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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릉미술학원 원생 132명.
이월드영어학원 원생 74명.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유치원생 19명[8].
인솔교사 1명.
레크레이션 강사 3명 등 총 23명.
이 참사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정확히 4달 뒤인 10월 30일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가 일어나면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참사가 또 터지고 말았다
3. 건물 구조
해당 수련원은 1998년 초부터 영업을 시작해 1999년 3월 수련원 인가를 받았으며, 총 부지 면적은 11,606m² / 건축면적은 2,576m²로써 A, B, C동으로 분리되었다. 당시 A동은 658m²로 강의실 및 식당, B동은 156m²로 생활관/관리사무실/양호실/휴게실로 각각 이루어졌으며, 특히 화재가 난 C동 건물은 1,762m² 규모로 1층 콘크리트 건물 위쪽 2~3층에 컨테이너 52개를 쌓아 외벽은 흰색 목재, 지붕은 샌드위치 패널로 마감된 건물로서 생활관 겸 지도자 숙소로 사용되어 총 59개 객실에 63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컨테이너부터 저가 제품을 썼다는 것인데, 해당 컨테이너는 두께 1.6mm 철판으로 열전도성이 강했으며, 그 이음새에 용접도 아닌 실리콘을 바르고 목재나 샌드위치 패널 등 인화성 물질로 감싸져 있었고, 화재 경보기는 작동을 멈췄고 소화기도 텅텅 비어 있어 초동진압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건물 지붕에 사용된 샌드위치 패널은 한쪽 면에 벽체로 사용되는 철판이 빠져 내부의 스티로폼 단열재가 그대로 노출된 형태였고, 각 방의 벽재도 스티로폼 단열재 위에 합판[10]만 올린 부실한 자재에다가 벽지만 대충 발라 때운 것이었다. 이렇다 보니 불길이 단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진 것은 물론, 단열재가 불에 타면서 대량의 유독가스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것. 게다가 컨테이너를 쌓아서 건물을 완공하는 데는 고작 1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수련원 대표는 토지 실소유주 김 모, 수련원장은 토지 임대자 박 모 씨가, 영업은 황 모 씨가 각각 맡았다. 게다가 수영장 자리는 원래 양어장 자리였는데, 1987년에 시설주가 양어장을 수영장으로 불법 변경해 벌금을 문 바 있었으며, 1997년에도 무허가 소규모 놀이동산을 차려 장사하다 적발된 바 있었다.
4. 원인
사고 하루 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원인 규명에 2~3개월 걸릴 거라고 했지만, 7월 2일에 갑자기 화재의 원인이 모기향 불이었다고 발표했으며, 그게 잘못 엎어지면서 가연성 소재로 된 건물 내로 불길이 번지고 매캐한 독가스를 뿜어지면서 피해가 커졌다고는 했다. 이후 법원 판결에서도 모기향이 화재의 원인으로 판단되었다.[11]
하지만 유가족들은 국과수가 사고 3일 만에 철저한 검증 없이 화재 원인을 발표한 데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고, 7월 6일 한국화재보험협회 실험에서 모기향을 피운 채 이불과 신문지를 놓고 2시간 동안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불이 붙지 않았다. 7월 9일 MBC <PD수첩>에서도 비슷한 조건으로 실험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부터 전기가 들어왔다, 안 들어왔다 했다는 목격 증언으로 보아, 전기 누전을 원인으로 보는 게 사실에 가까울 거라고 대다수가 입을 모았다. 모기향 화재인 것과 전기누전 화재인 것은 사고 책임 소재에서 큰 차이가 있으며, 전자는 모기향을 피운 소망유치원장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후자의 경우라면 관련된 공무원들 여럿 모가지다.[12]
한편 유가족들은 사건 발표 다음 날에 분노한 채 국과수까지 갔으나 전의경에 의해 가로막혔고, 수사 상황을 알기 위해 화성경찰서까지 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7월 23일엔 김종필 국무총리 면담을 요구하며 정부중앙청사까지 갔으나, 버스째로 견인 당했다.
