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TV단막극을 본 적이 있는가? '연속극'의 태양이 지지않는 한국 드라마판에서, '미니시리즈'의 전방위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당신이, 스타급 배우들은 웬만해서 나올리 없고, 밤 10시 프라임 타임에는 명함도 내미기 힘든, '단막극'이라 하는 짧은 드라마를 애써 찾아보지 못함은 감히 따져묻기도 민망한 질문일 것이다.
당신은 TV단막극을 좋아하는가? 'MBC 베스트극장'의 게시판에 글을 올려보았거나, 'KBS 드라마시티'의 지난 방송을 다시보기한 적이 있거나, 'SBS 오픈드라마 남과 여'를 기억하고 있다면 제법 단막극을 좋아하는 축에 속할 것이다. 단막극과는 조금 다른 범주이지만 인물과 배경은 같은 틀로 해서 매주 다른 내용이 전개되는 '시츄에이션 드라마' 형태인 과거의 '종합병원'이나 '카이스트' 따위를 기억하고 있어도, 당신은 단막극에 대한 은근한 애정이 있는 시청자일 것이다. 하지만 같은 시츄에이션 드라마라도 '사랑과 전쟁'이나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같은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은 사정이 조금 틀린 얘기니 '단막극 부활론'에 쉽게 끼어들면 곤란하다.
MBC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 시리즈 중 한 장면
어쨌든 당신이 단막극을 좋아한다면 '단막극 부활론'에 동참하길 적극 권한다. 왜냐, 잘못하다간 앞으론 TV에서 단막드라마는 다시보기를 하든가, 동영상 파일을 다운받아서나 보아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왜냐, 방송사들은 물론이고 드라마 외주사들도 앞으로는 쉽사리 단막극을 만드는데 돈을 쓰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징후로 몇해전 SBS가 단막극을 없애고 살릴 생각을 안하는 것, 얼마전 MBC 베스트극장이 상당기간 방송 및 제작 중단의 수치스런 상황에 빠졌던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비록 베스트극장이 화려하게 부활하면서 보다 더 세련되졌고, KBS가 TV문학관을 통해 10년 동안 100편의 작품을 제작하겠다고 한 것이 위안이 되긴 하지만 '돈' 몇푼에 PD 목숨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 불안한 부활이자 허풍스런 호언장담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우리의 TV단막극은 여전히 위태롭다.
단막극 부활의 징후
단막극이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다. 매주 금요일 밤이면 부모님들의 금슬을 더욱 좋게했던 안방의 감초 '드라마게임'. 수십개의 광고를 수주할 정도로,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보고 싶어도 광고 보다 지쳐 잠이 들 수밖에 없었던 단막극의 호시절이 있었고, TV문학관에서는 '방화'라는 이름으로 수준 이하의 기량을 펼쳐보이면서도 공급부족으로 인해 웬만큼의 시장가치를 갖고 있던 한국영화들보다 더 작품성 뛰어난 드라마들이 매주 쏟아져 나왔다. 이들에 비해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그 수명이 전직 대통령들보다 끈질긴 베스트극장은 현실을 깊숙히 들여다보는 내공과 다양한 소재와 주제를 변주해내는 발군의 기량을 통해 그 끈질긴 생명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처럼 단막극의 역사와 토대가 뿌리깊고 탄탄한 한국 TV단막극은 IMF 이후 제작비와 시청률의 추심을 견디지 못하며 위기를 겪어오다가 최근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단막극 부활론'을 꺼낼 수 있을 정도로 재기의 몸부림을 거세고 강단있게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 징후는 지난 연말 '방송 성수기'에, 그것도 주말연휴 프라임 타임에 4일간 연속방송 됐던 KBS 'HD TV문학관'과 긴 시간의 공반기를 거친 끝에 산뜻하게 부활한 MBC '베스트극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쉽고 빠르게, 보다 센세이션하게 '단막극 부활'의 징후를 느끼고자 한다면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를 볼 것을 권한다. 물론 '태릉선수촌 시리즈'부터 '가리봉 오션스 일레븐', '타인의 취향'까지 재기와 부활의 신호탄을 제대로 쏘아올린 베스트극장의 최근작들도 뛰어나다 아니할 수 없지만 사실 그만한 시도는 이전의 베스트극장에서도 얼마만큼 이루어져 왔었다는 점에서 패러다임을 변화시킬 정도의 혁신적인 성과라 보기엔 힘든 형편이다.
KBS HD TV문학관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의 한 장면
'커트코베인..'의 경우, 우리 단막극의 토대 위에서 극적 완성도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동시에 우리 단막극의 새로운 형식적 패러다임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드라마다. 물론 '커트코베인..'에 대해 미국의 TV시리즈물을 표방한 게 아니냐, 미스터리 스릴러 같은 장르 영화를 따라한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 속성상 그 어떤 극매체보다 제작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공중파라는 공공재를 통해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공공적 상품이기에 '변화'나 '실험'이라는 도전이 쉽게 어울리지 않는 극매체다. 하지만 '세븐'을, '범죄의 재구성'을 이제 자신의 방에서 'TV'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그 어떤 '변화'보다 획기적이고, 그 어떤 '실험'의 결과보다 뛰어난 성과임에 틀림없다. 그저 부럽게만 보았던 미국의 TV시리즈물 'LOST'나 'CSI'도 이젠 떳떳하게 국산으로 즐길 수 있는 시점이 되어가는 것이다. MBC의 '별순검' 같은 드라마를 통해 그 가능성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가능성의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기제는 TV단막극이라는 사실이다.
부활하라, 단막극이여!
실제로 각 방송사에서는 '역량있는 드라마 PD의 육성'이라는 차원에서 단막극 제작을 유지하기도 했었다. 방송 3사 중 가장 상업적이라 할 수 있는 SBS의 경우 일찌감치 단막극을 폐지하고, 장기적인 안목을 포기한 상태다. 그 결과 벌써부터 SBS의 드라마들은 상업적 성과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드라마적 완성도는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어쨌든 'HD TV문학관'과 같은 TV단막극 특히 '커트코베인..'처럼 뛰어난 단막극은 완성도 높은 TV시리즈물을 볼 수 있는 날을 보다 앞당길 수 있는 역할을 할 것이다. 'HD TV문학관'이나 '베스트극장', '드라마시티' 등 방영 중인 TV단막극들의 진행 과정을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이제 당당히 '단막극 부활론'을 외칠 때가 됐으며, 실제로 단막극이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는 믿음을 지울 수 없기도 하다. 지난 7일 방송된 베스트극장 '사랑해, 아줌마'는 전국 시청률 10.5% 기록하며 지상파 일일 시청률 전국 톱 20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고, 구랍에 방송된 '커트코베인..'은 많은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으며 지금까지도 그 뛰어난 작품성이 회자되고 있다.
단막극이 좋은 것은 변별력과 희소성에 있다. 미니시리즈가 스타 배우들의 '폼'과 PPL로 화면을 채울 때, 일일연속극과 주말연속극이 출생의 비밀과 시한부 삶을 가지고 한달.. 두달.. 일년을 지루하게 우려먹을 때, 단막극의 '서사'는 오로지 70~80분 안에 현실과 인간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며 '형식'으로써 시청자를 '상상의 감옥' 안에 가두고, 이미지의 변주를 가하며 '즐거운 고문'을 해댄다. 이 때 단막극을 보는 이들은 행복한 고통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밑도 끝도 없이 느끼고 마는 것이다.
첫댓글 단막극은 한국드라마의 미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