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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강해 제 12장 가열되는 음모와 종의 대응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이후에 유대교 지도자들의 음모와 살의는 절정으로 치닫게 되고, 이틀 앞으로 다가온 유월절을 맞아 전국 각처로부터 백성들은 몰려들고 있었으며, 예수가 유월절에 대대적인 선동을 할 것을 염려하여 최선의 모략과 지혜를 동원하여 파상적인 공격을 가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직 신령한 사명의 완수를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1. 악한 농부의 비유 (12:1-12절)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의 권위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인 후 예수께서는 저들을 정면으로 책망하고 경고하기 위하여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당시에는 본토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타지방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많았으며, 로마인으로서 팔레스틴에 투자한 사람들도 있었다. 따라서 지주의 부재로 많은 일들이 발생하였다.
비유의 배경은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인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간 주인과, 소작인이라는 신분을 망각한 채 소작 의무를 다하지 않고 도리어 포도원을 차지하려는 소작인의 탐욕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하여 주인이신 하나님과의 소작 관계를 배반하여 심판을 받게 될 유대인의 처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유는 이사야 선지자가 노래한 ‘포도원의 노래’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포도원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소작인들은 유대인의 지도자들이며, 종들은 예언자들이요, 주인의 상속자이며 외아들은 예수라는 것이다.
‘비유’라는 말 ‘파라볼레’는 ‘나란히 놓다.’라는 뜻으로 일상생활의 일로부터 숨겨진 내용을 설명하는 교육 방식이다. 예수께서는 교육을 하실 때 비유의 자료들을 자연이나 생활, 일상의 일들, 전형적인 사건들, 예외적인 일들을 주로 사용하셨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라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마도 외국인 지주였거나 부유한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뜻하는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으며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주인은 포도원에 산울타리를 둘렀다. 산울타리는 야생동물이나 침입자로부터 포도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시나 돌로 울타리를 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은 포도원 비탈진 곳에 두 개의 구덩이를 판 후 구덩이 주변을 돌로 쌓고 이 구덩이에 포도를 넣고 발로 밟으면 작은 연결 구멍을 통하여 포도즙이 흘러 내려 항아리에 담긴다. 이렇게 모아진 포도주는 가죽 부대에 넣고 보관하는 것이다. 포도원에는 파수꾼이 머물 망대를 짓는데 높이는 보통 10큐빗, 약 5m 정도이고 너비는 1.8m 정도의 크기이다. 이곳은 농부들이 거하기도 하고 소출을 보관하기도 하는 것이다.
주인은 상당한 규모의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소작을 주고 떠나갔다. 일반적인 관례의 소작 형태는 수확의 일정량을 반분한다. 즉 5:5의 비율로 정하여 수확량의 절반을 토지 소유자에게 납부하였다. 주인은 소작 농부를 믿고 타국에 갔는데 이는 포도원의 모든 권한을 소작인에게 전부 위임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포도원인 이스라엘을 잘 가꾸어 줄 것을 믿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맡기셨던 것이다.
‘때가 이르매’라는 말은 쌍방이 인지된 때를 가리키는데 소작 계약에 정해진 대로 결실을 거두어들이는 때였다. 팔레스틴의 포도 소출은 대개 9월에 이루어졌으며 주인은 소작료를 받기 위해 종을 보내었다. ‘종’이라는 말 ‘둘로스’는 모든 권한이 부여된 하인을 의미하는 ‘오이케데스’와는 달리 자신의 모든 권리가 주인에게 있는 노예를 가리킨다. 즉 종은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들을 의미하며 이들은 자신의 권리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리의 대변자로서 보냄을 받았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 요구하신 것은 물질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 신앙의 감사의 열매, 순종과 자비의 열매들이다.
