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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화요일, - 떠나보면 알거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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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떠나보면 알거야
비가 내렸습니다. 봄에 내리는 비는 농사일을 하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귀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화창한 날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비가 오는 날을 뛸 듯이 좋아합니다. 어둠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둠이 빛을 더 빛나게 하고 그래서 그의 소중함도 더해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빛은 빛으로써 존재하고 있었고 어둠은 어두움대로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16,7).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호자 성령께서 증언해 주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얘기하는 것보다, 다른 이가 얘기하면 믿음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떠나시면 세속의 권력자들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들이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하느님의 정의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예수님을 죄인으로 심판하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지금 새로운 법을 만든 잣대로 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잘못된 것을 지금 알게 해주는 것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이야기(루카15,11-32)를 보면 재산을 챙겨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은 모든것을 탕진하고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풍요로운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되었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새롭게 깨우쳤습니다. 그는 집을 나가서 밑바닥에 떨어져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되었고 다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아버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깨달아 안다는 것은 잊었던 것을 새롭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떠나보면 알게 됩니다. 그러니 한발 물러서 보십시오.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를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지에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있을 때 잘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걸맞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깨닫는 만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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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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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어디로 갈거나)
http://www.ofmkorea.org/526468
22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일단의 사랑에 그치지 말고)
http://www.ofmkorea.org/488681
21년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어디로 갈거나?)
http://www.ofmkorea.org/407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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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하 강론글을 더 보시려면
아래에 들어가셔서 보세요
https://cafe.daum.net/ThomasMoreSeoul/UtFb/520
===위에서 2021년도 강론글 옮김니다.===
김레오나르도 2021.05.11 04:01
부활 6주 화요일-어디로 갈거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늘은 주제와 좀 동떨어진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제자들을 나무라는 내용인데
제자들이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 이유가
자기들도 거기로 따라가야 하는데 그러기 싫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우리도 제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오늘은 어디로 갈 건지를 일부러 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옛날에 ‘어디로 갈거나’란 노래가 있었습니다.
‘어디로 갈거나, 어디로 갈거나, 내 님을 찾아서 어디로 갈거나.
이 강을 건너도 내 쉴 곳은 아니오. 저 산을 넘어도 머물 곳은 없어라.’
그때는 이 노래가 우리의 순례자와 나그네 영성과도 어울려서,
그리고 꽤 철학적인 가사가 마음에 들어 가끔 흥얼거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그저 감상에 젖어 흥얼거린 것이고,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처럼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요.
어디로 가는 것과 관련하여 옛날의 저는 이 세상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생각했지만 몇 년 전부터는 이 세상을 넘어 어디로 가는 것을 생각합니다.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게 되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저는 복음의
주님처럼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히 말하지만, 어느 정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있고,
초월하였기에 죽음에 초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너무 지나친 얘기라면 한 발은 이미 저 세상에 있고
다른 한 발은 아직 이 세상에 있다는 느낌입니다.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기인데, 보통 양다리 걸치기는 안 좋은 뜻이지만
지금 저의 경우는 이 세상을 살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한 발 딛고 있지만, 심정적으로 발을 확실히 담그고 있는 곳은
언젠가 가야 할 저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몇 주 전 한 형제와 대화를 나누다가 이일 저일 벌이기보다는
하나라도 성공 모델을 만드는 것이 후배들에게 이롭지 않겠냐는
충고를 들었는데 저를 콕 찌르는 말이긴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제겐 오래전부터 그것에 동의할 수 없는 지론이 있는데,
그것이 저의 목적은 성공이 아니라 사랑과 순종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늘 경계했던 것이 제가 시작한 일 제가 끝까지 붙잡고 있으려
하거나 제가 시작한 일이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안주란 편안함에 대한 안주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일에 안주하는 것도 있고
남자에게는 일에의 안주가 더 경계해야 할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제가 시작하고 하던 일을
즉시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그러해야 할 때이고, 그리 경계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제게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떠나는 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죽는 것은 두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선종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닥치면 떠나길 두려워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를 늘 물으며 살아야 하고,
