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동서 155마일에 걸친 휴전선 중간 부분이 유난히 북측으로 올라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도 38선 이북이라 북한에 속했던 지역이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새로 그어지면서 우리나라에 편입된 지역이다. 이른바 한국전쟁의 격전지로 알려진 철원 평강 김화로 연결된 철의 삼각지의 일부로서 얼마전 그 현장이 보고싶어 몇 년전 일반에 개방된 철원 소이산에 올랐다. 해발 362m로 그리 높지 않는 정상 부근의 전망대에 올라서니 드넓은 철원평야가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벼가 익어가는 9윌의 들판은 뭉게구름이 떠가는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멋진 풍광을 연출하고 있었다. 멀리 비무장 지대에 한마리 말이 엎드린 듯한 모습의 백마고지가 눈에 들어왔다. 1952년 10월, 24차례나 그 주인이 바뀌었던 10일간의 격전에서 김종오(金鐘五, 1921~ 1966) 장군이 이끌던 9사단은 무려 28만발이 쏟아진 폭탄속에서도 중공군 3개 사단의 파상적인 공격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던 전투 현장이다. 그 끔찍한 전투에서 산화하신 844위 장병들의 명복을 빈다.
이 철원지역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중부전선의 요충으로 풍년이 들면 7년은 먹고 산다는 비옥한 평야로 인해 후삼국시대 궁예의 태봉국도 이곳에 도읍을 정할 정도로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휴전 후 우리가 이 땅을 확보했을때 북한의 김일성은 두고두고 이를 애통해 했다고 한다.
#2
6.25 한국전쟁은 북한이 공산 통일을 목적으로 소련과 중공의 지원하에 우리측 유엔군과 3년여 일진일퇴 공방을 벌이다 휴전하였지만, 총 300여 만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민족적 비극이었다. 획정된 휴전선은 전쟁전의 38도선과 비교했을때 동부지역은 상대적으로 강한 우리측 공군과 해군의 영향으로 북쪽으로 올라간 대신, 서부에서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황해도와 경기도 일부 지역을 상실해 이전과 비슷한 영토 득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최근 속속 밝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 소련 등 강대국들의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초의 이념전쟁의 성격 이외에도 소련이 2차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장악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북한과 중공을 내세운 대리전의 성격도 함께 띠고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 8월 해방 즈음에 설정한 38경계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38경계선은 소련이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에 진입하던 8월 10일 전후, 일본군의 무장해제 분담을 위해 급작스레 그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벌인 미국, 소련 등 연합국측 강대국들이 벌인 협상의 결과로 보일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은 공식 발표문과 실무자 협의안, 수뇌부 밀약 등에 따라 혼선이 있어 아직까지 정리된 정론은 없는 상태이다. 다만, 유럽전선에서 희생이 컷던 소련으로서는 태평양전쟁 참전의 대가가 필요했을 것이고, 여기에는 한반도 문제뿐 아니라 다른 지역도 함께 거론되었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한편, 일부에서 제기하듯, 그 무렵 미일종전협상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도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시위였다는 설이 있다.
미국으로서는 일본 본토와 만주에 상륙할 지상군 부족으로 소련에 참전 요청을 하고 있었지만 만주에 한정할 필요가 있었고 , 일본 역시 소련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여 일본 본토 - 특히 홋가이도 마저 위협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했다면, 무엇보다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이 급선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오히려 원자폭탄을 터트려 준 미국에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른다. 왜냐구? 그 덕분에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본토는 간수할 수 있었으니까. 대신 애꿏은 우리만 분단된 셈이다
#3
고대 로마시대부터 국가는 정치경제적 으로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위였다. 특히 17~18세기 절대왕정과 중상주의 시대를 거쳐 성장한 국가중심적 사고는 19세기 산업혁명의 진전과 제국주의의 확산으로 부국강병 (富國强兵)을 위한 경쟁을 더욱 촉발 시켰다. 자연히 국가 간 자원에 대한 갈등을 전쟁이나 분쟁을 통해서 해결하는 한편, 20세기에 들어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새로운 정치 이념이 등장함에 따라 이에 맞선 대규모 전쟁이 빈번하게 발발하곤 했다.
이와 같이 근대국가에서의 전쟁은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의 세계처럼 정치적 이념이나 경제적 이익에 대한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에 의하여 종종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 왔다.
그러나 과학문명의 획기적인 발전과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개별 국가의 개념은 점차 희미해지고, 전쟁의 원인과 형태도 변화하고 있다. 오늘날 전쟁은 정치적 이념에서라기 보다 경제적 자원에 대한 지배체계 구축를 위한 성격이 강하며, 그 방식도 전통적인 전면전 위주에서 벗어나 특정 상황에 맞게 테러나 폭격, 용병에 의한 대리전, 소모전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오늘도 지구 어딘가는 전쟁 중일 것이다. 인간의 탐욕이 커질수록 전쟁의 유혹도 커지는 것이리라. 점점 자유롭고 독립적인 시민으로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어쩌면 평화를 위협하는 진정한 적은 잘 드러나지 않거나 오히려 천사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지도 모른다.
#4
나는 가끔씩 우리나라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열정이 생각난다. 그 에너지를 우리 사회의 평화(平和)를 위하여 다시 한번 모으면 안될까?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청백전식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고, 개인의 가치와 국가의 생존을 함께 존중하는 사회적 컨센서스가 너무 아쉽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시대적 과제나 세대 간 인구 구성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 과거를 내려놓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信賴)를 회복하는 일이 중요하다. 마치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가족(家族)이나 종교(宗敎)가 사랑의 토대 위에 뿌리내리듯~
긴 역사를 통해 보면 국가의 쇠망은 대부분 내부의 분열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지금 비록 혼란스럽더라도 절망의 끝에는 희망이 보이는 법이듯이, 내일 지구가 망하더라도 한 그루 나무는 심어야 하지 않겠는가? '신뢰(trust)' 라는 나무를~
소이산을 내려와 북한 노동당사 건물앞에 써있는 정춘근 시인의 시 '지뢰꽃' 을 옮겨본다. 여기서도 어김없이 전쟁의 냄새를 맡는다.
"월하리를 지나 대마리 가는 길
철조망 지뢰밭에서는 가을꽃이 피고 있다
지천으로 흔한 지뢰를 지긋이 밟고
제 이념에 맞는 얼굴로 피고지는
이름없는 꽃"
"꺾으면 발밑에 뇌관이 일시에 터져
화약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꽃들
저 꽃의 씨앗들은 어떤 지뢰위에서 뿌리내리고 가시 철망에 찢긴 가슴으로 꽃을 피워야 하는 걸까"
"흘깃 스쳐가는 병사의 몸에서도 꽃냄새가 난다"
'세상은 그리 이성적이지 않다. 무슨 일도 일어날 수 있다'
* 6.25 한국전쟁 당시 춘천 홍천 전투 (6사단장)와 백마고지 전투 (9사단장)를 지휘했던 김종오 장군은 1983년 더글러스 맥아더, 월튼 워커, 김홍일 장군과 함께 6.25 전쟁 4대 영웅에 선정된 바 있다.
(금년 9월 여행명상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