주인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농부들은 이유 없이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멸시한 것을 의미한다. 주인은 다른 종을 다시 보냈는데 이번에는 종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했다는 것이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의 권위에 도전하는 농부들에게 주인은 자비와 인내로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 다른 종을 보냈으나 농부들의 패역과 완악함을 더욱 심해졌고 능욕까지 하였다. ‘능욕’이라는 말 ‘에티마산’은 모욕을 주는 것으로 때리고 상처를 낸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다 모욕하고 인격을 모독한 것이다. 주인은 또 다른 종을 보내었는데 그들을 죽였으며 다른 많은 종들을 계속해서 보냈으나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는 것이다. 포도원 주인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내와 관용을 보인다. 그러나 농부들은 주인의 관용에 반비례하여 갈수록 더욱 완악하고 악랄하였다. 이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반하여 이스라엘의 패역한 역사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들이 다 가고 없고 이제 한 사람만이 남았는데 그는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이렇게까지 된 상황에서도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의 징벌을 통한 방법이 아니라 관용의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놀라운 인내를 보이고 있다. ‘사랑하는’이라는 말 ‘아가페톤’은 ‘유일한’이라는 의미도 있다. 주인은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아 포도원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하고 심각했는가를 알 수 있다. 최후로 보냄을 받은 아들은 앞서 보낸 종들과는 달리 농부들을 심판하고 손익을 계산하고 그들에게 상벌을 부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은 것에서 종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주인은 농부들이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의 기대와는 반대로 농부들의 생각은 아들을 죽이자는 것이었다. 당시의소유법은 소유주가 없는 재산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누구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으며 그럴 경우 먼저 주장한 사람에게 그 소유권이 돌아가도록 되어 있었다. 농부들은 그 아버지가 죽은 상태에서 상속자인 아들이 없으면 그 밭이 자기들의 것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에 먼저 아들부터 죽이자고 모의한 것이다. ‘내 아들을 공경하리라.’고 기대했던 주인의 기대는 완전히 거부되었고 농부들은 아들을 죽여 포도원 밖으로 내던짐으로써 극에 달한 포악함을 보여 주고 있다. 저들은 최소한 장례조차 치러 주지 않고 시체를 들판에 내버림으로써 육체적 죽음과 더불어 인격적 죽음까지 더하는 포악한 죽임을 저질렀던 것이다. 누가는 ‘아들을 먼저 포도원 밖으로 끌어낸 다음에 죽이자.’고 하여 예수 자신이 예루살렘 성 밖에서 죽임을 당할 것이 예언되어 있다.
이제 예수님은 저들에게 물으신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비유의 결론 부분에 이르러 과거 시점이 미래 시점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암시하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이 비유의 의미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계시는데 마태는 무리들이 대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시는 경우가 거의 드물지만 여기서는 소작인들의 행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강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용을 베푼 주인은 마지막 기회를 거부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줌으로써 포도원의 질서를 바로 잡을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심판이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는데 그 심판은 궁극적인 파국의 심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선민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는데 A.D 70년 로마의 티토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의 파멸로 인한 하나님 나라와 그의 백성의 완전한 해체였다. 뿐만 아니라 포도원의 소작인은 혈통적 유대인에서 신앙적 유대인으로 새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완악했던 유대인들은 포도원 지기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탄생하는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편118:22-23절을 인용하시고 그 내용을 자신에게 적용시켜 예언하신다. 즉 건축자들이 부적격 판정을 내리고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 즉 주춧돌이 되었다는 내용으로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부정하고 거역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를 죽음으로부터 살려 내어 열방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련한 건축자가 쓸모가 없다고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는 일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며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하나님은 능히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은 전혀 다를 수가 있기 때문에 유대 지도자들이 쓸모가 없다고 버린 돌이지만 하나님은 성전 곧 교회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께서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하시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교권자들의 무지와 완악함으로 공개적으로 책망하셨다. 특히 이 비유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당신의 권위 앞에서 허위와 위선의 실체가 드러나 버린 교권자들의 왜소한 모습을 대조시켜 자신의 권위를 확증하신 것이다. 이는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할 권위를 주었느냐.’는 저들의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하신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은 하나님의 독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징계하라는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이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비유를 들은 교권자들은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반대 의견을 제시하거나 자기들을 변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결국 예수의 지적이 정당함을 인정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회개하거나 수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무리들을 두려워 한 나머지 잡지 못한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저들의 가르침은 백성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은 백성들이 진리로 받아들일 정도로 심대한 영향력을 주었다. 저들은 예수의 권위에 대해 공격하여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의 실체를 밝혀내어 잡고자 했으나 결국 논쟁에서 실패하고 비참하게 물러갔다. 그러나 잠시 잠깐의 후퇴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예수를 처형시킬 때까지 예수에 대한 도전을 결코 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납세와 부활에 대한 논쟁 (12:13-27절)
심판의 경고를 담은 예수의 비유에 이어 유대교 지도자들의 반격이 재차 시도되었다. 몇 가지 시험이 등장하는데 납세 문제는 정치적 딜레마를 위한 것이고, 부활 문제는 신학적 논쟁에 속한다.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바리새인과 헤롯당을 동원하여 당시 정치적 상황에서 매우 민감했던 납세 문제로 예수를 옭아매려 했다. 납세 문제는 A.D 6년 헤롯의 아들 아킬라오가 로마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유다라는 사람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하나님 외에 통치 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범죄라고 선언하고 갈릴리 주민들에게 반역을 추구했으며, 당시 열심 당원들은 세금을 바치는 일은 로마 황제에게 순복하는 일이라 하여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헤롯당은 납세에 상당히 관대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 문제로 예수를 시험해 온 것이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직접 나서지 않고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뽑아 예수를 책잡게 했다. 이는 저들의 행동이 얼마나 집요한가를 보여 준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반로마 주의자들로서 로마에 세금을 내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이며, 헤롯당은 찬성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렇게 상이한 두 집단이 서로 협조하여 예수를 제거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반로마적인 혁명가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친로마적인 체제 유지자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반로마적인 민족주의에 편승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유지하려는 바리새파는 물론, 로마 권력에 기생하여 자신들의 이익만을 탐하는 헤롯당도 비판하셨던 것이다.
