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토니아 합살루 해변 차이코프스키 벤치
에스토니아 합살루 해변에 작곡가 차이코프스키가 앉았던 벤치가 있다. 차이코프스키 벤치가 있는 곳은 해변에 위치한 평화로운 프로메나데 길을 따라 항구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합살루는 19세기 러시아에서 가장 좋은 스파 리조트로 알려졌으며 차이코프스키와 여러 명의 황실가족이 휴가를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1867년 러시아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도 27세 때 이곳 합살루 해변에 3개월 동안 여름휴가 와서 장관인 석양을 감상하고, 이 벤치에 앉아 ‘합살루의 추억’이라는 곡을 작곡했다.
사실 이곳은 여행 일정에는 없는데 차이코프스키를 만나고 싶고, 또 그가 앉았던 벤치에 앉아 그의 숨결을 느끼고 싶어서 가는 것이다. 합살루 발트해변에 들어섰을 때 바닷가의 장미가 만발하여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눈부신 낭만이 눈과 가슴을 뜨겁게 채운다. 긴 해변을 걸어서 들어가는 것조차도 아름다워서 조금 먼 곳에 위치한 차이코프스키 의자가 금방 다가왔다. 바닷가 안온한 정원에 회색 시멘트 의자를 놓고 의자 중앙에는 차이코프스키 두상부조, 그 아래에는 P.I. TSAIKOVSKI 1840-1893라고 쓰여 있고, 양 옆면에는 오선지 악보가 그려져 있다. 원래는 나무의자였는데 지금은 돌의자로 바뀌었다. 우리 부부는 잠시나마 벤치에 앉아 그날의 차이코프스키를 만나는 환상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러시아 작은 마을에서 탄생했다. 10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보였다. 모스크바 음대를 졸업했다. 결혼 2개월 후 이혼했다. 우울증도 앓았다. 동성애자였고, 콜레라로 사망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가 콜레라에 걸렸는데도 면회가 허용됐고 죽은 뒤에는 손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도록 허용됐다. 전염병을 앓았는데 격리되지 않았다. 또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다. 당시 러시아는 동성애자를 처형하거나 시베리아 유형을 보냈는데 대법관, 검찰 부총장 등 권력 핵심에 있던 동창들이 그의 명예를 고려, 콜레라 전염으로 죽었다고 위장하기 위해 사약을 내린다. 사약은 비소로 추정한다. 비소를 먹으면 콜레라 증세인 쌀뜨물 같은 설사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의 사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울증, 동성애, 그리고 자살에 관한 것이다.
그의 성장과정을 보면 우라르의 윕트킨스크에서 광산 감독관인 아버지와 프랑스 이민 3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다방면으로 재능을 보였다. 음악뿐 아니라 언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6세에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이해하였으며 7세에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고 한다. 음악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고 섬세한 귀를 지녔으며, 7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처음에는 법률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나중에는 음악을 더 좋아해 1862년에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해 가족들과 헤어져야 했을 때 어린 차이코프스키는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해, 사람들은 그를 강제로 떼어놓아야만 했다. 어머니에 대해서 지나친 사랑을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바래다주고 돌아가려 하자 그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뛰쳐나와 어머니가 타고 가는 마차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 어린 시절의 체험은 영구적인 쇼크가 되어 차이코프스키의 일생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어머니 이외의 여성에 대한 사랑을 숙명적으로 거부하는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그의 이러한 동성애의 원인을 살펴보면,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한 지나친 사랑, 그리고 그가 14세인 1854년 되던 해에 유행한 콜레라로 인한 어머니의 사망이다. 즉, 이렇게 영원히 문이 닫혀 버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그로 하여금 다시는 어떤 여성과도 사랑할 수 없는 상처를 만든 것이다. 그는 이것을 극복하고자 결혼이 그것을 해결해준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감상적인 성격인데다가 우울증이 찾아와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일생을 불안과 고독으로 살았다. 그는 신경질적인 데다가 겁이 많았다. 집에 있어도 불안했고 집을 떠나 여행을 해도 불안했다고 적어 놓았다. 그 불안의 원인을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스스로가 한심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눈물을 자주 흘렸다고 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눈물 제조기라고 표현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생활을 위해서 신문사와 교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러나 1876년이 되자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폰 메크의 미망인인 나데주다가 그의 후원자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후 13년간에 걸쳐 그를 위해서 6000루불의 종신 연금 등 거액의 돈을 지출하기도 했다.