간다면 골로 가지 않고 아버지께 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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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사람들이 책 추천을 해 달라고 해서 요즘 인상 깊게 읽은 책 한 권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두께에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이렇게 두꺼운 책은 도저히 읽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분이 두꺼운 책 읽기를 꺼리십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책도 두꺼운 책의 분류에 들어가는지 성경을 도저히 못 읽는 책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긴 얼마 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3년 우리나라 평균 독서량은 7.2 권이라고 하더군요.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은 성인도 50%에 달한다고 하니, 두꺼운 책을 읽기란 두려울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시대인지라 긴 문장에 대해서는 난독증이 걸린 것처럼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또한 해시 태그만을 쫓고, 짧은 글과 짧은 영상으로 지식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식이 진실일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진실은 복잡한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복잡하고 길게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설명 자체를 거부하는 요즘입니다. 그래서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말도 안 되는 흑백 논리로 서로 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하버트 조지 웰시의 ‘눈먼 자들의 나라’에서 눈뜬 청년이 눈먼 부족에게 ‘본다’라는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눈먼 부족은 눈뜬 청년을 조롱하고 배척하지요. 자기들의 생각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런 세상은 아닐까요? 예수님도 사람들의 알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요. 이처럼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는 그 생각이 오히려 큰 잘못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에 다시 오를 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시지요.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 찹니다. 아마 십자가 죽음을 통한 이별의 아픔을 떠올렸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기들의 무능함을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은 모두 우리를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단순히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때 주님과 늘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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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평범할 때 하는 백 번 감사보다, 힘들 때 한 번의 감사가 더 값지다(성 아빌라 데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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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보내신 분의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아니, 성령은 이미 당신과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고 하시니, 이는 무슨 말씀일까?
이 말씀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된 종의 모습이 우리 육체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야,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 자체에 순수한 마음의 눈을 두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말합니다. 그레고리우스 역시 “내가 나의 육체를 너희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지 않으면, 보호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너희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설합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함께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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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바오로 이종윤
성부께서는 성자를 보내주시고,
성자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께서는 저희를 보호하시니,
저희들은
성부와 성자를 믿고,
성령을 따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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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잘 되던 인터넷이 갑자기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전원을 끄고 다시 켜보았지만 그래도 연결이 안 되었습니다. 그럴 때면 연결하는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스마트폰의 인터넷을 컴퓨터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니 인터넷 연결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는 인터넷은 회사에 연락해서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듯이 염불이든 참선이든, 밀교든 현교든, 간화선이든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을 얻게 해 주면 그 수행은 정법(正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로 걸어서 서울로 갈 때 목적지인 서울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나중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불교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내가 체득한 경지가 올바른 깨달음이라고 나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의 깨달음은 무엇일까요? 답은 간단명료합니다. ‘번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가르침은 고, 집, 멸, 도의 사성제(四聖諦)로 요약됩니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란 뜻입니다. 모든 현상은 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고성제, 그런 고통의 원인은 내 마음 속의 탐욕, 분노, 우치(愚癡)와 같은 번뇌라는 집성제, 이들 번뇌를 모두 제거하여 고통이 사라지는 열반의 멸성제, 그리고 이렇게 번뇌를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인 도성제입니다. 즉, 불교수행의 길에서 최종 목표는 번뇌가 소멸한 열반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하듯이, 그 어떤 수행법을 선택했어도 나에게 열반을 증득하게 해 주면 그 수행법은 정법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부처가 깨달음에 방해가 되면 그 부처마저도 버려야 한다.’ 임제 스님의 유명한 살불살조(殺佛殺祖)입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말은 나를 얽어매는 것은 무엇이든지 부셔버리라는 뜻입니다. 부처라는 관념, 조사나 아라한이라는 이름에 속박되면 절대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부셔버리지 않고서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인터넷을 가지고 씨름했으면 인터넷 연결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행히 스마트폰 연결이라는 방법을 알았기에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일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제자들에게는 어려움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차원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갈릴래아라는 공간과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표징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물리적인 법칙을 뛰어넘는 차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차원을 ‘협조자.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감옥이 흔들리고, 부서졌을 때, 바오로 사도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감옥은 더 이상 굴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감옥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불행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명예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이 인간의 영혼을 물어뜯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은 모상이었습니다. 재물이라는 욕망은 가난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명예라는 욕망은 비움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권력이라는 욕망은 겸손이라는 영혼을 만나면 얌전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난과 비움 그리고 겸손으로 따듯하게 받아들이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상의 재물, 명예, 권력에 젖어있던 간수는 사도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난, 비움, 겸손의 영혼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욕망의 우리에서 벗어나 참된 생명의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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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귀신은 뭐 하는지 몰라 저거 안 잡아가고!’라고 하는 말 들어보셨지요? 그런데 그 기도가 이루어집니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릅니다. 보기에는 파렴치하고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심판에 있지 않고 회개에 있습니다. 다시 돌아서도록 그런 사람에게도 내일을 선물해 주십니다. 이것에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라고 하니까 아무도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을 듣는 순간 고민합니다. ‘어떡하지? 주님이 내 옆에 있어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가족 아플 때 낫게 해 주실 것이고, 사람들이 좀 알아줄 것이고, 음식 걱정, 돈 걱정 안 해도 될 것이고, 그런데 떠나신다고!’
