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좀 갖다 줘."
바로 몇발 앞에 냉장고가 있어도 음료수든 음식이든 스스로 갖다 먹는 법이 없다고 한다.
"어휴! 말도 마세요. 얼마나 게으른데요. 비서를 두고 살아야 하는 체질인지 웬만한 일은 모두 저한테 시켜요."
`도루왕'' 정수근(24ㆍ두산)의 아내 서정은씨(27)의 푸념이다.
농담이려거니 생각했다. 1루에 나갔다하면 호시탐탐 상대의 빈틈을 노리다 재빨리 2루를 훔치고, 20~30m 전력질주해 타구를 잡아내는 부지런한 이가 바로 정수근이기에.
이내 한 마디 쏜다. "도대체 도루는 어떻게 해내는 지 모르겠어요." 그라운드의 `날다람쥐''가 집에서는 빈둥거리는 반달곰이 되는 모양이다.
계속되는 정은씨의 불평.
"신혼초에는 쉬는 날 영화보러 자주 갔는데 요즘엔 그냥 집에 있자고만 해요. 그렇다고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에요. 하찮은 심부름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다행이지요. 자기가 왕인 줄 알아요"
그래도 남편에 대한 사랑엔 변함이 없다. 의정부에 살면서도 잠실구장 출석부에 도장을 찍는 정도다. 15개월 된 아들 호준이의 기저귀와 우유까지 챙겨야 하는 등 번거롭기 짝이 없지만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풍가는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나선다. (정은씨는 결혼전까지는 야구를 전혀 몰랐고, 일요일에 TV에서 야구중계하는 게 가장 싫었다고 했다.)
"힘들긴 하지만 함께 `출근''하고, 함께 `퇴근''하는 맛이 꽤 괜찮아요."
퇴근길에 피곤한 남편 대신 운전대를 잡는 정은씨에게 경기에서 죽쑨 날 정수근의 태도가 어떠한 지 슬쩍 물어봤다.
"운동장에서 나와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차 안에서 한 마디도 안해요. 집에 들어가서도 곧바로 이불을 푹 덮어쓴 채 그냥 자요. 저도 신경 건드리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어요."
요즘 보기 드문 `천사표 부인''이라고 했더니 남편을 흉본 게 마음에 걸렸던 지 곧바로 남편 자랑을 쏟아놓았다.
"수근씨는 어른들에게 참 잘해요. 생신이나 기념일은 확실히 기억했다가 챙겨요. 함께 사는 친정 부모님이 100점짜리 사위라고 말하지요. 호준이와도 친구처럼 잘 놀아줘요."
평소에도 재미있는 말을 잘 하느냐는 질문에 "결혼하게 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며 남편의 유머감각을 추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