37세까지 독신이었던 차이코프스키는 1877년 7월에 자신보다 10년 연하의 28세 음악원 여학생 안토니나 이류코바와 결혼을 하였으나, 9주만에 파경을 맞았다. 그것은 안토니나가 히스테리성 여성으로 그녀의 강력한 구혼에 저항할 수 없어 결혼했으나 2개월만에 파탄이 오고 더욱 심한 우울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바람을 피워 3명의 아이를 낳고, 차이코프스키는 이혼을 원했다. 그러나 안토니나가 부부관계의 지속을 원해 법률상으로 그들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차이코프스키가 이혼에 대해 강하게 나오지 못한 것은 그녀가 그의 동성애를 폭로 할까봐서였다. 차이코프스키는 아내의 성관계 요구에 자살 기도도 했었다. 결혼 전의 우울 상태가 심화되었고 작곡 활동도 완전히 저하되었다. 모스크바강에 뛰어들어 자살을 꾀했으나 미수로 끝났다. 결국 그녀는 정신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차이코프스키는 그녀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면서 그녀의 죽음을 슬퍼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돈을 대준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몹시 좋아했었다. 그녀는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경제적인 후원을 하겠다는 독특한 제의를 해왔다. 차이코프스키는 이를 쾌히 수락하여 그 후 14년에 걸쳐 많은 액수의 후원금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만나지 않는 대신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편지의 수가 무려 1,100여 통이나 되며 편지 속에는 음악에 대한 의견과 개인적인 속사정까지 쓰여 있어 훗날 학자들이 차이코프스키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에서 폰 메크 부인이 차지했던 비중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폰 메크 부인과의 결별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890년 10월 4일 폰 메크 부인이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가 파산하기에 이르러 앞으로는 그에게 보내던 지원금을 보낼 수 없게 되었다고 하고, 편지의 끝에는 그들의 우정도 끝났다는 것을 암시했다. 폰 메크 부인과의 편지 왕래가 끊긴 데서 온 낙심과 울분은 차이코프스키의 만년을 온통 어둡게 채색했다며,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이 엄청난 충격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임종 때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격분하고 원망스러운 어조로 계속 ‘저주받을 그녀’라는 말을 되풀이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이 단순한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차이코프스키의 사인은 콜레라가 아니고 자살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콜레라로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최후의 걸작이라고 전해지는 교향곡 ‘비창’을 1893년 10월 28일 초연하였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비창’의 초연을 지휘하고 나서 9일째 되는 날인 1893년 11월 6일에 사망하였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자살설이 제기되어 왔다. 차이코프스키가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작곡했다고 자랑하는 ‘비창’에 대한 일반의 반응이 그리 시원치 않은 것에 참담한 실패감을 느껴 자살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연애자였다. 그 상대는 스텐본크 툴몰 공작의 조카였다. 그는 근사한 청년이었다. 그 두 사람의 교제에 무엇이 있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공작이 황제에게 차이코프스키를 고소하는 편지를 썼고 그 고소장이 입법부의 주임 소추인이며 부 검사총장이었던, 니콜라이 볼소비치 야코비의 손에 넘어간 일이었다. 동성애는 그리스도와, 러시아 정교에서 기피되었는데 그것은 최대의 파렴치이며 신을 모독하는 행위이며, 당시 그와 같은 자는 투옥을 당하거나 유형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야코비는 차이코프스키의 명예를 생각하여 그에게 자살을 권했다. 또한 독사발을 받고 강요된 자살을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이것은 그 당시 권세가였던 스텐복크 훼르모 공작의 조카와 동성애 관계에 의한 것으로, 비밀재판의 결과로 독약을 먹고 죽으라는 선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차이코프스키는 독물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독약이 몸 안에 퍼지는 시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이 되자 그는 ‘이것으로 죽는다. 마지막이다’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쌀뜨물 같은 설사를 했다. 이것은 콜레라로 사망했다는 가장 중요한 소견이다. 그러나 그런 증상을 보이는 독극물이 있는데 바로 비소다. 즉 차이코프스키는 비소가 들어간 독극물을 먹고, 콜레라와 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토록 아름답고 훌륭한 선율을 만들었던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에 따른 자살을 했다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의 특징은 우울하고 감상적이고 정서가 끈끈한 작품이 많다. 교향곡 ‘비창’을 초연했을 당시 청중들은 냉담과 무료함을 나타냈으나 사후에 즉시 이 곡이 재현되자 청중은 감동하고 흐느껴 우는 소리가 오케스트라 소리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곡은 어둡고 우울하며, 특히 제 4악장은 차이코프스키가 자기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여겨졌다. 뮌헨 정신과의사 폰 뮤렌다르 박사에 의하면, 차이코프스키는 26세부터 52세까지 26년 동안 12회의 울병기를 보냈다고 한다. 박사는 정신과 입원 환자에게 여러 가지 음악을 들려줘 보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을 들려주면 내인성 울병환자의 증상이 심해지고 절망적이며, 때로는 자살하려는 마음까지 갖게 되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따라서 박사는 차이코프스키의 울병은 내인성일 것이라고 하였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은 힘차고 화려하며 또 정열에 넘친 일면과, 우울하고 감상적인 일면이 있다. 이것은 차이코프스키의 정신적인 양면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눈과 얼음에 갇힌 조국 러시아를 그린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의 우수의 느낌,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밝은 햇빛 아래서 작곡한 교향시 ‘이탈리아 기상곡’에서 보는 명랑함과 경쾌함, 그리고 라로의 ‘스페인 교향곡’을 듣고 만든 바이올린 협주곡의 화려함과 같은 식이었다.
나는 오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20년이 된 2013년 8월 11일 여름 오후에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이토록 눈부신 바다와 청명한 하늘, 하얀 구름 모두 합하면 미술 걸작품 명화 같은 이 해변에서 그의 숨결을 만난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벤치로 명명된 그곳까지 걸어서 오가며 본 발트해의 해변 풍경도 비경이다. 에스토니아는 꽃 문화가 발달된 나라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준다. 발트해변 입구에서 본 아름다운 장미는 그것을 증명하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에스토니아 작은 도시 합살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품고 가는 소중한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