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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을 우상(偶像) 타파(打破)에 바친 이성(理性)의 파수꾼 ⑴ ‘리영희인(李泳禧人)’과 ‘그와는 무관한 사람’으로 나뉘는 세상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ylovich Dostoyevsky)는 나의 정신생활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내게 접목이 되어 그와 나와는 생명의 합일체가 되었다. 다른 어떠한 작가나 철학자도 그처럼 나의 영혼을 자극하고 나를 끌어올린 사람은 없다. 그를 알고부터 내게서의 인간은 ‘도스토예프스키인(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되는 것이다." 러시아의 사상가 베르자예프의 말이다.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자예프(1874년~1948년)는 두 차례의 투옥에 이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독일 베를린에서 머물다가 프랑스 파리로 옮겨 종교철학원을 개설하고 종교기관지《길》을 발행하였다. 그의《자유와 정신》·《노예의 자유》등 대표작은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베르자예프와 도스토예프스키 평가에 대해 소설가 나림(那林) 이병주(李炳注)는 베르자예프의 앞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를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향 아래 인생을 사는 사람과 그와 무관하게 사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같은 천체에 사는 인간일 수 없다는 뜻으로 된다. 이것은 내 경험과 같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주박(呪縛)과도 같은 힘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서두에 베르자예프의 글을 인용한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인’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라는 말을 따와 우리 나라의 현실에 대힙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의 군사독재시대 이래 한국인도 리영희를 아는 ‘리영희인(李泳禧人)’과 ‘그와는 무연한 사람’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고 하면 어떨까? 군사독재와 반이성(反理性)의 광기가 한국 사회를 짓누르던 시대에 의식있는 시민·청년·교육자·학생·노동자들은 리영희에게 주목했다. 그의 글을 읽은 청년들은 반독재항쟁(反獨裁抗爭)과 평화통일운동(平和統一運動)에 나서는 한편, 북한·중국·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의 실정에 ‘눈뜨게’ 되었다. 군사독재정권과 그 하수인들, 어용지식인과 수구언론인들은 틈만 나면 이데올로기의 색칠을 하고, 검찰과 사법권은 법의 올가미로 육신을 묶었다. 지난 10년 민주화 정권 시절에는 좀 뜸하다 싶었는데 이명박(李明博) 행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네오콘’이 극악한 말로 다시 그를 매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리영희에 대한 네오콘의 이념 공세를 지켜볼 때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떠오른다.《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1898년~1956년)는 나치를 비판하다 쫓겨나 유럽 각국을 떠돌다가 미국으로 망명하여《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갈릴레이의 생애》등 숱한 명작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귀향하였다. 망명지에서 내내 불의와 싸운 그는 동독으로 돌아가서도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보다 그의 책이 더 많이 팔릴 정도로 독일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어떤 특정한 세계관을 신봉한 적이 없었고 그와 반대로 통상적인 견해나 의견을 최대한 조롱했던 20세기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역설적이지만 학자들과 독자들에 의해서 항상 상이한 이데올로기에 고정되었다. 유물론자·허무주의자·무정부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 등 브레히트에게 적용되지 않는 ‘주의’가 없을 정도다. 