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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공동체
□ 본문 : 창세기 38장 1-11절
창세기 37장은 요셉이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는 내용입니다. 37장 마지막 절인 36절 말씀입니다.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39장은 노예가 되어 애굽으로 간 요셉의 이야기입니다. 39장 1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그런데 38장에 갑자기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도 시아버지 유다와 며느리 다말의 근친상간의 이야기가 말입니다. 그렇다면 37장과 39장 요셉의 이야기 사이에 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끼어있는 것일까요?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성경을 읽는 분들이라면 당연히 이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성경은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구속사의 관점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고 온 인류에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사망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신약성경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이라면,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구원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중요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이들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12아들 가운데 왜 유다가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유다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왜 다윗이 중요합니까? 예수님께서 유다지파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유다와 다말이 낳은 베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다말에 대해서 나눌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형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았습니다. 요셉은 노예가 되어 애굽으로 갑니다. 야곱의 사랑받는 아들 요셉이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는 기가 막힌 고난이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요셉이 애굽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야곱의 온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야곱의 가족은 애굽으로 내려가야만 합니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또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에 부르셨으면서 말입니다.
가나안 땅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야곱의 아들들은 가나안 여인들과 결혼할 것이고, 가나안 여인들이 낳는 자식들은 모두 가나안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왜 이것이 문제입니까? 이렇게 몇 세대가 지나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는 믿음의 족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 예가 바로 유다입니다.
1절 말씀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
38장은 ‘그 후에’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노예로 판 사건 바로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났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간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요셉을 종으로 판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케일(Keil)이라는 학자는 유다가 요셉을 노예로 판 사실에 대하여 심한 양심의 갈등을 느끼고 가족들로부터 떠났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케일의 해석에 동의합니다.
형들은 요셉을 잃어버린 야곱의 처절한 슬픔을 보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악한 일을 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만약 유다가 요셉을 팔자는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요셉은 르우벤의 계획대로 아버지 야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왜 그런 악한 제안을 했는지 무척이나 괴로웠을 것입니다. 요셉을 잃고 극심한 슬픔에 빠져 있는 아버지 야곱을 볼 때마다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이런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가족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냥 떠났다고 하지 않고 ‘내려가서’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내려가서’의 원어 ‘야라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갈 때 쓰이기도 하지만,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세속적인 길로 내닫는 인간의 발걸음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형제들로부터 떠났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것만 아니라 유다가 영적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구약시대의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유다가 형제들로부터 떠났다는 것은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에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실재로 유다와 같은 이유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안 짓는 것보다 죄 짓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죄를 지으면 괴롭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결국은 죄 짓는 것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이런 모습으로는 더 이상 교회에 나올 수 없다고 하면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죄를 지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보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더 양심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있습니다. 요셉을 팔아먹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버지 야곱을 대하는 다른 형제들보다 유다가 더 양심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유다처럼 자신이 지은 죄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집사가, 어떻게 권사가, 어떻게 장로가, 어떻게 목사가 저럴 수 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나 위선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보다 차라리 혼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안 됩니다.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지은 죄로 인하여 마음이 괴롭습니까? 정말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괴로운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탄식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떠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죄로 인하여 괴로우면 괴로울수록 더욱 십자가를 붙잡으십시오. 그 죄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고백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계속해서 죄인으로 남아 있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곳입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교회는 의인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을 보면 시험에 들 것밖에 없습니다. 야곱의 가정이 믿음공동체라고 하지만 시험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야곱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을 보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나중에는 이런 사람들을 택하신 하나님까지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죄 많은 야곱과 그의 열 두 아들을 택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야곱의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공동체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유다는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2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데리고 동침하니.”
늙은 아브라함은 자신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들 이삭에게 믿음의 아내를 얻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삭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통로가 되는 경건한 믿음의 자녀를 낳는 사명을 이삭이 감당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성적으로 타락한 가나안 여인이 아들 이삭을 타락시킬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에게 믿음의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종을 자신의 고향 자신의 족속에게로 보냅니다.(24:3,4) 그래서 믿음의 여인 리브가를 얻습니다.
이삭도 야곱이 맏아들 에서처럼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않도록, 야곱이 경건한 믿음의 자녀를 낳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야곱을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의 집으로 보냅니다. 그래서 야곱은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의 조상들에게 있어서 믿음의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유다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를 떠난 유다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이 가나안 여인과 결혼한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유다가 가나안 사람과 어울려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반드시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결국은 세상 사람과 어울려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지만, 세상 사람처럼 살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믿음의 공동체에 속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살아야 합니다.(히10:24) 이기적이고 교양 없는 교인들과 교제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어느 때는 교회 사람보다 세상 사람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과 교제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즐겁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는 교제의 주인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 없는 사람의 교제는, 예수님 없는 착하고 교양 있고 즐거운 모임은 자기만족과 교만에 빠지게 되고, 결국 바벨탑을 쌓게 됩니다.
