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과 일몰을 한번 구경해 보세요.
차를타고 행주산성 교에 서서 아름다운 한강의 풍치를 음미해 보며 새담 서울의 한강이 세계적임을 느낄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선현들의 감설을 한데 편집해 봅니다.
한도십영 (漢都十詠 )
조선초 풍류가객 월산대군과 강희맹, 서거정 등 문인들은 서울의 풍치 좋은 10곳을 꼽아 시로써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제1경. 장의심승(藏義尋僧) :
장의사(藏義寺)로 찾아드는 스님들의 모습이란 뜻으로 종로구 신영동에 위치한 장의사는 신라 무열왕이 장수 장춘랑과 파랑의 충성에 감동해 그들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지은 절로 전해진다. 북악과 인왕산 자락이 춤추듯 어우러지고, 계곡이 굽이치는 이 일대의 풍경은 당시 도성 밖 제일로 손꼽혔다. 지금은 장의사 자리엔 세검정 초등학교가 자리했고. 인근 세검정 정자엔 흥선대원군 별장 '석파정' 안평대군의 별장 '무의정사' 터가 있다.
제2경. 제천완월(濟川翫月) :
한강변 한남동 언덕에 있던 제천정에서 달빛을 감상하는 운치는 절정. 도도한 한강을 굽어볼 수 있는 이 곳에서 강 건너 청계산 위로 떠오르는 밝은 달을 구경하는 것이 최고의 흥이었다. 서거정은
‘… 넓은 하늘에 구름 없이 맑기도 한 것이
황금떡 마냥 둥근 달이 어느 사이 올라오네
정지간의 맑은 기운 뼛속까지 스미는데
밝고 밝은 그 빛에 털끝도 셀 것 같구나…’라고 노래했다.
제3경. 반송정(盤松亭) :
지금의 서대문로터리, 당시 개성으로 통하는 길가에는 크게 우거진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늘이 수십보 넓이를 덮어 길가는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됐다고 한다. 도성 사람들은 풍치 좋은 이곳에 나와 먼길 떠나는 길손을 전송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예의로 삼았는데 많은 문인들이 지은‘반송송객(盤松送客)’ 시가 유명하다.
제4경. 양화답설(楊花踏雪) :
누에가 머리를 쳐든 상이라는 잠두봉(절두산) 서쪽, 지금의 양화대교 북단에는 양화 진이라는 나루터가 있었다. 하얀 모래밭이 넓게 펼쳐져 있던 양화진의 겨울철, 흰눈이 가득 쌓인 것 같은 눈길을 걷는 정경이 너무 고와 양화답설이라 노래하였다. 양화진은 조선말 천주교인들이 처형됐던 곳으로 애잔함이 더한다.
제5경. 마포범주(麻布泛舟) :
마포 강에서 한가하게 황포배를 띄우고 달밤에 뱃놀이가 유유로웠다.
제6경. 전교심방(箭郊尋芳) :
전관평(살곶이벌)으로 불렀던 성동구 행당동 한양대 일대는 조선시대 왕의 사냥터이자 나라의 말을 기르는 목장이 있던 곳이다. 봄철이 되면 들판 가득 풀과 꽃이 무성해 마치 넓은 비단 요를 깔아놓은 것 같은 이곳에서 도성 사람들이 화창한 봄놀이를 즐겼다고 한다. 지금은 살곶이 다리가 홀로 남아 살곶이벌의 꽃놀이를 기억하고 있다.
제7경. 입석조어(立石釣魚) :
뚝섬의 성수교 부근을 찬미하는 말이다. 이곳에 작은 나루가 있었는데 어른 키 만한 선돌이 많아 입석 포라 불렀다. 고기가 잘 잡혀 낚시터로 애용된 이곳은 살곶이벌 평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가운데 있던 저자도와 건너편의 압구정 경치를 바라볼 수 있어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 입석의 아름다움은 아쉽게도 경원선(용산춘천) 궤도 밑으로 묻히고 말았다.
제8경. 흥덕상화(興德賞花) :
흥덕골(지금의 명륜동, 혜화동 북쪽) 부근에 있던 흥덕사 연못의 연꽃이 장관이라는 것,
제9경. 목멱상화(木覓賞花) :
봄철 남산에 올라 꽃을 즐기는 최고운치. 서거정은
‘…장안성 중 집마다 온갖 꽃으로 둘린 것이
누각 전당에 오락가락 붉은 비가 내리누나…’라고 남산을 노래했다.
제10경. 종가관등(鐘街觀燈)
사월초파일 종로의 연등축제를 즐기는 풍경. 강희맹은
‘…하늘 위에 항성이 일천 집에 떨어진 듯
한밤중 가는 곳마다 붉은 노을 감도누나…’라고 연등축제를 읊었다.
* 한강의 정자*
1. 망원정
합정동과 근접해 있는 망원동에서 한강변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있다. 서울시에서 보존하고 있는 이 정자의 이름은 망원정이다. 망원정에 올라서면 멀리 한강이 흐르는 것이 보이는데 이 곳은 원래 태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효령대군 별장 부속건물 중 하나였다.
망원정의 명칭은 희우정. 연유는 세종 당시 한동안 가뭄으로 농민들이 걱정에 휩싸여 있을 때 양화진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세종이 휴식차 효령의 별서에 도착해서 정자에 들자 때를 맞춰 비가 왔다 해서 기쁨의 비를 맞은 정자, 즉 희우정이라고 세종대왕이 붙여 준 이름이다.
