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3년(24일)을 며칠 앞두고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미-러 장관급 회담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첫 만남이니 만큼 미-러 양측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포함해 양국간 관계 개선을 위해 서로 의견을 개진하고 청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대국 주재 대사관 운영의 정상화 등 이해가 맞아떨어진 작은 분야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양측은 또 회담이 끝난 뒤 우크라이나 전쟁 등 현안을 풀어갈 고위급 협의체의 출범에도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전쟁 종식을 위한 본격적인 협상은 비로소 시작된다고 보면 된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미-러 장관급 회담. 사우디 측 인사가 회의 탁자 중간에 앉아 있다/사진출처:러시아 외무부(사이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12일)한 지 엿새만에 열린 미-러 장관급 회담은 18일 리야드에서 5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미국 측에서는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스티브 위트코프 대통령 중동 특사, 마이크 왈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이,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유리 우샤코프 대통령 외교담당보좌관,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러시아직접투자펀드(RDIF)대표 등이 참석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8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리야드 합의 내용'(О чем договорились в Эр-Рияде)이란 코너에서 "약 5시간 동안 진행된 이날 회담에 대한 양측의 평가는 긍정적이었다"며 '말을 듣는 게 아니라, 서로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고 회의 분위기를 전한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발언을 소개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또 "양국은 회의에서 관계 개선 문제를 다뤘으며,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미국 측의 위트코프 중동 특사도 나중에 "워싱턴은 더 나은 결과를 상상할 수 없었다"고 거들었다. 미 블룸버그 통신은 "미-러 회담을 중재한 사우디아라비아가 우크라이나 대표의 참석을 제안했지만, 미국과 러시아가 이를 반대했다"고 보도했다.
◇협상 후 러시아측 발표는
스트라나.ua는 "회담 후 발표된 양측의 성명으로 보면, 미국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전 종식과 관계 회복을 위한 평화협상 메커니즘을 매우 긍정적인 기조로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이에 따라 선(先) 미·우크라·유럽 합의, 후(後) 러시아와의 협상을 내세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유럽은 미국의 친러시아식 협상 독주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졌다고 이 매체는 진단했다.
사우디 미-러 장관급 회담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는 세부적인 추가 협상을 위한 대화 협의체의 구성이다. 라브로프 장관은 양국에서 특별 대표(일종의 특사)가 공식적으로 임명될 것이며, 이들이 서로 소통하며 세부 사항을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관심을 끄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우크라이나 특사로 지명된 키스 켈로그가 미-러 소통을 위한 특별 대표에 임명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 스트라나.ua는 러시아가 거부감을 갖고 있는 켈로그 특사가 미국의 대표로 임명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켈로그 특사는 18일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중동 특사로 팔레스타인 하마스-이스라엘 중재에 앞장선 위트코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위트코프 특사는 회의가 끝난 뒤 모스크바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미-러 회의에 앞서 러시아가 석방한 미국인 칼롭 바이어스 웨인(28)의 미국 송환 문제를 마무리지을 것으로 예상된다. 웨인은 지난 7일 소량의 마리화나를 소지한 혐의로 모스크바 공항에서 체포된 바 있다.
위트코프 특사는 얼마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측 인사들고 만나 마약 소지 혐의로 3년 넘게 수감돼 있던 대사관 직원(미국인 학교 교사) 마크 포겔의 석방을 주도한 바 있다.
미국의 중동특사인 위트코프/유튜브 영상 캡처
우샤코프 크렘린 외교담당 보좌관은 켈로그 특사가 우크라이나와 유럽과의 소통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켈로그는 19일 키예프(키이우)를 방문할 계획이다.
일부 언론은 미-러 정상회담이 내주에 열릴 수 있다고 보도했지만, 우샤코프 보좌관은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에 관한 협상 내용이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거의 없다. 러시아측에서 관련 내용 발표가 두개, 미국 측에서 하나가 나왔다.
우선, 라브로프 장관은 회담후 "미국 측은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가 뮌헨안보회의에서 주장한 '러시아의 영토 양보'를 사실상 일축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에서는 이에 대한 논평이 나오지 않았다.
라브로프 장관은 또 "종전 후 유럽 평화유지군의 우크라이나 배치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협상에서 한 주장을 되풀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협상 내용 브리핑/사진출처:러시아 외무부
놀라운 것은 회담후 나온 러시아 외무부의 성명이다. 성명은 "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 금지는 물론이고, 나토 가입을 처음으로 허용한 2008년 부쿠레슈티 나토 정상회담의 약속(공동성명)도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외무부 성명이지만, 러시아는 이날 협상에서 이 문제를 거론한 것으로 보인다고 스트라나.ua는 전했다.
