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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11일(금)
* 시작 기도
(골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주님...
주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시고 아들의 사랑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죄사함 곧 속량을 얻었습니다.
그런 속량을 얻은 사도 바울 역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는 마땅히 고난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고난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또한 나의 고난이 되고 주님과 연합될 때 생명으로 나아감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그러한 연합이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님과 연합하기 위하여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파리와 뚤루즈 복음캠프 위에 기름 부음이 넘치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게 하시고 날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하늘의 기쁨이 넘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호 9:1-9
제목 :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음행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2 타작 마당이나 술틀이 그들을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3 그들은 여호와의 땅에 거주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은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4 그들은 여호와께 포도주를 부어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그들의 제물은 애곡하는 자의 떡과 같아서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그들의 떡은 자기의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5 너희는 명절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6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7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온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8 에브라임은 나의 하나님과 함께한 파수꾼이며 선지자는 모든 길에 친 새 잡는 자의 그물과 같고 그의 하나님의 전에는 원한이 있도다.
9 그들은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부패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 나의 묵상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선포하면서 그들의 죄악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그들은 타작마당에 있는 곡식들이나 마실 포도주를 그들이 음란하게 섬기는 우상, 곧 바알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우상의 신전 앞에서 신나게 뛰며 제의를 행하지만 호세아는 그들을 향하여 기뻐하거나 뛰놀지 말 것을 경고한다.
그렇게 바알을 섬기는 이스라엘은 결국 애굽을 찾고 앗수르에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지도 못할 것이며 그 전제인 포도주도 부어드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이 드리려고 하는 제물은 다 부정한 제물이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
다만 그들의 배만 부르게 하는 것으로,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은 포로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명절이나 중요한 절기에 그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고 싶어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할 지라도 오히려 애굽이나 놉으로 지칭되는 멤피스는 그들을 삼키는 무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각종 금은 재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어 찔레와 가시덩굴만 퍼진 황폐한 땅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 그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였다.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을 쌓아갈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향하여, 바보 같다고 하며 영에 감동된 자들을 미쳤다고까지 말하기 때문이다.
한편 호세아와 같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심판을 선포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거짓된 마음을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을 기만하고 호도하며 그 백성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물과 같은 자들일 뿐이다.
게다가 심지어 이들은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을 향하여 미움과 증오를 품기까지 한다.
이것은 마치 사사시대에 기브아에서 일어난 패역한 일처럼 영적 지도자들인 선지자들까지 철저하게 부패하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한 레위인의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에 가 있을 때 레위인은 그의 첩을 데리러 유대 베들레헴으로 간다.
여러 날을 그곳에 거하다가 마침내 그의 첩과 함께 자기가 사는 에브라임으로 가는 도중 저녁이 되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서 한 노인의 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낸다.
그런데 그 기브아에 있는 동성연애자들이 그 집에 떼로 몰려와서 이 레위인을 내어달라고 한다.
그와 동성연애를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 주인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게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다.
그들을 내어줄테니 제발 이 레위인 만큼은 손을 대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량한 사람들이 레위인을 요구하자 레위사람은 자기의 첩을 끌어내어 그 사람들에게 주었다.
결국 그 사람들은 그 첩을 윤간하였고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한 첩은 새벽에 그 집 앞에 당도하였지만 집 문 앞에서 엎드린 채 죽고 말았다.
결국 이 일이 발단이 되어 이 레위인은 자신의 첩의 시체를 열 두 조각으로 잘라 각 지파에게 보내면서 베냐민 지파의 잔인함과 죄악상을 고발하였다.
이에 분노한 열 한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과 전쟁을 벌여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는 참극이 벌어지고 만다.
이와 같이 사사시대의 비극은 레위인이나 제사장들까지 모두 하나님을 떠나 음행을 하며 철저하게 타락하였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오늘 본문인 호세아에서도 동일하게 자행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들을 지도하는 영적 지도자들까지 철저하게 부패하고 타락해버린 상황에서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주고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공의는 언제나 살아있다.
그 공의는 무섭고 두렵지만 그러나 무조건 그들을 죽이고자 하는 진멸의 심판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돌아오면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복이 되는 것이다.
오늘 이 본문 앞에서 나 자신의 죄성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나는 하나님을 떠난 패역한 백성임을 시인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내 앞에 있음에도 나는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던 자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저 관념적이거나, 여려서부터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성경의 지식이 나의 신앙의 전부였다.
