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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공룡능선을 다녀와서
저는 산에 관한한 비기너입니다.
젊었을 때 딱히 다른 거 한 것도 없으면서 산에도 그다지 가지 않았습니다.
회사 다닐 때도 1년에 한번 근교 야유회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년전 고문으로 물러나면서 학교 동기 산악회 두군데와 한수회에 조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봄이면 산에 그렇게 꽃이 많이 피는 줄 알았고, 가을이면 산에 단풍이 그토록 아름답게 물드는
줄 알게 되었습니다.
한수회는 2015년 3월에 대모산에서 신입 첫 산행을 비교적 가볍게 마치고, 다음달 4월에 북한산 포대능선을
따라 가게 되었는데, 몇년을 신지 않은 등산화 밑창이 지하철 이동 중 벌어지는 해프닝으로 낭패를 보는 일도
겪었으며, 하산길엔 다리가 아파 고생할 정도의 초보 실력이었습니다.
그러다 5월엔 백암산 1천미터를 올라 가고, 이후 1년 남짓 서울 근교 산을 다니다가 이번에 '공룡능선'이라는
저로서는 일대 모험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설악산 공룡능선!
이전까지 설악산하면 비선대 부근 정도는 가 본 적이 있고 , 대청봉은 들어는 봤지만, 솔직히 공룡능선 용아장성
같은 건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산에 다니면서 띄엄띄엄 산에 정통한 사람들로부터 '공룡능선'이 언급되길래 인터넷을 찾아 봤습니다.
『내외설악을 남북으로 가르는 능선으로 마등령에서 희운각 대피소 앞 무너미고개까지, 대한민국 명승 103호로
지정되어 있고, 국립공원 100경 중 제1경으로 아름답고 웅장하며 신비롭고, 속초시와 인제군의 경계이기도 하며,
구름바다가 만드는 절세가경(絶世佳景)』이라 했습니다.
구미가 확 당겼습니다.
그러나 산행루트를 검색을 해 보고는 역시 어렵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악동 소공원-신흥사-비선대-천불동 계곡-양폭-무너미고개-신선암-1270m봉-마등령-금강굴-비선대-
설악동 소공원으로 돌아오는 총거리 18km 에다 예상소요시간 12-14시간』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아 - 열서너 시간을 하루에 걸을 수 있을까?
지난달 우연히 NHK스페셜 『파타고니아 빙하 한계 레이스 141km』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세계적 철인 선수들이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神의 영역 (몸이 극도로 힘들어 지면 뇌가 멈추라 명령해도
납덩이 같은 몸을 끌며 게속 걷게 되는 숨겨진 능력)에 도전하는 세계 각지의 극한 코스에서 열리는 경기였는데,
파타고니아의 춥고 험준한 141km의 산과 계곡을 18시간 남짓으로 거의 뛰다시피 해서 주파하는 걸 보았습니다.
60세의 최고령 도전자도 있었습니다.
감히 이런 사람들과 비유할 건 못되지만 용기를 내서 18km 정도는 더 늦기 전에 걸어 보기로 작정하고 준비에
들어 갔습니다.
우선 몽베르 아웃렛에 들러 헤드랜턴과, 발목이 올라오는 등산화, 1리터짜리 수통, 3리터 배낭을 새로 구입하고,
수시로 대모산/구룡산 루트에서 기초 체력을 다지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감기 몰살로 체력훈련은 1회에 그쳤고 출발일까지 감기가 낫기만 기다려야 했는데, 다행히
그럭저럭 괜찮아져서 10월18일 오후 동서울 터미널로 나갔습니다.
조금 일찍 도착해 2층 '명동 할머니 국수집'에서 모밀 한그릇 먹고 3시에 출발, 어둑해 지는 속초에 도착해 바로
중앙시장으로 직행해 세꼬시와 방어회로 저녁을 한 후 영랑호 콘도에 들었습니다.
이 콘도는 일본에 있던 80년대 후반에 세계적 리조트로 개발될 것으로 믿고 43평 빌라형을 천삼백만원에 샀다가,
25년도 더 흐른 지난해에 천백만원을 받고 팔아버린 저의 대표적 투자실패 사례이기도 합니다.
10월 19일 수요일 맑음.
택시를 불러 우리 일행이 숙소를 떠난 시간은 새벽 04:45, 아직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설악동에 도착해 아침을 먹으려 했으나 문을 연 식당이 없어 식사를 거른채 오늘 하루 긴 여정을 고려해 그냥 길을
재촉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머리에 랜턴을 걸어 켜고 설악동을 지나고 신흥사 대불 앞을 지나 비선대까지는 아직 주위가 캄캄해
그저 발밑만 보고 걸었습니다.
