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현의 테마로 읽는 사찰문화재 25.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
정형화 틀 깬 파격 아이콘 한국 미술 수준 압권 상징
▲ 국보 101호로 지정된 지광국사 현묘탑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으며 지금은 사찰이 아닌 국립고궁박물관 야외에 놓여있다. 그럼에도 이 지광국사 현묘탑은 단연 한국 부도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장엄(莊嚴)은 불교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어다. 사전적으로 ‘웅장하며 위엄 있고 엄숙함’을 뜻하는 이 말은 ‘훌륭하게 배열한다, 짓는다, 꾸민다’는 의미인 산스크리트어 ‘vyu -ha’에서 비롯되었다. 장엄이라고 하면 흔히 채색이나 도안 같은 장식(裝飾)을 먼저 떠올릴 것 같다. 그런데 장엄은 장식에서 나아가 상징이고 도설(圖說)이기도 하다. 장엄을 잘 해석하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얻을 수 있으니, 어쩌면 불교미술을 해석하는 ‘키워드’는 양식이 아니라 장엄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불교미술에서 장엄이 가장 잘 표현된 예를 들라면 필연적으로 ‘지광국사 현묘탑’ 부도를 먼저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 고승 지광국사 부도
원주 법천사지에 모셔졌다가
일제기 일본인이 오사카 반출
불법반출 항의여론 거세지자
1915년에 현재 위치로 이전
6·25전쟁 때 상륜부 파손
일반 부도와 전혀 다른 양식
탑신 가득한 조각 장식 일품
장엄 극치 이룬 최고 부도
서울 경복궁 경내, 지금 국립고궁박물관 옆에 아름답고 커다란 부도 하나가 있다. 처음 보면 마치 탑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는데, 여하튼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장중한 풍모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바로 우리나라 부도 중 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본래는 강원도 원주 법천리에 자리한 법천사(法泉寺) 터에 있었다. 법천사는 고려시대 굴지의 사원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폐사된 이래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게 되었고, 너른 절터에는 이 현묘탑과 탑비 그리고 당간지주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이렇게 아무도 관심을 두지 못하는 점을 틈타 일본인이 이 현묘탑을 해체하여 후지타(騰田)라는 일본 귀족에게 팔았고 결국 오사카로 반출되어 나갔다.
그렇지만 이후 불법 반출에 항의하는 여론이 거세게 일자 조선총독부는 여기에 견디지 못하고 반환을 지시해 1915년에 천신만고 끝에 다시 현해탄을 건널 수 있었다. 하지만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당시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던 이 자리에 어정쩡하게 놓였고, 얼마 안 있어 여기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들어서면서 그대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바뀌고, 박물관이 2005년 용산에 새로 지은 건물로 이전하면서 다른 모든 문화재들도 따라서 옮겨졌다. 다만 이 지광국사 현묘탑은 석질이 약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그냥 그 자리에 남게 되었다.
높이 6미터가 조금 넘는 크기인 이 부도는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의 와중에 폭격의 여파로 꼭대기 상륜부가 부서졌다가 1957년에 긴급 수리한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경복궁 뜰을 걷던 이승만 대통령이 부서진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해 수리를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처음 일본에서 반환될 때는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 옆에 있다가 이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이후 국보 101호로 지정된 것처럼 이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를 받으며 우리 불교미술의 높은 수준을 상징하는 압권으로 인정받았다. 부도의 주인공은 고려시대의 고승 지광국사 해린(海麟, 984~1067)인데, 이 부도가 세워진 시기는 당연히 해린의 입적 얼마 뒤로 보는 게 순리일 것 같다
▲ 비례가 서로 다른 기단 부분.
형태 면에서 이 현묘탑이 주목을 받는 이유는 부도이면서 전체적인 모습이 탑(塔)형을 하고 있는 점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이 탑이고,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것을 부도라고 구분하는 것처럼 탑과 부도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탑에 비해 부도는 크기가 훨씬 작고 구조도 간단한 편이다. 부도의 전형적인 모습은 팔각형 기단부 위에 종(鍾)처럼 배가 부른 모습을 한 몸체가 올라가고 맨 위에 지붕처럼 생긴 옥개석이 얹히는 이른바 팔각원당형으로, 이런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충실하게 지켜졌다. 그러나 전무후무하게 고려시대 초 갑자기 기단부가 사각형이고 몸체도 탑의 모습을 한 부도가 나타났으니 바로 이 지광국사 현묘탑이다. 양식 면으로 볼 때 파격이고 혁명이었다. 이런 파격과 혁명은 이 현묘탑 곳곳에서 보인다.
부도는 이중으로 쌓은 사각형 기단(基壇) 위에 탑신을 놓고 그 위에 지붕 모양의 옥개석과 상륜부가 놓인 구조를 하고 있다. 보통 건축물에서 이중으로 기단을 놓은 경우는 불상을 봉안한 전각이나 불탑 혹은 야외 불상에 국한되고, 부도에 이중 기단이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우니 현묘탑의 이중기단은 아주 드문 의장(意匠)인 셈이다. 기단 모양도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이후의 탑이 하나 같이 팔각이 기본임에 비해, 이 탑은 사각을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양식을 과감히 선보이고 있다.
