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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7월19일 화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수도회]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미카 7,14-15.18-20
† 복음 마태 12,46-50
◈ 오늘의 묵상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가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거룩하고 소중한 선물인데,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마치 이 진리를 거부하시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족에
대해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장차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에서
가족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그 기준에 가장 적합한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신, 순명의 가장 완벽한 모범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모님에 대한 찬양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족은 우리 생명의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안식처입니다. 곧 우리 삶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결국 삶의 둥지를 떠나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려고 더 큰 세상으로 날아갑니다.
거기에서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라는 새로운 혈연으로
교회라는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투신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가족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우리 가족 안에는
하느님의 뜻이 살아 있고, 그분이 주신 소명이 우리의 삶을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가족의 안위와 평안만을 위해 하루하루를 소극적이고
닫힌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오늘 복음 말씀을 기준으로 묵상해
볼 일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먹고 사는 인간적인 문제의 해결이 중요합니다.
2016년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제1독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7,14-15.18-20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46-50
언젠가 어떤 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자기도 가톨릭 신자인데 지금
현재는 냉담 중이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러면 이제
다시 성당에 나가시면서 신앙생활을 하셔야지요.”라고 말씀드렸더니,
“물론 그렇지요. 저도 언젠가는 다시 신앙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일이 더 중요해서요. 먹고는 살아야지요.”
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먹고는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뒤로 미루고 있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돈 많이 벌어서 은퇴를 하게 되면 그때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활동도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나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신앙생활은 우리의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 안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이라면서
완전히 분리를 시키면 그만큼 주님의 자리는 없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자리를 만들지 않고 사는 사람이 먼 훗날 힘이 없어져서 할 일이
없어지면 저절로 그 자리가 만들어질까요?
사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주님을 믿는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잘 먹고 잘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렵고 힘든
상황이 찾아올 때 혼자의 힘으로 이겨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거뜬하게 이겨내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만 봐도 먹고 살기 위해 주님을 믿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우리의 한 가운데에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뛰어넘어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그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으로 연결된 가족관계를 누구도 거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거부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긴
시간을 소비했을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는데 문전박대를 당하는 모습이니
얼마나 서운하셨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인간적인 인간관계를 부정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새로운
인간관계, 하늘 나라에서 함께 누릴 새로운 공동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느냐, 실행하지 않느냐로
결정되기에 때로는 지금의 인간관계가 깨질 수 있는 것이지요.
먹고 사는 인간적인 문제의 해결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가슴으로 살아갈 때, 그대의 삶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된다(혜광).
가족과 같은 친한 신부님들과 어제 저녁에 함께 했던 곳입니다.
생각의 반전
미국의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가 신인일 때의 일입니다.
영화 ‘죠스’를 찍는데 너무나도 큰 난관에 부딪힌 것입니다. 종일 촬영한
필름 중에서 한 컷도 쓸 수 없는 날이 잦았는데, 결정적인 문제는 제작비
전액을 들여서 만든 상어 장치 때문이었습니다. 이 상어 장치를
만들어서 민물에서 시험 가동했을 때는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치를 바닷물에 넣는 순간, 전기가 합선되고 오작동이
잇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만들 시간도, 무엇보다도 더 이상 돈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망가진 상어를 어떻게 되돌릴지 고민하고 있을 때, 스필버그 감독은
이 상황을 뒤집어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상어가 나오지 않는 영화를 만들자. 사실 보이지 않는 게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
이러한 생각의 반전이 바로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생각의 반전을 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원리원칙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꿔서 또 다른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을 그 자리에 초대한다면 보다 더 넓은 생각을 가질
수가 있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영화 죠스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마태 12,46-50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50)
The true family of Jesus
순례하는 사랑 덩어리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에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런데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참 형제자매가 되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의 형제자매가 되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12,50)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최상의 법이며 이것이 바로 제자가
되고 예수님께 속하기 위한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혈연관계, 가족이나 종족이라는 자연적 관계, 신분 등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일차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이러한 관계보다도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되려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그분과 친밀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특정한 계명을 뜻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파견되신
예수님을 우리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이니 좀더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것입니다(10,27). 그것은 또한 예수님에 의해서 해석된 사랑의
계명들이기도 합니다(5,18; 6,10; 12,50).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다가온 하느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를
살아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한다는 것은 사랑 덩어리가 되는 것, 곧 하느님의
자비가 이 세상과 이웃들 안에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행함으로써 종말론적인 가정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 순례의 호흡이자 목표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 사랑의 순례자였습니다. 그는 한
인간에게서 형제를 발견하였고, 성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기도하실
때 수난 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영혼이 녹아버렸습니다. 그는 참을
수 없는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가난한 순례자가 되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어느 날 성 프란치스코가 페루지아에서 아씨시를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계속 눈물을 흘리자 같이 가던 순박한 사람이
어찌된 영문인지 묻자, 그는 “형제여, 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의 사랑을
생각하면 이 세상 온 골짜기와 모든 거리를 나의 눈물로 채워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형제도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우리에게 형제가 되신 주님의 육화의 겸손과 헤아릴
수 없는 수난의 사랑 때문에 그 사랑을 참을 수 없어 끝없는 순례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의 수난의 사랑이
그를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고 해야겠지요. 사실 주님 친히 그를 사랑의
전달자로 쓰신 것입니다.
