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16
12월26일[성탄 8일 축제 1일/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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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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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kYR39-fBD8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서광호 베네딕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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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도 충분히 하늘이 열리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서 미사의 은혜로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미사 때마다 저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광휘가 빛나며, 천사들과 성모님을 비롯한 성인 성녀들이 영광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신도 신학자 스콧 한 형제도 미사의 은총과 축복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미사에 갈 때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상징이나 은유가 아니며, 우화나 비유도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입니다. 성가가 부족하더라도, 강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모든 미사는 지상에 현존하는 천국입니다.”
우리가 습관처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하늘이 열리고, 미사 안에서 하느님과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어머니 성모님과 천사들, 무수한 성인 성녀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 결국 미사 안에서 천국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런 체험의 원조는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하늘을 올려다보실 때마다, 하느님 아버지를 뵐 수 있었습니다. 그분과 수시로 통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 혹독한 고통과 상처, 수난과 죽음까지도 견뎌내실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분 하늘이 열리는 체험을 하신 분이 있었으니,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스테파노 첫 순교자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가 순교를 목전에 두고 목격한 천상 광경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6)
우리도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이고 집중한다면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천상 체험을 이 세상에서부터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앞당겨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체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 안에서 가능합니다. 좀 더 지극정성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미사에 참여한다면, 우리 역시 하늘일 열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진흙탕 같은 세상 속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한 송이 연꽃처럼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면, 우리 역시 하늘이 지상에서 천국을 맛보는 은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의 지극히 거룩한 삶 앞에 악인들이 보이는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그들을 모두 화가 치밀어오를 대로 올라 도무지 통제가 불가능했습니다. 부득부득 이를 갈았습니다. 일제히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귀를 막았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한 마리 짐승을 쫓아내듯 성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이윽고 주먹보다 더 큰 돌들을 들어 그에게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악인들이 진리와 정의 편에 선 의인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은연중에 악인들 편에 침묵으로 동조하면서, 그들의 악행에 가담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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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oyYV6zum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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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롭지 못하면 자비롭지도 못하다>
오늘은 성 스테파노 순교자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지혜와 능력에 있어서 따를 자가 없었습니다. 그를 시기한 자들도 그를 넘어설 수 없었습니다. 이때 하느님은 스테파노에게 이 세상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스테파노는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용서하신 것과 같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나를 모함하여 십자가에 못 박거나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 분들은 어떻게 그런 자비의 마음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자비는 ‘정의’의 열매입니다. 자칫 정의가 자비와 반대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정의로 심판하여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것은 자비롭지 않은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정의와 자비는 결국 같은 선에 있습니다.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동생들을 지극히 싫어하는 5학년 딸아이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동생들을 “없어져 버려!” 혹은 “쟤네 입양 보내!”라고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의 애정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생들을 낳은 엄마가 매정하기만 합니다. 왜 금쪽이는 동생들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그리도 모질까요? 자비롭지 못한 이유는 정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정의롭게 사랑을 준다고 여기지만, 자신은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롭다면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해 더 노력할 것입니다. 불평만 하지는 않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라는 시를 쓴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심한 뇌성마비로 말을 하기도, 움직이기도 힘들지만 하느님을 “공평하다”라고 노래합니다. 이 가사는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평하다고 쓰라고 할 때는 쓰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뭐가 공평하냐는 것입니다. 이때는 자신의 처지를 친구들과 비교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하늘이 자신에게 해 준 은혜를 봅니다. 그랬더니 공평함을 넘어서 ‘감사함’이 생겨납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라고 노래합니다.
