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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유대인 전통복장, 수염, 가발, 키파에 관하여
유대인 전통 복장의 변천사
성경에서
의복에 대한 성경 용어는 베게드, 케수트, 레부쉬 등이고 이에서 파생한 동사들을 사용해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또는 정숙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복을 입었다.
사 52:1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위대함의 상징)
사 59:17 보수를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셨다.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다(응징의 상징)
사 61:10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승리와 행운의 상징)
시 35:26 나를 향하여 자긍하는 자로 수치와 욕을 당케 하소서
they shall wear shame (실패와 패배를 상징)
시 132:9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성공과 특권의 상징)
let your priest be clothed with triumph
이밖에도 성경에 보면, 여러 경우에서 의복은 어떤 사람의 위치, 지위, 특정 임무와 관련된 경우가 많다.
왕의 의복(레부쉬 말쿠트 에 6:8 왕의 입으시는 왕복과)을 모르드개가 입고 존귀와 영광을 받았던 경우가 있다. 슥 13:4 “그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할 때에 그 이상을 각기 부끄러워할 것이며 사람을 속이려고 털옷도 입지 아니할 것이며”. 이 구절에서 털옷도 입지 않는다는 말은 “아데레트 쎄아르”를 입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털덮힌 망토’를 말한다. 아마도, 털 덮힌 망토는 나실인과 수도사들의 상징물이었다.
초상 중에 과부는 색다른 옷을 입었다(그녀가 과부의 의복을 벗고, 창 38:14).
죄인들도 색다른 옷을 입었다(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왕하 25:29).
제사장들은 별도의 의복이 있었다(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지니, 출 28:2)
의복을 화려하게 입는 것이 사람의 위대함을 드러내었던 것처럼, 옷을 찢거나, 더러운 옷, 가벼운 옷차림은 사람의 신분이 낮은 것을 나타내거나 초상을 당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옷차림으로 인식되었다.
성경은 특정 신체와 관련된 의복에 딸린 여러 부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터반 또는 주교관(miter)은 머리에 쓰던 것이다(제니프, 미즈네페트).
출 29: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슥 3:5 내가 말하되 정한 관을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사자는 곁에 섰더라
가죽 헬멧 또는 청동 헬멧(코바) 또는 머리에 쓰던 것들은 전쟁에서 사용하던 보호 장구들이다.
삼상 17:5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고
대하 26: 14 웃시야가 그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돌을 예비하고
‘씸라’라고 불리던 망토 같은 의복은 어깨부터 발목까지 덮는 형태의 의복인데 남자와 여자가 모두 입었던 의복이다.
왕상 11:30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출 12:34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매니라
이갈 야딘의 하솔 발굴 보고서 3-4권(1061) 그림 cccxxxix 1, 2 참조
튜닉(크토네트)은 짧은 옷이다. 상체를 덮는 의복이다. 역시 남, 여 모두 입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레 16:4 거룩한 세마포 속옷을 입으며, 세마포 고의를 살에 입고…
아 5: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코트(메일)는 긴 옷으로 외투처럼 입던 것이다. 앞부분을 열고 입었던 옷이다.
삼상 15:27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삼상 24: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삼하 13:18 암논의 하인이 저를 끌어내고 곧 문빗장을 지르니라. 다말이 채색옷을 입었으니 출가하지 아니한 공주는 이런 옷으로 단장하는 법이라 제사장들은 바지(미크나싸임)를 입었다
출 28:42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겔 44:18 가는베 관을 머리에 쓰며 가는베 바지를 입고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 것이며
허리띠(아브네트)를 사용하였다.
출 29:9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워서 제사장의 직분을 그들에게 맡겨
레 8: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신발은 가죽으로 끈을 메어 신는 것이었다.