그래서 모습은 주님을 닮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세계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예수를 알지도 믿지도 않는 자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똑같이 원하고, 그들이 가는 그 길을 나도 똑같이 갔으며, 그들이 가지는 욕심이 곧 나의 욕심이 되었고, 나의 가치관과 삶의 목적은 그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들 나름대로의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며 노력하여 그 자리에 올라간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나는 예수를 이용하여 그 자리에 올라가고 세상적인 것들을 얻으려고 했던 아주 패역한 자요 괴악한 죄인 중에 괴수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의 삶의 방식보다 더 악하고 나쁜 자가 아닌가?
또한 나는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미워하며 증오하는 그런 악한 종이다.
성도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영적 지도자로써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바르게 가르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그물을 쳐서 그 그물에 걸린 주님의 양들을 잡아먹는 자가 되고 말았다.
나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들에게는 내 맘을 다 내어주면서도 나와 함께하지 않는 주의 종들은 무시하고 비난하며 그들을 조롱하고 증오하기까지 하였다.
동역자는 하나님의 일을 함께 연합하여 더 큰 시너지 효과를 내는 자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런 자가 아니라 나 자신만 크게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 눈에 멋지고 그럴 듯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하고, 인정받고 칭찬 받는 그런 사람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나는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정말 사역도 잘 하고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종인 줄로 착각하였던 것이다.
다른 동역자들이 사역의 열매가 없으면 그들을 정죄하면서 도대체 사역을 어떻게 하기에 저렇게 열매가 없느냐면서 욕하고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나는 내가 능력이 있어서 잘 하는 줄로 알았던 것이다.
그런 나는 사역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나를 죽이는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받고 무덤 가운데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목회를 그만두려고 마음먹었을 때 복음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오늘 분문에서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호세아 선지자의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메시지요, 사랑의 회초리이다.
회초리를 맞는 종아리는 아프지만, 그 아픔을 통하여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그 가슴 아픈 사랑을 알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나의 죄 때문에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을 하셨다.
그것은 곧 공의의 사랑이다.
공의가 없는 사랑은 거짓 선지자들이 부르짖는 무조건의 규정과 다름없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에게 조건의 규정을 주시면서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 안에 머물도록 하셨으며 그 언약 안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무슨 심판을 하시느냐면서 조건의 규정을 무조건의 규정으로 바꿔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내가 바로 이런 거짓 선지자와 같이 무조건의 규정을 선포하고 가르치던 거짓 지도자였음을 이 시간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에게 기회를 주셨다.
바로 공의의 심판을 통하여 철저하게 나를 무덤 속으로 부르셨다.
그렇게 나는 그 무덤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 내려놓았다.
주님은 그곳에서 나에게 주님의 은혜를 베푸셨다.
나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을 만나는 생명의 자리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덕지덕지 입고 있던 무화과 옷이 다 찢겨지고 벗겨진 가장 비참한 자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자리이며 또한 주님이 계시는 성소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곳에서 참 복음을 알게 되었다.
현실적인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나는 복음을 통해서 주님과 교제하는 자리로 매일 나가게 된 것이다.
나를 향해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일 중독, 사역 중독에 걸렸던 나는 모든 사역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오직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주님과 존재로써 교제와 사귐을 가진다.
요즘 사회적인 핫이슈는 10월27일 주일에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있을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및 큰 기도회’다.
물론 악법에 대하여 교회라는 공회가, 그것도 개혁주의를 부르짖는 장로교 단체가 집단적으로 이를 저지하기 위한 예배와 기도회를 개최한단다.
이는 틀림없이 교회와 교단의 지도자들이 결정한 것일 게다.
그런데 이런 물리적 힘을 과시하여 악법을 저지하는 것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일까?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무력 앞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무력함을 보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들을 천사들을 동원한 물리적인 힘으로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다.
그렇게 악하디 악한 이 세상을 품으신 것이다.
주님의 뜻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동원하여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그들을 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죽었던 자를 이렇게 주의 복음으로 살려 주셨나이다.
아담 안에서 죽었던 자이나 위로부터 오신 아들의 생명을 내게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사오니 이 은혜 앞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나이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패역한 인생으로 살았던 죄인,
성도들을 기만하고 죄의 길로 인도했던 부정한 지도자였으며,
참된 동역자들을 미워하며 증오하고 선의의 경쟁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을 매도했던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 죄인에게 주님은 공의의 심판을 하셨고 그 심판의 무덤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주님과 교제를 시작하였으며 오늘도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나이다.
무덤에서만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있음을 아오니 그 속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가 있게 하소서.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하셨사오니 우리의 영이 주의 영으로 다 살아나게 하소서.
주님을 기대하고 사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