하느님을 정의롭다고 여기게 되면 누구에게나 넘치는 사랑을 받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다른 이들이 받지 못한 것들이 보이게 되어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부모가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아이에게 어떻게 사랑을 주어야 할까요? 문자로 사랑을 전달할까요? 그것으로 될까요? 한 아이에게 잘해주면 다른 아이가 질투합니다. 정의롭다면 노력하는 만큼 보상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습니다. 노력해서 인정받습니다. 그 인정은 내가 형제들과 같은 수준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비로울 수 있습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동생이 태어나자 질투가 늘어버린 꼬마 아가씨가 나옵니다. 여기서 금쪽 처방은 아기가 부모처럼 동생을 돌보는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자신이 동생과 같은 수준이 아니라 부모와 같은 수준임을 믿게 됩니다. 그러자 질투가 사라집니다. 자비로워집니다.
오늘 스테파노가 하늘이 열리고 삼위일체 사랑을 바라봄이 이와 같습니다. 스테파노는 정의롭기에 노력하는 만큼 하느님께서 보답을 주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불쌍하게 바라볼 눈을 얻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이들을 자신들에게 돌을 던져도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테파노는 자신이 그런 것처럼 하느님도 사랑에 대해서는 공평하신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우십니다. 부모가 그렇듯 누구든 당신 수준으로 높여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정의롭지 못해서 하느님도 공평하지 못하다고 믿는 이들에겐 아무것도 주실 수 없습니다. 은총으로 주어도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끝까지 형제들을 향해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결국 정의는 하느님 자비를 얻게 하고 하느님 자비는 이웃을 정의롭게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모든 이들에게 대한 자비입니다. 결국 정의와 자비는 하나 입니다. 자비는 본성 상 정의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비는 모든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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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 교회에는 없는데 미국 교회에 있는 제도가 있습니다. ‘종신부제’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부제는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으로 1년 정도 있다가 사제 서품을 받습니다. 부제의 직무는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 혼배성사 집전, 세례 집전, 봉성체가 있습니다. 저는 부제 때, 주로 말씀을 선포하는 강론을 하였습니다. 미국 교회에서 종신부제는 5년간 신학 교육을 받은 후에 부제품을 받습니다. 종신부제들은 사제가 파견되지 못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목을 하고 있습니다. 종신부제는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미국 교회에 적응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현지 교구와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부제는 본당에서 훌륭한 보좌역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언젠가 종신부제 제도를 받아들일 때가 오리라 생각합니다.
교회사에서 빛나는 부제들은, 오늘 축일을 지내는 최초의 순교자 스테파노가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했던 라우렌시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제의 역할이 축소되었던 중세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도 부제였습니다. 제가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도 지난 5월에 종신부제가 탄생했습니다.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 온 형제님입니다. 형제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온화한 성품과 성실함으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부제품을 받은 후에 매 주일 영어미사에 강론을 하고 있고, 한국어 미사에는 한 달에 한번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미사에 강론은 한국어와 영어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 익숙하지 않는 청년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본당 주일학교 복사들과 함께 신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학생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7일에는 교우들을 위해서 ‘대림특강’도 해 주었습니다. 기혼인 종신부제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기 위해서는 배우자인 아내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배우자와 함께 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부제의 역할이 무엇인지 배우자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의 축일을 지내면서 고인이 되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생각합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님과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저는 적성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께 대림특강을 해 주실 수 있는지 편지를 보내드렸고, 추기경님께서는 대림특강은 물론 미사까지 해 주시겠다고 답장을 주셨습니다. 무척이나 바쁘신 추기경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 주신 것은 적성 성당이 당시 서울대교구에서 가장 작은 성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강의와 미사를 함께 해 주셨고, 교우들이 정성껏 준비한 저녁까지 맛있게 드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따뜻한 사랑을 듬뿍 주시고 가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언제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생각하셨고, 그분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해마다 성탄절에는 가난한 분들이 많이 사시는 달동네에 가셔서 성탄절 미사를 봉헌하기도 하셨습니다. 권력의 힘에 밀려서 성당을 찾아오시는 분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사람들에게 희망을 이야기 하셨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 남겨 주신 ‘우산’이라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戀人)이란 비 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 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 줄 때/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오늘 하루 희망의 우산, 나눔의 우산, 위로의 우산, 친절의 우산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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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0,17-22: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오늘은 성탄을 지낸 후 첫날인데 스테파노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교회 역사에서 첫 번째로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신 스테파노 성인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였다. 스테파노는 사도들을 도와 일했던 성령과 지혜로 가득 차 존경을 받던 일곱 부제 중의 한 사람이었다.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한 분으로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주님의 수난을 몸으로 체험한 분이시다. 오늘 독서에서 들었듯이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사도 7,60)라고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 분이시다. 이리하여 스테파노 성인은 그리스도인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으신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신앙 때문에 고발을 당하였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과 순교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완전하게 닮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가장 완전히 일치될 수 있고, 그분의 가장 완전한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순간순간을 항상 하느님 자녀의 자세를 잃지 않고, 모든 어려움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이겨나가려는 굳센 의지로 하느님 안에 살려고 했기 때문에 순교할 수 있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박해하였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물이었다. 이러한 삶 속에 성령의 도우심이 있다. 매 순간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우리가 신앙과 복음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하셨던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여야 할 말을 깨우쳐 주신다. 이것을 믿고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나 자신과 싸움을 충실히 해나가야 한다.