다행히 음력 열아흐레라 달이 아직 둥글어서 어렴풋이 암벽과 나무들의 실루엣은 감상할 수 있었고, 새벽이었지만
춥다고 느낄 정도는 아닌 기온이었습니다.
산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하늘을 올려다 보니 주먹만한 별들이 밝게 보였습니다.
이 날 산행은 서울에서는 못보는 커다란 별을보며 시작했습니다.
천불동 계곡
어느덧 날이 밝고 비선대를 지나 조금은 가파른 길을 오르자 아까부터 시작되었던 천불동계곡의 千峯萬岩의 유수
한 경관이 확연히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이 이미 여럿 와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외설악을 대표하는 절경에다, 바뀌는 계절이 연출하는 자연의 오묘한 단풍을 즐기는 것도 잠시, 갈길이 먼 우리들
은 비교적 평탄하다고 할 수 있는 양폭까지는 멈추지 않고 걸었습니다.
아침을 제대로 먹지 못해 걸으면서 반찬도 없는 주먹밥을 씹어 삼키고 육포와 찹쌀떡 쵸코렛으로 간간히 보충을
했습니다.
양폭을 지나 1차 목표지점 무너미고개까지는 가파른 길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걷다가 고개마루에 올라서자 왼쪽은 희운각대피소와 중청봉 대청봉 방향, 오른쪽은 공룡능선으로 들어
서는 길이란 표지판과 함께 시원한 바람과 더불어 펼처진 웅장한 신선암에 압도되었습니다.
표지판 밑에 배낭을 풀어놓고 희운각쪽 전망대로 올라가 신선암을 재감상하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지금의 저 거대한 바위덩어리는 수만년을 이 자리에서 버티며 다듬은 모습일텐데, 고작 80년을 살까말까하는 그
중에서도 찰나같은 하루를 내어 찾아온 인간에게 긴 호흡의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무너미고개에서 공룡능선으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서 마등령까지 5.1km, 도전의 길입니다.
설악산하면 얼핏 대청봉을 떠울리지만 무너미고개에서 바라본 대청봉은 높기는 했으나 그저 밋밋한 산같이 보였
습니다.
하지만 공룡능선은 동쪽으로 권금성과 서쪽으로 용아장성이 이어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설악의 갖가지 절경이
펼쳐져 이 코스를 진설악(眞雪嶽) 이라 부른다 하니 이왕이면 이곳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신선암 왼쪽으로 얼마 가지않아 밧줄에 의지해야 하는 직벽에 가까운 가파른 곳이 나타났고 험난한 앞길을 예고
하는 관문인 듯 했습니다.
조금전 무너미 고개에서 사진을 찍어 주셨던 영감님 두분은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 간다고 했습니다.
공룡의 등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 운 좋게도 더없이 맑고 화창한 가을 날씨 덕에
먼 곳과 가까운 곳 내설악과 외설악을 두루 조망하고, 가끔은 뒤로돌아 중청봉 대청봉도 확인하고 걷다가,
이윽고 다시 급경사가 나타나 힘겹게 오르자 공룡능선의 상징인 1275m봉이 나왔고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가을산의 색깔과 모양과 자연의 오묘한 조화를 감상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창세기의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셋째날에, 하느님께서 뭍을 땅이라 하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고 여기 설악산에 내려와 경치를 구경했디면, 과연 좋으셨겠다 싶었습니다.
(The God saw that it was good.)
1275봉의 여름표정 (인용)
무너미고개에서 3km를 왔으니 마등령까진 아직 2km가 남았습니다.
공룡에 들어서서 오르내리기를 셀 수 없이 반복했는데 마등령까지만 가면 거기서부터는 내리막이라지만 이 2km
가 멀기만 했습니다.
시간도 꽤나 지났고, 1리터 수통에 채워간 물은 동이났고, 스페어 생수 한병으로 버텨야 하는데 내려 가면 또
오르막이 나오곤 했습니다.
나한봉에서 기암괴석의 용아장성(龍兒長城)을 다시 보고 마등령삼거리 공터에서 잠시 휴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다시 돌아 보았습니다.
산정상 하나가 의미가 있는 다른 산에 비해 공룡은 코스 전체가 정상이요 어느곳에서 어디를 봐도 아름다웠습니다.
저 아래 속세는 티끌보다 작게 보여 묻혀지고 대공간에 큰 것만 보였습니다.