하지만 견해만 가지고는 지속성 있는 작품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브레히트 자신은 오히려 사실에 의존했고 투이즘(Tuismus) 즉 곡학아세에 반대했다. ‘투이(Tui)’는 ‘intellektuell’을 ‘tellekt - uell - in’으로 도착시켜서, 그 머릿글자로 만든 브레히트의 신조어다." 얀 크노프가 말했듯이 브레히트는 한순간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잃은 적이 없으면서 스스로 정치화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리영희 역시 그랬다. 그는 이승만 백색독재 이래 한번도 비판의 목소리를 잃은 적이 없으면서, 그 자신이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리영희는 “사회주의 지향의 지식인”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의 전형”일 뿐이다. 브레히트는 1949년 4월 중순 폰 아이넴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서독이나 동독 중 어느 한 곳에 정착해서 다른 쪽에서는 죽은 사람처럼 될 수 없지 않은가”라고 썼다. ⑵ 루쉰을 글쓰기와 생활의 은사로 삼다.
“나의 글쓰는 정신이랄까, 마음가짐이랄까 하는 것은 바로 루쉰의 그것이에요. 글쓰는 기법, 문장의 아름다움, 속에서 타는 분노를 억누르면서 때로는 정공법으로, 때로는 비유, 은유, 풍자, 해학, 익살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세련된 문장작법을 그에게서 많이 배웠지요.” 리영희의 루쉰 닮기는 썩은 무리들으로부터 얻어먹은 갖가지 ‘욕’이나 모함에서도 비슷하다. 중국의 저명한 현대사상가 리쩌허우[李澤厚]는 루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는데, ‘반봉건(反封建)’·‘반식민지(反植民地)’를 ‘분단’, ‘군사독재’로 바꾸면 그대로 리영희에 대한 평가가 된다. "반봉건·반식민지라는 복잡한 환경 속에서 루쉰은 수십 년 동안 시종일관 애증이 분명했고 조금도 모호함이 없었다. 그토록 맑게 깨어 있으면서도 유난히 깊히 사색하는 루쉰의 개성적 특징과 불같은 열정을 얼음 같은 냉정함 속에 담고 있던 작품의 미학적 품격은 바로 생활이 각인시킨 흔적이다." 리영희가 루쉰의 글을 인용한 다음 한 대목은 바로 자신의 글쓰기 자세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루쉰의 글 가운데, 빛도 공기도 들어오지 않는 단단한 방 속에 갇혀서 죽음의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벽에 구멍을 뚫어 밝은 빛과 맑은 공기를 넣어주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궁리하면서 고민하는 상황의 이야기가 있다. 방 속의 사람은 감각과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까닭에 그 상태를 고통으로 느끼지 않을뿐더러 자연스럽게까지 생각하면서 살아(죽어)가고 있다. 그런 상태의 사람에게 진실을 보는 시력과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되살려 줄 신선한 공기를 주는 것은 차라리 죄악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루쉰은 물론, 당시의 중국의 사회와 중국인의 상태를 안타까워서 쓴 것이다." 루쉰은 “나는 한 마리 상처 입은 하이에나다. 홀로 황야를 달리며 자신의 혀로 몸에 난 상처자국을 핥아내고는 다시 전투에 뛰어들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한국 사회에서 독재정치의 수족이 된 공권력과 수구언론이 민주화운동·평화통일주의 인사들을 사정없이 물어뜯는 부정적 의미의 ‘하이에나’와는 전혀 다른 뜻에서)그대로 리영희에게 투영된다. “무슨 거창한 이념이 있었다기 보다는 ‘거짓’이 태생적으로 맞지 않아서 이렇게 살아왔나 봅니다. 특히 대중을 속이고 바보로 만들면서 개인적인 치부나 향락에 몰입하는 권력집단의 거짓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권력을 지키려 국민을 비인간적으로 만들고 인간다운 권리와 정체성을 박탈하는 집단이죠.” 리영희는 삶을 대하는 기본자세에서 루쉰에게 빚을 졌다고 여겼고, 루쉰의 젊은 날의 행적을 더듬으며 늘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담금질했다. 그래서『우상과 이성』첫머리에 루쉰의 글을 인용하면서 그에 대한 헌사로 삼아 빚을 갚으려 한다고 했다. "루쉰에게 진 빚은 무엇인가? 그의 삶의 기본자세에서 배운 빚이다. 그는 일본 유학 때 중국인의 몽매함을 절감하고 의학공부로 신체의 병을 고치기보다 동포의 정신의 병을 고치겠다고 문학수업으로 전환한 내력을 모르는 이가 없다. 