신앙은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지내는 것같이 평화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스테파노 순교 축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려주듯이 강철과 같이 강해져야 함을 말하고 있는 오늘 축일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한다.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으며, 이에 대처하는 우리 신앙인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느님을 떠나도록 주위에서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박해하고 있는 이것들을 잘 이겨나갈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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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6장과 7장에서 성인의 발자취를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식탁 봉사를 위하여 뽑힌 일곱 봉사자(부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는 식탁 봉사의 직무 말고도, 말씀을 선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설교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것인데, 특별히 스테파노의 설교(사도 7장 참조)도 함께 전하여진다는 것은, 그가 초대 교회에서 두 사도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스테파노의 순교 장면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떠올립니다.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최고 의회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거짓 증인들의 모함도 받습니다. 특히 스테파노가 숨을 거두기 전에 드린 기도는 예수님께서 바치신 기도와 매우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하고 기도하셨듯이, 스테파노도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하고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하고 말합니다. 이처럼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가 스테파노를 마치 예수님처럼 묘사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스승님을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전부가 아닌 일부만, 또는 편하고 쉬운 부분만 닮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께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때로는 그분을 닮으려다가 사람들의 미움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시련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이만이 참제자로서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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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스테파노>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 그리고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졌다.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5-60)
스테파노 순교자는 우리 교회의 첫 순교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이지만, 충실한 신앙인들이 들어가게 될 하느님 나라와 그 나라의 영광을 직접 목격하고 증언한 첫 증인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여기서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라는 말은, 그가 순교 직전에 목격하고 증언한 일은, 어떤 환각이나 착각에 의한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한 일이고,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시를 받아서 증언한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의 증언은 ‘구원의 진리’에 속한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보였다는 말은, 스테파노가 하느님을 직접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묵시 22,3ㄴ-4ㄱ) 신앙인들이 누리게 되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은 ‘하느님을 직접 뵙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을 ‘지복직관’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그것을 증언한 것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신앙이 옳은 것임을 확증한 것입니다. ‘하늘이 열려 있다.’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모습을 스테파노에게 보여 주셨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가 순교 직전에 하느님과 예수님을 본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스테파노를 마중 나오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마중 나오신 일 자체가 신앙인들에게는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스테파노가 살해당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다가(구경만 하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마중 나오신 것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순교는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은 그것을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앙인들이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증언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힘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늘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 우리가 아파할 때 우리보다 더 아파하시고, 우리가 슬퍼할 때 우리보다 더 슬퍼하시는 분, 우리가 당신 곁을 떠나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 우리가 한눈을 팔아도 우리만 바라보시는 분...>