저들은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하여 위선적이며 수사학적인 찬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저들은 예수를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는 분이라고 하였다. ‘참되다’라는 말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무흠하고 거룩한 품성 및 초월적인 권위를 고백하는 말로서 만약 이 말을 인정하고 진실하게 했더라면 감히 예수를 힐책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지만 입에 발리는 사탕발림으로 했기 때문에 거짓이요 위선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는‘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는 품격을 가진 진리를 수호하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또 말하기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고 했다. 이처럼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예수를 칭송했지만 그들은 말과 같이 예수를 진정으로 우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죄를 더하는 위선과 술수였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일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가이사’는 로마 황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로마 최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에서 유래했으며 당시의 가이사는 황제 디베료였다. 여기에 언급되는 ‘세’는 ‘인두세’로서 A.D 6년에 헤롯 아켈라오가 추방된 후로부터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인두세를 황제에게 바치라는 요구를 받게 되었다. 이렇게 제정된 인두세는 남자는 14-65세까지, 여자는 12-65세까지 한 데나리온씩 바쳐야 한다. 인두세 말고도 로마에 바치는 세금이 두 가지가 더 있는데 하나는 지세로 곡식 수확량의 1/10, 술이나 과일의 수확량의 1/5을 돈이나 현물로 바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소득세로 전 소득의 1%를 바치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은 그들이 로마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것이며 불만이 많았다. 특별히 인두세는 더욱 그 의미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매년 성전에 생명의 속전을 바치기 때문에 하나님께 바치는 속전 대신에 로마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은 율법에 어긋난 행동인 동시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금에 반대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금 문제는 예수를 사면초가로 몰아넣는 수렁이 되었던 것이다. 즉 납세를 찬성하면 매국노가 되고 반대하면 로마 권력에 저항하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찬성하면 민족의 반역자로 매도되어 돌로 쳐 죽임을 당할 것이며, 반대하면 로마 당국에 고소되어 로마법에 의해 처단될 것이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하고 답변을 다그쳤던 것이다. 저들은 이미 ‘당신은 참되시고’라고 하여 예수에게 올무를 놓았기 때문에 참이신 예수가 육신이 살기 위하여 적당한 궤변을 쏟아낼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외식함을 아셨는데 ‘외식’이라는 말 ‘휘포크리시스’는 ‘위선’이라는 말이다. 저들이 진정으로 그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를 궁지에 빠뜨려 제거할 목적이었던 것이다. 마태는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라고 했고, 누가는 ‘그 간계를 아시고’라고 했다. 이는 그들의 숨겨진 저의를 너무도 환히 들여다보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시험’이라는 말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렇다면 예수를 넘어뜨리려고 시험했던 사탄의 행위와, 지금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적대자들의 행위는 동일한 것이며 결국 저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훼방하는 사탄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와서 보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그 동전의 화상과 글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 자신이 이미 가이사의 돈을 사용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들 자신은 이미 로마의 권력과 납세의 의무를 인정하고 있음을 폭로하신 것이다.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 은화인데 로마 제국의 통일된 세금 화폐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 동전의 한 면에는 신적인 신분의 상징인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 글자가 있는데 ‘황제 디베료, 신적인 아구스도, 존엄한 아들’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뒷면에는 ‘최고의 사제 폰티팩스 막시무스’라는 문구와 함께 황태후 리비아의 화상이 있고 그 오른편에는 올림피아의 긴 홀이 있고 왼편에는 올리브 나뭇가지가 있어 그녀를 천상적인 평화의 화신으로 나타낸다. 결국 이 화상과 글귀들은 모두 황제 숭배 사상에 근거한 신성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저들은 항상 이 돈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돈을 자연스럽게 예수께 보여드렸다. 이들은 예수께서 왜 돈을 보이라고 하는지 생각하지도 않고 돈을 꺼낸 것이다. 이 일이 자기들의 위선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동전을 보시고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다. 예수는 그들 스스로 대답하게 함으로써 자기들이 파 놓은 함정에 자기들이 빠지게 하신 것이다. 이 돈이 저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것은 저들이 평소 로마 권력을 인정하고 황제 숭배를 하고 있으며 납세를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저들이야말로 위선자이고 매국노라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는데 가이사의 요구도 합법적이고, 하나님의 요구도 합당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즉 국가 권력과 하나님의 나라가 서로 반목 관계가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국가 권력이라는 질서 속에서 인간들이 살아가도록 하신 것이므로 국가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서 국민들은 자기의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납세도 그 책임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요구와 가이사의 요구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 둘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와 국가가 완전히 분리되어 별개의 것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국가 권력은 반목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동시에 모순 관계에 빠져도 안 되는 것이다. 