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주인과 함께 생활하는 애완견에게 목줄을 채우면 처음엔 거부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반대로 목줄을 채워서 외출하게 된다면 콧바람을 쐰 강아지는 그 다음부터 주인이 서랍에서 목줄을 꺼내기만 하면 빙글빙글 돌면서 좋다고 컹컹 짖을 것이다. 목줄은 자유를 억압하지만 외출해서 바깥나들이를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강아지에게 목줄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상징이 된다. 이처럼 꿈꾸는 자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령 10대에 진즉 자신의 진로를 설정하고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면 20대에 꿈의 무지개를 그렸을 테고, 이미 30대에는 사람들에게 그 꿈꾸는 무지개를 선연하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미리 풀이 죽을 필요는 없다. 살아가다보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먼발치를 앞선 사람이 먼저 선착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구약성경의 인물 중에 아브라함의 증손자 요셉은 꿈꾸는 자로 별명이 붙여질 만큼 꿈을 자주 꾸었고, 그 꿈은 모두 적중했다. 어릴 때 자신의 곡식(穀食) 단에 형제들의 곡식 단이 엎드려 절하는 것을 보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더라는 꿈을 형제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장자우선주의에 형제의 위계서열이 엄격했던 유대인의 정서에서 요셉의 꿈은 그의 인생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형제들이 모함해 그를 구타하고 구덩이에 빠뜨렸고, 나중에는 외국의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후 부모에게는 짐승에게 물어 찢겼다고 거짓말을 했다. 시간이 흘러 대기근이 들자 요셉의 형제들이 이집트에 가서 곡식을 구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상대방이 요셉임에도 형제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은 이집트인의 의상을 입고 통역을 두고 형제들을 만났기에 형제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양식을 얻기 위해 요셉과 만날수록 과거의 그들의 악행들이 악몽처럼 재현되는 것에 두근거리는 심정을 제어하기 힘들었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이 사랑했던 라헬이 산고 끝에 낳다 죽었기에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던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할 때 형제들은 천벌 받는 심정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결국 요셉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형제들을 용서하고 부친을 모셔오라고 할 때 그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 숨을 한꺼번에 몰아 쉴 수 있었다. 마침내 수십 년 만에 부친을 상봉한 요셉은 꿈꾸는 자의 화려한 대미를 그의 꿈 그대로 장식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어촌이었던 울산에 현대그룹의 심장을 이식했던 정주영 회장의 발자취도 기실 그의 꿈의 실현이 드라마틱한 우여곡절을 겪어 성취된 덕분이었다. 잘 알다시피 현대중공업이나 조선소를 건설할 때의 일화나 포드자동차와의 협력을 파기하고 독자적으로 현대자동차를 세운다고 했을 때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왕회장은 그 불가능을 가능한 현실로 일궈냈다. 때마침 정부주도의 공업단지 조성과 맞물려 울산은 전국 최고의 부자도시에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 후 성장기와 호황기에는 잘 몰랐던 것을 침체기와 불황 때는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것이 냉혹하고 엄정한 현실이다. 전부 "어렵다, 힘들다!" 하는 이즈음 "하면 된다. 해보자!"는 진취적 정신으로 나아갔던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의 신념과 도전정신을 새로운 시선으로 배웠으면 좋겠다. 꿈꾸는 자의 자유는 애오라지 꿈꾸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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