“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았다.”라는 말은, 박해자들이 스테파노의 증언을 ‘신성 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해서 분노하면서 말을 막으려고 했고, 스테파노의 말을 안 들으려고 귀를 막았다는 뜻입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져서 죽인 것은, 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위기에 있는 율법대로 한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모독한 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 온 공동체가 그에게 돌을 던져야 한다. 이방인이든 본토인이든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레위 24,16) 그런데 당시에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총독의 허락 없이는 율법대로 사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로마법의 절차대로 진행되었는데, 스테파노 순교자의 경우에는 그 절차가 모두 무시되었습니다. 아마도 총독이 개입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의 폭동과 같은 수준의 박해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 증인들’이라는 말은, 스테파노를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보다 먼저 돌을 던진 박해자들을 가리킵니다.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두었다는 말은,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박해자들의 우두머리였음을 나타냅니다. <‘박해자 사울’은 나중에 ‘사도 바오로’가 됩니다. 스테파노 순교자가 흘린 피가 ‘하나의 밀알’이 되어서 ‘사도 바오로’라는 열매를 맺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요한 12,24)>
스테파노의 마지막 모습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하고, 그가 바친 기도도 예수님께서 바친 기도와 비슷합니다. 그것은 스테파노가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그대로 뒤따라갔음을 나타냅니다.
60절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에 ‘잠들었다.’는 말은, 기도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두었음을 나타냅니다. <죽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잠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순교자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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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교회는 그리스도교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기념합니다. 그는 설교를 통하여 사랑의 복음을 전한 첫 열매입니다.
그 사랑은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아드님을 지상에 파견하시고 우리 가운데에 당신 천막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오늘부터 여러 증인들의 기념을 통하여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강생하신 목적, 곧 사람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하늘로 데려가시려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선교 대화에 속하는 복음은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제자들은 스승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걱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곁에 영원히 함께 계시고, 그분의 영을 통하여 그들을 도와주실 것이라고 안심시키십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는 스승을 본받아 희생된 첫 어린양입니다. 가말리엘 학파에서 바오로의 동료였던 스테파노는 사도들의 설교를 충실히 받아들였고 일곱 부제 가운데 사랑의 봉사를 위하여 선발되었습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백성 가운데에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은 복음을 가만히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반대와 폭력이 쏟아져도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협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강한 그는 피를 흘리면서도 계속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하느님께 자신의 영을 받아 주시고 그 박해자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청하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목숨을 잃는 희생의 순간까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복음을 증언하였고 계속해서 증언하는 이들의 행렬을 이끕니다. 믿음의 영웅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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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과 말씀 - 설명과 해석>
말과 말씀을 구태여 구분 지을 필요는 없지만, 말은 아무래도 쉽고 가볍게 할 수 있는 것처럼 들리고, 말씀은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좀 더 귀 기울여야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빈 말도 있고 저잣거리 말도 있으며, 지껄임이나 에두른 말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말씀이라고 하면, 무언가 ‘쓸 수 있는 말’, ‘쓸모 있는 말’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잣거리 외침 정도나 지껄임 정도의 말로 오신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라고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박해와 순교의 순간에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너희 안에서 하느님의 성령이 말씀하시도록’ 하라는 것도,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겠지만, 설명은 말하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고, 해석은 듣는 이에게 주도권이 있습니다.
설명의 설(說)이 ‘말을 달리한다’는 뜻풀이를 가지기에, ‘쉽게 말해서’, ‘달리 말해서’ 등으로 쓰겠지만, 어느 경우에는 쉽게 말하려던 것이 더 어렵게 되고 달리 말하는 것이 더 꼬이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써 말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 스테파노 순교자는 박해자들에게 애써 말하는 설명이 아니라, 순교라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게 했고,ㅠ말씀은 적중하여 많은 이들에게 올바로 해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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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10,22)
예전 읽었던 복음 묵상 글이 아주 신선하게 저에게 다가왔기에 적어 두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들레라는 다년생 풀이 있지요. 짓밟혀도 잘 죽지 않고 즙이 매우 쓰기 때문에 가축들도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노란색의 꽃이 4~5월에 피는데 민들레의 꽃은 생명을 다하면 홀씨가 되어 날아갑니다. 그리고 어디엔가 터를 잡으면, 그곳에 자기 영토를 만들어 다시 꽃을 피우면서 곳곳에 퍼져 나갑니다. 민들레의 이런 생존 방식은 마치 초기 그리스도교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외부의 자극, 곧 박해와 스테파노의 순교를 시발점으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마치 구슬이 바닥에 떨어지면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가 흩어졌습니다. 이렇게 피신하는 과정에서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새로운 복음 선포를 위한 전기를 마련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전화위복이었던 것입니다.
