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은 빨갱이라서?
약산 김원봉 선생(1898~1958?)에 대한 서훈 검토를 하고 있다는 보훈처장의 발언이후 보수언론과 자유한국당의 반발이 도를 넘고 있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김원봉은 뼛속까지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했고, 같은 당 박대출 의원은 “건국을 부정하는 역사공정에 MBC가 앞장 설 일이 아니다. ‘드라마’ 정치를 중단하라”고 하여 방송 편성에 관여한다. 같은 당 정갑윤 의원은 “한국당은 국민과 함께 역사전쟁의 승리를 통해 자유세계의 영웅들을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태 의원은 ‘5.18 진상규명을 위한 대국민 공청회’를 열어 막말파동을 일으키더니 이번에도 같은 당 의원들과 ‘사회주의자 서훈 이대로 좋은가’라는 주제의 토론회를 주최하여 여전히 ‘빨갱이 타령’이다.
먼저 김원봉 선생의 생애부터 알아보자
선생의 생애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선생은, 1913년 서울 중앙학교에 입학한 뒤, 1918년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한다(여운형이 다녔던 학교). 이듬해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 의열단을 창단하고 나석주 선생의 유명한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사건을 일으킨다. 의열단의 연이은 공격에 놀란 일제는 1932년 윤봉길의 의열 투쟁을 기획한 임정의 김구에 대한 현상금(현시세로 약200억원) 보다 훨씬 더 많은 현상금(약320억원)을 내걸었다고 한다. 의열 투쟁이 한계에 도달하자, 1926년 여운형의 주선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한다.
1931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의열단은 상하이로 본부를 옮겨야 했고,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결성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중국의 임시 수도 우한이 일본군의 공격을 받자, 선생은 좌익 군소 정당과 연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고, ‘일제타도 조선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다. 선생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데, 이는 관내 중국(산해관 이남)에서 조직된 최초의 군부대였고 스스로 총대장에 취임한다.
중국 땅에서 중국 정부의 군사원조로 운영되는 조선의용대는 어쩔 수 없이 중국 국민당군에 배속되었고, 부대원들의 투철한 정신무장과 지식 어학 능력을 활용하여, 대일본군 선무공작, 선전, 포로 심문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일본군이 난징까지 점령하면서 관내 독립운동 단체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를 따라 남쪽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중국군의 뒷바라지나 하는 소극적인 활동에 불만을 품은 조선의용대원 약 80%가 중국공산당의 해방구가 있는 화북지방으로 은밀히 북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1년 12월 호가장 전투, 이듬해 5월 반소탕전 등 크고 작은 항일전을 벌였다. 이후 김두봉, 박효삼 등이 이끄는 부대와 연합하여 김두봉을 주석으로 하는 화북조선독립동맹(북한 정권의 연안파)으로 발전하고 1942년 7월, 조선의용대도 무장대오인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다.
이러한 전황의 급변과 임정의 파벌 싸움에 이은 요인들의 이탈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임정에 남아 좌우연합체인 ‘전국연합진선협회’ 성립을 주도했고, 1940년 9월, 임정이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창설하자 광복군제2지대장을, 1944년에는 임정 군무부장을 맡았다.
광복 후 제2진으로 귀국한 선생은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 임시내각의 군사부장을 맡아 활동했고, 이후 남북분단을 방지하기 위한 여운형 선생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고 협력했다. 그러다가 1947년 종로경찰서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 2일간 고문을 당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에 김구, 김규식, 박헌영, 최극로 등과 같이 참석했고 그 자리에서는 사회를 보았다. 이후 그곳에 눌러 앉아 북한정부의 국가검열상, 1952년 노동상에 취임하고 1958년 회갑을 맞아 훈장을 받고 10월에 숙청되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점이지만, 선생도 약속된 부귀영화를 내던지고 모든 것을 걸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평생을 헌신하였다.
선생의 약력을 살펴보면 선생이 공산주의자였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다. 21살의 약관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의열단을 창단하고, 상하이로 옮겨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부대원들이 국민당군의 심부름 대신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80%가 북상하는데도 선생은 남아 임정을 도와 광복 때까지 광복군과 임정을 위해 헌신하였다.
광복 후 귀국해서도 평소 존경하는 여운영 선생의 건준 활동을 맡고, 또한 여운영 선쟁의 남북분단 방지하기 위한 좌우합작 활동을 도왔다.
문제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복 연석회의에 참석하고 난 후 그곳에 머물러 북한 정부 수립에서 국가검열상 자리에 올랐다는 점이다.
