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는 이들이 있었다. 주님을 믿는다는 핑계 하에 노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말미암아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 있었기에 일하기를 거부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는 일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게으른 자들이라고 하며,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바울로는 자신의 모범을 따라 일하기를 권고한다.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자세는 지상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고,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기다림이어야 한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에서 얻을 영원한 기쁨과 행복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세상 것들로부터 만족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세상의 것들을 하찮은 쓰레기처럼 여긴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산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자칫 잘못에 빠질 수 있다.
하느님 나라를 너무 중시한 나머지 세상 삶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마치 영혼을 구속하는 감옥이나 껍데기처럼 생각하고, 현세의 삶을 그림자처럼 생각하여 현세적 삶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도 않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실 때, 좋고 아름답게 만드셨고,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을 잘 다스리며 살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친히 에덴동산을 만드셔서 그 동산에서 사람이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다. 동산에 보기 좋고 맛있는 열매를 맺는 온갖 과일나무를 만드시고 그 열매를 따먹도록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을 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노동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다. 때문에 하느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살며 노동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동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더욱이 하느님 나라는 현세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라, 현세의 삶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육체노동을 하셨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다. 현세의 삶이 중요하며, 현세의 삶 속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충실히 간직하며 보전하는 수도회들은 기도와 더불어 노동에 대하여서도 소중히 생각한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도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곤 한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서 수도회를 유지해 나간다. ‘기도와 일’을 하느님께 나가는 소중한 길로 생각한다.
오늘,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생각하자. 노동은 곧 하느님의 뜻이며, 하느님께서는 노동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도록 하셨음을 생각하자. 나에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것,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충실히 지는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생각하자.................◆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의 현저한 갭(Gap)
-박홍도 신부-
오늘 복음도 월~화요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내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태오 5.8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또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고 마태오15장에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또 오늘 복음 앞 구절 23, 25-26 에서는 정결예식에서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오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를 칠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무덤은 겉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소를 돌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들보다 더 훌륭하며 자기들이 무덤을 꾸며 놓은 의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더 멀어졌고 마음이 더 무디어 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져 얻어 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 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즉시 깨끗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갑자기 쏟아지던날 공소 미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제 차안에는 반주자와 그 딸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던 그 아이가 곧바로 엄마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금방 무섭다고 했는데 엄마를 믿고 엄마품에 안겨 금방 잠이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왜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는지? 왜 그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외적인 것에, 세상의 것에 매여 불안과 위선 속에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본당의 아이처럼 하느님품에 안겨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작년 11월. 어떤 분께서 성지에 나무를 기증해주셨습니다. 워낙 큰 나무이기 때문에 장비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이 장비로 땅을 깊이 파서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는 깜짝 놀랄만한 광경을 보고 말았습니다. 글쎄 그렇게 큰 나무들이 모두 뽑혀있는 것입니다. 혹시 누가 와서 나무를 뽑았나 라는 생각도 했지만, 이렇게 큰 나무를 누가 뽑을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생각이었습니다. 범인은 바로 ‘바람’이었습니다.
갑자기 불은 돌풍으로 인해서 심었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혔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이렇게 큰 나무들이 힘없이 뽑혔을까요? 바로 심은 땅에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기 때문에, 즉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강한 바람에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나무들을 다시 새우고, 쓰러지지 말라고 나무 지지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 지지대는 거의 1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세워져 있답니다. 아직도 뿌리를 완전히 내렸는지 모르니까요.
이 나무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내려야 쓰러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뿌리를 내려야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주님께 뿌리를 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이 세상의 세속적인 것들에 뿌리를 내리려고 하다 보니, 점점 주님을 떠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만약 앞선 성지의 큰 나무들이, “나는 크니까 굳이 이렇게 답답한 땅에 묻혀 있을 필요 없어.” 하면서 땅에 뿌리 내리는 것을 거부한다면 어떨까요? 아무리 큰 나무라고 할지라도, 이 나무는 결국 뿌리가 말라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이와 똑같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대단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랑하고 내세운다면, 그래서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속은 각종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마치 나무뿌리가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말라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들을 향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지요.
