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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충만하신 하느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우리 모두 또다시 한해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니 즉시 떠오르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다사다난(多事多難)!
이 정도 선에서 올해가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설상가상이라고 제주 항공 여객기 참사가 우리 모두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하는 탄식이 절로 입에서 터져 나옵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초대형 참사를 바라보며 너무나 안타깝고 안쓰러워 할 말을 잊습니다. 그 많은 꿈과 희망, 애틋한 사연들, 못다한 이야기들이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이번 참사로 세상을 떠난 희생자 한분 한분을 당신의 크고 따뜻한 품에 꼭 안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리 황망히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는 유가족 한분 한분을 따뜻이 어루만져주시기를 청합니다.
대형 참사를 접할 때마다 온몸과 마음으로 체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난다긴다할지라도,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 실감합니다. 우리네 인생 일장춘몽이라는 것, 그래서 하루하루에 감사하며, 매일 매일을 마지막으로 여기며, 충만한 하루를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갖은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한해였지만, 돌아보니 지나온 한해, 비록 실패와 상처투성이, 죄와 십자가의 연속인 우리네 삶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좋으신 주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폭포수처럼 받았습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요한 1,16)
‘충만(充滿)함’이란 표현이 제 마음을 크게 요동치게 만듭니다. 하느님의 본성 중에 우세한 측면이 충만함입니다. 충만함이란? 풍성함, 넉넉함, 완전함, 너그러움...참 다양한 함의(含意)를 포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옹색한 존재인지요? 얼마나 빈약하고 비천한지요? 얼마나 약하고 불완전한지요? 이런 우리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기 위해서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제나 부족해서 허덕이는 우리이기에 너무나도 당연히, 완전하고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야하겠습니다.
충만하신 그분께로 나아가서 풍요로우신 그분으로부터 에너지를 충전시켜야겠습니다. 백만 볼트 에너지로 가득 충전시킨 후에, 세상과 가난한 이웃들을 향해 나아가야겠습니다.
가끔씩 완전 방전된 밧데리 상태의 제 영혼을 확인하곤 합니다. 내 한 몸 서 있기에도 벅찬 순간에는 영적 생활이고 이웃사랑의 실천이고 무의미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틈만 나면 충만하신 하느님께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방전된 우리의 플러그를 초강력 에너지원이신 하느님이란 전원에 꼽아야겠습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이요 영적 생활입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충전 상태를 확인하듯이, 매일 우리의 영적 충전 상태를 확인해야겠습니다.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충전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 바라보듯이, 매일 영적 충전을 위해 그분께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충만 그 자체이신 하느님, 부유하고 풍성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충만함을 빈약한 우리를 위해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사용하시는, 아니 남김없이 모두 써 버리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나는 절대 죽지 않아. 한 말씀만 있으면.
오늘 복음은 로고스 찬가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빛이십니다. 말씀이 어떻게 생명이 될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이들은 말씀을 갈망합니다.
‘책도둑’은 나치 독일의 암울한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주인공 리젤은 글을 읽을 줄 몰랐지만, 자신의 삶에 들어온 ‘말씀’을 통해 글을 배우고, 이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당시 독일은 자신들의 잔인한 폭정에 반대하는 책들은 다 불태웠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은 리첼은 그래도 인간성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은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배우고 불타다가 남은 책들을 주워 읽습니다.
그가 글을 배우고 읽고 쓰는 작은 지하실은 독일에 남은 작은 인간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곳에 유대인을 숨겨주며, 훔친 책들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성장시켰습니다.
어느 날 폭격으로 인해 마을의 대부분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파괴된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남습니다. 그 작은 지하실에서 글을 쓰다 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징적으로 잔인한 환경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말씀으로 양식을 삼으면 결국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요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리젤의 이야기는 암흑 속에서도 빛으로 존재하시는 말씀의 생명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그녀의 삶을 보호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고난 속에서도 자기 생명과 같은 사랑과 희망을 품게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와 오프라 윈프리의 가장 위대한 멘토가 되었던 흑인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마야 안젤루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큰 고난과 차별 속에서 자랐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글과 시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왜 새장에 갇힌 새가 노래하는지 안다’라는 그녀의 시는 자유를 갈망하며 억압 속에서도 살아가는 인간의 영혼을 노래합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며, 마야 안젤루의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가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사야서 40장 31절의 말씀처럼, “주님을 바라는 이는 새의 날개처럼 힘을 얻는다.”라는 구절이 그녀의 삶에 잘 들어맞습니다.