만약 모순 관계에 빠져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물론 우리들은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국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위탁받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국가도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서 ‘바치라’고 한 말은 ‘모두 되돌려 주라.’는 뜻으로 필연적인 책무를 강조하는 말이다. 마치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빚을 갚듯이 세금에 대한 태도도 신실하고 분명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자기들의 생각을 완전히 능가하는 예수의 지혜에 저들은 크게 놀랐다. ‘기이히 여겼다.’라는 말은 예수의 신적인 능력에 완전히 압도되어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자기들로서는 당해낼 수 없는 예수의 초월적 지혜와 능력을 보고 깜짝 놀랐던 것이다.
이번에는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부활에 대한 논쟁을 걸어온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자신이 죽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셨기 때문에 예수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비합리성을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어서 예수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두 가지이다. 첫째 부활 후의 세계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계가 아니라 천사들과 같아지는 세계라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이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성경을 근거로 부활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사두개인에 대한 언급은 이곳뿐이다. 이들은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들로서 대개 사제 계층과 일반 귀족에 속하는데 대중적인 인기는 없었지만 정치적, 종교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집단이었다. 이들의 특징은 엄격한 현세주의자들로서 부활이나 영과 천사의 실체를 믿지 않았으며, 모세 오경 이외의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이 믿는 모세 오경에는 부활에 대해 명확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율법을 근거로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이들은 오세 오경을 들고 나왔다. 즉 결혼법에 관한 규례인 신25:5-10절에 나오는 규정으로 형이 자식이 없이 죽는 경우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자식을 낳게 해 줌으로써 형의 가문을 세워주도록 하는 소위 수혼 제도, 내지는 계대 결혼법을 말하는 것이다. 이 법은 단순히 대를 잇게 한다는 목적 외에 하나님 백성의 순결성을 유지하고, 홀로 남아 있는 과부를 제도적으로 보살펴 주며, 죽은 형제의 가문과 기업을 보존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법은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못 낳고 남편이 죽는 경우 그 책임이 여자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동생을 여자에게 주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유다가 셋째 아들을 다말에게 주지 않은 경우인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모세가 수혼 제도를 율법으로 주었으므로 합리적으로 판단할 때 모세가 부활을 인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도 부활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현세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부활은 부활 이후의 세계에서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 현세의 생활이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이 있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의 말대로 하면 칠 형제가 다 죽어서 그 여자를 만났을 때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아마도 바리새인들은 첫 번째 남편의 아내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사두개인들은 그런 부활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수혼 율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부활은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 이전에 내세를 부정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고, 바리새인들은 현세와 내세를 동일한 세계로 알고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부활에 대하여 오해했다고 말씀하시고 오해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들이 성경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대하여 오경만을 성경이라고 고집하며 그것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경의 진의를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성경에 대한 단편적이고 편견에 찬 이해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시를 왜곡할 위험성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를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무에서 유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죽은 자에게 새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즉 그들은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 즉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의 판단과 이해 속에서 오해했던 것이다. ‘오해했다.’라는 말 ‘플라나스데’는 마치 목자를 따르지 않고 우리를 뛰쳐나간 양이 정도를 벗어나 갈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것을 뜻한다. 이 말은 유다서에서 ‘유리하는 별’로 나와 있다. 사두개인으로 대변되는 유대교는 이렇게 제멋대로 나돌다 길을 잃은 양과 같고, 방황하고 유리하는 별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심으로 부활도 있으며, 천사도 있다고 하셨다. 