어젠 주님의 성탄을, 오늘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을 축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 다음 날을 스테파노의 축일로 지내는 것일까요. 스테파노 순교자의 축일을 굳이 성탄 다음 날 지내는 이유를,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지극히 상반된 ‘출생과 죽음: 시작과 마침’을 연이어 기억하는 그 근저의 동질성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숨을 거두면서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라고 교회는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세상에 탄생하심으로 가져온 구원을 기억하면서, 스테파노가 처음으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사랑으로 바침으로써 천상에서 탄생하게 되었음을 교회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탄이 지상에 태어남이라면, 순교는 하늘에 태어남인 것입니다. 오늘 입당송의 『복된 스테파노에게 하늘의 문이 열렸네. 첫 순교자로 오른 그는 하늘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네.』라고 노래하고 있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테파노의 축일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스테파노와 우리 모두 구원되었음을 전제로, 예수님의 지상에 탄생하심으로 우리가 하늘에서 탄생하였음을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축일을 통해서 교회는 선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축일은 단지 스테파노 성인만의 축일이 아닌 하늘나라를 위해 증거하고 봉사하고, 순교한 모든 이들의 죽은 날이 곧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희망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의 은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상과 천상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낮추심과 올라감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가난하심과 부유하심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죽음과 태어남의 교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참여한 그 첫 사람이 바로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입니다.
오늘 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스테파노 성인은 평판이 좋고(6,3) 은총과 능력이 충만(6,8)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분(7,55)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많은 신도 가운데서 사도들이 직접 뽑은 식탁 봉사를 위한 일곱 봉사자, 부제들 가운데 한 분이셨으며 사도들과 더불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진리를 증언하는 역할을 담대하게 수행했습니다. 그가 왜 첫 순교자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 독서에 의하면 그는 다른 봉사자들 가운데서 탁월한 능력을 소지하고 있어서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으며(6,8) 이 일로 인해 디아스포라에서 온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지식을 다 동원해서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였지만, 지혜와 성령의 능력으로 힘입어서 말하는 스테파노의 언변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신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한 스테파노에 대한 열등감과 그에 따른 분노로 속이 끓어올라 이를 갈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7,54참조)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탓하기보다 스테파노에 대한 분노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안절부절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분노에 스테파노의 다음과 같은 말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에 기름을 쏟아붓는 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7,56) 물론 이 말은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의 신앙의 증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을 더욱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든 표현이자,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결정적인 이단이었고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 스테파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의 분노에 분노를 더한 증오의 불을 타오르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어 순교라는 결정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으리라 봅니다.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열등감으로 이를 갈던 그들에게 이제 스테파노의 이 말은 그들에게 마지막 버팀목인 자존심마저 짓밟혔다고 느꼈기에, “큰 소리로 지르며 귀를 막았다.”(7,57) 고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미 집단적인 광기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단지 일제히 달려들어 스테파노를 성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지만, 그 과정에서 군중의 집단적인 폭력성이 고조되면서 누구라고도 할 것 없이 모두가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성 밖으로 몰아내는 광경은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나자렛에서 회당에서 첫 설교 이후 고향 사람들의 반응과 비슷하며, 군중들이 돌을 던지며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스테파노의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7,59)라는 기도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를 연상시킵니다.
