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뇌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곳’ 세계서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484호(2018. 7.15)
강봉균 서울대 기억연구단 단장
‘기억연구 외길’ 국가과학자 - 치매치료에 새 이정표 제시
우리는 종종 기억을 ‘간직한다’고 말한다. 뇌에서 소중한 기억과 추억을 간직하는 곳은 어딜까.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소설 한 구절이 떠오르지만 이제 기억만큼은 예외가 될 것 같다. 강봉균(미생물80-84) 모교 생명과학부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기억연구단이 세계 최초로 뇌에서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인 ‘기억저장 시냅스’를 찾아낸 덕분이다.
시냅스는 두 신경세포(뉴런)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 나온 돌기들이 이루는 틈새다. 신경세포들끼리 신호를 주고 받는 통로다. 크기는 마이크로미터보다 작고, 세포 하나당 수만 개에 달한다. 1,000조 개의 시냅스가 사람의 뇌 속에 있다. 70여 년 전 심리학자 도널드 헵은 시냅스에 기억이 저장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가설에 따르면 학습에 의한 시냅스의 변화가 곧 기억의 물리적 실체다. 이 대단한 통찰은 오랜 시간 정설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험으론 직접 확인된 적이 없다. 방대한 시냅스에서 기억에 참여하는 것만 골라내기란, 백사장에서 모래알 찾기만큼 어려웠다.
강 교수 팀은 10년간 연구 끝에 신경세포의 시냅스를 종류별로 구분하는 원천 기술을 개발했다. 이 기술로 기억이 저장되는 시냅스의 위치를 명확하게 찾아내고 지난 4월 사이언스 지에 결과를 공개했다. 6월 26일 관악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강 교수는 “오래된 학설을 증명하겠다는 결심이 발단이 됐다”고 했다. “기억이 저장된 장소를 찾는 근래의 연구들은 모두 신경세포 수준이었습니다.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세포도 불과 수 년 전에 밝혀졌죠. 하지만 뇌 기능의 최소단위는 신경세포가 아닌 시냅스입니다. 그 동안 간접적인 증거는 많았지만, 시냅스가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걸 눈으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강 교수 팀이 개발한 신기술 ‘dual-eGRASP’는 신경세포가 활성화될 때 그 말단의 시냅스 부분이 두 가지 형광 빛으로 표시되도록 만들었다. 공포 기억을 저장한 생쥐에게 이 기술을 적용해서 기억을 관장하는 뇌 부위인 해마를 살펴봤다. 그 결과, 해마의 기억 저장 세포 말단에서 많은 시냅스들이 활성화를 의미하는 노란 형광 빛을 띠었다. 해당 시냅스들이 기억 저장에 관여했다는 신호다. 동시에 시냅스 부위에 있는 돌기들의 크기도 커졌다. “강한 기억일수록 더 많은 시냅스가 이러한 구조적 변화에 동참했는데 이는 기억이 강할수록 시냅스 연결이 강해졌음을 뜻한다”는 설명이다.
논문 속 사진엔 현미경으로 관찰한 시냅스들의 변화가 또렷하게 포착돼 있다. “연구 결과를 국제학회에서 발표했을 때 많은 학자들이 자신도 도전했다가 기술부족으로 실패했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학습과 기억을 연구하는 신경과학자라면 누구나 확인하고 싶었을 겁니다.”
강 교수는 뇌과학계 대표 석학이다. 지난 30년 간 그의 화두는 오로지 ‘기억은 어떻게 우리 뇌에 저장되는가’였다. 첫 연구 대상이 된 것은 바다달팽이의 일종인 군소. 제주 출신인 그는 모교에서 미생물학 전공으로 석사까지 마친 후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신경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과정 지도교수가 군소의 기억을 연구해 노벨상을 수상한 에릭 캔델 교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신경세포를 가진 군소는 기술이 부족한 시절 좋은 연구 대상이 됐죠. 동물을 연구하는 건 사람의 뇌를 직접 연구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의 환원주의 덕분이기도 해요. 쪼개고 쪼개서 근본을 알게 되면 모든 것에 통한다는 원리죠. 군소에서 밝혀낸 기억의 분자 메커니즘을 생쥐를 대상으로 다시 검증했습니다.”
1994년 모교에 부임해 연구를 시작할 때 전국의 어시장을 헤매며 군소를 찾던 일도 이젠 추억이 됐다. 군소와 생쥐 연구를 통해 포유동물의 학습과 기억에 관여하는 분자 메커니즘을 규명했고, 기억을 떠올릴 때 시냅스에서 ‘유비퀴틴 단백질’ 분해가 회상을 돕는다는 사실 등을 밝혀냈다. 사이언스, 네이처, 셀 등 권위 있는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180여 편에 이른다.
2012년 국가과학자로 선정되면서 강 교수가 이끄는 신경생물학 연구실은 ‘서울대 기억연구단’으로 뇌와 기억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한 연구 과정에서도 좋은 결실을 낸 비결은 “학생들”이라는 그다. “학생들이 워낙 똑똑하고 동기부여가 잘 돼 있어요. 이번 논문의 공저자 중 제1저자인 최준혁 박사가 특히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처음 5년은 연구가 잘 안 돼서 포기할 법도 했는데 어떤 오기로 해낸 것 같아요. 기초 연구는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연구실을 지망하는 학생들에겐 “다시 생각해보라”며 짐짓 엄포를 놓기도 한다. “뻔한 건 기초과학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수천억 인류가 몰랐던 새로운 걸 찾아내는 일이 쉬울 리 없죠. 열 번 도전해서 아홉 번 틀려도 감내할 수 있는 정신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해요.”
그는 “기억이 저장되는 시냅스를 찾아낸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했다. 다음 목표는 “역으로 특정한 시냅스의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저해했을 때 기억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확인하는 것”. 일종의 검산 과정이다. 특정한 기억저장 시냅스를 강화하거나 약화시켜서 기억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치매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기억과 관련된 질병 치료에도 새로운 실마리가 될 것이다. “이 기술은 더 만들기 어려울 것”이라며 담담하게 새로운 도전을 시사했다.
“전에는 치매를 쉽게 말해 어떤 원인으로 신경세포가 죽어가는 병으로 설명했어요. 최근엔 시냅스 기능이 저하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시냅스가 변화하는 ‘가소성’이 기억의 원리라면, 그런 시냅스의 가소성과 탄력성에 문제가 생겨서 뇌 질환에 걸린다는 거죠. 치매 예방법으로 주로 권하는 운동이 시냅스의 원활한 기능에 도움이 될 겁니다.”
인터뷰 다음날 강 교수는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수여하는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수상했다. 수상소감에서 “뇌 과학 용어조차 생소한 시절에 시냅스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때 일반생물학 책에서 신경생물학 비중이 제일 적었어요. 할 수 있는 일이 많겠다 싶어 뛰어들었죠. 지금 보기에 어렵고 인기 없는 분야도 수십 년 후 중요해질 수 있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는 것 같습니다.”
취미를 묻자 강 교수는 골똘한 생각 끝에 “과학이 취미”라고 답했다. 현재 국가과학자이자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정회원, 학술지 ‘Molecular
Brain’ 편집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경암학술상, 미래창조과학부장관 표창장, 대한민국학술원상을 받았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