이는 부활과 천사를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며, 부활 후의 세계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세계가 아니라 천사와 같은 전혀 다른 세계라고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생명을 받은 존재로서 영생에 들어간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천사들은 자라거나 쇠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피조하신 그대로 영원한 상태로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부활관이 잘못 되어 있음을 지적하신 후에 이제는 그들이 구체적으로 성경의 어느 부분을 잘못 읽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신다. 자기들이 생각하기에는 모세 오경에 부활을 인정하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하여 신명기 25:5-6절을 인용하여 도전했는데 예수도 이에 맞서 모세 오경에 분명히 부활의 증거가 있음을 제시하신 것이다.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을 인용하셨는데 이는 출애굽기 3:1-6절에 나오는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나타내시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실 때 ‘에고 에이미’ ‘나는 ...이다.’ 라고 하신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물으셨는데 즉 하나님의 과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고, 이삭의 하나님이셨고 야곱의 하나님이셨다는 말이 아니라 현재 이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이 조상들은 모세 시대 훨씬 이전에 죽었지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바로 그 시점에 그들 족장들이 살아 있는 존재로 인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족장들은 죽어서 완전히 무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이 족장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더욱 강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족장들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그들과 생명적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생존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는 자들은 죽음을 넘어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에 동참하는 것이다. 비록 그들의 육체는 흙이 되어 변했다 할지라도 그 영혼들은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계속하면서 궁극적으로, 실제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경이 부활을 증거해 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을 책망하시고 저들이 성경을 크게 오해했다고 하셨다. 마태는 ‘무리들이 듣고 놀랐다.’고 했고, 누가는 ‘서기관들과 율법 학자들이 ’선생님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인정했다고 전한다.
3. 가장 큰 계명 (12:28-34절)
정치적, 신학적 질문에 이어 세 번째로 서기관은 율법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선한 사마리아인의 도입 부분으로 하여 마가와 초점이 다르고, 마태는 이 서기관 역시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마가는 서기관의 태도가 진지하며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을 구체적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세부 조항을 분류하고 중하고 경한 것을 나누고 상세한 규례들을 도출해 내기 위해 논쟁을 벌였다. 이 서기관은 이러한 고민을 해결하고자 했을 것이다. ‘서기관’은 ‘그람마튜스’라는 말로 글을 베끼는 사람이다. 레위 지파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며 제사장의 직무를 기록하거나 성전 수리비로 모금된 공공 기금을 계산하여 기록하고 특히 행정부의 서기관은 정부의 고문으로 일하거나 군대 소집의 책임도 맡는다. 신약시대에는 율법 학자로 알려졌다.
‘예수께서 잘 대답하시는 줄 알고 나아와 묻되’라는 말은 예수에게 질문을 하게 된 동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예수를 시험하려고 묻는 것과 다르다. 이 서기관은 예수와 사두개인 간에 벌어진 논쟁에 대하여 예수께서 지혜 있게 대답하심으로 사두개인들의 입을 봉쇄한 것을 지켜본 증인으로서 율법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려고 한 것이다. 유대인들에게는 248개의 규정령과 365개의 금지령이 있었다.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 중에 어는 것의 큰지, 어느 것이 더 중한지,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서기관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첫째’라는 말 속에는 그 가치의 중요성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것이라는 개념이 들어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6;4-9절 말씀을 인용하셨다. 이스라엘에게는 ‘신앙 신조’라는 할 수 있는 ‘쉐마’가 있다. 신6:4절의 첫 글자인 ‘들으라.’라는 말이 ‘쉐마’인데 유대인들은 이 쉐마를 매일 아침 암송했으며, 그 격문을 팔이나 이마에 달아 항상 착용하였다. 유일 신 사상은 십계명 중 제 1계명의 중심이기도 한데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대 전제는 ‘유일성’이다.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유대인의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또한 그 유일 신 하나님과 유대 백성들 간의 언약 관계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통해 그의 백성을 신실히 사랑하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능력을 총 동원하여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다 주셨다. 동시에 죄를 범한 인간을 속량하시기 위하여 하나님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에게 주실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땅히 당신의 백성들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시기를 요구하시고 또한 기대하시는 것이다. 신명기 6:4절의 말씀은 십계명의 전반부 곧 하나님에 대한 계명의 포괄적 요약이다. ‘사랑하라.’는 말 ‘아가페세이스’는 미래 시상에 속하는데 이는 강한 의지를 동반한 명령문의 대용으로 쓰인다. ‘마음’이라는 말 ‘카르디아’는 전체적인 자아 즉 인격의 중심으로 상징된다. 이는 모든 사고와 활동의 근저를 이루는 인간 의지를 강조한 표현이다. ‘목숨’은 ‘프쉬케’라는 말인데 육체적 생명 즉 육체를 활기롭게 하는 그 생명력을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적당히, 어느 한계까지만 사랑하지 말고 생명을 걸기까지 전력으로 사랑하라는 강한 요구를 담고 있는 명령이다.