주님 사랑의 악기가 되어 죽을 때까지 영원한 사랑의 연주를 했던 그를
교회가 ‘제 2의 그리스도’(비오 11세)라 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인은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과 정신과 혼을
다해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예수님의 형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거룩한 사랑과 순수하고 진실한 양심을 가지고 우리의 몸과
마음에 그분을 모실 때 그분의 어머니들이 됨을 상기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소명을
되새기면서, 하느님의 사랑에 불타는 사랑 덩어리가 되어 끝없는 사랑의
순례를 시작할 때입니다. 주님의 진정한 형제자매가 되기 위하여...
강론채널 주소 : story.kakao.com/ch/francesco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태 12,48)
오늘날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무너지고 핵가족화 되면서
가족 개념이 모호해지고 다변화 되고 있습니다.
나 홀로 가정도 많고 다문화 가정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동성 가정 등 옛적엔 생각지도 못했던 가정 개념들이 많습니다.
저희 수도원 식구들은 영적인 가족이지만 법적으론 동거인들이랍니다.
저에게는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를 아저지요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수도원 식구들이 가장 가까운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200명이나 되는 우리 성심원 한센 어르신들과 장애인들
그들을 섬기는 직원과 봉사자들과 후원자들이
내가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지리산 언저리에서 함께 생명평화 운동을 하며 살아가는
타종교인들이 나의 길동무들이요 도반들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이신 이 알타반의 말씀사랑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내 육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랬듯이 모든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자들이 모든 민초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입니다.
아니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에
나의 어머니요 형제들입니다.
모든 자연과 피조물이 모두 같은 하느님을 모시기에
나의 형제들이요 자매들이랍니다.
여러분의 어머니요 형제는 누구입니까?
- 프란치스코회 성심원 원장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 49)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관계가 정화되는 것입니다.
참된 정화는 모든 관계에 앞서 아버지 하느님과
우리가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는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야 자유로운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실행해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모든 관계안에서 적용하고 실천하는 이들입니다.
성숙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장 가까운 관계안에서 주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뜻이 주체가 되지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내적인 끈으로 연결시켜주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현실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영적여정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걸어가야 할 길을 힘차게 걸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성장되는 관계는 없습니다.
먼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성장한는 관계의 신비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16년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 12,46-50
폴란드에서 세계 청년대회가 시작됩니다. 제가 있는 성소국에서도
신부님과 수녀님께서 가기로 하였습니다. 서울교구에서는 80여명이
함께 한다고 들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같은 신앙의 이름으로 모일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고, 대화를 나눌
것입니다. 언어가 달라도, 피부가 달라도, 삶의 자리가 달라도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임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이기 때문에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젊은이들을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보편되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2005년 11월 4일입니다. 저는 캐나다로 연수를 떠났습니다. 낯선
곳에서 외롭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다리가 아파서 잘 걷지도
못했습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불편하고, 말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따뜻한 봄바람에 얼었던 땅이 녹듯이, 제게도 봄바람처럼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머물던 숙소에 부부가 찾아오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부부는
저를 가족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해 주셨고, 여행도
함께 해 주셨고, 외로움의 그늘을 없애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분들이 저의 가족이 되어 주셨습니다.
나뭇잎은 부는 바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는 바람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더욱 지혜로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태어났습니다. 신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느님께로 갈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자신을 맡기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에 모든 것을
맡기면 한결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도 결국은
다 지나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많은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갈등과 다툼이
있습니다. 미국은 흑인과 백인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럽은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으로
많은 난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도 분열과 대립이 있습니다.