창 14:23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 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사 5:27 그들의 허리띠는 풀리지 아니하며 그들의 신들메는 끊어지지 아니하며
의복들 중에서 ‘씸라’ 와 ‘튜닉’은 가장 기본이 되는 의복이었다. 이러한 의복들은 제작 과정에 의해서 값이 결정되었으므로 비교적 값이 비싼 것들이었다. 의복의 중요성은 한 사람의 지위와 위치, 성격, 삶의 양식을 나타내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복은 종종 선물 또는 전리품으로 전달되었다.
창 45:22 또 그들에게 다 각기 옷 한 벌씩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삿 14:12 내가 베옷 삼십 벌과 겉옷 삼십 벌을 너희에게 주리라
왕은 의복 창고를 두어 의복을 보관하였고, 성전에도 의복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
왕하 22:14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전승비에 새겨진 의복의 형태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남아있는 왕들의 전승비에 그려져 있는 그림에 새겨진 것들을 살펴보면, 남자들이 입었던 일반적인 의복은 허리에서부터 무릎까지 또는 좀더 아래 부분까지를 덮는 것이었다. 허리띠를 사용해서 앞에서 또는 뒤에서 묶어서 고정시켰다.
탈무드 시대
탈무드와 미드라쉬에는 의복과 관련된 정보들이 있다. 성경 구절이나 종교적 율법과 관련된 해석과 연관하여 우연히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다.
탈무드에서 의복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좋은 의복”은 “사람의 마음을 넓게”해주는 것이다(Ber. 57b). 그리고 “사람의 위엄은 그의 의복을 통해서 드러난다(Ex. R. 18:5)”
학자라면 흠이 없고 깨끗한 옷을 입어야 했다. 그래서 “학자가 입은 옷에 얼룩이 묻어있으면 죽는 이만 못하다(Shab. 114a)”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기워 신은 신을 신고 밖으로 나다니면 안되었다(Ber. 43b). 미드라쉬에 기록되어 있는 한 사건에 보면, 얀나이가 무식한 사람을 학자로 착각했는데, 왜냐하면 그가 옷을 아주 우아하게 입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Lev. R. 9:3).
여자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다니는 것은 정숙치 못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유대인 관습을 어기는 행위로 간주하였다. 이스라엘에 살던 여자들과 바벨론에 살던 여자들 사이의 복장에 차이가 있었다. 바벨론에서는 채색된 옷을 입었고, 이스라엘에서는 흰색 옷을 입었다(Pes. 109a). 검은 옷은 초상이 났을 때, 재난을 당했을 때, 괴로울 때를 상징하여 입었으며(Hag. 16a), 또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러 나올 때(TJ, RH 1:3, 57b) 입었다. 랍비 아키바가 히르카누스의 아들 랍비 엘리에젤과 관계를 끊었을 때, 아키바는 검은색 옷을 입었다(BM 59b).
헬라시대 그리고 페르시야 시대의 의복들
3세기 회당 듀라 유로포스 회당 프레스코 벽화 그림들에 반영되어있다.
바르코흐바 시대의 유물들로 발견된 의복들과 벽화에 그려진 의복들이 비슷하다.
탈무드 이후 시대의 의복들
할라카에 영향을 받은 의복의 형태들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방인들이 입는 의복의 착용을 금지하였다.
레 18:3 너희는 그 거하던 애굽 땅의 풍속을 좇지 말며 내가 너희를 인도할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고
레 20:23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신 12:30 너는 스스로 삼가서 네 앞에서 멸망한 그들의 자취를 밟아 올무에 들지 말라. 또 그들의 신을 탐구하여 이르기를 이 민족들은 그 신들을 어떻게 위하였는고 나도 그와 같이 하겠다 하지 말라.
습 1:8 여호와의 희생의 날에 내가 방백들과 왕자들과 이방의 의복을 입은 자들을 벌할 것이며
남자들은 옷 술(zizit)을 달아 입었고, 여자들은 단정한 복장을 하여야 되었다. 결혼한 여자들은 항상 머리를 가리고 다녀야 되었다. 안식일에는 좋은 옷을 입도록 하였고, 절기 때에는 더 좋은 옷을 입도록 하였다. 랍비들에 의한 의복 규정은 보수적이면서 근검한 복장을 하도록 가르쳤다.