‘뜻’은 ‘디아노이아’라는 말로 지적 능력, 생각하는 힘을 말하며 맹목적이고 무지한 상태가 아니라 분명한 이해력과 통찰력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힘’은 ‘이스퀴스’라는 말로 인간이 소유한 총체적인 능력, 그 중에서도 특히 영적, 육체적 활동력을 강조한 말이다. 그렇다면 이 네 가지 단어가 주는 의미는 인간의 전 인격과 모든 정성과 온갖 능력을 다하라는 것이다. 이 단어들에게는 ‘다’라는 말이 첨가되어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실로 하나님은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사랑을 원하지 않으시고 전폭적이고, 전의지적인 사랑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가장 심대한 의무인 동시에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를 지속시켜 주는 특별한 기회요 기쁨의 부르심이다.
이어서 예수께서는 하나님 사랑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기 위해 레19;18절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이는 십계명 중 둘째 부분으로 대인 관계의 율법이다. 이웃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짝을 이루어 율법의 완성이라는 차원에서 제시하고 계신다. 하나님과 인간 사역의 수직적 관계를 올바로 유지하기 위해 마련된 대신적 계명은 전제요 모범이다. 동시에 대인적 계명은 대신적 계명의 필연적 결과요 자연스러운 귀결인 것이다. 이 두 계명은 결코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레19;18절의 이웃은 이스라엘 동포로 한정되며 함께 사는 타국인까지만 허용된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웃이라고 할 때에는 눅10:29-37절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에게서 볼 수 있듯이 무제약적이요, 무차별적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기를 거부했지만 예수께서는 그를 이웃으로 인정했고 이것은 모든 이방을 이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 긍정되고 있는 동시에 이웃 사랑의 시금석이 곧 자신 사랑임을 알 수 있다. 실로 자신을 정당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한 것 같지만 순위에 있어서는 구별이 된다. 즉 먼저가 하나님 사랑이며, 이 사랑이 자연스럽게 이웃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사랑이 이웃 사랑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고 하셨는데 마태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였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이 계명이 모든 계명 중의 계명임을 단정적으로 제시하신 것이다.
서기관은 예수의 답변에 매우 고무되었으며 흥분하여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옳소이다.’라고 했다. ‘옳소이다.’라는 말 ‘칼로스’는 감탄에 가까운 말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말씀을 자기의 언어로 다시 반복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서기관은 신4:35절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신4:35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그 외에는 다른 심이 없음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서기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목숨과 뜻’대신에 ‘지혜’라는 말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일치한다. 다만 유사한 말을 대신하여 그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자 했을 따름이다. 그는 율법에 대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계명이 가지는 궁극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한 선지자들의 말을 인용하여 말했던 것이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당시 형식적인 제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유대교인들에 비할 때 탁월한 것이었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율법과 희생 제사가 동일 선상에 놓일 만큼 의식적 종교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기관은 사랑이 더 우월하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칭찬하셨다. ‘지혜 있게’라는 말 ‘누네코스’는 ‘그 마음의 씀씀이가 유익한 결과를 낳게 한다.’라는 의미로 ‘매우 정확하고 재치 있게 말했다.’라는 것이다. 서기관은 예수의 말씀을 전적으로 찬동함으로써 예수의 권위를 인정했고, 예수께서는 서기관의 율법의 이해가 본질에 가까워 있음을 인정하셨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즉 그가 하나님 나라로 이끌림을 받을 수 있는 영적 분별력과 지혜가 있음을 인정하신 것이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각 개인의 지혜로운 마음에 깃들어 있다.