그는 원래 뜻했던 소설문학으로서보다는 평론으로 중국 민중의 정신적·의식적 몽매를 깨우치는 역할을 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민중과 함께 있었고 민중 속에 있었다. 민중을 속이는 일체의 허위와 권력에 대해서는 용감한 전사였다. 민중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그의 글을 평이하고 이해하기 쉬워야 한다는 각성으로 이끌었다. 그의 글에는 현학적인 요소가 없다. 고매한 학설이나 이론으로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것은 동포에 대한 지식인의 배신행위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 지식인의 전통적 인생관인 “영원히 청사(靑史)에 이름을 남긴다”는 허황한 생각을 거부하였다. …나는 노신(魯迅)의 이 점이 좋다. 영원·허망·허영·허식·허욕을 마음에서 떨쳐버리면, 눈앞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자명해진다. 루쉰이 그 시대의 중국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전통과 지배계급의 허위를 까발리는 일이었다. 몽매한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는 작업이었다.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을 가지고 알기 쉽게 써야 한다. 복잡하고 어려운 사물·관계를 평이하게 풀어써야 한다. …(추상적인)이론으로 해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와 자료를 제시해야 한다. 학자·전문가·대학교수·박사 따위의 자화자찬의 높은 자리에서 ‘가르친다’는 교만한 자세로서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생각해 보자’는 친절함이 바탕이어야 한다. 이것이 루쉰이었다. …내가 이 나라의 한 시대를 ‘반의식(反意識)’의 철통 속에 갇혀서 사는 학생들에게 어느 만큼의 신선한 공기와 빛을 넣어주었는지는 나도 계량할 수 없다. 하지만 권력을 쥔 쪽에서 말끝마다 ‘의식화(意識化)의 원흉(元兇)’이라고 호통을 치는 것으로 미루어 헛수고만은 아니었다고 자위한다. 내가 나 자신을 생각해도 참 나는 우스운 사람이다. 루쉰처럼 대학시절에 대오각성해서 동포의 정신적 구제에 헌신하기 위한 대전환을 모색할 열정도 의식도 없었다. 해양대학이라는 곳을 꼬박 4년간 다니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7년간을 6·25동란 속에서 사는 동안 배웠다는 것은 권총사격술뿐이다." 리영희는 특정한 이념의 ‘기수’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거짓’이 맞지 않아서 ‘진실’을 말하고 실천하다가 용공의 너울을 뒤집어쓰고 ‘의식화의 수괴’로 매도당한다. 리영희의 이름 앞에 하나의 관용어만 필요하다면 ‘진실을 추구하는 지식인’일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눠져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은 우상(偶像)에 도전하는 이성(理性)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고 영원히 그러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발전, 사회의 진보는 있을 수 없다." 사회학자 고병권은 “그는 지식을 전달한 사람이라기보다는 각성을 전달한 사람이었다. … 그는 사람들의 선입견을 깨뜨렸고,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한마디로 그는 일깨우는 사람”이었다고 평한다. 아카데미를 세운 플라톤이 아니라 몽매한 아테네 시민들을 날카로운 침으로 쏘는 소크라테스라 하겠다. "리영희 선생의 존재는 이런 탐구력으로 언제나 빛난다. 애매모호한 글발로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결코 없다. 사회과학자의 엄밀성과 투명성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냉엄하고 뜨거운 진실추구와 민족에 대한 사랑 없이는 감내하기 힘든 작업이다. 지적 겸손에 어긋날까봐 되도록 자기표현을 자제하는 편이면서도, 꼭 필요한 시기에 꼭 필요한 말을 하는 용기는 곧 시대의 구원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또 듣는 이의 부끄러움이어야 옳다. 막상 부끄럼을 타야할 위인들의 한결같은 예외는 오만불손으로 들린다." 다들 지조와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현대사의 격동기에 리영희의 진실에 대한 추구는 더욱 치열했다. 