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김명옥인 가수 나미는
1957년 10월 9일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레코드점을 경영했던
부친 김종은씨와
모친 김귀례씨의
1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레코드가게에서 팝송과 더불어 성장했다.
네 살 때부터 하루종일
틀어대는 최신 유행팝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음반을 구입하러 온 미군들은
앙증맞게 춤을 추며 재롱을 부리는
네 살짜리 꼬마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이내 동두천 일대에선 '똘똘이 춤'을
추는 그녀를 모르면 '소련에서 보낸 간첩'으로
통했을 정도.
일곱 살 때 미군장교의 소개를 받은
미8군 쇼 프로모터가 찾아왔다.
6살 때 미8군 부대에서
If You Go Away 부르며
슬픈 가사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
8살 때 노래하는 모습
9살무렵 미8군에서
The House of the Rising Sun 부르는 모습
딸의 예상치 못한 인기에
부친은 레코드점을 정리하고
쇼 가수로 키우기 위해
서울로 이사를 결심했다.
동두천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후암동으로 이사를 해
삼광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를 따라 시내 곳곳의
극장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다.
당시 국내 쇼 무대는
박활란, 하춘화, 오은주 등
꼬마 스타들의 전성시대였다.
나미는 발군의 춤 솜씨와
노래재능으로 단숨에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5학년이 되자 당대 최고 인기가수
이미자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에
어린 시절의 이미자 역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윤복희씨의 인생을 그린
미니 아가씨에
꼬마 윤복희로도 출연했다.
70년 상도여중에 입학,
2학년이 되던 71년
새롭게 결성된 5인조
여성 록그룹 해피돌즈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 멤버들은 기타와 플롯 겸
보컬에 김명옥(나미), 기타 겸 섹스폰 김승희,
베이스 이종숙, 기타 겸 트럼본 김승미,
드러머 김은숙이었다.(맨 왼쪽 나미)
미8군쇼에서 팝의 본고장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해피돌즈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과 경쟁하여
성공을 도모하였으나
좌절을 겪어야 했다.
15세 소녀였던 그녀는 1978년
스무살 처녀로 돌아왔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었지만
뒤늦게 남동생이 임파선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해피돌즈는 해산이 되었다.
그녀는 남동생의 죽음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국내에 눌러앉게 되었다.
그러다
나미는 솔로 가수로
국내 무대에 복귀하기로 결심하고
록 그룹 검은 나비의 오디션에 응했다.
이 때가 1979년.
헌데 오디션을 지켜보던
이탈리아 출신의
일본 빅터 레코드사
전속 작곡가 프랑코로마노가
원더풀을 연발하며
자신의 로마노 밴드 객원 가수로
나미를 영입했다.
귀국 첫 복귀 무대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이었다.
활동을 시작하자 곧 소문이 났다.
블루벨즈 출신으로
남성듀엣 머슴아들의
멤버였던 장세용이 찾아 와
매니저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나미와 프랑코 로마노 밴드를
그룹 나미와 머슴아들로 합쳐
첫 앨범을 제작했다.
이듬해 출반된 그녀의 2집 난 사랑했어요
그러다 그녀는 80년대 옴니버스 앨범에 참여한다
81년도 앨범 발표
82년도 앨범 발표
83년 앨범 발표
86년도 대표곡모음 발표
84년 이듬해에는
트위스트와 록큰롤을 믹스한 듯한
빙글빙글을 발표,
새로운 물결을 주도했다.
언론은 전국이 빙글빙글 신드롬에 걸렸다며
나미를 단발머리 뉴웨이브 가요의
선두 주자로 대접했다.
나미의 이 노래는
85년 최다 방송 가요로 기록되고
KBS-TV 가요 톱 10에서 5주
정상을 고수해
골든 컵의 영예를 안겨 주었다.
당시 디스코의 요정으로 떠오른
그녀는 5집 앨범에서 각기 개성이 다른
유혹하지 말아요, 보이네, 슬픈 인연, 나비 등
4곡을 동시에 히트시켜
화제의 주인공에 올랐다.
결국 85, 86년 KBS, MBC 등 양대 방송은
그를 10대 가수상의 정상에 등극시켰다.
나미 윤수일, 이선희 전영록, 최진희 구창모, 정수라 김범룡, 주현미조용필
솔로 활동 7년만인 86년 그녀는
나미와 불새라는 7인조 그룹을 결성해
해외 진출을 꿈꾸기도 했다.
87년 3월엔 신곡 발표 및 팬 클럽 결성을 위해
63빌딩 컨벤션 홀에서
국내 첫 디스코 콘서트를 개최했다
(당시 모습)
많은 인기에
에바스 화장품 CF모델로도 나서고
88년엔
앙드레김과 롯데호텔에서 패션쇼를 겸한
조인트 디너쇼를 열기도 했다.
89년 3월 트로트 열풍을 감지한
그녀는 발라드 풍의 트로트
가수로 다시 변신을 꾀했다.
6집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로
가요 차트에 다시 진입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홍보도 하지 않은
인디언 인형처럼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몰고 왔다.
팬들은 댄스가수 나미를 원했다.
이에 평범하게 불렀던 이 노래를
DJ 붐붐과 함께
색다른 패턴으로 재 취입을 시도했다
독특한 춤과 더불어 랩을 도입해
리믹스 댄스 뮤직으로 거듭난
인디언 인형처럼은 가히
폭풍 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특히 나미의 헤어스타일은
새로운 유행의 기준이 되었다.
서울 시내 미용실에는
나미의 추장머리 스타일을 요구하는
고객들이 줄을 섰고
인형 가게에선 벌거벗은 모습으로
춤을 추는 검은 인디언 인형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이 생겨났다.
마침내 KBS2 TV 가요톱10에 4주 연속
재등극하면서 이 곡은 최대의 히트곡이 되었다.
그 결과 87년에 이어
90년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고
진유영 감독의 영화 독재 소공화국에
발탁되는 행운까지 안았다.
그녀는 92년 윤시내와 함께 한
조인트 음반을 발표 했다
그리고 92년도에 변신 앨범 발표
싱글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한
그녀는 97년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인콘서트를 열며 건재를 과시했다.
97년 콘서장에서
그리고 이후 골든디스크 앨범 발표
그후 2008년 아들 최정철군과 함께 부른 노래
IF I COULD
아들과의 많은 인기에 힘입어
나미님은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하게 된다.
나미님을 기다리고
보고 싶은 팬들에게 엄청난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2009년 3월 14일
팬들과의 만남
그리워지는 길목에 서서 마음만 흠뻑 젖어가네 *RepeatX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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