이러한 근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내가 가야 한다. 내가 하늘에 가야만이 너희들은 내게 걸었던 헛되고 세속적인 욕망을 접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바라는 희망이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지만, 눈에 보이는 내 모습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자리에 너희가 나를 세운다면 그것은 크나큰 죄가 된다. 그러니 나는 가야 한다. 하느님의 자리를 하느님께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사용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바라는 것을 기도하더라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화내거나 노여움에 싸이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믿음의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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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과 불통 그리고 고통
어릴 적 저는 산골 소년이었습니다.
이산 저산을 뛰어다니며 나이 불문, 서로 뛰어다니며 놀았습니다.
해가 뜨면 서로의 집 앞에서 외쳤습니다.
‘⭘⭘⭘아 놀자~~~’
그때는 서로의 생각도, 이념도, 이해관계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학교에 가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반 친구가 생겼습니다. 우리 학교가 생겼습니다. 다른 학교, 혹은 남의 학교라는 반대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내 학교, 내 친구, 내 사람, 내 것, 내 생각, 내 과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소통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소통의 반대는 불통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소통이 자연스러운 곳에는 웃음과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소통이 막힌 불통이 있는 곳에는 불편함과 외로움이 있음을 나이가 들며 배우는 것 같습니다. 불통이 쌓이고 쌀이면 삶의 고통이 된다는 것도 말입니다.
가끔 학교 교과 과목에 ‘소통’이라는 과목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조금이라도 소통을 배울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덜 고통스럽고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했을지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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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께서 하시는 일
“아름다운 삶”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역시 오늘도 서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만세칠창으로 시작되는 하루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성령님 만세!’에 초점을 둡니다. 며칠전 읽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나오는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영혼을 가지고 짐승을 닮아서는 안된다. 신체의 직립으로도 우리는 짐승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제 아무리 숭고한 것이라 할 지라도 물체들에다 영혼을 내던지라는 말이 아니다. 숭고한 사물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안식을 거기서 찾는 다는 것은 결국 정신을 비하하는 것이다.
신체는 물체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을 향하도록, 즉 본성적으로 천체들을 향하도록 똑바로 세워져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신 역시 영적 실체로서 영적사물들 가운데서 숭고한 것으로 고양되어야 마땅하다. 그렇다고 오만불손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경건한 의덕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두발로 서있을 수 있는, 두발로 걸을 수 있는 축복에 감사해야 합니다. 직립인간답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존엄한 인간품위를 지키며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하늘의 사람답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요즘 세상 떠나는 분들을 대하며 화두처럼 저절로 나오는 말마디입니다.
“다들 때가 되니 떠나는 구나! 어디로 떠나나?”
이에 대한 답을 주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믿는 이들 역시 그들을 보내신 하느님께 간다는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떠나심이 우리에게 이로움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미 주님께서 보내주신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닮아 무죄한 삶, 의로운 삶, 진실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직립인간답게 품위있는 삶, 자유로운 삶,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의 소소하면서도 확실한 깨달음 역시 성령님의 은총입니다. 다음 다산의 말씀도 이런 깨달음의 소산이겠습니다.
“삶의 무게는 온전히 나의 것이지만, 죽음의 무게는 가족들이 함께 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죽음이 가족들에게 최고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만으로, 세상은 평안해지기 시작한다.”
구원은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주 예전에 민들레꽃 홀씨들 날려 보내며 써놨던 “영원한 삶”이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꽃졌다하여 끝난 것은 아니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
민들레 홀씨 형제들!