더디지만 꾸준한 걸음이었기에 1980년대에 거세게 몰아닥친 ‘좌편향’의 목소리에도 경사되지 않았고, 1990년대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재빨리 변신한 ‘역풍’에도 초연했다. 오히려 “새는 좌우로 난다”는 통찰을 제시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역설하면서 한 걸음도 비켜서지 않았다. 부정하고 사나운 권력의 치맛자락으로 기어든 속물 지식인·언론인이 판치는 가운데 리영희는 시선을 역사의 지평에 고정시킨 가운데 진실을 탐구하고 전하는 데 온 열정을 바친 것이다. 그의 글쓰기 자세는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깝고 진실 추구의 의지는 혁명가에 가까웠다. 우상과이 광기로 몰아치는 사회에서 진실이 설 곳은 바늘 끝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난무하는 우상의 광기와 요설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20세기 한국에서도 ‘사문난적’의 집단폭력은 시퍼렇게 살아 숱한 지성과 양심을 감옥에 가두고 그들의 저작에 금서 딱지를 붙였다. 해방 후 온통 기회주의와 협잡이 판치던 한국사회에서 신념을 갖고 진실의 편에 선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하고도 외로운 행보였다. 4·19민중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요인들이 5·16쿠데타 정권에 가담하고, 4·19민중혁명 주도자들이 군사정권과 유신권력에 협조하고 참여한 대가로 일신의 영달을 누렸다. 쟁쟁한 반독재노선의 지식인·언론인이 신군부정권에 봉사하고,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386세대 가운데 다수가 양지를 좇아 수구정치세력에 가담하였다.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난장판인 격변기에 진실의 편에 서서 양심을 지키는 일은 구도의 길만큼이나 험난하고 고단하였다. 진실은 신비롭고 달아나기 쉬운 것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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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생을 우상(偶像) 타파(打破)에 바친 이성(理性)의 파수꾼 ⑶ 권력의 탄압을 무릅쓰고 진리 추구의 길을 걷다 진리(眞理)란 한마디로 ‘자유의 사상’이며, 자유의 사상을 추구하는 삶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처럼 “너희들이 무슨 짓을 해도 지구의 운동을 멈추게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이다. 그런 신념과 사상과 용기는 이른바 ‘기성의 권위’에 맞서는 삶이다. 오로지 이성(理性)에 충성하는 정신(精神)이다. 맹신과 복종을 강요하는 어떤 권위와 권력에 대해서도 그 허위의 껍질을 벗겨내고자 하는 기백이다. 그런 삶은 필연적으로 약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리영희는 자신이 군사독재의 포악한 시대에 지적 활동을 지탱해 준 두 권의 책에서 진리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진리에 몸바쳐야 하는 지식인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도 배웠다고 했다. 존 베그넬 베리의《사상의 자유의 역사》와 앤드류 화이트의《기독교국가에서의 과학과 신학의 투쟁의 역사》이다. "초자연적 신학이론과 교회의 권위에 대항해서 인간과 인간 이성을 해방하기 위한 싸움이 보여주는 이 처절한 투쟁사는 바로 오늘날 남한 사회의 정치 이데올로기의 권위 앞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자유사상의 투쟁의 현실과 미래를 말해주는 것 같다. 한 때의 기독교가 차지했던 사상 탄압과 반진보적 역할을 지금 이 나라의 착도된 정치 이데올로기가 대행하고 있다. 이 정치 이데올로기가 그 권위를 지키고 국민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수단과 수법의 포악성도 중세의 기독교 권력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면서도 인류의 사상사와 문명사는 반이성적 억압세력의 패배의 역사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 인식 없이는 자유사상을 위한 투사는 희망을 잃은 지 오래일 것이다." 리영희가 거대한 우상집단에 대항해 ‘진리를 위한’ 싸움에 동원한 무기는 ‘논증(論證)’이었다. "약자의 유일한 무기는 논증이다. 