탑·부도·석등의 기단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우선 건축 면에서 볼 때 기초구조이므로 얼마나 오래 가게 하는가가 우선 여기에 달려 있다. 또 미술 면에서 보더라도 탑의 기단과 불상의 대좌(臺座)는 곧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수미산(須彌山)을 염두에 두고 표현되고 있기에 중요한 장엄이었다. 그 때문인지 기단과 대좌는 조각가들이 늘 고민하는 부분이었다. 기단 혹은 대좌의 평면이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고 팔각과 사각을 반복하면서 나타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는 팔각형이 기본이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사각형으로 바뀌었다가 후기가 되면서 다시 팔각형이 나타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조형은 변한다는 미술사의 원칙이 이 기단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기단의 중간이나 모서리도 탱주·우주 등 불탑에 보이는 장식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어 아마도 이 현묘탑은 처음부터 불탑을 염두에 두고 구성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현묘탑이 여느 탑이나 부도에 비해서 확실히 구분되는 점은 기단을 비롯해서 탑신의 각 면마다 가득 베풀어진 조각 장식이다. 꽃이나 구름 같이 자연을 묘사한 그림에 그치지 않고, 장면 그 자체로 어떤 이야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조각 장식도 있다. 장식과 이야기가 한껏 장엄된 것이다. 아마도 이 현묘탑을 만들면서 장엄이란 어떤 것인지를 작정하고 보여주려 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조각 장식은 맨 아래 땅과 바로 맞닿은 부분인 지대석부터 시작된다. 다른 부도나 탑에 비해 면적이 매우 넓은 편인데 특히 지대석의 네 귀퉁이마다 용의 발톱모양 같은 장식이 있는데 마치 이 지대석이 흔들리지 않도록 굳게 누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 장식은 물론 기능적인 면보다는 이 부도의 격을 높이려는 의미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대석부터 바로 위에 있는 기단까지 높이와 너비에 있어서 비례를 일정하게 두지 않고 층층마다 서로 다르게 해서 변화를 준 점도 건축적 매력으로 다가온다. 눈을 아래에서 위로, 다시 위에서 아래로 빨리 움직이며 보면 활동사진의 파노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쉬운 점은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도면을 보면 본래 기단 네 모서리마다 사자가 하나씩 있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점이다. 아마도 일본에 반출되었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없어진 것 같다. 없어진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반출을 위해 해체될 때 사리장엄과 나왔던 문서 뭉치, 금불상 등도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기단과 몸체에 새겨진 여러 장식 중에서도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는 장막(帳幕) 장엄이 가장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이 현묘탑을 해석할 때 가장 핵심이 되는 장식일 것이다. 사람들이 잘 꾸며진 가마를 들고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다. 가마의 지붕은 이른바 보개(寶蓋) 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그래서 이 현묘탑은 12세기 중국 요(遼)나라에서 여러 차례 황제가 가마를 보내왔다는 ‘고려사’ 기록에 착안해서 황제의 가마를 형상화한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탑이든 부도든 근본 목적은 사리의 봉안이다. 감은사 및 송림사 사리장엄처럼 우리나라 사리장엄의 기본은 전각이나 보개에 있었으니 여기에서 연원을 찾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현묘탑에 나오는 가마 메는 장식도 중국 황제가 보낸 가마가 아니라 석가모니 열반 후 나온 사리를 봉송하는 장면을 상징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중국 돈황 막고굴 148굴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담은 관을 나르는 ‘열반경’ 변상도를 표현한 벽화가 있는데 이 현묘탑의 묘사와 비슷하다. 이런 생각은 그 그림 주변에 불·보살·봉황 등의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된 것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이 장식들 하나하나가 모두 지고의 존재를 상징하는 장엄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탑신 앞면과 뒷면에 문비(門扉)를 새기고 그 좌우에 페르시아 풍의 창문을 낸 다음 여기에 영락(瓔珞)을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라든지, 안상(眼象)·운문(雲紋)·연화문(蓮花紋)·초화문(草花紋)·보탑(寶塔)·신선(神仙) 등의 장식이 여기저기 빈틈없이 장엄되어 있다. 우리나라 불교 조각 중에서 이만하게 화려한 장엄도 보기 드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웅건한 기풍이 없고 기교에 너무 치우친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면이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보아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감각이 돋보이고 풍부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인해 장엄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현묘탑을 우리나라 부도의 최고봉에 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이런 걸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부도의 주인공 해린이 워낙 존경받는 인물이었고 또 법천사의 사격도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유방선(柳方善)이 법천사에서 강의를 하자 권필·한명회·강효문·서거정 등 촉망받는 젊은 문인들이 찾아와 공부해 나중에 모두 이름을 얻었다고 나온다. 법천사는 조선 초기 지식인들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나중에 조선을 이끌었던 ‘젊은 그들’이 경내를 거닐다 이 현묘탑을 보며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궁금해진다. 극락에 있을 해린 스님도 자신의 사리를 담은 부도가 후대 사람들에게서 걸작으로 환호를 받는 걸 알면 일본을 넘나들며 유랑했던 험한 기억일랑 잊어버리고 함박 웃으며 좋아하고 있지 않을까.
[1278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