유대 의상을 규정한 법령은 849년 이집트에서 칼리프 알 무타와킬에 의해서 반포되었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노랑색 페르시야 망토(mantle)를 입거나, 가는 끈 벨트를 메도록 하였다. 만약에 페르시야식 모자를 쓸 경우에는 색깔을 제한하였다. 터반을 두를 경우에는 노란색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나중에는 같은 색깔의 배지를 착용하여야 되었다.
기독교에서 제정한 최초의 법령은 1215년 제 4차 라테란 회의에서이다. 유대인들은 구별된 형태의 옷을 입어야 되었다.
중세 초기의 의복
이 시대의 의상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중국 당나라 시대(618-907)의 무덤에서 발견된 항아리에 새겨진 그림에 셈족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에 새겨진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생각 하는데, 페르시야 모자, 카프탄, 거들 등의 형태가 나타나 있다.
오리엔탈 유대인들의 의복
많은 이슬람 국가에 살던 유대인들은 검정색 옷을 입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특히, 북아프리카 지역은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한다.
16세기 터키 시대에는, 본토 유대인은 노란색 터번을 둘렀고, 스파라디 유대인은 빨간 모자를 썼다. 스페인 추방 때, “현자”들은 안식일에 카포스를 입었다. 이 복장은 스페인 유대인들의 독특한 복장이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보급된 복장은 카베제(터반), 메스트(양말), 슬리퍼 등이다. 여성들의 복장도 지역마다 독특하게 발전하였다
모로코, 알제리, 튜니지아, 트리폴리 유대인들을 결정짓는 복장은 검정색이다.
검은 모자, 검은 튜닉, 검은 드로스(바지), 검은 망토, 검은 슬리퍼 등이다.
서구 유럽 유대인들의 의복
중세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은 검정색 가운을 망토(cape)와 후두(두건)와 함께 착용하였다. 면도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배지를 착용하였다.
13세기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과 다른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유대인들만이 쓰는 모자(Judenhut)가 유행하였다가 15세기가 지나면서 사라졌다. 이 무렵 다른 형태의 모자가 생겨났으며, 독특한 의상이 유대인들을 구별하였다.
바레테(barrette) 모자(천으로 만든 검은색 중절모)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 모자는 주름잡힌 옷깃(Judenkragen)과 더불어 유대인들의 특징적 복장이 되었다.
이탈리아와 교황 관할권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노란색 모자를 써야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랍비 해석에 따른 의복
동구 유럽 유대인들의 의복
폴란드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유대 복장은 12세기 세밀화에 그려져 있다. 이 복장은 비쟌틴 시대의 튜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남자들은 소매가 없는 망토, 외투(cloak)를 입었다. 동구 유럽 지역은 서구 유럽에 비해서 기독교 의상의 영향을 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적 복장을 따랐다.
처음으로 공공기관의 간섭이 시작된 것은1266년 브레슬로(Breslau)에서 열린 교회 협의회의 결정이다. 이 회의에서 그네슨(Gnesen)의 감독직에 있는 유대인들은 특별한 모자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오펜(Ofen) 회의(1279)에서 유대인들은 붉은색 배지를 착용하도록 결정하였다.
후기의 유대 복장은 유럽 중부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마치 기모노처럼 옷을 갈라서 입었다. 코테(cotte)라고 불리우던 의복을 남녀가 모두 입었다. 여자는 스카프를 하였고, 남자는 원뿔형의 모자를 썼다. 나중에는 유대인들을 특징짓는 복장 “카프탄(caftan;터키 사람 등이 입는 띠가 달리고 소매가 긴 옷)”을 입게되었는데, 이 복장은 오늘날에도 정통유대인들 사이에서 입는 복장이 되었다.
