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밤에 프랑스를 향해 출국합니다.
긴 비행 시간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곳에서 주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십자가 보혈로 오염된 영혼을 씻어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이 되어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7.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
8.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 찼도다
9.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11.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본문 주해)
1~3절 : “어서 야훼께로 돌아가자! 그분은 우리를 잡아 찢으시지만 아물게 해주시고, 우리를 치시지만 싸매주신다.
이틀이 멀다 하고 다시 살려주시며 사흘이 멀다 하고 다시 일으켜주시리니, 우리 다 그분 앞에서 복되게 살리라.
그러니 그리운 야훼님 찾아나서자. 그의 정의가 환히 빛나 오리라. 어김없이 동터 오는 새벽처럼 그는 오시고 단비가 내리듯 봄비가 촉촉이 뿌리듯 그렇게 오시리라.”(공동번역)
전에 이스라엘은 그들의 병과 상처를 세상의 힘에 의지하여 치료하고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로 인하여 오히려 낭패와 실망을 당하였다.(호5:13~15)
호세아는 자기 백성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받아주실 줄 알기에 그에게 돌아가자고 호소한다.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는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장사됨을 통해 부활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예표한다.
호세아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알기를 호소한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히브리어 ‘야다’이며 언약 관계 안에서 그와 연합되는 것을 말한다.
4~6절 : “그러나 에브라임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유다야,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너희 사랑은 아침 안개 같구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 같구나.
그래서 나는 예언자들을 시켜 너희를 찍어 쓰러뜨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말로 너희를 죽이리라.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제물을 바치기 전에 이 하느님의 마음을 먼저 알아다오.”(공동번역)
‘인애’란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헤세드를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할 때 인애, 자비, 긍휼 등으로 번역한다.
그러므로 인애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너를(이스라엘을)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끄집어내어서 오늘까지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건만 도대체 너의 인애는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향한 인애가 얼마나 엄청난지 아느냐, 그런데 나에 대한 너희의 인애는 아침 구름과 같고 쉬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애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애도 없고, 이웃에 대한 인애도 없는 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즉 이들이 입술로는 돌이키지만, 행위의 열매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자를 보시고 주님께서 탄식하시는 것이다. ‘도대체 너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탄식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심판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
주님의 심판이 일차적으로 선지자들을 보내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선포함으로 백성들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백성들은 왜 평안을 빌고, 복을 빌어 주지는 않고 치는 설교만 하느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버린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죽여 버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친히 죽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죽음에 넘겨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참회 분위기나 종교적 제도라는 경건의 모양에 속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바치는 희생제물을 원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연합)과 거기에서 나오는 인애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이것이 부재한 제물이나 헌신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6절은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인용하신 말씀이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
7~10절 : 진정한 회개가 없는 그들의 죄악상을 고발한다.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7절)에서 ‘아담’은 사람의 이름과 지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람으로 보았을 때, 이는 이스라엘이 ‘첫 사람’ 아담이 말씀에 불순종하여 언약을 깨뜨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깨뜨렸음을 암시한다.
둘째, 지명으로 보았을 때 ‘아담’은 요단강 부근의 도시로 파악된다.
“이 백성은 아담에서 이미 계약을 깨뜨렸다. 거기서 벌써 나를 배신하였다.”(7절, 공동번역)
이 아담에 이어 길르앗(8절, 행악자의 고을), 세겜(10절, 제사장들이 거하는 곳), 벧엘(9절, 이스라엘 집) 등 이스라엘이 죄악을 저지른 장소들이 이어진다.
11절 : “유다야, 너도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공동번역)
“유다야, 너를 심판할 시기도 정하여 놓았다. 내가 내 백성의 운명을 바꾸어 주고자 할 때마다,”(새번역)
“유다야, 내가 내 백성을 회복시키려고 징계할 때 너도 벌할 것이다.”(현대인)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동시에 유다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추수 때가 정하여졌으니 정신 차리라는 것이다.
(나의 묵상)
이스라엘은 부지런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우상에게 하듯이 자기 소원을 위해 열심히 제물을 바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들이 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라고 단단히 착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호세아 선지자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한 것은 번제를 열심히 드리자는 것이 아니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한 증거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은 자들임에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도, 이웃에게도 주지 않는 것이었다. 주기는커녕 더욱 악을 행하고, 음행만 저지르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였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결과였다.
복음을 알기 전 내 상태가 꼭 이랬다.
주일성수는 두말하면 잔소리요, 성경공부, 봉사, 헌금 등 모든 면에서 열심이었으니, 이런 나를 주님께서 틀림없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나는 목회자들마다 다 칭찬했으니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주님에 대한 사랑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이, 자신만을 사랑하던 자였다.
내가 가진 성경지식으로 판단과 정죄에는 빨랐지만, 영혼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참으로 메말라 있었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아 놓고도,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동료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무자비한 자였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너무도 무지했기 때문이다.
주님을 아는 것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저 담임 목사님이 이끄는 대로 하면-주의 종에게 충성하면-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배우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내게는 주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이 더 풍성하게 전달되어진 것같다.
그러다가 복음을 알게 되고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는 복을 받게 되었다.
수박 겉핥기 식의 회개, 예수님도 눈치 못 챌 만큼(?)의 재빠른 형식적인 회개, 그것조차도 드문드문 하던 자가 이제 날마다 말씀 앞에서 가슴 서늘함을 느끼며 눈물을 글썽인다.
하나님의 창세전에 약속,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그렇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며 내게 새 생명을 주신 이유가 나 같은 것과 교제하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되니, 내 삶의 모습이 주님 앞에 죄송하고 민망한 것뿐이다.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고 방방 뛰며 설치지만, 이내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인애가 없는 나는 주님의 영광을 부지런히 가리는 자이다.
그러나 오늘도 이 말씀을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매일 말씀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거하지만, 여전히 비실비실한 나를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간구한다.
진짜 주님께 돌아간 자의 삶에 나타나는 그 인애가 내게도 점점 풍성해지길 간구한다.
그래서 주님을 더 잘 전하고 자랑하는 남은 생이 되길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여호와께 돌아가자...힘써 여호와를 알자....’
감동된 표정으로 외웠던 성경 구절이지만
주님께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시절이 길었습니다.
이제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어 주님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 아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어떤 이는 저 자신을 자랑한다고 판단하기도 하지만,
주님께서 제 마음을 아시니 아무 상관 없습니다.
다만 저의 연약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려우니
주님께 받은 그 풍성한 인애가 제 삶에도 나타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