소통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타협과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작은 이 나라에 ‘지역, 이념, 세대, 빈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고, 옳다하여도 나의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반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소통과 대화를 위한 원칙과 상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세대,
이념, 빈부’의 잣대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원칙과 상식이라고 말을
하십니다. 지금은 죽고 못 살 것 같지만 그것도 다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다면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나태주님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는 참 외로운 별입니다. 지구별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보듬어 주기에도 부족한 시간들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놀랄만한 진리
2016년 다해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놀랄만한 진리
재물욕 권리욕 성욕 육욕 등 욕(慾)에 물든 인간들이 제도를 만들지만,
이런 욕에서 나온 제도라도 그의 근본 원천은 가계며 가정이 아닌가요?
가계며 가정은 사람에게는 필연적 조직이기에 신성하다고까지 합니다.
교회교리는 최고최초의 하느님은 ‘우리 닮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하고 인류의 모든 인간들은 가족이라 했죠.
이런 말씀은 예수님 외엔 누구도 생각 못했으며 놀랄만한 진리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오 12,49~50)”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님이신 예수님을 믿고 이 집안 가족에 들어야
합니다. 이 울타리를 벗어나거나 거부하는 것은 자기 존재의 위치파악
못한 실패죠.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청주] 새로운 가족을 얻다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6년 7월19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 12,46-50
형제와 자매, 어머니를 얻다.
우리나라의 인구가 5천 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45년에
이르면 다시 5천만명 이하로 떨어진답니다. 저출산 고령화 문제로
이제는 혈육으로서의 형제, 자매라는 관계도 형성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하십니다. 결국 하느님의 뜻을
행함으로써 새로운 형제자매를, 어머니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앞서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시고 하늘나라의
가족관계를 형성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로마8,14-15).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1요한 5,1). “여러분은 모두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삶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갈라3,26).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의 세계에서 살았지만 지금은 주님을 믿고 빛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에폐5,8).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에페5,1). “사람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과 거룩하게 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그들을 형제라 부르셨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며 회중 가운데서 당신을 찬미 하겠습니다…….하느님께서 나에
주신 자녀들이 나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히브2,11-13).
믿음으로 형성된 새로운 관계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녀다운 품위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 사이에 형제애의 관계도 돈독히
해야 하겠습니다. 성당에 잘 나오지 않는 분들이 가끔 “아내가 열심히
해서 치맛자락만 붙잡고 있으면 반 천당은 갈 것” 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내가 주님과 맺은 관계와 내가 맺는 관계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뜻을 열심히 실행할 생각은 하지 않고 아내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묵주반지를 끼고 신자라고 폼 냅니다. 그것도 금으로
만들고, 때로는 보석을 박아 자랑합니다. 자동차 안에는 십자가나
묵주를 걸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주님을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저 매달고 다니고 간직하면 좋은 일이
생기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요? 생각 없이 지니고 다닌다면
부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 스승과 제자, 스승과 나의 깊은 관계는 어떤
물질적인 것이나 상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혈연이나 가정, 민족이 다 소중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장차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의 가족을 미리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뜻을 사는 이들은
이미 한 가족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창조물을
얼마나 사랑했던지 태양을 형님으로, 달을 누님으로 노래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차원을 뛰어넘어 또 하나의 그리스도로 사는 가운데
(갈라2,20) 형제, 자매의 관계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가족관계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두고 가족을 바라보면 할 일이 많을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는 것
"자기 자신의 한계, 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통과시키는
문입니다. 그 문은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고 재창조
시키는 그분 사랑에 개방된 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진리에 문을 열고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죄를 인정할 때 마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성한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의롭다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마태 9, 12-13 참조)에 대한 아름다운 체험을 해 봅시다.
인내심이 가득한 그분의 인내와 자상함, 그리고 모든 이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의지를 체험합시다. 무엇이 표징일까요?
우리가 ‘새로운 사람들’로 변화되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변화되었다는
표징은 누더기를 벗어버릴 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평화와 타인에 대한 봉사, 자애로움과 자상함이라는 깨끗한 옷을 입기
위하여 분노심을 버리고 원수를 사랑할 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신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충실성만이
오직 진정한 새로움, 재창된 새사람, 새로운 사람들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교황 프란치스코, 토리노 사목 방문 2015년 6월21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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