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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신앙]
배 베드로
여러분 반갑습니다.
저를 초청하여 신앙공동체에 가입하게 해 주신 김명준님께 감사하면서 그 보답으로 과학과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강의하고자 합니다.
상당히 긴 글이기에 혹시 지루하고 실망스럽드라도 새내기를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과학하는 사람으로서 과학에 관련한 것 외에 강의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신학자가 아닌 제가 과학과 신앙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다룰 수 있겠는가 하는 두려움이 많았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습니다.
오늘 준비한 강의내용은 어느 의미에서 제 개인적인 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가톨릭의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저는 대전교구 덕명동성당을 본당으로 하고 있는 배 베드로입니다
물리학을 전공한 과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입니다.
약 15개월 전 79세의 나이로 연구직에서 퇴직하고 자유의 몸이 된 것을 생각하면 그 기나 긴 연구원으로서의 생활을 대과없이 마감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지금까지 가톨릭 신앙인으로서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만 중년에 이르러 과학과 신앙의 가운데서 많은 갈등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실제로 과학인들의 상당수는 종교를 부인하는 경향이 짙은 편이지만 연륜이 쌓이게 되면 대부분 신앙에 대한 긍정적 입장으로 선회하는 것을 봐 왔습니다.
첫 번째로 여러분이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은 과학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과학에는 많은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이란 자연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인간이 밝혀 정리한 것으로 어떠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가를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과정에서 창조주인 하느님께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를 설명하게 될 것입니다.
과학을 시대적으로 분류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일이 될지는 모르나 제 소견으로서는 불과 100여년 남짓한 시점을 기준으로 현대과학이 탄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에 있어 현대과학의 발전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고 하여도 전혀 무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생각하면 과학의 한계가 어디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 한계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과학과 신앙의 갈등 속으로 쉽게 빠져 들게 됩니다.
그러나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조금만 각도를 달리하여 생각해 보면 간단히 한계에 도달하게 됨을 알게 됩니다.
저는 오늘 현재의 첨단과학에 대하여 몇 가지를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태양계, 은하계, 우주를 생각하게 되면 과연 내가 누구며, 하느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며,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간단히 예를 들 수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생명과학부분입니다. 인류문명이 시작된 이래 생명의 신비에 대한 생각과 의문은 인류생활에 많은 향상을 가져 왔으나, 그에 대한 생각과 의문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으며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왜 일까요?
생명은 인간의 몫이 아니고 하느님 몫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과연 생명은 무엇이며, 생명은 어디서 주어지는 것인가에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진화론이라는 가설을 주장하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만 창조론은 계속 지지되어 왔으며, 어떠한 사람도 창조론을 명학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점들에 대하여 중점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만 연구만으로 평생을 살아 온 저로서는 여러분들에게 과학과 신앙에 대하여 강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가톨릭에 대하여 강의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며, 주어진 테마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드릴 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시 한 번 이해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제 생애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보이는 과학보다 보이지 않는 신앙”을 왜 더 믿느냐는 말을 들어 왔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과학은 보이며 누구나 과학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은 알면 보이지만 모르면 보이지 않는 것이 과학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과학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쉽게 믿습니다만 무한한 자연을 생각하면 믿을 수 있는 범위가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믿는 만큼 보입니다.
신앙의 깊이가 깊을수록 더 크게 보입니다.
저는 이공계를 공부한 후 지금까지 계속된 연구생활과정에 겪었던 일들 가운데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미국에서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동료 연구원 중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저에게 물어 온 일이 있습니다.
"인간이 달에 가고 과거에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일들이 과학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과학이 종교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과학이 발전 중에 있기 때문이며 더욱 더 발전하여 과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신앙이 필요 없어 질 것이다."라는 말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한 하나의 예에 불과하지만 과학인들 중에는 이와 같이 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심어 주지 못 한다면 이들로 부터 신앙은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어떤 물건을 찾으려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등불이 있으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등불입니다.
또, “과학과 신앙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도 많이 받아 왔습니다.
상당히 복잡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입니다.
이러한 질문에는 신앙을 가지고 과학하는 것과 신앙 없이 과학하는 것의 차이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으로 답하였습니다.
여기서 가설과 법칙의 차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과학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진화론이라는 이론에 대하여 긍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이가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 물론 정리된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이론이지만 어디까지나 가설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생각해 보면 지구 어디를 가드라도 작용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한 것으로 모든 물체는 중력의 중심으로 이동하려는 힘에 대한 법칙으로 확인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법칙은 우주에서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여기서 진화론과 만유인력의 법칙은 그 성격이 전혀 다름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면 진화론은 법칙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화론을 법칙으로 오해하고 있지만 챨스 다윈이란 영국인에 의하여 주장된 가설일 뿐이지 법칙은 절대 아닙니다.