“불행하여라~~~”
나는 과연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까요? 정말로 주님이라는 좋은 땅에 뿌리를 내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그래서 세상의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고 있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나무를 사랑합시다.
빠다킹신부
예언자의 어려움
-김광태 신부-
구약의 예언자들이 회복시키려 하던 이스라엘의 정신은 이집트를 탈출하고 광야를 방황하던 시절에 형성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 외에는 소유하는 것을 포기하고 함께 사는 사람 모두를 소중히 여기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던 야훼 하느님을 따르던 광야의 삶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완전히 바뀝니다. 더 많이 가지려 하다보니 다른 이들의 소유마저 빼앗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추종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던 삶이, 하느님을 잊고 자기 왕국을 건설하는 일과 물질 중심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런 삶을 용납할 수 없었던 예언자들은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예언자들의 목소리가 거슬리자, 그들을 제거하여 자기들의 행실을 합리화했습니다. 예수님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듯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나 본능이 동일하기 때문에 어쩌면 예언자는 영원히 반대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결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마태 23,37).
욕하면서 닮는다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김보경 수녀-
◆한밤중에 벨소리가 울리더니 술 취한 여인의 푸념이 쏟아진다.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난날 자신을 미워한 아버지가 밉고 그런 아버지를 닮은 자신이 또 밉다고 울먹인다. 여인은 결혼할 때 양가가 마련해 준 전세금과 혼수 가구를 지난 15년간 이 일 저 일 전전하느라고 야금야금 다 까먹고 친정 돈을 빌려 낡은 집에 월세로 살고 있다. 남들은 결혼 햇수가 늘면서 재산도 는다는데 여인은 오히려 그 알량한 재산마저 점점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그들 부부는 한 가지 일을 지긋하게 하지 못하고 힘들면 그만두기를 거듭하여 지금은 조그만 가게를 하면서 양가에게서 한 푼 두 푼 받아서 간신히 살고 있다. 둘 다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곤란을 견디는 끈기와 자존심을 수그릴 겸손이 부족하다. 여인의 친정아버지도 그랬다고 한다. 좋은 기술이 있어도 자존심 때문에, 또 힘든 것을 못 견디고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해서 가장 역할을 못하고 궁핍하게 살았다. 반면 다른 형제들은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기보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안정된 가정을 꾸미고 살고 있다. 그런데 여인은 아버지를 ‘욕하면서 닮았다’.
성덕은 악습을 연구하여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거듭 실천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은 ‘좋은 습관’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이 자기 조상의 잘못을 들추어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남의 잘못이나 부족한 점을 밝힘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악습을 쌓느라 정작 좋은 것을 습득하는 성덕 쌓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연중제21주간수요일
-임종욱신부-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알프스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맑은 시냇물에서 하루를 보내던 그 소년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 속에서 예쁜 돌멩이를 줍고 있던 그 소년은 "여기 물 속에 있던 돌멩이의 속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속이 말라 있을까? 아니면 젖어 있을까?" 라는 궁금증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년은 궁금증을 확인하기로 하고서는,
물 속에 있는 돌멩이 중 주먹만한 돌멩이를 건져내었습니다.
그리고는 큰 돌에 던져 반을 쪼개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는 어땠을까요?
그 돌멩이는 완전히 말라있었던 겁니다.
근데, 이 돌맹이가 물속에 있었던 시간은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요?
10년, 20년 아니면 100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 있었을 수도 있겠지요?
