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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정족산(전등사). 광성보. 손돌목.
황산도 트레킹 (2022.02.17.~18)
▶트래킹 일자 : 2022. 02. 17.(목)
▶날씨 : 아주 맑음
▶트레킹 코스
▻17일 : 정족산 삼랑성 종주, 전등사. 광성보.
손돌목. 대명리 포구
▹정족산 : 온수교회-북문-삼랑성-정족산-
서문-남문-동문-전등사 (2시간 40분)
▻18일 : 황산도 트레킹
▶트래킹 스케치
1박2일 일정 강화도 겨울 드래킹~~~
강화도는 그동안 구석구석 왠만한 장소는
거의 흝었으나 산행을 겸한 건강트레킹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다 너무 싱겁다는
이유로 한번도 다녀오지 않은 정족산(삼랑성)
트레킹으로 결정
2022. 02. 17. 10시, 이날은 영하의 날씨
강추위가 예상 된다는 기상청 기상예보에
따라 만반의 겨울 산행 복장을 갖춰
집에서 출발했다
아침부터 해맑은 하늘 쾌청한 날씨....
출근시간이 지난 탓에 교통이 원활하고 한적한
도로 싱싱 달려 50분 만에 강화도에 도착했다
다소 차가운 날씨에 겨울 복장으로 정족산
산행을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겉옷을 벗어야 할
정도로 땀샘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신선한 공기 깨끗한 산소 상쾌한 기분이 되레
겨울산행의 멋과 맛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강화 정족산은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고 하는 삼랑성 성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북문-서문-남문-동문으로 이어진 삼랑성
성벽과 성벽안에 소재한 전등사를 답사하는
것으로 2시간 40분동안 트레킹 했다...
정족산과 전등사...
만약 봄날 이였다면 새싹과 연초록의 향연....
아름드리 전등사의 멋을 맘껏 음미하는
트래킹 이였겠지만 그래도 잎새가 없는 탓에
뻥 뚫린 시야... 성벽길 을 걸으며 위에서
바라보는 강화 시가지와 넓은 평야~~
조용하고 고요하고 마냥 평화로워 보였다~~~
트래킹 내내 시원한 겨울 바람이 머리를
맑게하고 나름대로 즐겁고 전망 좋고 맘껏
힐링한 유쾌한 겨울 트레킹이 아니였나 싶다~~
►강화도는 역사의 보물이다~~~~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남해도에 이어 5번째로 큰 섬으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을 품고있는 해운교통의 요충지로,
역사의 고비마다 크고 작은 사건의 무대로
등장했던 섬이다.
고려 때 몽고의 침략으로 수도를 천도하며
‘제2의 수도’로 떠오른 이래, 동서양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를 넘볼 때 마다
강화도는 늘 최전방 전선이 되어 수난을
겪어왔다.
그만큼 선인들의 애환이 서린 흔적들이
허다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등 선사시대
유적부터 일제강점기 침탈 흔적까지 섬 전체에
유적이 깔려있고 하나하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민족은 5천년 역사를 가진 단일 민족이다
단군 2333년 건국이후 끊임없이 외세침략을
받았는데 그 외침 횟수가 963회라는
얘기도 있고 993회 얘기도 있지만 힘이 없어
외침을 받아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번 강화도 트래킹에서 방문했던 그곳의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의 분량이
너무 많아 극히 일부분 대충만 소개 한다
▶삼랑성(三郞城)
단군의 세 아들 부여, 부우, 부소가
쌓았다고 하여 삼랑성(三郞城). 성의 길이
2,300m 정도, 동서남북 각 방향에 성문이
있으며 전등사를 에워싸고 있다
►동문 앞에 양헌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병인양요 양헌수 장군의 공적 수록)
1866년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대와
격전하여 승리한 승전비
▶전등사 역사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인
381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진종사(眞宗寺)로 불렀다고 한다.
고려 고종 46년인 1259년에 진종사 경내에
가궐을 지은 것으로 다시 기록에 등장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1270년 사이 강화도에
임시 도읍을 정했다. 1266년 진종사는 크게
중창됐으며, 충렬왕 8년인 1282년 충렬왕의
왕비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전등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뜻한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을
프랑스군으로부터 방화되어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출처 : 홍주일보 & 나무위키>
▶전등사 나부상 (傳燈寺 裸婦像)
►전등사(傳燈寺)는 호국불교의 근본 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전등사 중심에 있는, 석가여래 삼존을 모신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은 규모는 작아도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닫집으로 꾸며져 있어서
조선 중기 대표 건축물로 손꼽힌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전등사 대웅보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 형상의 조각이
있다.
신성한 사찰에 그것도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인
대웅전에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이다.(아래 사진 참고)
그래서일까. 혹자는 여인이 아닌 원숭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용과 더불어 원숭이도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여기는데다가 조각상
생김새가 원숭이와 흡사해서 그런 듯하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이 조각상을 벌거벗은
여인, 즉 나부(裸婦)로 보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 화재로 말미암아
전등사의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지경 스님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으로 전등사 재건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전국에서 실력 있는 목수들을 찾아내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자를 도편수(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로 삼아
전등사 재건을 시작했다.
도편수는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터라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부쩍 외로움을 느꼈다.
그러다 보니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다가
결국 주모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다가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주모를 불렀다.
▻오늘따라 왜 이리 심각하시대요?
►임자! 임자는 계속 이렇게 혼자 살 텐가?
▻거둬 주는 남정네가 있는데 이러고 살까요?