법칙은 실험을 통하여 얻은 확증을 정리한 것으로서 어떠한 부정적 요소도 없이 어떤 경우에라도 적용되는 규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실험을 통하여 확정된 일이 없습니다.
이런데도 가설과 법칙을 구분하지 못하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의 공존관계에 부정적 사고를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진화론에 의하면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주 A씨는 경주동물원 A씨로 바뀌어야 하고, 전주 B씨는 전주동물원 B씨로 바뀌어야 할 것이며, 집집마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어느 동물원에서 왔는가를 자손들에게 설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끔찍스런 일입니까?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원숭이와 사람의 중간체가 있어야 하며, 원숭이의 집단서식지에서 새로운 사람이 계속 진화되어 나와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에서도 중간체가 발견된 일은 없으며 어떠한 동물원에서도 사람으로 진화되어 나온 일도 없습니다.
진화론의 내용은 어느 날 갑자기 우주공간에서 아메바가 생겨나 지구에 떨어져 사람으로까지 진화하였다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 명확히 증명된 법칙이 절대 아닙니다.
가장 위험한 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이며 법칙은 절대 아닌 진화론을 일부 교사들이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법칙으로 착각하여 가르치려고 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여 진화론이 실험으로 확인되었으며 재현 가능한 불변의 법칙이라면 진화의 법칙으로 정리되어야 할 것이지만 세계 어느 누구도 진화의 법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진화론자들은 진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돌연히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이는 진화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발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생명이 어디서 왔으며 사람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생각하면 진화론을 무시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배경에는 하느님 없이도 세상만물이 창조되었으며 생명이 탄생되었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적 사고방식, 바꾸어 말하면 소위 무신론적 사고방식이 깔려 있습니다.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챨스 다윈의 진화론은 공산주의에 의하여 각별하게 지지되었으며, 이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고는 공산주의의 성공은 절대 불가능하였기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지지된 유물론이 무신론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재미있는 일은 1,000여명의 석학들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연구의 결과가 실패로 끝났을 때, 해당 연구원은 가장 쉽게 말하는 것이 "모두 하느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경우도 하느님 뜻이라고 하여야 해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유물론에 젖은 러시아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 과학인도 물론 있었습니다.
독일의 로켓 과학자 폰 브라운이 V2를 발사한 후 조용히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하느님 V2가 런던을 명중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이는 자신의 과학적 지식보다 하느님 뜻이 절대적 위치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V2에 의한 런던의 타격은 상상 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불이익이 되는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유물론자요, 무신론자라고 하는 과학인들 가운데는 실제로는 유신론자가 많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유신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심한 경우 신앙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고 실험을 통하여 확인하고 재현가능하게 하는 모든 과정을 정리하여 법칙을 수립하는 것을 과학이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가설은 "그럴 것이다"라는 것을 하나의 이론으로 주장하는 것으로 언제라도 즉시 재현가능하고 실험을 통하여 불변하는 사실로 증명된 법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때문에 과학자들이란 관찰을 통하여 얻은 사실을 실험을 통하여 사실로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학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만물이 법칙과 관계없는 이론에 근거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과학자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야기꾼에 불과한 사람들을 과학자라고 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과학자에게는 크나 큰 모욕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과학은 관찰과 이론적 정리, 실험을 통한 확인, 재현 등의 단계를 과학의 기본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모든 현실은 모두 법칙에 근거한 발명의 소산이지 절대로 이론에만 근거한 발명의 소산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면 유물론자들이 보물처럼 받들고 있는 챨스 다윈의 진화론은 이론의 단계에 있을 뿐이지 과학적으로 완성된 법칙은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 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진화론이란 과학에 미치지 못하는 하나의 설, 즉 이야기일 뿐이지 절대로 과학이라고 평가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혹시 유물론에 대하여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 계시다면 그러한 사고를 당장 버려야 할 것입니다.
과학이란 주님께서 허락하신 학문의 한 분야입니다.
실제에 있어 과학은 중세 때에 천주교회에서 설립한 학교에서 시작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과학으로 밝힌 법칙의 일부분에 대하여 교회의 입장에서 해석의 오류로 부정된 부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정되었던 것으로 지금은 모든 과학 분야에 대하여 어떠한 부정도 없습니다.