비록 죄인 냄새 풀풀 나고, 우리 안에 있는 추하고 더러운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십자가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런 죄인들을 사랑하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6절, 7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그래도 유다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괴로웠고, 비록 잘못된 선택이지만 그래서 믿음의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아들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신앙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완전히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유다의 장자 엘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는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실 정도였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악했기에 하나님께서 죽이실 수밖에 없었을까요?
악하기로 하면 야곱의 아들들도 뒤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누이를 더럽혔다고 세겜 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성의 모든 물건을 노략질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말이 복수지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 도적떼와 다름이 없습니다.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 야곱의 첩과 간음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정말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기심으로 인하여 의로운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했고,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노예로 팔았습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는데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죽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신24:7)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악한 죄를 저질렀던 야곱의 아들들은 죽이지 않으시고 유다의 장자 엘은 죽이셨습니다. 도대체 엘이 얼마나 악했으면 하나님께서 엘을 죽이셨을까요? 이 부분에 대한 김서택 목사님의 해석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했습니다. 그 부분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죄를 지었습니다. 르우벤은 서모와 간통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요셉을 시기해서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 버리는 큰 죄까지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부 다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은 살인이나 간음이나 자기 형제를 팔아먹는 것보다 더 큰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렇게 곧바로 즉사한 것입니까?
저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죄의 질에서 찾기보다는 공동체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무서운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아직 아버지 집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집은 구약 시대의 교회였고 거기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 신앙의 공동체를 떠나 세상으로 갔고, 세상에는 그를 지켜 줄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습니다.
(김서택, 꿈을 가진 자의 연단, 홍성사, p, 197)
믿음의 공동체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일이 있어도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도 교회 안에 있는 것과 교회를 떠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아무리 방탕한 아들이라도 밤이 되면 꼬박꼬박 집에 들어오는 것과 집을 나가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그래도 집에 들어오는 아들은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습니다. 아무리 방탕해도 절대로 넘어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선을 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럴 바에야 집을 나가는 것이 낫다고 해서 가출하면, 그래서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같습니다. 갈 때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 거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의 눈에는 교회가 시시하게 보일 것입니다. 교회의 울타리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거친 파도가 몰려오는 바다에 빠져도 구명줄을 놓지 않으면 삽니다. 교회 안에 거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마지막 생명줄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어떤 경우에도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떠나게 합니다. 그렇다고 마귀가 처음부터 교회를 떠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사람들 보기 싫어서, 몸이 너무 힘들어서, 교회가 시끄러워서 한두 달만 쉬라고 합니다. 한두 달 뒤에 다시 나오면 된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 한두 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를 떠난 그 한두 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생명줄을 놓고 세상의 거센 파도에 빠진 그 한두 달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깁니다. 완전히 세상 사람이 됩니다.
유다의 아픔은 장자 엘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장자 엘이 죽자 유다가 둘째 오난에게 말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고대 근동에는 ‘계대 결혼법’이 있었습니다. 후사 없이 죽은 형을 대신하여 동생이 형수와 동침해서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들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형의 아들로 형의 대를 잇습니다. 이 계대 결혼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도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신25:6)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 오난은 아버지 유다의 명령에 순종하는 척 형수 다말과 동침하지만, 형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 일이 없도록 땅에 설정합니다. 만약 다말이 아들을 낳으면 자신이 장자의 권한을 누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난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습니다. 오난이 죽고 나서 ‘얼마 후에’ 유다의 아내도 죽습니다.(38:12)
이것이 믿음의 공동체를 떠난 유다의 인생이었습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룻기에 나오는 엘리멜렉이 생각납니다. 엘리멜렉의 가정도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갑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와서 먹고 살려고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 세상으로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았습니다. 베들레헴의 흉년을 피해 잘 살아보겠다고 모압으로 갔는데 진짜 흉년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룻1:21)
그럼 베들레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흉년으로 모두 죽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봐주셔서 풍성한 양식을 주셨습니다. 베들레헴에도 흉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풍년을 맞이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도 흉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거해도 영적인 흉년이 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인생, 우리의 가정에 흉년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으면, 끝까지 믿음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으면 반드시 흉년은 지나가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풍년을 맞이합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난 나오미의 인생에 진짜 흉년이 왔지만 그러나 나오미의 인생은 흉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다시 믿음의 공동체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를 떠난 유다의 인생에도 진짜 흉년이 왔습니다. 두 아들이 죽고 아내도 죽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인생은 이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나오미가 다시 믿음의 공동체로 돌아왔던 것처럼, 유다도 다시 믿음의 공동체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공동체로 돌아온 유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유다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 44장에서 자세히 나누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38장의 유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음의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안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도 흉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 흉년으로 인하여 고생하지만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흉년은 반드시 지나갈 것이고 그 뒤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년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의 흉년 가운데 있는 분이 있습니까? 더 이상 교회에 나와야 하는 의미도 모르겠고, 예배드리는 것 자체도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시는 분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더욱 교회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유다처럼 믿음의 공동체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마귀의 각본대로 가는 것입니다. 흉년이 왔을 때는 떠나지 않고 버티는 것도 승리입니다. 흉년을 끝까지 견디고 승리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풍년을 맞이합시다. 주께 영광!
치바에서 김성섭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