정부의 엉터리 화재 원인 규명에 분노했던 유족 중에는 1988 서울 올림픽 여자 하키 은메달리스트 출신으로 대통령 훈장까지 받은 학부모 김순덕이 있었다. 김순덕 씨가 분노해 체육훈장을 반납하겠다고 나서자, 그제서야 김종필 총리와의 1:1 면담 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김 총리는 그 자리에서 재수사를 약속했다. 그러나 재수사는 결국 없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은 이러한 정부 방침에 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결국 김순덕은 거듭되는 대형 참사 속에도 달라지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와 대한민국의 현실에 분노하며 자신의 훈장을 반납했고, 자신의 가족들과 뉴질랜드로 영구이민(국적포기)을 떠났다.
5. 화재 진압
특히 많은 희생자가 난 사유들 중 가장 큰 원인은 사고 지역이 무선통신 난청 지역이라, 신고가 늦었다는 점이다. 1999년 당시는 핸드폰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긴 했지만, 아직 보급 초창기여서 도시를 벗어나면 통화가 터지지 않는 음영 지역이 많았다. 즉 cdmaOne 기지국이 충분히 깔리지 않았었다는 뜻이다.
오산소방서에 신고가 접수된 건 사고 1시간 후였고, 게다가 소방서에서 씨랜드까지의 거리는 70km나 돼서[13] 고속도로에서 질주를 해도 40분은 잡고 가야 하는[14] 긴 시간이 걸렸다.
또한 고속도로처럼 선형 좋은 도로도 40분인데, 사고가 난 곳은 전형적인 농어촌 지역 오프로드 산길에다가 선형도 안 좋았으니, 제 아무리 소방차가 신호 다 무시하고 달리고 새벽이라 교통량도 적었다 한들, 가는데 당연히 시간이 엄청 걸리는 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수련원 쪽으로 열려있는 도로는 중형 승용차 1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도로 폭이 좁아서 아예 소방차가 들어가지도 못했고[15], 다른 쪽 도로에는 수련원 측이 사유지라 주장하며 쳐놓은 철조망 및 쇠말뚝 등이 있었기 때문에 출동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화재 발생과 동시에 소방차가 출동했다고 쳐도 결국 화재 현장과 소방서의 거리가 멀어서 화재 발생 후 40분 이상 지나고 나서야 도착하게 되었다.[16] 관련 기사. 결국 동원된 소방 인력만 553명[17]에 소방차 등의 차량도 67대가 넘게 동원됐지만 3분 만에 물은 동이 나고 유독가스와 화염 그리고 건물 붕괴 위험 등으로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끝내 어린이 19명을 포함한 23명은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6. 피해 급증 원인[편집]6.1. 허술한 소방안전시설
화재를 처음 눈치챈 사람은 당시 학원 캠프 현장답사를 위해 씨랜드를 방문했던 송영규 태권도 관장이었다.
3층 천장에 연기가 퍼져나가는 걸 목격한 송영규 관장은 재빨리 근처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눌렀지만 화재경보기가 울리지 않았다.
비치된 소화기는 제조된 지 10년이 넘은 노후소화기였다.
화재경보기는 아이들이 호기심으로 누를 수 있다는 사유로 꺼두었다.
소화전은 고장이 나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사고현장은 오산소방서하고 70km, 남양소방파출소하고는 30km나 떨어져 있었다.
소방차들은 상당수가 10년이 넘은 노후차량이라서 대형버스보다도 못한 135마력에 불과하여 꼬불꼬불한 국도를 달리는 동안 40km안팍의 속도밖에 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초기진화가 늦어진 것은 당연지사.
처음으로 도착한 서신파견소 차량은 3분 동안 5,000리터의 방수포를 모두 쏘고 나면 물이 모두 바닥나 급수를 받아야 했지만, 급수차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진입로가 비포장도로인데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2.8m에 불과하였으며, 수련원 입구가 바리케이드로 막힌 것도 한몫했다.
결국 송 관장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내서 불이 났다고 외쳤고, 이제 막 잠이 깬 아이들과 교사들이 혼란에 빠져 정신없이 움직였다.