교회는 성탄의 큰 축제 중에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냄으로써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호출하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오신 그분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무릇 그분처럼 아니 스테파노처럼 자신의 존재와 삶을 통해서 세상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며 박해할지라도 꿋꿋이 ‘주님의 사람으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자신 안에서 내주하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그 사랑’으로 언제 어디서든지 증거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은 바로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그런 점에서 스테파노는 예수님을 가장 닮은 존재였고, 사랑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를 ‘복음과 예수님 때문에’ 기꺼이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놓은 분이시기에 교회는 오늘 축일을 성대히 지내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성령으로 충만한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순교하셨습니다. 순교는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여! 스테파노는 박해와 죽음까지도, “끝까지 견디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10,22)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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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로부터 성체 분배 때문에 항의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랐습니다. 성체 분배를 제대로 못 한다는 항의가 아니라, 신부가 한 곳에서만 성체 분배한다는 항의였습니다. 그렇게 한 군데에서만 성체 분배를 하면, 다른 곳에 앉아 있는 신자들은 한 번도 신부님께 성체를 받지 못하지 않느냐는 항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매번 자리를 바꿔서 성체 분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신부가 지난번에 했던 곳에서 또 성체 분배를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앉은 사람만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고 하더군요.
별의별 항의가 다 있다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항의를 하지 않는 저희 본당 신자들에게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사실 이런 항의를 들어도 저는 옮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정된 자리에서 성체 분배를 해야 아직 세례받지 않은 사람, 첫영성체를 하지 않은 어린이들이 안수받으러 오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자리를 계속 바꾼다면 이들의 혼란이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항의하는 요즘 세대를 종종 봅니다. 자신의 불편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면 어떨까요? 또 무엇보다 사랑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마음을 담아보면 어떨까요?
얼마 전에 병자성사 갔다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확장 주차’ 자리를 보았습니다. 요즘 큰 차량이 많기에 배려 차원에서 넓은 주차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아주 작은 경차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경차 주차선이 따로 있었고, 텅 비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기 불편을 따지기보다 함께 사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닐까요? 그 나라가 바로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을 맞이한 오늘, 제1독서는 용기 있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스테파노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말을 듣고 마음에 화가 치민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유다인들이었습니다. 그들 역시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의 지혜로운 언변이 그들을 물리쳤고, 이 점이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투석형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과연 스테파노의 죽음을 원하셨을까요?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화가 난다는 이유로 자기들의 악행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인정하실까요? 그런데 지금을 사는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간직할 때가 너무 많았습니다.
복음에서도 전해주듯, 우리에게 일러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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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령을 따라>
마태오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성령을 따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20)
배척과 억압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고루 보듬으시는
성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거짓과 침묵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진실을 외치시는
성령의 목소리를
나의 목소리로
불의와 변절이
삶의 길일 때
한결같이
곧게 나아가시는
성령의 발걸음을
나의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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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을 지키는 일>
죽음에 직면하면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이 아니라 어디가 조금 아파도 걱정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두려움은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믿음이 없는 자를 꾸중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죽음을 앞두고도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사도 7,55) 하며 주님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59-60) 하고 외쳤습니다. 참믿음을 지닌 사람만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주님을 증거할 수 있고 자신을 처벌하는 자에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가 걸었던 이 길은 바로 예수님이 걸으셨던 길이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나는 비록 두 팔이 잘리고 두 눈을 빼앗기더라도 복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주 예수님께서 자기를 못 박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시고 용서하시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지 않았느냐?”(성 에드몬드)
용서한다는 것이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는 연약함을 지닌 이상 우리도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그때 비로소 타인을 넉넉히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음으로써 믿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이 고난을 겪으셨으니, 제자가 또한 그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언제나 진리의 길을 갈 것이고 그를 시기하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미움을 감당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증거는 박해를 불러온다고 해도 그 박해의 순간이 참된 신앙의 탄생이고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 측면에서 보면 이미 인간을 위한 희생이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에게 박해와 고난의 여정이 계속된다면 예수님의 탄생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희망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삶이 끝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그 삶은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마태 10,16)합니다. 결무른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처지가 되던지 믿음 안에서 부드러움으로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10,22) “신앙은 내 신념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각을 내 삶으로 옮기는 삶입니다.”