자유의 사상을 대표하는 소크라테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브루노, 스피노자, 로저 베이컨‥‥에서부터 근대의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이성의 신봉자들이 종교적 권위나 세속적 권력의 본질인 무지, 편견, 폭력, 아집, 교만, 교활, 포악, 위선, 궤변, 협박, 허위, 광신, 잔인‥‥과 싸워온 기록은 눈물겨울 만큼 감동적이었다. ‘위대한 인간’이란 어떤 인간을 말하며 ‘자유로운 사상’이란 어떤 사상인가를 이 두 권의 책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나의 글을 논증으로 무장하는 동기가 되었다." ‘논증’을 철학적으로 풀이하면 “주어진 판단에 참이라고 하는 것의 이유를 밝히는 논리적 절차, 논증되어야 할 판단을 논제(論題) 또는 주장이라 하고, 그 이유 내지 근거로 선택되는 것을 논거(論據)라 한다.” 칸트(Immanuel Kant)는《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사유는 ‘논증적’이지 ‘직관적’이지 않다고 했다. 리영희가 지식인·언론인의 산맥에서 봉우리로 우뚝 선 것은 치열한 ‘논증의 글쓰기’에서 비롯한다. 책상머리 글쟁이, 추상명사를 남발하는 허위의 글쓰기가 아니었기에 그는 한국 지성사(知性史)의 성좌(聖座)가 될 수 있었다. 그 ‘논증’ 때문에 ‘의식화(意識化)의 원흉(元兇)’으로 몰리고 탄압받았다. 리영희는 논증을 통해 금기의 영역을 조명하고 우상(偶像)들을 박멸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1960년대부터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이른바 ‘의식화’의 ‘원흉’으로 몰아치는 권력에 의해서 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각각 한 차례씩, 그에 대한 정권의 보복으로 세 차례의 반공법에 의한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대학생과 젊은 지식인 세계의 ‘의식화’의 물결에 나의 저서들이 몇 개의 물방울을 보탰는지 정확히 가늠할 길이 없다. 보탰다손치더라도 극히 미미한 것이라는 주관적 평가로 살아왔다." 반이성(反理性)의 인물이나 집단이 권력의 칼자루를 쥐면 그 주변에 온갖 망나니가 몰려든다. 망나니들은 주군에게 자신들의 존재가치와 이유를 확인시키려고 끊임없이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이들 권력집단과 망나니들의 놀음에는 희생양이 필요하게 마련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러했듯이 그 시대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가장 먼저 희생양이 된다. 거기에는 이성의 목소리를 제거하려는 일차적 목적과 함께 그를 따르는 무리에게 공포감을 심어주려는 배제의 효과도 고려된다. 리영희는 반이성의 시대에 우상들의 제물(祭物)이 되었다. 1966년(27일), 1977년(2년), 1980년(60일), 1983년(35일), 1989년(5개월 10일)의 구속을 비롯하여 9차례의 연행, 5차례의 구치소 수감, 3차례의 재판, 각각 2차례의 해직(대학)과 강제퇴직(언론사) 등으로 점철된 30여년의 수난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한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고 시련이었다. 사회 첫발을 땔 무렵 리영희는 그저 평범한 언론인이었다. 몰상식과 광기의 시대가 그를 저항과 비판의 지식인, 사상의 투사로 만든 것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대변혁을 이루고 있기 전부터도 제도나 체제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존중히 여겨왔습니다. 해방 이후 이 사회를 지배해 온 가치관은 자유와 평화를 배제한 것이었습니다. 개인의 창의를 억제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제도나 이데올로기에 맞서 분노를 가지고 싸워왔어요. 군사적 방식 및 철학에 대한 거부, 총체적 평화를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온 것이지요. 앞으로는 이런 가치들에 대한 추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⑷ 지식청년으로 무엇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다 제도나 체제보다 인간적 가치를 존중해 온 한 지식 청년이 반체제 지식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그가 활동했던 1960년대 이후 군부독재체제가 자리한다. 군부독재시대에는 이성보다는 폭력, 논리보다는 우격다짐이 판을 치고 우상이 날뛰었다. 그런 사회에서 참다운 지식인이라면 진실을 말하고 폭력과 싸우며 우상의 실체를 벗기는 일에 앞장서는 것이 당연한 책무다.