앞쪽을 갈라서 열린채 입는 ‘페르시야식 코트’가 터키 시대에 주로 입던 복장인데 이것은 예맨과 모로코 등지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착용되었다. 폴란드 동부와 러시아 쪽에 살던 유대인들은 카프탄을 입고 넓은 띠(sash)를 둘렀고, 서부쪽에 살던 사람들은 가는 띠(cord)를 둘렀다.
유럽의 의복이 변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의 복장도 16세기에 들어서, 한물 지난 폴란드 귀족과 상위 클라스 의복의 형태를 반영한 의복이 발달하였다.
그러자, 동구 유럽의 여러 지역들에서 유대인들의 의복이 화려하게 발달하는 것을 금지하기 위한 조치들의 취해졌다. 그래서 1538년 피오트르코(Piotrkow) 결정으로 유대인들은 기독교적 의상을 입어서는 안되며, 노랑색 모자를 착용하도록 규정하였다. 1566년 리투아니아, 1595년 폴란드 등에서도 여성 복장과 보석류에 대해서도 규정 사항을 만들었다. 리투아니아에서도 노랑색 모자를 남자들이 착용하고, 여자들은 노란색 스카프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위기 상황이 되면, 예를 들면 카미엘니키(Chmielnicki) 학살(1648-49), 스스로 검소한 복장을 입도록 권장하였다.
폴란드 남자 유대인들이 입었던 의복이 “베케쉐(bekeshe)”와 “카포테(kapote)”
였다. 카포테는 페르시아 복장 카프탄에서 유래한 것이다.
페오트
레 19:27a “머리 가를 둥글게 깍지 말며”라는 구절을, 탈무드에서는 레위기 구절을 해석하여 “성전에서 머리를 깍을 때, 귀 뒤쪽에서부터 이마까지 부분의 머리를 밀어서는” 안된다(Mak. 20a)라고 규정하였다.
이 부분의 머리는 탈모제나 가위나 전기면도기 등으로 깍아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페오트를 기르는 것이 면제되었다. 레 19:27b “수염 끝을 손상치 말며”라는 구절은 남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병행구 후반부가 남자에게 적용되므로 전반부 역시 남자에게만 적용한 것이다(Kid 1:7; Kid. 35b).
마이모니드(Maimonides)의 해석에 따르면, 최소한 40가닥의 머리털이 페오트로 남아야 한다(Yad, Avodat Kokhavim, 12:6). 그러나, 슐한 아루크(YD 181:9)에서는 라쉬(Rashi)의 해석에 따라서(Mak. 20a) 머리가 귀 앞쪽에서부터 광대뼈(zygomatic arch)까지 길게 해야 한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페오트의 최대 길이는 어떤 시대의 관습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것은 할라카(halakhah)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이삭 루리아(Isaac Luria)의 신비주의(kabbalistic)적 저술에 따르면, 페오트의 중요성을 숫자에 대비하여 설명한다. 페오트의 단수형태인 페아에 함축된 숫자가 86이다. 히브리어의 “페”는 80이고, “알렙”은 1이고, “헤이”는 5이다. 이것을 합산하면 86이된다. 이 숫자는 엘로힘의 숫자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엘로힘의 “알렙”은 1이고, “라메드”는 30이고, “헤이”는 5이고, “요드”는 10이고, “멤”은 40 이다. 이것을 합산하면 1+30+5+10+40=86, 즉, 86이다.
이와같이 페아와 엘로힘이 같은 숫자값을 같을 만큼 페아가 중요하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하시딤 사람들과 예멘의 정통파 유대인들에게 페오트를 기르는 것이 관습이 되어졌다. 페오트의 형태는 짧게 해서 귀 뒤로 돌려 감거나, 아니면 길게 늘어뜨려서 귀 양편에 늘어뜨리는 형태로 한다.
(유대백과사전 내용 중에서)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