어쨌든 돌멩이는 오랫동안 물속에 있었지만 그 물을 한 방울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랑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딱딱하면 그 사랑을 한 방울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겠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푹 잠겨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분명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종종 깨닫지 못할 때가 더러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연극 배우처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위선자로 책망을 받았을까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율법과 규율을 내세워 하느님 뜻보다는 자기들의 생각과 실천이 전적으로 옳고,
또한 그렇게 모든 유대인들이 따라야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예수님께 지탄과 책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수천 가지나 되는 규칙이나 규례를 준수하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고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본질적으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낸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을 모르는, 그래서 마치 눈먼 사람이 길을 안내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나 위험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온갖 율법의 조문들과 규칙들의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 하느님의 자녀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제자로 만드는 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신앙인들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것을 제도화해서 만들어 놓은,
특히 상급자가 자기 편의대로 부리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양 강요하고 괴롭히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기준과 잣대를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필요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어떠한 미사여구의 규칙이나 관례도
하느님 앞에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생각하고 고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질 것입니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 규칙과 규정에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귀한 존재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께로부터 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나이다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옛 시조 한 수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까마귀 검다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은 검은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 하노라.?“
까마귀가 검다고 비웃지 말라는 거지요. 속조차 검지는 않다는 겁니다. 비웃는 백로야말로 겉은 희지만 속은 검으니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노래한 시입니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뜻의 고사성어가 많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겉 다르고 속 다르다는 뜻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이라는 성어가 있는가 하면 입에 꿀이 있고 배에는 칼이 있다는 뜻의 ??구밀복검(口蜜腹劍)?‘도 있습니다. 또 웃으면서 속에는 칼을 감추고 있다는 뜻의 ??소리장도(笑裏藏刀)?‘라는 성어도 있지요. 모두가 겉과 속이 다르니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실 리가 없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단 한 번도 칭찬을 하지 않으시고 매번 꾸지람만 내리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만 미워해!?“하고 속상해 할만한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형식주의적이고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단죄하고 계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마태 23,26-27)
회칠한 무덤이 무엇인지를 알면 오늘 복음의 의미를 좀더 쉽게 알아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는 무덤 안에 회칠을 하였지만 유다인들은 무덤 겉에 회칠을 하였습니다. 유다 지방은 길가에 무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무덤에 닿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특히 유다인들의 3대 명절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순례객들로 거리가 뒤덮이고 비좁은 길을 가다보면 무덤에 닿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지요. 무덤에 몸의 일부가 닿는 것을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몹시 부정타는 일로 여겨서 불결하게 생각하였고 명절 행사에는 참석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민수기 19장에 나옵니다.
?’누구의 주검이든 그것에 몸이 닿는 이는 이레 동안 부정하다.?“(민수19,11)
이러한 부정을 막기 위하여 유다인들은 길가에 있는 무덤에 회칠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칠한 무덤이 멀리서 보면 햇빛에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이 여간 아름답지가 않았습니다. 속에서는 시체가 썩어가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을 하지만 겉은 아름답게만 보였지요. 그래서 겉과 속이 다른 것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대단히 좋지 않은 의미인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맹공을 퍼붓고 계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열심한 신앙인인 척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며 성경의 참된 정신을 훼손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언자들까지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겉과 속이 똑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에게 겉과 속이 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다르면 안 되겠지요. 지금 이 시대는 너무나도 겉만을 중요시하며 살아갑니다. 한 때 이런 가사의 유행가가 있었습니다. 오늘 잠깐 생각해보니 요즘 이 노래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지 여자지~?“
요즈음 이 노래를 부른다면 바보로 취급당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너무나도 포장과 겉모습에만 온 힘을 기울이는 요즈음이지만 또 많은 사람들이 그런 것에서 끝없이 갈증을 느끼며 채워지지 않는 진리에의 갈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내면이 준비되지 않은 화려한 겉모습은 우리를 금방 질리게 할 뿐입니다. 정(情)도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재미가 없지요. 마치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것처럼 처음 잠깐은 맛이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허전할 뿐입니다. 사람의 참된 아름다움은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지요. 겉과 속이 똑같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내면이 알차지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지금 계절은 가을의 문턱을 들어서고 있습니다. 가을은 풍성한 열매가 차곡차곡 쌓이는 결실의 계절이지요. 올 한 해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의 신앙과 인격적인 성숙이 하느님 안에서 얼마나 풍요로운 열매를 맺었는지를 되돌아볼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로 좀 더 나아가고, 또 이웃과 좀 더 친근하게 나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발전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칫 겉모습만 추구하면 우리도 예수님께 회칠한 무덤이라는 꾸지람을 들을 수 있습니다. 겉모습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멋진 신앙인이 주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함께 나누고 싶은 하루입니다.