과학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물질에 대하여 불명확한 것을 명확하게 정립하여 법칙으로 정리하는 것을 말하며, 발명은 명확하게 정립된 법칙을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탄생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물질은 인간의 몫이 아니고 하느님 몫이며, 인간의 몫은 과학일 뿐입니다.
하느님 몫과 인간의 몫을 혼돈한다는 것은 과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될 뿐입니다.
저는 하느님 몫과 인간의 몫을 설명할 때에 뉴톤의 만유인력을 즐겨 인용합니다.
대분의 사람들은 사과가 떨어지면 “이게 웬 떡이냐”하는 마음으로 “먹을 것이 생겼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는 어느 의미에서 모든 동물의 식이 본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뉴톤은 사과가 떨어지는 현상을 보고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왜 떨어질까? 그 것도 왜 아래로만 떨어지나? 아래는 어떤 방향인가? 하는 의문에서 시작한 관찰을 바탕으로 지구의 중심 방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지구와 사과 사이에는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는 법칙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힘은 우주의 모든 물체 간에 서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많은 과학자들의 의하여 증명되고 명확하게 정리되어졌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둘 것은 이미 자연계에 존재하는 법칙 가운데 하나를 뉴톤이 발견했다는 사실이며, 없는 법칙을 만들어 낸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신앙을 부정하는 유물론은 그 근거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뉴톤과 다원은 모두 영국인으로 영국의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 모두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뉴톤에 대하여는 과학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나 다윈에 대하여는 과학자가 아니고 탐험가로서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의 설을 주장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영국인입니까? 그러나 이러한 국민적 사고가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였던 것도 유물론을 부정하고 유신론을 긍정한 영국인의 국민성이 가능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휴대폰으로 세계 어느 곳과도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누구하고나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천리길을 단 두 시간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자연의 법칙에 바탕한 것이며 법칙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행기는 어떤 면으로 보아도 새와 똑 같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날개의 모양을 그대로 모방하여 양력을 얻어 높이 뜹니다.
휴대폰의 구성부품들은 이들을 이루는 물질들의 물성을 연구하여 발견된 법칙에 바탕하여 개발되고 제조된 것입니다.
단 두 시간에 천리길을 주파하는 고속열차도 전기와 자력에 대한 법칙에 바탕하여 고속으로 회전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모터를 발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 하나도 하느님 몫에 근거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하시게 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은 법칙을 만들어 낼 수는 없으며, 이는 하느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몫인 자연의 현상이나 성질을 연구하여 하나하나 법칙을 정리하여 가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몫이며 과학이라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아직도 자연은 엄청난 신비를 숨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는 하느님을 믿지 않고는 절대로 접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웬 불교냐 하고 좀 이외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불교 경전에 보면 아함부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창세기에 가까운 것이지요.
서가모니 부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하나의 소세계, 바꾸어 말하면 아주 작은 세계이며, 3,000개의 소세계는 하나의 중세계를 이루고, 3,000개의 중세계는 하나의 대세계를 이루며, 하늘은 3,000대세계라고 하었습니다.
이는 무한한 우주를 설명한 것으로 역시 자연의 신비를 인간이 알기에는 너무나 크고 어렵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또, 서가모니 부처님은 “일적수에 일억충”이라고 하였습니다.
직역하면 물 한 방울에 일억마리의 벌레가 들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만 그 뜻은 무한히 많은 구성요소가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일억이라고 한 것은 정량적 의미보다 무한대를 말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는 과학에서 아보가드로의 법칙으로 정리되어 있는 내용과 너무나 같습니다.
실제에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에는 지구와 같은 행성 외에 약 1,000억개의 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은하계에는 또 1,000억개의 태양계와 같은 것이 존재하며, 우주에는 이와 같은 은하계가 2,000억개 정도 존재한다고 우주과학에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무한한 것을 인간의 몫으로 하기에는 너무나 커서 인간의 몫이 되기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들에게 과학이란 자연계에 이미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법칙을 발견하여 불명확한 것을 명확하게 정립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합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을 명확하게 정의한 것은 아직까지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냥 태어나서 죽기까지 살아있는 과정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막연한 표현이 있을 뿐입니다.
실제에 있어 어떤 현상에 대하여 정의한다는 것은 많은 반론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잘 못 정의한 사람은 회복 불가능한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때문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서도 두려워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봐 왔습니다.
믿음에 바탕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탕이 되었다면 많은 법칙들이 발견되고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어떤 현상을 정의함에 있어 간결하지 못 하고 복잡하게 말하는 것은 사실상 모른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한 것입니다.