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의 비보를 접한 매천은 “난작인간식자인(難作人問識字人:세상에서 글 아는 사람이 가장 괴롭구나)”이라 한탄하며 음독 자결했다. 무릇 글을 익힌 자로서 국가의 위난지경(危難之境)이나 반이성(反理性)·불의(不義)가 횡행하는 시대에 침묵하거나 그 집단에 끼어든다는 것은 학문과 진리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 매천의 뜻이고 리영희의 생각이었다. 제자·지인들이 리영희 회갑기념문집(1989년)을 만들면서 쓴 ‘헌정사’에 그런 뜻과 생각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패도(覇道)에 눈이 먼 자들의 광란이 이 땅을 어지럽힐 때, 그 많은 사람들이 침묵하거나 추종하면서 제 나름의 변명을 창작하고 있을 때, 리 교수님께서는 곧고 바른 선비의 길, 스승의 길을 굳게 지켜오셨습니다. 그리고 ‘직필인주(直筆人誅)’의 실증에서 희생의 주역이 되셨습니다. 맹자의 말씀처럼 선비의 길은 뜻을 높이는 일[尙志]이요, 나아가서 정의를 최고의 가치로 받드는 일[義以爲上]이기에 바로 그런 의미에서 리 교수님의 의로운 가르침과 행함은 더욱 빛나는 지성의 깃발로 이 땅에 펄럭이고 있습니다. 진실의 추구를 가로막으려는 우상에 도전하는 그 엄청난 싸움, 그 처절한 현장에 언제나 님이 계셨습니다. 과연 그 도전은 님의 말씀처럼 언제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고, 그 고통없이는 인간의 발전과 진보는 있을 수 없다는 이치를 가시화시켜 주었습니다. 리영희는 치열한 투쟁적 지식인이면서 투철한 언론인이었다. 그의 생애를 직조해온 비판정신의 고갱이는 언론활동을 통해 싹트고 역사와 사회를 보는 눈을 맑게 만들었다. 오랜 글동무였던《한겨레신문》초대 발행인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는 리영희를 이렇게 말한다. "본래 그는 언론인이고 지금도 언론계에서 같이 일하고 있지만 그래서 그를 보고 리교수라고 부르기가 좀 어색하다. 그가 학교로 가게 된 것은 가고 싶어 간 것이 아니라 공화당 독재 때 언론계에서 추방되다시피 해서 학교로 부득이하게 가게 됐었다. 벌써 이십여 년 가까이 교육계에 몸담고 있지만 그의 마음과 정열은 지금도 언론계에서 떠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 특히 진보진영 인사들은 남을 칭찬하는 데 인색한 편이다. 물론 과찬이나 아부 또는 ‘주례사 비평’은 삼가야 할 일이지만 마땅한 상찬이나 평가에 인색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청암의 리영희 평가는 하나 뺄 것도 없이 마땅하다. 시인 고은(高銀)은 회갑기념문집에서 이렇게 썼다. "사상의 은사 시대의 선구자 60년대 70년대 80년대 대표적 지성 아 이 한반도에 살아 있는 정신 불 얼음 우리들의 전위와 후방." ☞ 김삼웅(金三雄)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1. 평생을 우상(偶像) 타파(打破)에 바친 이성(理性)의 파수꾼 ⑸ 병마를 딛고 일어나 다시 우상타파에 나서다 리영희(李泳禧)의 이름을 대면 흔히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냉철한 투쟁적 지식인으로만 인식하기 쉽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직필과 그로 인해 거듭된 박해, 다시 그것에 저항하는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기백이 그런 선입관을 갖게 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랜 지인들의 말을 빌리면 그는 더할 수 없이 인성이 따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소설가 이호철(李浩哲)이 1989년「사회와 사상」에 게재한 리영희에 대한 평론이다. "매사에 화끈하게 뜨겁고 선렬하며 단순명쾌한 사람, 노회성이나 유연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 이 정도면 대충은 리영희씨를 짐작할 수 있다. 생나무를 한 방으로 쳐 빠갰을 때, 허연 속살을 환히 드러내 보이듯이, 한두 번만 만나면 금방 속속들이 알 수 있는 사람이 리영희씨이다. 특유의 폭발성 웃음소리, 다듬어지지 않은 약간 모로 휘뚱거리는 걸음걸이, “오래간만이외다”하고 내미는 거미튀튀하게 두터운 손 등등은 그야말로 북방(北方) 고구려적(高句麗的)이고 수(隨)의 침략군을 때려 부수던 살수대첩(薩水大捷) 때의 병사 냄새가 물씬 풍긴다." 리영희의 직필과 수난은 1990년대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상들의 대처 방식이 보다 교활해지고 망나니들의 칼춤이 다소 둔해졌을 뿐이다. 그러던 리영희에게 새 천년이 열리면서 병마가 찾아왔다. 