다행히 후술한 소망유치원을 제외한 다른 유치원, 학원,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아이들과 같이 있었기에 송 관장의 소리를 듣고 얼른 일어나 침착하게 아이들을 인솔하였으며 또한 302호에 남아있던 소망유치원 아이들도 아이들을 발견한 송 관장과 다른 선생님들이 달려와 구조하여 총 521명의 아이들은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1호실의 소망유치원생 18명이 전원 사망한 까닭은 그 이들이 씨랜드 3층의 한 개 방에 다 같이 자고 있었는데 불길이 급격히 번진 데다 어린이들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인솔교사들이 무책임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당 유치원의 인솔교사들은 314호에 투숙했다고 증언하였으나, 문제는 314호가 그 유치원생들이 자는 301호의 바로 맞은 편 방이었으며 최초 발화 지점도 301호였다.
6.2.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행동
즉 314호의 인솔교사들은 충분히 화재 상황을 빨리 알아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알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 그러나 이와 상반되는 증언도 있었는데 당시 3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314호에선 사람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즉 314호가 아닌 아예 밖에 있었던게 아니냐는 의혹도 있었다.
그후 조사 끝에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지는데 바로 소망유치원 인솔 교사의 대부분이 밖에서 불을 피워두고 삼겹살하고 소주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즉 교사들이 처음부터 아이들과 같이 있지 않았던 것이며 불이 났어도 술에 취해 있던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다.[18]
반면 전 소망유치원 원장 측은 후술할 2009년 <조선일보> 기사 인터뷰에서 본인을 포함한 인솔교사 3명 전원이 개신교 신자라 술을 안 마셨다고 했고, 수련원 314호에 있었을 적에는 아픈 아이들이나 연락 온 어머니들이 없는지 교사들과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남겨진 302호의 아이들은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전부 구조되었으나 301호에 있던 어린이들은 아무런 빛도 없는 깜깜한 방 안에서 불길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질식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또한 초등학교 교사 한 명과 레크리에이션 강사 3명이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가 함께 변을 당했다. 그리고 3층에서 투숙했던 소망유치원 외에 2층에서 투숙했던 부천 이월드영어학원에서도 유치원생 1명이 희생되었다.
이렇듯 유아교사는 교사 업무 중 어린이들 옆에 꼭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임에도 씨랜드 사건 3년 후 발생한 광진구 어린이선교원 흉기난동 사건을 계기로 유아교사들의 자질 향상이 아직 멀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6.3. 공무원들의 비리
뿐만아니라 수련원 측은 운영 과정에서 시공 및 감리회사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먹였으며, 화성군 공무원들은 이를 묵인, 비호하였고, 충격적이게도 김일수 화성군수가 불법 운영에 개입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뇌물을 먹였으니 씨랜드의 건물은 불법적인 구조로 운영을 할 수 있었고, 안전검사 또한 무시할 수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 1층 위에 컨테이너 52개로 가건물을 조합해서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건설비하고 운영비 절감을 위해 장부에만 철근콘크리트로 되어 있을 뿐 52개의 조립식 컨테이너 박스를 콘크리트로 된 건물 1층 위에 한 쪽에 13개씩, 총 26개를 2개 층으로 쌓아 올린 가건물이었다.
정상적으로 지은 건물은 통상 불이 나지 않더라도 무너지지 않는 반면, 아무래도 가건물이다 보니 화재로 건물이 붕괴, 어린이 중 일부는 미처 대피하지 못한 채 참변을 당했다고 목격자들은 진술했다.
방 천장 등은 인화성이 강한 스티로폼하고 나무로 장식되어 있는 외벽이 불쏘시개 역할은 한 탓에 불길이 순식간에 확산되어 건물 전체로 확산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건물 내부에 유독가스까지 가득찼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수련원 밖으로 연결되어 있는 비상구라고는 길이가 50여 미터인 본 건물 양끝에만 위치해 있어 많은 어린이들이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아무런 대처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들을 말 그대로 화마의 소굴에 재운 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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