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도 9,1-20; 요한 6,52-59 / 부활 제3주간 금요일; 2026.4.24
오늘부터 부활 시기의 독서인 사도행전은 베드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선교 활동에 이어서 바오로를 중심으로 한 선교 활동을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시며 보여주신 발현 가운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오늘 독서에 나오는 사울의 회심 사건일 것입니다. 박해자가 선교사로 인생을 전환하게 한 이 사건은 초대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뜨거운 잇슈였을 뿐만 아니라 매우 중대한 논쟁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이르신 말씀에 따르면, "그는 다른 민족의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사도 9,15)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꽃길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 반대로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고난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기운까지 예수님께서 주셨을 따름입니다.
사울의 회심 사건은 그가 개인적으로 영웅적인 결단을 내려서 한 일이 아니었고 자진해서 결행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번개 빛과 천둥 소리로 발현하시어 박해자로 설쳐대던 그의 발길을 강제로 돌려세우셨고,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를 비롯하여 초대교회의 여러 신자들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기도하는 가운데 사울을 받아들여서 공생활 동안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들려줌으로써 사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도록 이끌었으며 마침내 선교사로 새로이 살아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20여 년에 걸친 선교 여행의 결과로 사울이 초대교회를 활성화시키고 그리스와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회심은 한 번 일어단 단순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주도 아래 초대교회 온 신자들이 관심을 갖고 응원하여 이루어진 '사태'였으며, 또한 그 덕분에 20여 년 동안 선교사로서만이 아니라 사도로서 초대교회를 활성화시킨 '현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사건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 보겠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스테파노의 노선을 충실하게 따르던 신자들이 그 중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한 안티오키아로 향하자 이들을 모조리 잡아 들이겠다고 사울은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대사제로부터 체포영장을 자진해서 발부받아가지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느닷없이 번쩍이는 번개 빛이 가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눈부신 빛에 일시적으로 눈이 멀어 땅에 고꾸라진 사울에게 큰 소리가 울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이 소리를 동행하던 사람들은 그저 천둥 소리로만 들었기에 멍하게 서 있었지만, 사울만은 그 소리에 담긴 음성이 들렸고 이에 되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사도 9,5). 그에 대한 대답이 사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이 당시까지만 해도 사울은 율법에 열성적이다 못해 광신적인 바리사이였기에 그 당시의 대다수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해서 하느님을 사칭하고 성전의 권위까지 모독한 한낱 거짓 예언자로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거짓 예언자에 불과했다면 이런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빛과 소리보다 그 안에 담긴 음성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사도행전은 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나니아스에게 위로와 안수를 받고 곧바로 회당에서 선교사로서 복음을 선포하였다고 호의적으로 함축해서 보도하고 있습니다만(사도 9,20), 정황상으로 보거나 인간 심리로 보거나 이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대한 객관적 보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울 자신이 이 사건을 회고하며 선교사로 나서기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렸다고 쓰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습니다.(갈라 2,1) 아마도 이 회고가 실제 역사적 현실에 부합할 것입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라비아 사막, 시나이 사막 등에도 가서 홀로 고요한 가운데 구약 성경을 꼼꼼이 다시 읽으며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다시 성찰했을 것이고, 타르수스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도 잠심하고 피정을 하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았을 것입니다. 말씀과 신앙을 성찰하는 가운데 이스라엘 조상들의 역사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을 것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나중에 바르나바와 함께 시작한 1차 선교 여행에서 들렀던 비시디아주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행한 설교가 그 근거입니다.(사도 13,13-43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습니다. 당연히 그 촛점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계시 진리였습니다. 사도행전 9,20의 기록은 회심 사건 이후 30여 년 동안 틀림없이 실현되었습니다.