수차례의 감옥생활과 극심한 고문으로 망가진 육신이 더는 세월을 이겨내기 버거웠을까? "2000년 말, 나는 느닷없이 찾아온 뇌출혈이라는 손님을 맞고 쓰러졌다. 70세를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뇌중추신경 타격(중풍)으로 신체의 우(右)반신이 마비되고, 사고도 혼미해지고 언어의 장애를 겪었다. 이제는 내 의지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지적(知的) 활동과 글쓰는 일은 영원히 끝났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명의 선고를 받고 체념하면서 순순히 승복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의 예정표를 어찌 인간이 가늠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하늘이 큰 뜻을 수행하려는 사람에게는 늑골을 괴롭힌다 하고, 하늘은 큰 역할이 끝나지 않는 사람은 불러가지 않는다 하였다. 리영희가 일흔 나이에 중풍을 맞고 쓰러졌다가 다시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터이다. 자신의 저서를 사들고 온 후학들에게 사인이라도 해줄라치면 리영희의 떨리는 손은 몹시 힘겨워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리영희가 무척 존경했던 백범(白凡) 김구(金九) 지사(志士)의 휘호체(揮毫體)를 일러 ‘떨림체’라고들 한다. 백범은 1938년 5월 7일 저녁,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3당 대표들을 조선혁명당 본부가 있는 남목청(南木廳)에 불러 통합논의를 하던 중 심장 근처에 괴한의 총탄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이후 수전증이 심해진 탓에 백범체는 ‘떨림체’가 되었는데, 자칭 ‘탄환체’라고 농을 하기도 하였다. 리영희의 ‘떨림체’ 역시 그런 의미에서 값지다 하겠다. 리영희의 ‘병세’는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어 그 사이 문학평론가인 임헌영(任軒永) 민족문제연구소장과 “한 지식인의 삶과 사랑”을 담은 자서전《대화》를 구술을 통해 펴내었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 행정부에서 제도적 민주주의가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인권신장과 남북화해협력의 틀이 제법 잡혀가자 리영희는 “내가 했던 주장이 이제 상식이 되었으니, 내 글의 소임은 다한 것 같다.”고 은퇴의 변을 토로했다. 그러나 건강을 차츰 회복한 리영희에게 이명박 행정부의 통치 행태는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 역사의 퇴행과 권력의 만행을 지켜보다 못한 리영희는 글 대신 말로 추상같은 질타를 던졌다. 2009년 7월 1일 저녁, 서울 조계사 한국 불교 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인권실천시민연대 창립 10주년 기념행사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는 이명박 정권을 파시즘으로 규정하였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명박 통치시대는 비인간적, 물질주의적, 인권이 존재하지 않는 파시즘시대의 초기에 들어섰다고 비판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시대 이 땅에서 생존했던 생명체나 개체는 현대적인 인권이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아니었다. 동물이었다.”면서 “다행히 그 속에서 투쟁한 많은 선구자, 선배들 목숨의 댓가로 지난 10년 부족하나마 인간다운 개체로서 되살아났다. ……그러던 것이 1년 반 만에 사회가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기를 맞이해 파시즘의 시대에 들어갔다. …역사는 이뤄진 열매 위에 또 하나의 큰 열매가 열리는 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늦추면 언제든 역전되는 것이다. …현재 이명박 정권의 물질밖에 모르는, 인간이 지향하고 숭배해야 할 가치를 돈밖에 모르는, 그리고 인간의 존재가치가 말살되어 가는 이런 정권을 과거 40년의 고생 끝에 받아들인 것은 우리 자신들의 책임이다. 이는 우리의 실수이고, 개개인의 판단착오이고, 역사의식의 잘못이었다. ……짧은 10년이지만 우리가 이룩했던 공민으로서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필사적인 불퇴전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리영희의 도저한 비판정신과 예리한 분석력이 조금도 녹슬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 강연이었다. 