*요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나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께서는 서기관이 지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지라도 앞으로 사려 있는 회개를 하고 예수를 주로 영접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도록 도전하라고 격려하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서기관의 질문에 대답하심으로 더 이상 감히 묻는 자가 없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적대자들과의 논의를 끝맺었음을 뜻한다.
4. 다윗의 주이신 예수 (12:35-37절)
지금까지 유대교 지도자들의 난해한 질문과 공격을 받았던 예수께서 역공세를 취하시는데 바로 자신의 메시야적 신성을 계시하신 것이다.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던 적대자들의 모든 시도는 좌절되었고 그로 인해 저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주도적으로 그들을 향해 질문 공세를 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첫 번째 질문이 다윗의 아들로서의 메시야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유대인들의 정통적인 메시야관은 다윗의 육체적 자손으로서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할 인물이었다. 이런 경우 메시야는 인격적으로 다윗에게 종속되며 사역으로 이스라엘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예수가 주장하는 메시야는 저들과 전혀 달랐다. 다윗이 메시야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예수가 혈육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는 마리아의 아들일 수가 없고, 예수가 혈통으로는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실제적으로는 다윗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윗의 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인격은 다윗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그의 메시야로서의 사역도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이 질문을 하셨는데 마태는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라고 질문의 대상을 분명히 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모여 들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에게 메시야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 논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셨다. 즉 ‘어떤 의미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저들의 대답을 기다리시지 않고 자신이 직접 그 대답을 하셨다. 그 내용은 시110;1절이었다. 이 시는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언한 것이었다.
*시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물론 모든 성경은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이 기록한 말씀이기 때문에 저자가 성령이시며 모든 말씀이 다 예언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메시야의 초월적 신성을 설명하시기 위해 성경의 증거를 들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다. 헬라어 성경에는 ‘퀴리오스 토 퀴리오 무’라고 되어 있어 이 말을 번역하면 ‘주께서 내 주께’라고 되어 있어 이해가 곤란하나 히브리 성경은 ‘예호와 라도니’ 즉 ‘여호와께서 내 주께’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유대인들이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아도나이라고 읽기 때문에 헬라어에는 ‘주’로 번역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며, ‘내’는 다윗이고. ‘주’는 메시야인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정복자는 패배한 집권자들의 목을 발로 밟음으로써 그들의 승리를 상징화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원수 즉 사탄의 목을 발로 밟으실 때까지 그리스도를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전제로 한 것이다. 메시야 되신 예수는 비록 십자가 형틀에서 사탄과 죽음의 세력에게 자신을 내어주실 것이지만 곧 하나님의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개입으로 예수를 부활하게 하시고 죽음과 사탄의 세력을 정복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영광스러운 승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며 재림 때까지 머무르실 것이다. 이것이 시편 110편의 내용이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즉 다윗이 주라고 부른 분이 그리스도라면 당연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없다. 조상을 하나님의 대권자로 인정하는 유대 사회에서 조상이 자손에게 존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질문하신 것은 편협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이 불완전함을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시려는 것이다. 분명히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다. 적어도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존재하신 다윗의 주 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실로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분이지만 성결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만민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부터 대적자들은 공개적으로 예수에게 도전하여 그를 망심시킴으로 백성들과 분리시키려 했으나 그들의 시도는 좌절되었고 군중들은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예수의 탁월한 가르침에 백성들은 즐거워했던 것이다.