이 회심 과정에서 사울이 한가하게 구약성경만 훑어보았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니아스를 비롯한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르며 직접 가르침을 배운 이들을 부지런히 두루두루 찾아다니며 그분의 강생부터 부활까지 샅샅이 물어보고 찬찬히 따져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초대교회 신자들이 공유하던 전승을 배우며 물려받았을 것이고, 이 전승을 나중에 자신이 만난 예비자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1코린 11장).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잘못 알고 단단히 오해하던 부분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1코린 11,24)시던 성체와 성혈의 성사를 통해서 그분이 '살과 피로 오신 하느님'이심을 믿었고 따라서 사람이 되어 오신 강생의 신비를 증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 죽임을 당하셨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이 아니었더라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헛될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1코린 1,14 참조)
이렇게 사울은 강생부터 부활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전부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사람이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겠다는 말씀을 그는 진리로 믿었습니다.(요한 6,56) 이것이 부활의 진리요 영원한 생명의 현실임을 자신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믿을 진리로 선포하기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쳤고, 결국 그는 가톨릭교회 2천 년 역사상 최고의 선교사로서, 숱한 후대의 선교사들을 부르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민족들에게 당신을 알리기 위해 선택하시고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우신 예수님의 개입은 이렇게 주효하였습니다. 그런데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워 선교사로 삼으신, 이 극적인 회심 사건만큼이나 극적인 개종 사건이 현대 한국사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1956년 11월 17일자 한국일보에는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나”라는 글이 발표되었는데, 1946년부터 개설된 명동 성당 가톨릭교리강좌에서 예비자 교리를 배운 지성인들 가운데 최남선(崔南善, 六堂, 베드로, 1890~1957)이 불교에서 개종한 이유를 밝혀 학계와 종교계는 물론 일반 대중들에까지 일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는 벽초 홍명희,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시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었던 학자요 문필가였습니다. 1919년 삼일 독립만세운동 당시에는 민족 대표들의 위임을 받아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기도 했습니다. 한학과 역사학에 뛰어났던 그는 평생 고전을 정리하고 주석하여 다방면에 걸쳐서 국사와 고전 서적의 간행, 복원, 한글 번역 작업을 하였는데, 독립선언서에도 그의 역사의식이 듬뿍 담겨 있거니와, 1927년에 단군을 시조로 한 고조선이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임을 밝히는 <불함문화론>(弗咸文化論)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성과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는 그가 남긴 수많은 업적 가운데에서 한국의 문화사적 이해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업적으로서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 문화를 고찰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을 통하여 보는 동방문화의 연원과 단군을 계기로 한 인류 문화의 일부 측면’을 고찰한 이 논문에서 그는 우리 민족 문화의 기원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요지는 단군이 지녔던 신앙은 한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가 ‘불함문화권’이라고 주장한 동북아시아의 넓은 지역에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불함’이란 말은 '밝다'는 뜻과 '크다'는 뜻의 순 우리말로서, 밝고 큰 문화가 우리 한민족의 문화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그의 이런 문화적 시도는 독립선언서 작성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일제는 고조선의 역사를 지워버리고자 단군의 역사를 한낱 신화로 격하시키고자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육당 최남선의 이러한 노력은 이벽 세례자 요한이 일찍이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를 접하고 나서 이 ‘천주’는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우리 민족의 단군 역사에 이미 숭배되고 있었던 바를 알고 천주교 신앙 운동을 벌인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남선 베드로가 개종의 취지를 밝히면서, 가톨릭의 역사성과 보편성 그리고 진보성을 내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강생과 부활이 민족의 역사 안에서 뿌리내리고 꽃피워 열매 맺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강생으로 말미암아 부활이 시작되듯이, 민족의 역사 안에 신앙이 토착화 되어야 민족 복음화도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초대교회가 사울의 극적인 회심으로 선교 활동의 활력을 얻어서 가까스로 서방 복음화의 길이 열었듯이, 이제 남은 동방의 복음화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쓰실 그릇도 몸소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도들의 신중한 노선을 돌파하고 예수님의 정통 노선을 견지하고자 치명까지도 불사했던 스테파노처럼, 보편교회와 역대 교황들의 간절한 여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적거리며 답답하게 머뭇거리고 있는 한국 천주교회에 채찍을 가할 인물도 눈여겨 보고 계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