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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들 세상사나 자기 생각에 깊이 빠져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두 사람, 육화 강생하신 하느님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품에 안아보는 특전을 누린 예언자들이 있었으니, 시메온과 한나였습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상 의롭고 독실했습니다. 언제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성령께서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계셨으며, 성령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여 예언자 한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루카 2, 36-37)
보십시오. 한나 예언자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지복직관할 수 있었던 비결이 짧은 문장 안에 정확히 들어 있습니다. 이른 나이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큰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도 항상 하느님만 바라보며 신앙생활에 충실했습니다.
요즘 우리 가톨릭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7-80대 자매님들처럼 단 하루도 빠짐없이 미사에 참석하며, 교회 일에 협조적이었습니다. 항상 묵주를 손에 놓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는데, 신명기에 따르면 아세르 지파는 모세로부터 엄청난 축복을 받은 모범적인 지파였습니다. “아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아세르. 그는 형제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가 되어 발을 기름에 담그리라. 너의 빗장은 쇠와 구리 너는 한평생 평안하리라.”(신명 33, 24-25)
한나의 좋았던 시절 7년과 현재 나이 84세에 대한 주석가들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나가 남편과 함께 산 7년 세월은 주님께서 육신으로 사셨던 시간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84세에 대해서는, 일곱에 열둘을 곱하면 84가 됩니다. 일곱은 또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전 과정을 나타낸답니다. 열둘은 열두 사도의 완전한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한나 예언자가 84세란 표현은 그녀가 삶의 전 과정을 사도들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히 살아온 신앙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한나는 갖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84년 동안, 아니 평생토록 충만한 은총 속에 주님을 섬겨온 신앙인의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한나 예언자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습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참으로 많은 고생을 겪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가장 불행한 인생의 대표 격인 ‘청상과부’로 60년 이상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삶을 보십시오. 그 오랜 세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기도의 결과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큰 상급을 내리셨는데, 그것은 바로 ‘지복직관’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뵙는 것이었습니다. 성모님의 품에 안겨 계신 만왕의 왕,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품에 안아 본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어두웠던 시기, 아무런 의미도, 아무런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유다 백성들에게 보내셨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은 기다리는 일이군요. 비록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의 나날이라 할지라도 그저 기다리는 일입니다. 꼬이고 꼬인 인생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풀 방법이 없어 보이는 실타래를 손에 들고 있다 할지라도 기다릴 일입니다.
어둠이 깊다면, 그것은 어쩌면 새벽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고통의 정도가 극심하다면 그것은 어쩌면 고통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정말 너무 너무 지루하다면 기다림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기다리다보면 선하신 하느님께서 언젠가 반드시 우리 앞에 좋은 날을 펼쳐놓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노고를 크게 치하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에 백배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한나 예언자에게 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도전하지 않는 희망은 합리화된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복음: 루카 2,36-40
얼마 전에 어떤 신자분이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있는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고 싶고 힘든데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합니다. 저는 그저 인내를 가지고 희망하라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빠진 것 같아 이 강론으로 설명을 대신합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사.시.를 끊임없이 읽었고 단식하였습니다. 만나주실 때까지 할 작정이었습니다.
루카 복음 2장 36-40절에서는 예언자 안나가 오랜 세월 동안 금식과 기도를 통해 메시아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안나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헌신하며 기도로 하루하루를 채우며 메시아를 볼 수 있는 그날을 준비했습니다. 그녀의 기다림은 희망 속에서 도전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기다림과 희망은 반드시 실천과 도전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월터 미티의 이야기는 이러한 주제를 현대적인 방식으로 잘 보여줍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주인공 월터 미티의 삶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월터는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상상을 통해 자신을 위로하며 살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는 모험적인 삶을 꿈꾸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는 삶을 희망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의 삶은 단순히 희망과 상상의 반복일 뿐, 현실을 바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순간 용기를 내어 자신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기로 결심했을 때,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월터는 회사의 중요한 사진을 찾기 위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상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진정한 모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빙하를 건너고, 화산이 분출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자신의 상상력을 현실로 실현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두려움에서 벗어나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과도 연결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상상과 희망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줍니다. 도전과 행동이 동반되지 않는 희망은 단순히 합리화된 절망일 뿐입니다. 월터의 삶은 도전과 실천이 있을 때 희망이 어떻게 현실로 변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제, 또 다른 실화를 통해 희망과 도전의 힘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영화 ‘바람을 길들인 아이’(The Boy Who Harnessed the Wind)는 말라위의 한 소년 윌리엄 캄쾀바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윌리엄은 극심한 가뭄과 기아 속에서 절망에 빠진 마을에 희망을 가져다준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고자 했지만, 자신이 가진 것은 학교 도서관에서 배운 과학 지식과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폐품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작은 자원을 활용해 풍차를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이 풍차는 마을에 물을 끌어올려 농사를 가능하게 했고, 그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윌리엄은 단순히 기적을 기다리며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희망을 행동으로 옮기고, 실질적인 노력을 통해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의 아버지 역시 처음에는 그의 계획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들의 열정과 결심에 감동해 마침내 협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람과 아버지를 감동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도와주었다가는 자신이 바람과 아버지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교만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희망이 당신을 감동시키기를 기다리시는 이유입니다. 결국 윌리엄은 자신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가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음을 가르칩니다. 참된 기다림은 준비된 기다림이며, 희망은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가집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무엇을 하였을까요? 약속의 땅으로의 여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욥은 또 어땠나요? 자기 자신과 싸웠습니다. 예수님께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은 어떤가요? 절망하지 않고 그분의 옷자락을 만지기 위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5)