망원정이란 이름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이 효령대군의 별서를 사용하면서 멀리 내다볼 수 있다 해서 망원정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이후에도 망원정은 경치가 좋아 임금의 행차가 잦았는데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애달픈 죽음을 기리며 이 곳 망원정에 올라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수원을 바라보며 시름을 달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서양의 배가 침입하는 것을 염려하여 자주 이 망원정을 찾았다 한다.
2, 압구정(狎鷗亭)
세조(世 祖) 때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의 놀던 정자다. 한명회(韓明澮,1415~1487)는 수양대군을 도와 ‘킹 메이커’의 역할을 다했던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 된 뒤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로 무려 30여 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자리했던 인물이다. 두 임금을 받들어 세움으로써 네 개의 공신(功臣)을 겸하고, 두 임금의 장인이었으며 최고의 벼슬인 영의정을 수삼년 동안 거치므로서 도합 73년간이나 벼슬 밭에서 영화를 누렸다.
하지만 민심(民心)은 그의 위선에 우둔하진 않았던 것이다. 그 정자의 벽에 낙서(落書)가 끊이질 않았다. `정자는 있으나 그곳에 돌아가 쉬는 자 없으니 누구라 갓 쓴 원승이라 일러 예이지 않으리 요' 하는 낙서며, 정자 현판 아래 친할 `압(狎)'자를 억누를 `압(押)'자로 바꿔 압구정(押鷗 亭)이라 쓴 낙서가 있었던 것이다.
낙서란 말은 일본에서 생겨난 숙어인데 중국에서는 희서(戱書)라 했고, 우리 나라에서는 말이 날아다닌다 하여 비서(飛書) 또는 벽서(壁書)라 불렸던 것 같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또 자신의 뜻을 밝히고 선양하며 보존하려는 욕구원망(願望)이 낙서 란 형태로 나타난 것만은 동서고금이 다를 것이 없다.
한명회(韓明澮)는 관직에서 물러나서 벼슬밭에 뜻이 없었다는 세평을 듣고 싶어 이곳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와 친하다(狎)는 뜻으로 압구정이라 이름짓고 주도면밀하게 세류를 파악하였지만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지 못해 압구정자에 머물렀으니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3, 제천정(濟川亭)
보광동 강가 언덕 즉 한남대교 북쪽 어귀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용산구 한남동 541번지 일대에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세웠으며 세조로부터 명종 18년(1563)에 이르기까지 한강변의 정자 가운데서 왕이 가장 자주 찾은 곳이었다. 이 곳을‘제천완월(翫月)’이라 하여 승경으로 꼽혔던 곳으로 광희문을 빠져 남도지방으로 내려가는 길목 나루터 옆에 있었기 때문에 왕이 선릉(宣陵)이나 정릉(靖陵)에 친사(親祀)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려서 쉬기도 하였으며 또한 중국 사신이 오면 으례히 이 정자에 초청하여 풍류를 즐기게 하였다 한다.
「제천정은 한강 북강(北岡) 위에 있는데 경치가 뛰어났다. 명나라 사신으로 관광하는 이는 먼저 이 다락에 오르고 또 이 곳을 지나는 선비들이 날마다 많이 모여든다. 월산대군은 여러 차례나 이 곳 제천정에 납시면서 정자의 규모가 적고 좁다 하여 이를 고쳐 짓게 하였다.」 월산대군이 세상을 떠난 1488년 이후 얼마 안 되어 작은 정자를 크게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인조 2년 갑자(1624)에 이괄(李适)이 반란에 성공하자 임금이 왕대비와 종묘 및 사직단 신주를 받들고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던 밤 한강을 건널 때 제천정에 불을 질러 그 불빛을 의지하고서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제천정 바로 아래 강가에는 세종 때 세운 수표석(水標石)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알 수 없다.
4. 반구정
환희정승이 임진강변에 세운 정자. 황희와 한명희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명재상이지만 두사람의 상극적인 인생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황희와 한명회는 상반된 인생을 산사람이다. 황희는 존경받는 청렴한 재상으로 5대에 걸친 재상을 해먹었고 한명회는 권모술수 재간으로 출세한 선비로 5대에 걸처 영화를 누렸다. 두사람은 한강에 정자를 지었는데 황희의 반구정(伴鳩亭)과 한명회의 압구정(鴨鳩亭)은 그 의미가 달랐다. 권세의 상징인 압구정에 비해 청렴한 학같은 청빈낙도의 생활이 반구정이었다. 압구정과 반구정은 시대의 조명을 달리하는 두재상의 생애를 표현하는 정자다. 청렴결백한 재상과 권모술수 부패의 양상인 재상, 현대인은 이 두사람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황희는 한명희와 대조적으로 파주의 서쪽 임진강변에 반구정(伴鷗亭)이라는 작은 정자를 지어 청백리의 귀감을 보였다. 방촌 (尨村) 황희는 세종조의 명재상으로 반구정을 지어 갈매기를 벗하며 살았다. 반구정의‘伴’자와 압구정의‘狎’자는 둘 다‘벗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놀았던 갈매기는 아주 달랐던 것 같다.
황희가 말하는 갈매기는 무심의 상태로 놀았다면 한명회의 갈매기는 먹이를 탐하는 갈매기였다. 그래서 누구는 한명회의 압구정의 ‘압’자를 친할 ‘押’이 아닌 누를 ‘壓’자로 야유하기도 했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이 강정(江亭)에 걸려있는 한명회의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의 내용인 ' 젊어서는 사직에 몸받첬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
라는 싯귀의 扶를 亡으로, 臥를 汚로 고쳐 써서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라는 뜻을 바꾸어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끝)
첫댓글 솔직히 몇일은 두고보면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 쉽게 와다을 내용이 아닌 것 같아 복사해 갑니다. 한강에 얽힌 사연을 자세히 살펴 볼 기회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