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다야교파, 히폴리투스, 순교자 유스티누스, 시몬 마구스, 시모니아, 세모 상쿠스
교부들the Apostolic Fathers은 대체로 영지주의Gnosticism(그노시스파)가 <사도행전> 8장 9~24절에서 언급되는 마술사 시몬 마구스Simon Magus와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시몬은 “위대하신 하느님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는데 사도 시대에 사마리아에서 그 능력을 행사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지만, 그 후에 사도들에게서 영적 권능을 돈으로 사려고 했다가 베드로에게 몹시 책망을 받았다. 여기서 거룩한 것을 사고파는 일을 뜻하는 시모니아Simonia라고 하는 말이 생겼다.
2, 3세기에 그노시스파에 속하는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시몬을 교조敎祖로 한다고 주장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100?-165?)와 몇몇 저술가들은 그 교단의 창설자는 시몬이며, 시몬은 사마리아의 기타Gitta 출신이며, 그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Claudius(41~54, 2대 황제인 디베료(티베리우스)의 조카) 시대에 로마로 왔다고 한다. 시몬은 그 제자들한테서 신으로 받들어지며 테베레Tevere 강의 어떤 섬에 그를 존경하는 석상을 세우고 “거룩하신 신 시몬에게Simoni Deo Sancto”라는 기명記銘을 써 붙였다고 한다. 그러나 1574년 이 석상의 밑 부분이 발견되었는데 그 석상의 기명은 “성실하신 신 세모 상쿠스Semoni Sanco Deo Fidio에게”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시몬에게 봉헌된 석상이 아니라 사비니인들의 신 세모 상쿠스Semo Sancus(신뢰와 서약을 관장하는 로마의 신)에게 봉헌된 석상이었다.
상쿠스는 ‘거룩함, 성스러움, 신성불가침’을 뜻하는 라틴어 산크투스sanctus 및 ‘제정하다, 인준하다, 확정하다’는 뜻의 라틴어 산키오sancio와 관련이 있다. 고대 로마인은 상쿠스가 결혼 서약과 법, 상업 등 공적이고 사적인 계약 관계들의 증인이 되어 이를 수호해준다고 믿었다. 그는 제우스의 아들 헤라클레스나 유피테르의 아들 디우스 피디우스Dius Fifius와도 종종 비교되었다. 특히 이탈리아 아페닌 산맥Apennine Mountains에 살았던 고대 사비니Sabini 부족민들은 상쿠스를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이자 최고신의 아들로 생각하여 열렬히 숭배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조인 사부스Sabus가 상쿠스의 아들이라고 믿었다. 이후 사비니 족이 로마로 진출하면서 상쿠스 숭배도 널리 퍼져나갔다. 퀴리날리스 언덕에는 상쿠스 신전이 세워졌으며, 그에게 제의를 올리는 날도 별도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히폴리투스Hippolytus(170?-236?, 히폴리투스는 고삐 풀린 말이라는 뜻)와 다른 저술가들에 따르면 시몬은 로마에서도 베드로와 말썽을 일으켰고, 끝내 마술의 실패로 극적으로 죽어 없어졌다고 한다. 시몬은 후에 <글레멘스 설교집>과 <시인是認>(글레멘스 문헌Clementine Literature. 초대 사도 직후 시대에 로마의 글레멘스 교황의 이름으로 널리 나돌던 외경外經 문헌을 가리킴)에 다시 언급되고, 고대와 중세의 전설에도 언급되며, 아마도 이 전설에서 파우스트Faust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단자 기타Gitta의 시몬은 역사적 인물이었고, 이 사람은 사도행전의 시몬과는 다른 사람으로 그는 실제로 2세기에 산 사람이다.
팔레스타인 가이사랴 태생의 신학자로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263-339)에 의해 인용된 바 있는 팔레스티나 출신의 그리스도교 개종 유대인 헤게시프스Hegesippus의 말에 의하면, 영지주의는 유대교의 분파들 가운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교부들인 그노시스파와 논쟁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역설하고 저서 <모든 이단에 반대하여Adversus haereses>(5권)에서 그노시스파를 비판한 이레나이우스Irenaeus(140-203,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라고도 함), 삼위일체라는 신학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한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Quintus Septimius Florens Tertullianus(터툴리안, 155?-240?) 같은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제논 등의 사상이 영지주의 이단의 주된 근원이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는 영지주의라고 하면 기독교 시대Christian era 중에 발달했던 사상체계, 즉 교부들이 그토록 격렬하게 대항하여 싸운 영지주의적 이단을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영지주의는 기독교가 시작되었을 때 이미 그와 더불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것은 하나의 모호한 종교현상에 지나지 않는, 즉 서로 다른 몇 개의 종교적 유전들로부터의 이론적 도움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구원론에 불과했다. 영지주의는 동방Orient으로부터 왔으며,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여러 종교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만다야교파Mandaeanism는 영지주의가 페르시아에서 종교적 형태를 이루었음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만다야교파는 아랍어의 만다 드하이예Mandā d’Haiyē, ‘인생에 대한 지식’에서 파생한 것이다. 원래는 팔레스타인에 있다가 이라크 습지에 있는 현재의 본거지로 이주한 소규모 종파였다. 만다야교도는 유대교의 신비주의파인 꿈란파Qumran sect와 엣세네파Essenes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있는데, 서로 닮은 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 종파들은 교리도 서로 비슷할 뿐만 아니라, 침례 의식도 행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지주의는 동방으로부터 유대땅, 특히 사마리아에 모습을 드러낸 후, 그곳에서 유대적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시대 초기에 영지주의가 갖고 있던 모습이며, 사도들은 그때 사마리아에 머물고 있던 시몬 마구스를 통해 영지주의와 만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