골수 민족주의자인 김원봉이 왜 월북했을까? 몇 가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 있다. 무엇보다 미군정의 패악질, 이승만의 남북분단 획책, 친일파들에 의한 독립운동가들 제거 등이다. 따라서 1947년 7월9일, 여운영의 혜화동 로타리 암살사건과 악질 친일고문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어(남로당 총파업 죄목) 종로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일로 인해 선생은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역사학자 전우영 교수는 재미있는 비유를 말한다;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과 미군정에 의해 기득권으로 편입된 친일부역세력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는 마치 서북청년단에 의해 공산주의자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제주도민이 어쩔 수 없이 한라산으로 피신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다”
남북연석회의 쯤에 중국 충칭에서 자신의 비서였던 사마로에게 보낸 편지에 선생의 심경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북조선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지역의 정세가 너무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험하게 하여 살 수가 없다”
선생은 북한 정권의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한국전쟁을 반대했고, 좌우합작내지 평화통일 노선을 견지했다고 한다. 1958년 회갑훈장을 받고, 중국 장제스 정권의 간첩죄로 10월에 숙청되어 이후 소식을 모른다.
우리는 모두 참회해야
1948년 남한에는 친미극우의 이승만 정권이, 북한에는 친소극좌의 김일성 정권이 들어섰다. 바꿔 말하면 상해 임정부터 이루려 했던 좌우합작, 중도나 중립을 추구하던 노선의 인사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따라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양식 있는 일꾼들이 숙청되고 죽임을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밀양의 김원봉 선생 댁을 뒤져 친형제 4명, 사촌 5명을 사살하고 늙으신 아버지는 유폐시켜 굶겨죽게 했다고 한다. 세칭 보도연맹사건이다.
<약샨 김원봉>을 쓴 이원규 동국대 겸임교수는 탈고를 한 후 중국의 태항산을 찾아가 독립무장투쟁으로 젊음을 바치고도 해방공간에서 남북 모두에게 버림 받고 쓸쓸히 사라저간 조선의용대의 유적을 찾아 술잔을 올리고 참회했다고 적고 있다.
여운영도 2005년 국가유공자 2등급으로 서훈되었다. 선생의 부인 남차정 여사도 서훈되었다. 의열단 단원들의 동상도 서울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다.
지난 2월24일, 서울신문이 역사학계 관계자 15명에게 설문조사(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재평가가 시급한 인물)를 한 결과는 1위가 김원봉, 2위가 박헌영, 3위가 이관술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 외에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체제경쟁은 이미 끝난 지 오래 되었다. GDP 차이가 50배가 되고, 연간 국방비 지출이 10배가 된지 오래다. 상황이 이런데도 반세기 이전의 ‘북진멸공통일’ ‘종전선언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을 것인가. 승자가 쓰러진 패자를 일으켜 세우면 안 되나.
마치는 말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악질 친일 헌병 오장 출신 김창룡 묘가 국립현충원에 모셔저 있는 것은 외면하면서, 김원봉 선생 서훈은 반대한다.
이 나라 유명 관광지나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이면 으레 한국전쟁 전몰 유가족을 기리는 ‘충혼탑’이 서 있다. 분단체제에 기생하던 과거 군부독재정권의 작품이다. 분단체제 아래서 독재정권은 반공을 가장 손쉬운 정권안보의 수단으로 삼았고, 정당한 민주화의 요구까지 용공과 종북 또는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뒤틀린 이념 사냥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지금도 우파를 자처하는 기득권 세력은 현실의 변화에 눈감은 맹목과 혐오의 언어를 놓지 않는다.
사월혁명회 회원 일동이 발표한 ‘4월혁명 59주년 선언’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다.
전략
이들 친일친미 매국반역집단 세력의 후예들은 외세의 한국지배를 찬양하고 민족분열 국토의 영구분단을 획책한다. 일신의 영달과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반민족반통일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시대의 지상명령인 민족통일국가 건설의 장애물이요 암적인 존재들이다.
중략
1945년 강도 일본이 패망하여 물러가자 미국은 해방군의 탈을 쓰고 서울 한복판 용산에 점령군으로 주둔했다가 지금은 평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한국군 통수권까지 틀어쥐고 세계지배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냉전의 희생물, 극동의 전초기지화 하여 참혹한 6.25전쟁의 제물로 삼았다. 급기야 미국은 자신들의 본토방위를 위한 평택주둔 전략군의 주둔 비용까지 한국이 부담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후략
2019.04.19. 맹 행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