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영화판 뛰어드니 다들 미쳤다고 하더군요”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88호(2018. 11.15)
영화 ‘안시성’ 제작 박재수 수작 대표
400억짜리 영화 185억에 제작 “542만 관객동원 자부심 느껴”
졸업 후 삼성전자 입사했지만 거대 조직의 일부로 사는 삶에 회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연출부로 영화계 입문 후 2003년 제작자로
영화 ‘안시성’이 542만여 관객을 끌어 모으면서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중 흥행 2위를 차지했다. (10월 9일 기준) 20만 당나라 대군과 그에 맞선 고구려 병사들의 싸움을 스크린으로 옮겨온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제작비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거액의 돈이 투자되는 만큼 웬만한 흥행 성적으론 본전을 뽑기도 힘들 터, 제작사 입장에선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안시성을 제작한 영화사 ‘수작’의 박재수(기계설계87-91) 대표는 “하루하루가 드라마틱하고 희로애락이 휘몰아치는 직업을 쫓아 영화판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안시성 개봉 36일차를 맞은 지난 10월 24일 서울 광진구에 있는 수작 사무실에서 박재수 동문을 만났다.
“영화업계에선 다들 이건 못 만든다고 했습니다. 예산이 400억은 소요될 것이라며 국내 영화시장 규모가 빤한데 그만한 돈이 투자될 리 없다고요.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모두 의기투합해서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했어요. 순제작비 185억원 갖고 만들어냈죠. 그것도 물론 큰돈이지만 시나리오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한 예산이었어요. 주연 배우가 부상을 입거나 촬영 중 비라도 내렸다면 더 힘들었을 겁니다. 다행히 그런 불상사 없이 무사히 제작을 마쳤고 완성도 면에서도 호평을 받았죠. 흥행성적 면에선 아쉬움이 더러 있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다들 재미있다고 하세요. 그럼 된 거죠.”
안시성은 소재부터가 기존 한국영화와 달랐다. 사극은 보통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기 마련인데 안시성은 1,400년 전 삼국시대의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 또한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시키거나 사회적 이슈를 내세워 관객을 모으는 흥행 공식을 깨고 성을 뺏으려는 자(당 태종 이세민)와 지키려는 자(안시성주 양만춘) 사이의 ‘공성전’을 주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 동문은 이러한 차별성이 관객들에게 어필할 것이라 확신했고 오랜 준비기간 끝에 모험을 감행했다.
안시성 전투와 관련된 정사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단 세 줄뿐. 양만춘이라는 성주의 이름조차 16세기 명나라 소설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義)’를 통해 처음 등장했으니 실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팩트는 중국의 대표적 명군 당 태종이 서기 645년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5,000여 병사들이 지키는 안시성에 가로막혀 88일 만에 후퇴했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군이 60여 일간 공들여 토산을 쌓았다는 것, 토산이 안시성 쪽으로 무너지면서 도리어 역공을 당해 고구려의 수비진지가 됐다는 것 정도만 확인될 뿐이죠. 왜 무너졌는지, 그 전엔 어떻게 싸웠는지 등은 알 수 없는 부분이에요. 영화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지점이기도 하죠. 일각에선 정확히 고증했느냐 하는 비판도 제기되지만 영화는 사실 그대로를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그게 가능하지도 않고요. 개연성을 바탕으로 장면을 구현하고 관객들을 납득시키면 돼요. 저를 비롯해 안시성 제작에 함께한 이들 모두가 자부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영화 안시성의 큰 줄거리는 주필산 전투로 시작해서 세 번의 공성전을 거쳐 고구려 지원군의 도착 및 당군의 퇴각으로 완결된다. 그 중 양만춘이 쏜 화살에 당 태종이 한 쪽 눈을 맞는 마지막 장면은 야사에 근거하며, 고구려 신녀와 석궁을 쏘는 여군 등은 허구적 상상력이 가미된 부분이다.
박 동문은 모교 공대에서 학사 및 석사학위 취득 후 전공을 살려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일정한 출퇴근과 고액연봉, 무난히 승진하면 임원이 될 수도 있는 출세가도가 눈 앞에 있었지만 거대 조직의 일부분으로 사는 것에 대해 회의감을 느꼈다고.
“어른이 됐다고 ‘어떻게 살면 좋을까’ 하는 고민이 멈추진 않잖아요. 관성에 따라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왔지만 틀에 박힌 일상을 반복하며 빤한 인생을 살 것 같았습니다. 재미없더라고요. 아직 정해져 있지 않아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삶,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몸의 일부처럼 느끼며 모험을 즐기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영화 마니아까진 아니었어요. 한 달에 한두 편 흥행영화를 찾아 관람하는 보통의 관객이었죠.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영화판에 뛰어들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기질의 차이인 거죠. 영화를 제작하는 매 순간이 제겐 가슴 뛰는 모험이었습니다.”
1998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연출부 막내로 영화계에 첫발을 디딘 박 동문은 2001년 유니코리아 문예투자에 입사하면서 투자 파트로 전향, 영화 제작자로 성장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2003년 독립해 영화사 수작을 설립했으며 설립 5년 만에 개봉한 첫 영화 ‘7급 공무원’이 흥행 성공을 거두면서 명성을 떨쳤다. 2008년 ‘차우’, 2013년 ‘노브레싱’, 2014년 ‘널 기다리며’ 등을 제작했다. 작품 기획의 전문성을 갖춘 합리적인 영화 제작사로 평가 받는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