희망 자체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희망은 믿음을 낳고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희망한다면 무엇이든 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된 기다림, 실천하는 기다림을 해야 합니다. 단순히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길들일 수 있는 도전과 준비를 통해 우리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응답하며 도전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참된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루가 2,36-40: 안나라는 과부의 기쁨
오늘 복음에서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지내다가 하느님의 구원을 발견한 한나라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 여인이 과부라고 소개한다. 인생에 있어서 과부라고 하는 생애는 남편과 사별을 하고 외롭고 슬픔이 가득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슬픔은 인간적으로 참으로 비통에 빠지기 쉬운 경우라고 하겠다. 한나는 사랑하는 이를 잃은 뼈아픈 체험을 통하여 현세의 삶과 죽음의 허무함을 통감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께 더욱 의탁하는 경우이다. 현세에서 당하는 슬픔은 단지 이런 여인의 슬픔만이 아니라,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당하는 모든 고통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외면하게도 되고,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도 있어 그 뿌리를 튼튼하게도 한다. 이 모든 것은 그러한 고통을 통해서 결국 하느님을 자기 생활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는 여인은 결혼한 후 7년 동안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84세에 이르도록 성전에 몸담아 하느님께 봉사와 기도로써 지내왔다. 이것은 하느님 공경에 참으로 정성스러운 생활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그러한 그 할머니가 성전에서 봉헌되는 구세주 아기 예수가 누구신가를 알아보고 기뻐하며 다른 이들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증언하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의 한나 할머니는 과부가 되었으나 자신의 삶이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았고 충실히 믿었기 때문에, 또 하느님이 자신의 삶에서 최선의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성전에서 일생을 봉사와 기도로써 살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나는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구세주 아기 예수를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기쁨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러한 삶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2024년 파리올림픽 여자 공기 소총 10m에서 올림픽 역사상 대한민국 100번째 금메달을 거머쥔 반효진 선수가 자기 노트북에 붙여 놓은 쪽지가 화제였습니다.
‘어차피 이 세계 짱은 나다.’
생각한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사회심리학 이론 중에도 자기 충족적 예언이 큰 효과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 버리면 그것에 맞게 자기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속담도 기억납니다. ‘말이 씨가 된다.’
생각의 힘이 이렇게 대단한데도 생각을 닫아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히려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 변화를 멈춰버립니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면서 쉽게 포기합니다.
언젠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중학생을 만났던 적이 있습니다. 방에 나오지 않고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면서 그 부모가 한 번 만나주길 원해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학생은 사람 만나는 것도 힘들고, 이 세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가상의 세계에서의 삶만이 이 아이에게 행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앞으로 엄청나게 많을 텐데 할 수 없다면서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서 이렇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거 해 볼 걸….”
생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이 힘을 키우는데 주님과의 대화는 결정적입니다. 사랑이신 주님은 생각 안에서 큰 힘을 주시며,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후회를 줄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한나라는 예언자도 생각의 힘을 믿었던 분이었습니다. 주님을 뵙게 되리라는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한두 해의 노력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여든네 살이 될 때까지 자기 생각이 이루어지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즉각적인 결과만을 바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포기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큰 기쁨과 함께 새로운 변화를 갖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역경 속에서도 계속 의욕을 가져라. 최선의 결과는 곤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마틴 브라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1요한2,17)
세상이
강물처럼 흘러가듯
세상의 욕망도
강물처럼 흘러간다네.
우리의 생각도 흘러가고
우리의 삶도 흘러가고
우리의 재능도 흘러가고
우리의 의로움도 흘러가고
우리의 슬픔도 흘러가고
우리의 의지도 흘러가지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저는 매년 <눈맞춤 성탄미사>를 하면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눈맞춤을 하는
교우들의 눈빛을 바라봅니다.
꼭 안고 무언가를 속삭이듯
마음 한 켠에 있는 말을 눈빛으로 전합니다.
또 눈망울에 아기 예수님을 가득 담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저 또한 가슴 뜨거움이 전해 옵니다.
저런 눈빛으로 교우들을 바라보고
저런 눈빛으로 이웃들을 바라보면
좋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구원을 약속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강생하신
신비의 기적을 오늘 이 자리에서
보게 됩니다.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현세대와 지나간 역사의 세대가 하나가 됩니다.
우리 마음에 밝게 빛나는
불빛이 되어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강생의 의미를 깨닫고
나의 삶도 아기 예수님을 닮은 삶으로
탄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2,12-17
12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그분의 이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13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4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쓴 까닭은
여러분이 강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며
여러분이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15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7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6-40
그때에 36 한나라는 예언자가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예수님의 부모는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