◇미국측 발표는
러시아 측의 협상 내용 발표 후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기자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해제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모든 당사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며 "유럽도 대러시아 제재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회담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대러 제재 해제와 회담 참여를 연결시킨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서방의 대러 제재 해제 등 4가지의 전쟁 종식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루비오 장관은 다음 회담에서는 영토 문제(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점령지 처리)와 우크라이나 안보 보장 문제가 다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일시적인 해결책이 아닌 영구적인 평화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정의롭게 끝내고 재발을 방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번 회의에서 발표된 또다른 합의사항은 모스크바와 워싱턴에 있는 대사관의 직원 수를 정상화하기로 한 것이다. 미-러 양국은 러시아의 '미 대선개입' 갈등으로 지난 2016년부터 외교관 추방과 외교시설 폐쇄, 현지 직원 감축, 신규 외교비자 발급 거부 등이 이어지면서 대사관의 정상적인 업무가 차질을 빚고 있다. 이같은 상태에서 양측은 공석인 주재 대사를 조속히 임명하고 대사관 규모를 정상화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복원하기로 합의했다고 라브로프 장관은 전했다.
미국 측은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후 지정학적 이익과 경제적 기회에 관한 러시아와의 협력을 발표했다.
◇미국의 전쟁 종식 방안
마-러 첫 고위급 회담을 계기로 미국 언론들은 양국이 논의중인 전쟁 종식 방식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친트럼프 성향의 폭스 뉴스는 미국과 러시아가 휴전→우크라이나 선거(대선)→평화 협정 서명 방식의 단계별 평화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3단계 방안'은 미국에서 계속 제기된 것으로, 부분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 측 인사들로부터 확인되기도 했다.
라브로프 장관은 그러나 '3단계 계획'(정전-선거-평화조약)안을 접한 적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폭스 뉴스는 "미국과 러시아 모두 젤렌스키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은 낮고, 대선을 평화 정착의 핵심 조건으로 보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친러시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포함해 모든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후보도 젤렌스키 대통령보다는 더 유연하게 전쟁 종식 협상에 임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에 반발하듯, 최근 며칠간 "키예프의 조건에 따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거를 실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선 실시를 요구하는 야당측 인사에게는 "시민권을 바꾸라"고 응수하기도 했다. 그의 이같은 방침은 미-러 협상 국면에서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진단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의 반발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사이트
튀르키예(터키)를 방문 중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리야드 협상에 극도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초 예정된 사우디아라비아 방문(19일)을 3월로 연기한다고 18일 전격 발표했다.
그는 또 "미국과 러시아가 (평화 정착을 위한) 최후통첩을 보내더라도 우크라이나는 이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 없이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끝내는 방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한 지난 12일 정례적인 대국민 저녁 연설(영상 공개 방식/편집자)을 한 뒤 13일부터 이를 중단했다. 스트라나.ua는 대통령이 지난 3년간 이렇게 오랫동안 저녁 연설을 중단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큰 충격을 받았거나, 트럼프-푸틴 전화 접촉에 항의하는 차원으로 저녁 연설을 중단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된다.
스트라나.ua는 그러나 "우크라이나에게 가장 나쁜 선택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평화 협상 의지를 보이지 않아 미국이 무기 공급을 끊고, 그 상황에서 계속 싸우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어떤 결과가 벌어질 지 분명하다는 뜻이다. 더 나쁜 전황(항복 직전)에서 굴욕적으로 평화협상안을 받아들 지도 모른다.
유럽은 미-러 간의 협상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한 것 같다. 전날(17일) 파리에서 열린 유럽 주요 국가들의 임시 정상회의에서 대책이 마련돼야 했지만, 평화유지군의 우크라이나 파견 등 주요 문제에서 아무런 합의도 나오지 못했다.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회담 후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유럽의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폭탄성 발언과 행동에 대응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며 "파리 엘리제궁에서 3시간 30분 동안 회의를 했으나, 수십 년 만에 닥쳐온 가장 큰 안보 구도 변화에 대한 유럽 지도자들의 반응은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했고, 우크라이나 평화유지군 파병을 놓고 논쟁을 벌였으며,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서는 진부한 말만 반복했다"는 게 폴리티코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