5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과 과부의 두 렙돈 (12:38-44절)
본문은 두 가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유대 지도자들의 위선을 경고하시는 내용과, 가난한 과부가 바친 두 렙돈의 연보에 관한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은 마태가 ‘일곱 가지 화’로서 위선적 거짓 서기관들의 부패상을 고발했고, 마가는 두 가지 내용을 경고하고 있다. 첫째는 명예욕에 사로잡힌 서기관들이 대중의 인정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들은 신분상의 특권을 표시하는 옷을 입고 다니면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며 어디를 가나 상석에 앉으려 하는 자들이다. 둘째, 재물에 대한 탐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과부의 가산까지 삼키는 서기관들의 반 율법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메시야의 다윗의 자손에 대한 이야기를 끝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물러가고 백성들과 제자들만 남아 있는 상태에서 예수께서는 교훈을 계속하셨다. 당시 서기관들의 의복은 세마포의 통옷과 땅에까지 닿는 백색의 긴 두루마리 형태의 옷인데 이 옷들은 의전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들의 명예와 풍채를 자랑하기 위해 착용하였다. 특히 두루마리 형태의 옷 끝에는 옷 술이 달려 있어서 일반인들의 옷과 구별되었다. 또한 외견상의 위엄과 영예를 과시하기 위하여 팔에 성구를 넣는 곽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기도 했다. 유대사회에서 서기관들은 일반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장터 같은 곳에서 서기관을 만나면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며 지극한 존경의 표현인 ‘랍비’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은 공개적인 시장터에서 이런 존경받기를 즐겨했던 것이다. ‘회당의 상좌’는 명망 있는 사람이나 공적인 인물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자리로 ‘토라’를 넣어두는 상자 앞에 있으며, 이곳은 회중 전체가 바라보기 좋은 장소이다. 서기관들은 누가 권하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잔치의 상석’은 잔치에서 가장 존귀한 자리로 출입구에서 제일 안쪽 중심의 오른쪽이다. 중심에는 주인이 앉고 랍비는 오른쪽에 앉아 사람들을 한 눈에 바라보는 것이다. 노령자나 주인의 부모들보다 우선적으로 이 자리에 서기관들이 앉았다. 예수께서는 이들의 치졸한 명예욕을 비난하신 것인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그들이 자신의 영광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서기관들의 명예욕에 이어 재물에 대한 탐욕을 고발하고 있는데 경건의 구실을 붙여 과부의 재물을 착취하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전문가인 서기관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데 신앙심의 깊이를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기도를 형식적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과부의 재산을 수탈하면서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경건한 척하며 길게 기도하는 행위는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일이다. 저들의 행위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패역한 행위이며 중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더구나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자리에 있으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가르치면서 오히려 불경건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혹독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비판하셨다.
예수께서는 이어서 이들 서기관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에서 가장 볼품이 없는 자리에 있는 과부의 진실한 신앙을 칭찬하셨다. 부자는 많은 것 가운데 일부를 헌금했고, 과부는 없는 가운데 가진 것 전부를 바친 것이다. 예수께서는 과부의 적은 헌금을 높이 평가함으로써 신앙의 핵심은 풍부한 양과 화려한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중심과 순수한 본질에 있음을 교훈하셨다. 성전의 여인의 뜰은 여인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성전 창고가 있고, 여인들의 뜰을 구별하는 벽이 있는데 한 쪽은 남자의 뜰이 있고 다른 한 쪽은 이방인의 뜰이다. 이들 사이에는 벽이 있는데 벽을 따라 놋쇠로 된 나팔 모양의 헌금함이 13개가 놓여 있었다. 13개의 헌금함 가운데 9개는 일반 제물 대신에 드리는 헌금이나 성전세를 담게 되어 있으며, 이것으로 성전을 운용하였고 나머지 4개는 빈민 구제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헌금함 맞은편이 앉아서 무리들이 돈 넣는 것을 보고 계셨다. 당시에는 헌금 드리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였는데 헌금하는 자가 자기의 헌금액을 알리는 경우가 있고, 또 자신의 돈을 헌금통으로 던져 넣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즉 부자들은 자신의 헌금을 과시할 목적으로 많은 헌금을 던져 넣은 것이다. ‘한 가난한 과부’라는 말 ‘프토코스’는 극빈자를 말한다. 즉 부자와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말로 이 과부가 바친 ‘렙돈’은 ‘작은 것’이라는 의미로 가장 소액의 유대 동전이었다.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인데 이 동전은 1/128 데나리온의 가치라고 한다. 현재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100,000원이라고 할 때 한 렙돈은 780원이다. 두 렙돈이면 1,560원인데 2,000원 정도를 넣은 셈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헌금에 관한 주님의 뜻을 정확히 교훈하시기 위하여 저들을 부르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신실성과 권위를 인준할 만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하신 후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다.’고 하셨다. 산술적 가치에 있어서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은 액수가 신앙적 가치에 있어서는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헌물의 양보다 헌물에 실린 마음을 더 가치 있게 여기셨고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다. 실로 과부는 자기의 소유의 전부를 드렸고 생활비의 전부를 드렸던 것이다. 이는 생명을 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가치를 지닌 것이다. 여기서 ‘생활비’란 한 달의 생활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일용 근로자에게 소용되는 최저의 일일 기본 생활비이다. 즉 과부는 하루에 2,000원 정도 벌어서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그녀의 헌금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전부’로서의 헌신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과부는 일일 생활비 전부를 드림으로써 그 날 하루는 굶어야 하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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