성탄축일에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충만히 받으시길 빕니다. 성탄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우리도 나를 내려놓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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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
-영적승리의 순교영성-
어제 주님 성탄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천상탄일 축일입니다. 주님을 위한 순교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성 스테파노를 비롯한 순교성인들의 천상탄일입니다. 또 오늘은 순교적 사랑과 헌신으로 수도생활에 정진중인 우리 요셉 수도원의 김기룡 스테파노 부원장 수사의 영명축일이기도 합니다.
나이 77세 노령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사랑과 신뢰, 존경을 한몸에 받으며 부원장직과 더불어 주방장, 채소밭 책임을 다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스테파노 수사입니다. 스테파노 수사와 저는 오랫동안 2주 간격으로 매금요일마다 서로 삭발에 가까울 정도로 머리를 깎아줍니다. 2주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중요합니다. 과장하여 머리 깎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새삼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샘솟는 희망의 원천은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축일의 새벽 성무일도 1.초대송 후렴도, 2.찬미가도, 3.즈카르야 후렴도 아름다웠습니다.
1.“탄생하신 그리스도께서 오늘 복되신 스테파노를 월계관으로 꾸미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
2.“순교자 스테파노 기쁜축일을, 모두다 정성다해 경축하세나
주님을 위한투쟁 목숨을바쳐, 최초로 승리빨마 얻어냈도다”
3.“첫 순교자인 스테파노에게 천국문이 열리고, 그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도다.”
내용 모두가 순교 영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합니다. 순교영성은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영성이요 1-2세기는 순교영성의 세기라 할만큼 무수한 순교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순교를 열망했고 자발적 거룩한 사랑의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라 말합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순교입니다. 제 주변에는 자발적 사랑으로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말그대로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연옥같은 환경중에도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우리가 경축하는 순교축일은 비단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에서 순교적 삶을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분발하게 합니다.
삶은 전쟁입니다. 인류사는 전쟁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는 야만의 전쟁입니다. 문명의 야만시대의 역설을 보여주는 전쟁이요, 인간 무지의 적나라한 표현이 전쟁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이라 일컫곤 합니다. 영적전쟁에 영적전사, 영적승리란 주제는 제 초창기 수도사제 시절부터 강론에 참 많이 인용됐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바로 순교자들의 후예이자 순교영성을 살아가는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우리 믿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될 영적전쟁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인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영적 전의(戰意)를, 영적 투지(鬪志)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분투(奮鬪)의 노력을 다해 영적훈련에 전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영적전의를 새로이 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자작 애송시, “담쟁이”를 나누고 싶습니다. 25년전 쓴 시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좋아하여 자주 인용하는 시입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들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定住)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루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이렇듯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가 되어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나이와 무관하게 초록빛 열정으로, 초록빛 영성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순교영성의 사람들이요 순교성인들의 후예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에게 면면히 계승되고 있는 참으로 고맙고 자랑스런 순교영성의 유전자 디엔에(DNA)입니다.