마야 안젤루의 말에는 피가 묻어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수많은 역경을 거쳐오며 깨달은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녀가 “너는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여 믿음을 키웠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말씀은 오프라 윈프리를 절망에서 구해주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도 말씀은 제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었습니다. 한 번은 성체를 영하면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제 삶의 방향을 사제로서의 길로 확실히 정했습니다. 사제직의 여정에서 때때로 어려움이 있었지만,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동안 저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자신이 있음을 느낍니다. 이는 시편 119편 105절에 나오는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제 길의 빛이옵니다.’ 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어둠 속에서도 빛으로 이끄는 생명의 원천입니다. 오늘의 복음 말씀처럼,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진리는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이를 믿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생명이고 우리와 함께 있다고 믿으면 우리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한 말씀은 나의 모든 고통을 치유해 줄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말씀으로 나의 길을 닦는다면, “난 결코 쓰러지거나 죽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1-18: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1.3-4) 여기서 그분이 바로 “말씀”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자면 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다. 말이란 자기 생각과 마음과 의지, 즉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말에 있어서, 그 말에 참으로 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감사드릴 수 있는 것은 말을 들을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이란 서로를 이어주고 서로의 뜻을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수단이다.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말의 역할이 그러하다면, 바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이 요한의 소개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에 우리는 그 말씀을 믿고 따르며 아버지께로 갈 수 있으며 친교를 맺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아들이 말씀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려주셨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이 하느님의 말씀은 한 점, 한 획도 그르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진리 앞에, 그 말씀 앞에 숙연하여지도록 하자. 또 생활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닮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을 새해에는 살아가도록 결심하며 모든 것을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열심히 살았다고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살았던 자매님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높은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가정에 소홀히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좋은 아내, 엄마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분이었다. 또 이웃에게도 친절했고,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쁜 일상으로 종교 활동에 전념할 수는 없었지만, 죄짓지 않으며 하느님 뜻에 맞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자매님에게 충격적인 일이 다가왔습니다. 글쎄 말기암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 1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의사에게 암이 생긴 이유를 물었습니다. 뭘 잘못 먹어서인지, 운동이 부족해서인지,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서인지, 뭐든지 이유가 있어야 했습니다. 분명히 자기 탓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그냥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같은 것이에요.”
무엇이 잘못되면 원인을 찾고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아닐까요? 이때 드는 생각은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불공평으로 삶 전체가 부정되는 느낌일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일상 삶 영역을 넘어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하느님의 영역을 우리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불공평하다고 하지만, 하느님 영역에서는 다른 의미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인간의 영역을 넘어 진정한 행복이 있는 하느님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다고 또 부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맡길 때 바뀔 가능성이 더 높아집니다.
요한은 ‘말씀은 사람이 되셨다’라면서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요한이 과연 아무런 문제 없이 하느님을 체험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역시 많은 고통과 시련으로 겪었고, 그러나 포기하고 좌절하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더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 뜻을 우리 역시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할 것을 권하는 것입니다.
벌써 2024년의 마지막 날을 보냅니다. 올 한 해 과연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살았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어도 분명히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순간을 소중히 여기다 보면, 긴 세월은 저절로 흘러간다(마리아 에지워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11)
주여,
용서하소서.
한햇동안 품고 살아도
여전히 그대로인
우리들의 미성숙한 사랑을
용서하소서.
주여,
주님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곳에 두었던
우리의 속마음을
당신의 의로움으로
한결같이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뒷걸음치는
우리의 믿음을
용서하소서,
주여.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2024년 마지막 날 기도 드립니다.
무안 공항 비행기 참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와 슬픔에 젖어있을 유가족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슬픔과 아픔의 암흑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보게 해주소서.
불안정한 국내정세로 경제적으로 힘들어 하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눌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소서.
아직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는 부족한 저희를 위해 기도 드립니다.
용서와 화해로 성사적 친교의 삶을 사는 저희가 되게 해주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2,18-21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