►임자! 내가 받을 돈이 푼푼한데 임자가
앞으로 내 돈을 맡아 주겠소?
▻저도 지아비만 바라보며 사는 여염집
여자가 되고 싶었어요.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웃음기를 보였다.
도편수는 주모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자
그녀가 더욱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그날 이후로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돈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집과 작은 밭
정도는 살 수 있겠지?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지 모르겠어요.
일 빨리 끝내고 오세요.
►당분간은 못 내려올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된다오.
도편수는 주모의 애교 섞인 재촉을 보니
함께 사는 것이 더 간절해졌지만 일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고 불심을 다했다.
며칠 동안은 주막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작업을 했다. 대웅보전 재건 작업도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작업이 곧 마무리될 거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도편수는 주막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주막에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임자! 나왔어! 어디 있는 거야! 임자!
주모가 보이지 않자 도편수는 마음이
조급해져 더 큰 소리로 주모를 불렀다.
그 소리에 옆집 할멈이 사립문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불러도 소용없수. 며칠 전에 쫓기는
사람처럼 밤에 짐을 싸서 떠났으니까.
►잘못 보신 게지요. 주모가 뭣 때문에
그리한다 말입니까.
- 아, 이 양반아. 야반도주했다 이 말이오.
아마도 못 찾을 거요.
도편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던 마음은
차차 분노로 바뀌었다.
작업장에서도 주모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에
도통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며칠을 보낸 도편수는 문득
부처님을 뵐 면목이 없음을 깨닫고는
마음을 다잡아 재건 작업을 마무리했다.
재건된 대웅보전 네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 형상의 조각상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나부상을 자세히 보면 네 개의 조각이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두 손을 모두 올리고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한 손만 올린 것도 있고 옷을 걸친 것도 있다.
과연 도편수는 단지 복수의 의미로만
이 여인을 조각해 올려놓은 것일까.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 조각상의 표정이 그리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도편수는 그 여인이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죄를 씻어내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각상을
만든 것이리라.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법당의 추녀 밑에
벌거벗은 여인의 조각을 발견한 스님들이
이것을 없애지 않고 너그럽게 받아들인 것은
도편수의 진심이 전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정답은 도편수만 알겠지만,
나부상을 바라보며 도편수의 마음을
추측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하다.
<2011.8.11.>글, 최민정 기자 /
EBS독학사 국어국문학과 교수
▶철제 범종
►전등사에는 철제 중국 범종이 있는데,
보물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보물로 지정된 종들 중에서는 유일한
중국 종이다. 원래는 중국 허난 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었고 해방 후 인천의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졌다.
어떻게 한국으로 오게 됐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배를 통해 실어날랐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일제강점기 말에 쇠붙이를
강제 수탈하던 때에 중국에서 반입한 것이
일본의 패망이후 낙오되어 인천에 남지
않았는가 추측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출처 : 나무위키>
▶정족산 사고지
현재 정족산 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가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
본 실록들은 많은 변동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
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잔존실록들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
▶광성보
►조선 광해군 10년(1618년)에 고려시대의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였다
►손돌목 돈대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지휘하에
조선 수비군은 손돌목 돈대 주변에 배치되어
미군의 공격에 맞섰다.
근대적 화포로 총으로 무장한 미군에 비해
조악한 조선군의 무장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선군은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는 구식
화승총과, 포탄이 작렬하지 않는 전근대식
불랑기포(佛郞機砲)였던 데 반해 미군은 기계식
격발장치 소총과 작렬하는 포탄을 발사하는
근대식 포로 무장한 군대였다.
손돌목 돈대를 최후의 거점으로 삼아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 그리고 휘하의
200여 군사는 4월 23일부터 다음날까지
48시간의 죽음을 무릅쓴 사투를 벌였으나
돈대 안으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미군의
함포 사격과 돌격대의 공격으로 결국 전원이
장렬한 전사를 맞고 말았다.
광성보 전투의 전적을 보면 조선군 340명
전사에 미군은 단 3명이었다. 참혹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미군은 목숨을 건 조선군의 치열한 반격에
더 이상 진격할 전의를 상실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서는 이긴 셈이었다.
►손돌목
손돌목 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 사이의 해협)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이 손돌목은 물살이 세기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배들이 난파당한 곳이기도
하다.
손돌목의 손돌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로 피난가던 고종 임금을 배에 태웠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배에 오른 고종이 이곳을 지날 때 배가
심하게 요동치자 손돌이 자신을 죽이려고
배를 이곳으로 몰았다고 의심한 나머지
손돌을 처형하고 만다.
손돌은 죽기 전 임금이 건너갈 수 있도록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반드시 뱃길이 트인다"고 말한 후 죽음을
맞았다. 정말 바가지를 따라가니 뱃길이
열리고 고종은 무사히 강화 땅에 오를 수
있었다.
비로소 자신이 오해한 것을 안 고종은 손돌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마지막 부분 사진)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인터넷 강화뉴스>
►손돌목 돈대를 방문했을 당시 마침 밀물이
들어올 때 였는데 마치 물살이 엄청 센 강물이
흐르듯 하였다.
손돌목 돈대와 바닷물이 흐르는 반대편
덕포진(김포)사이는 협곡처럼 폭이 좁아
조수 간만의 차로 인해 이곳을 지나는 바닷물의
물살이 엄청 쎄게 흘러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손돌 영혼의 울음처럼 들려왔다~~~
▼북문
▼정족산 정상
▼서문
▼강화 유스호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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