이런 순교자의 모범, 순교영성의 모범이 바로 오늘 경축하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입니다. 순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총, 성령의 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어려운 상황중에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때 아버지의 영이, 성령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스테파노의 적대자들은 은총과 능력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를 당해낼 수 없었다 합니다. 참으로 순교영성의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자 동시에 인내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는 이에게 영적승리의 구원이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역경중에도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내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 바로 순교영성이요, 이에 성령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성규72,5)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사랑의 성령, 사랑의 전사, 사랑의 순교자”로서의 진면목이 성 스테파노의 임종어를 통해서도 환히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짐으로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임종어는 그대로 사랑의 주님을 닮았고 한없는 감동을 줍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순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주님은 바로 순교자 스테파노에 이어 사울을 예비하십니다. 적대자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 발 앞에 두었고 사울은 시종일관 스테파노 순교장면을 체험합니다. 장차의 사도 바오로, 사울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결국은 회심에 이르게 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음을 봅니다. 스테파노는 순교의 죽음을 끝난 듯 하지만 사울은, 사도 바오로가 되어 그 뒤를 이음으로 하느님의 일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순교적 삶에 충실함으로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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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교환의 신비에 초대 받는 우리>
“첫 순교자인 복된 스테파노의 천상 탄일에 거행하는 신비를 저희가 삶으로 드러내게 하시고 숨을 거두면서도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하소서.”
성탄절에 그리고 그것도 주님 성탄 바로 다음 날에 성탄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순교자 축일을 지내고,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지내는지 그 의미가 오늘 본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세상에 태어나시고 스테파노는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지요. 주님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 스테파노를 포함해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됨을 뜻하는 겁니다.
주님의 모든 신비는 교환의 신비이고 성사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는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이 부활하게 되고, 주님의 성탄과 육화의 신비는 주님의 땅으로 내려오심으로 우리 인간이 하늘로 오르게 되고, 주님의 성탄으로 우리 인간이 천상에 태어나게 되는 신비지요.
문제는 있습니다. 교환이 이루어지려면 그 교환에 동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늘과 땅을 교환하자고 하시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면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오르겠다고 동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셨어도
우리가 하늘로 오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 주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아무리 구원 열차에 오르라고 초대해도 우리가 그 열차를 타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 축일로 지내는 스테파노는 이 교환의 제의에 처음으로 응답하여 처음으로 천상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스테파노에 대해 사도행전은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라고도 하고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라고도 하는데,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는 적대자들을 이렇게 초대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물론 그들은 하늘을 보지 못하고, 그 초대에 응답도 하지 않지요.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 분노로 가득 찼기에 하늘 대신 스테파노에게 증오의 눈길을 보냅니다.
스테파노가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초대를 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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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10,20)
<성탄과 죽음!>
오늘 복음(마태 10,17-22)은 '박해를 각오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뽑으신 열두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시니 '걱정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박해와 미움을 끝까지 견뎌내라.'고 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오늘은 '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사도6,8-10; 7,54-59)는 스테파노가 '은총과 능력이 충만했고, 지혜와 성령이 충만했다.'고 전합니다.
스테파노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의 힘으로 모든 박해와 미움을 끝까지 견뎌냈고, 마침내는 예수님처럼 장엄하게 순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사도7,59)
어제가 주님성탄대축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특히 모든 교회에서 주님 성탄의 큰 기쁨을 노래했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묵상합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주님성탄대축일 바로 다음날에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해 잘 죽어봅시다!
그래서 다시 부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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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FzoUMTzp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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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 20)
성탄도
순교도
우리에게
참된 사랑을
가르쳐주는
사랑의 참된
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며
예수님께로
다가서게 하시는
성령이십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오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성령은 우리에게
오십니다.
무엇을 우리가
한 적이
없는데도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다시 사랑할
힘을 주시는
성령이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애썼는데도
할 수 없었던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멈추는 법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멈추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멈추면
어느새
하느님께
닿아 있습니다.
우리에겐
너무 힘들었던
문제들이
너무 쉽게
해결됩니다.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전혀
아깝지 않을
사랑이 답입니다.
이렇듯
사랑이신
예수님을
뵙는 것이
우리 삶이
가야할 길이며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는
사랑의
기쁜 날입니다.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는
가장 소중한
진리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뵙는
성탄이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듯
성 스테파노는
순교로 예수님을
뵙습니다.
성탄도 순교도
그 중심에는
예수님의
구유와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음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을
이루시는
예수님
당신이셨습니다.
이루시는 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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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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