언제 떠나 어디에 닿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임만이 알뿐이다
몇날 동안 참 행복했고 화려했다
이제 샛노랗게 빛났던 하늘사랑 추억 가득 담고
임바람 불기만 기다릴뿐이다
꽃졌어도 계속되는 생명 바로 영원한 삶이구나
죽어 사라져도 끊임없이 사랑의 홀씨들 나눴던 삶
죽음은 없다
영원한 삶이다
나눌수록 풍성해지는 생명이다
떠날 채비는 끝났다”-2001.5,4
무려 23년전 글이지만 지금도 새롭습니다. 예수님은 떠났지만 보호자 성령 덕분에 우리는 주님의 홀씨들이 되어 계속 주님 파스카의 꽃을 피어냅니다. 주님의 일을 계속합니다. 이런 시 또한 성령님께서 주신 깨달음이며 성령님의 은총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끊임없이 폈다지는 주님 파스카의 꽃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이의 빛나는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오라와 실라스입니다. 두 제자들은 깊은 감방에 갇혀 있는 수인들이지만 영혼은 참 자유롭습니다.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이에 놀란 간수는 수인들이 달아난줄 알고 자결을 시도하자 즉시 바오로는 이를 만류하였고 상황을 깨닫고 마음을 추스린 간수와 두 제자간 주고받은 대화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합니다.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런 두 제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입니다. 바로 오늘 사도행전 일화는 다시 한 번, ‘하느님께서는 굽은 선들에서도 똑바로 쓰실 수 있는(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분임을 가르쳐줍니다. 성령의 사람, 바오로와 실라스입니다. 복음선포자들과 간수에게 재앙같은 사건도 그들 모두를 위한 아름다움이 여기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가장 아름다운 글자들(the most beautiful letters)이 있습니다.
우리 역시 만일 우리 삶중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의 중심에서 예수님을 볼 수 있다면, 우리 역시 이런 하느님 친히 쓰신 아름다운 글자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날마다 굽이굽이 굴곡진 인생길에도 주님은 똑바로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 가실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성령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며, 우리의 곡선 인생 여정중에도 주님은 계속 아름다운 글자를 써내려가심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인생이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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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걸음>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나를 보내신
분을 떠났던
첫 걸음과
나를 보내신
분께 닿을
마지막 걸음
그 사이 잇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걸음들
홀로 걷는 듯
제 잘난 맛에 취해
비틀거리는
나를 보내신
분과 멀어지는
걸음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더디더라도
쉼 없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가는
걸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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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요한 16,6)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
낙담의 폭정은 대단합니다. 우리가 굳건히 그것과 맞서려면, 그리고 거기에서 유용한 것은 거두고 쓸모없는 것은 버리려면,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처럼 때때로 낙담에도 뜻이 있습니다.
우리나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그것은 슬퍼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세상의 어려움에 빠졌을 때, 낙담은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직 완전하지 못한 제자들이 낙담에 빠지자, 그리스도께서 꾸지람으로 그들을 어떻게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지 보십시오. 지금까지 그들은 그분께 온갖 질문을 했습니다
(참조:요한13,36;14,5.</div><!--AfterDocument(554687,35144)--><div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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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7.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오늘 복음은 주님 승천 대축일을 준비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가다’와 ‘오다’입니다.
예수님의 ‘가심’에 제자들은 ‘근심에 가득차게’ 됩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스승님의 부재가 커다란 상실감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재가 단순한 공허가 아님을 성령의 ‘오심’으로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이전에 저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가심’이 성령의 ‘오심’으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바통을 넘겨받듯, 성자의 시대가 성령의 시대로 교체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삼위일체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빈자리에 들어선 새로운 선수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더 이상 지상에 머물러 계시지 않더라도 그분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게 하는 중개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분과의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더욱 돈독한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은 성령께서 오시면 “잘못 생각하는 것”(9.10.11절, 세 번 나옴)을 바로잡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는 성령의 인도를 통하여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것은 계절 사이의 바통 넘겨받기가 아닙니다. 겨울 속에 봄이 있고, 여름 속에 가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깊고 견고하게 만드는 연속된 단계요 이어짐입니다. 이 초대의 의미를 깨닫고 더욱 깊은 신앙으로 성숙해지는 것이 성령 강림 때 우리가 청하여야 할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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