세상이 공평하게 보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운무도 좋겠지만 이 날은 너무도 맑아 끝없이 이어지는 대전망을 끼고 걷는 즐거움은 형언할 수 없이 컷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잔 생각이 간절했으나 무거운 보온병을 짊어지고 온다는 건 애초부터 생각 안했기에 맹물 한 모금
마시고 바로 위 마등령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삼거리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코스는 봉쇄되어 있었고, 이제 비선대까지 오로지 내려가는 길 3.5km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내리막이 그렇게 악명높고 힘들 줄 몰랐습니다.
그렇게 가파른 길일 줄 몰랐습니다.
이 날 새벽 비선대에서 마등령으로 먼저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면, 아마도 지쳐서 공룡능선 완주는 어려웠을 것
입니다.
평생 이렇게 장시간 산을 걷는 것은 첫 경험이어서 내리막을 1/3쯤 왔을 때부터 종아리가 서서히 아파오기 시작
했는데, 계단을 뒤로 걸어 내려가기도 하고, 최대한 지그재그로 스틱에 의지해 걸었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금방일 줄 알았는데 한참을 걸어도 걸어도 남은 거리는 좀체로 줄어들지가 않았습니다.
잎이 거의 떨어진 정상부근 보다는 아래쪽으로 내려오자 단풍이 고왔으나 시간도 촉박하고 다리도 아파 제대로
눈길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쉬지않고 걸어 드디어 비선대 평지길에 이르자 다리 통증은 사라지고 걷기가 수월해 졌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무사히 완주했다는 데에 가벼운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적어도 일행에게 부담은 주지 말아야지 하는 일념으로 묵묵히 걷고 기어오르고 다리를 끌며 내려온 18km 13시간,
말도 안되는 나라꼴 걱정도, 그 어떤 잡념도, 비집고 들어올 틈을 허용하지 않았던 순수한 자연과 자신의 인내력에
몰입했던 하루였습니다.
산에 가는 사람과 가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요?
산에 가지 않는 사람은 이런 기분 모르겠다가 답이 아닐까요.
산에 오길 잘 했다 생각한 날이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인간의 유전자는 자연에 친숙하게 되어있고 거기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 모양
입니다.
새벽 올라갈 때 안 보였던 비선대의 淸水玉潭을 잠시 확인하고, 어느 중년 외국인 커플의 사진 한 컷 찍어주고는
하산을 서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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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이 지난 10월 26일에 양양을 갈 일이 있어 다시 강원도를 찾았습니다.
속초 부근을 지나면서 설악산이 한 눈에 들어 왔습니다.
울산바위 왼쪽 멀리로 내설악의 봉우리들이 산수화같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기를, 저 먼 데를, 또 가라면 못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J
첫댓글 제가 공룡능선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최대장님의 격려와 리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말씀 드립니다.
그 대장님으로부터 따로 산행 소감을 올리라는 명을 받아 온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 보았습니다.
함께한 서우철선배님 우경 & 창준형들, 군대라도 함께 갔다온 것처럼 동지애를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일본에 관한 글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게 앞으로 꾼으로서 산행기로서 한일
카페를 더욱 빛내 주길 바랍니다
산에 가봐야 산을 알게되고 그렇게 조금씩 익어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산 메니어가 되지요
앞으로 지리산 종주도 해보고 아직 젊은(?) 나이니까 일본 북알프스에 가
진짜 산의 진미에 빠져 보길 권합니다
앞으로 한수회의 장래에 큰 기대를
갖게 만들어 너무 좋은데요
산행기 너무 잘 읽고 기분좋은 하루를
시작하게 만드네요
수고 많았습니다
호재님 공룡능선 정복을 축하 드립니다. 뒤돌아보면 내가 어찌 저산을 올랐던가하는 뿌듯한 여운이
실버의 삶을 살아가는데 늘 함께하며 용기도 줄것입니다.잘 다녀 오셨습니다...
진솔하게 써주신 산행소감 역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과의 싸움과 주변의 격려.도움이 어우려져
성공적인 산행으로 마무리 되었슴이 절절이 나타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설악의 첫등정이 안전산행으로 마무리되어 무척 다행한 일입니다. 함께 걸으며 눈여겨 보니 호재님은 기운이 팔팔, 몇살 젊음이 이런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시작이니 활기찬 의지와 체력으로 지리산 종주도 도전 하여야 지요. 느낌을 그대로 나타낸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초보자에게 과찬을 해주셔서 송구스럽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번 산행에서 많이 느끼고 배우고 경험했습니다. 모두가 선배님들 덕분입니다.
짧디 짧은 제 산행 역사는 공룡능선 등정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고 싶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