5백여 청중의 뜨거운 갈채를 받으며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리영희는 우리나라 인권의 시기를 4단계로 나눴다. 이승만 정권 시기를 1단계, 박정희·전두환 등 군사정권 시기를 2단계,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를 3단계로 규정하고 이명박 정권 시기를 4단계로 지칭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인권이 존재했던 시기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10년 밖에 없었다. 이후 일년반만에 사회가 또 거꾸로 가고 있다”고 이명박 정권을 매섭게 비판했다. 《연세대학원신문》이 1999년 12월 9일자 기획특집으로 교수와 대학원생들을 상대로 우리 학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 대한 설문을 벌였는데, 리영희와『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1위로 꼽혔다. 이 설문조사에서 일치된 견해는 “1970~80년대 한국 변혁운동의 중심이었고, 폭압적인 시대 상황에 맞서 싸웠으며, 70년대의 냉전주의적 사회분위기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었다”는 것이었다. 굳이 이 설문에 기대지 않더라도 리영희가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조·중·동으로 회자되는 보수언론의 리영희 색깔 입히기와 비난은 논외로 치더라도 윤평중 한신대학교 교수처럼 논리를 앞세운 비판의 견해는 경청해둘 만하다. 윤평중은 리영희의 기여를 인정하면서도 그에 비판을 덧붙인다. "한국사회를 지배한 반공친미의 구조에 내장된 허위를 칼끝 같이 고발한 논객 리영희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투쟁에만 있지 않다. 그는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 자체를 바꾸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우상을 타격하는 그의 이성이 그 과정에서 스스로 세운 또 다른 우상에 의해 광휘(光輝)가 바래 이성의 존재이유를 훼손했다는 사실이 논변된다." 보수언론과 보수성향의 지식인들이 리영희의 ‘우상타파’를 두고 그 자리에 자신이 새로운 우상으로 들어섰다는 투의 공격을 가했지만, 리영희는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교사이거나 스승이면 몰라도 스스로 ‘우상’은 아니었다. 인간의 이성을 높이 치면서《순수이성비판》과《실천이성비판》등을 집필, “역시적 진보가 객관적으로 모순에 의거하여 합법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임마누엘 칸트를 두고 ‘이성의 우상’이라거나 ‘지성의 우상’이라 부르는 독일인은 없다. 또 붓 한 자루로 바스티유 감옥을 깨뜨렸다는 저항적 문필가 볼테르를 ‘우상’으로 받드는 프랑스인은 보이지 않는다. 리영희는 윤평중이 본 대로 “냉전반공주의(冷戰反共主義) 철벽에 이성의 펜을 가지고 도전한 지식인”일 뿐이다. 리영희는 이미『역정 - 나의 청년시대』라는 자전과, 임헌영과 나눈 자서전격인《대화》그리고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의《한국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와 김만수 부산대학교 사회대학원 교수의 연구논집《리영희 살아 있는 신화》, 고병권 외 9인이 조명한《리영희 프리즘》이 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리영희 평전(李泳禧評傳)』을 새로 쓰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잔인무도한 시대에 언론인·지식인으로서 그가 어떻게 진실을 지키고 불의와 싸웠는지를 조명하고,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투영하여 나약과 탈선으로 책무를 저버린 언론인·지식인들의 귀감을 다시 찾고자 함이다. ☞ 김삼웅(金三雄)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계속}
안수찬《한겨레21》기자 “언론인 리영희는 진정한 특종 기자다. 세계 정치의 맥을 잡아 헐을 찔렀다. 그런 특종 기사가 부지기수다. 국내 질서는 휘어잡았으나 국제 질서에서 비루했던 이 땅의 권력자들을 끝없이 불편하게 만들었다. 언론인 리영희는 참된 지식을 궁구했고 또한 기꺼이 나누었다. 독서의 넓음과 깊음은 현대사를 통틀어 따를 자가 별로 없고, 그에 바탕을 둔 글쓰기는 우리의 비겁한 삶을 각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의 글은 방황하는 지식인에게 양심을, 주린 민중에게 양식을 주었다. 양식이 되는 양심을 나눠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