위선이라는 병의 치유(治癒)
-이수철신부-
아마 인간의 보편적 현상중 하나가 위선일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는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
과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 얼마나 될까요?
누구나 정도의 차이 일뿐 위선이란 병을 지니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위선 역시 하나의 영혼의 질병으로 간주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표리부동을 위선이라 한다면,
겉과 속이 같음을 진실과 정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의 병든 삶이 아닌,
진실의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아침 식사 후 산책 중
며칠 전 모종한 어린 배추들이
뿌리내려 자라나는 건강한 모습이 참 싱싱하여 예뻤습니다.
엉뚱한 곳에 한 눈 팔지 말고 내 삶의 현실에 건강히 뿌리내릴 때
비로소 치유되는 위선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현실에 뿌리내려
진실을 체험하며 흡수해 갈 때 영육으로 건강한 삶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우리 분도회의 모토가
위선은 물론 허무주의나 우울증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입니다.
기도와 노동으로 삶의 현실에 뿌리내리는 것입니다.
기도와 노동에 충실하다보면
도저히 잔머리 굴리는 위선적 언행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됩니다.
얼마 전 잔디밭의 풀을 잠시 뽑으면서 노동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노동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함께 노동하면서 성미 급한 사람은
저절로 자기를 절제하게 되므로 성급하게 서두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특히 농사나 건축일은 서두른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믿음을,
때를 아는 지혜를 터득해 가면서
자기 완성과 자기실현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대로 수행으로서의 노동인 것입니다.
몸 노동을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분야에서 오랜 동안 노동에 종사해 온 분들에게서
저는 종종 수도자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뭔가 힘들고 불편하고 더딘 육체노동이
위선의 치유와 영신 건강에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건강히 양성된 사람들,
결코 바다이야기 같은 사행성 도박의 유혹에 빠져
인생 망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의 진솔한 고백이 심금을 울립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몸 노동이 없어
공짜와 요행을 바라며 돈을 헤프게 쓰는 겁니다.
정작 자기가 몸으로 일하여 건전하게 번 돈이라면
함부로 쓰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정말 기도와 노동의 사람입니다.
기도가 빠진 노동이라면 얼마 못가 영혼도 육신도 망가집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영혼의 기쁨이 노동에 스며들 때,
또 기도와 노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노동은 거룩한 수행이 되어 영육을 더욱 건강하게 만들 것입니다.
비로소 위선이나 우울, 허무주의의 병은 치유되어
진실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의 위선의 병을 치유해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마지막 불행선언 (6,7)
-박상대신부-
권력(power)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권력이란 아주 ‘위험한’, 그러면서도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로서, 직무나 직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권력은 ‘물리학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러셀)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바가 불순하거나 부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악(惡)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선(善)하다 하더라도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의 ‘결과’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목적이 항상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권력을 ‘선(善)이라고 생각되는 장래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한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율법을 보호하고 전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목적이 선(善)이었다고 하나 그 결과는 악(惡)을 초래하였다. 선의의 목적이 악을 초래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다.(마태 23,16.17.19.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치욕적인 불행선언이 잇따른다.
여섯 번째 불행선언은 율사들의 속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의 ‘겉과 속’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무덤의 외부를 회칠하는 이유가 내부를 덮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내부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겉치장한다 하더라도, 화려한 겉치장으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하려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은 속이고 겉은 겉이다. 다소 옳게 보이는 겉모양이 속내를 가릴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율사들의 속내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불행선언은 예수님 당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의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상들과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과 차별을 두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 주장이 그들 스스로를 살인자, 박해자의 후손임을 자백하는 것으로 지적하신다.(31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는 것’(31절)이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심하고 치욕적인 예수님의 언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언변은 유다교의 총체적인 종말을 의미하며, 야훼 하느님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무덤의 겉과 속처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