현실이 이렇지만 우리는 생명의 기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이에 대해서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모델로 설명하고 있으며, 하나는 진화론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론입니다.
생명의 기원에 관련하여 “생명은 우연히 창조되어 긴 시간을 통하여 변화되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론이라는 가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목적이나 계획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히 태어나 그냥 변화하여 왔으며 지금도 변화 중이라는 것이 진화론의 바탕입니다.
이에 비하여 창조론은 “생명은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으며 어떤 큰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대칭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창조에서 만들어진 모델은 현재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설은 서로 명확하게 다른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론이 주장하는 모델은 과연 어떤 것인가?
“먼 옛날 어느 날 갑자기 아메바가 지구에 떨어져서 단세포로 진화하고, 복잡한 구조와 형태를 가진 복합다세포로 진화하고, 다시 벌레나 곤충으로 진화하고, 물고기, 양서류, 파충류, 조류, 포유류의 순으로 진화하여 인간에 까지 이르렀다”는 가설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음에 또 무엇으로 진화하게 될까를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불과 100년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명을 가진 단 한 사람에 의하여 주장된 것으로 수 천만년, 수 억년을 통한 과정에 대한 것을 실험적 과정을 통한 증거나 재현의 제시 없는 가설이라는 것에서 설득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원의 진화론은 아메바의 탄생에 대한 것을 설명하고 있지 못하며, 단지 오파린의 가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오파린은 “지구가 원시시대 때, 우주 어느 곳에 질소, 메탄 암모니아와 같은 가스가 존재하였고 이러한 가스가 번개를 맞아 촉매의 도움으로 질소화합물로 변화되고 질소화합물이 액상의 덩어리로 변화하여 생명을 가진 단순한 세포가 되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모든 것은 다원의 진화론과 오파린의 가설을 접목시켜 생명을 설명함으로서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이용하기 위한 무신론을 만들어 낸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결과입니다.
실제에 있어 맑스, 레닌 등은 공산주의국가 건설에 가장 큰 장애는 종교로 생각하였으며, 이들은 러시아에서 종교를 말살시킴으로서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성공한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창조론은 하느님께서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으로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종은 적자생존법칙에 의하여 어떤 종은 멸망하고 어떤 종은 유지되어 왔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법칙 중에는 열역학 2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자연현상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반대방향으로 진행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너지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아무리 품질 좋은 벼라고 하여도 그냥 경작만 계속하면 종국에는 아주 맛없는 벼로 변화하고 말 것입니다.
화분에 심어져 있는 꽃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물만 준다면 종국에는 처음의 아름다움을 잃게 잃고 말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녀도 그냥 두면 점점 쭈그러진 할머니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하거나 더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는 에너지의 힘을 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명확한 사실이 있는데도 진화론은 그냥 두어도 좋은 방향으로 계속 진화하여 간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을 가설로 내 세우고 있습니다.
저는 유물론과 무신론은 없는 것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신앙 ?
과학의 기초는 절대 불변하는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법칙은 실험과 연구의 계속으로 발견된 것이지 이야기로 시작되어진 “이럴 것이다”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과학이 만들어 낸 모든 것들은 인간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계에 존재하는 법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창조의 능력이 없으며 모든 발명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법칙을 이용하여 완성되었기 때문에 창조와 발명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극도로 발달한 현대과학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법칙의 어느 하나도 그 존재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의 한계인 것으로 과학으로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저는 여기서 과학을 앞세워 하느님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
창세기 1장 1절에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창세가 2장 1절에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을 이루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자연을 창조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은 하느님 섭리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과학을 통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밝힌 것 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미 우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기 26장 7절에는 “땅을 허무 위에 매다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달려 있다면 잡고 있는 어떠한 끈이 존재해야 하는 것으로 그 끈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잡고 있는 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매달려 있다면 매달린 곳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천체와 천체 간에 작용하는 힘을 부정하지 못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뉴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에 완전히 일치합니다.
잠언 8장 27절에 “태두리”로 기록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원서에 써클로 된 것을 테두리로 번역한 것입니다. 테두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하여도 둥근 것을 말하는 것이며, 모든 천체는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 100여년 전까지 중국의 지배적 지구관은 천원지방이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난 모습”이란 의미입니다.
이에 비하여 성경은 지구의 둥근 모습, 모든 천체의 둥근 모습과 또한 중력장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들은 중력의 중심을 향하여 작용하는 힘과 서로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시편 19장 5절과 6절에 태양이 “용사처럼 길을 달리며”라고 기록 된 것은 태양도 빠른 속도로 일정한 궤도를 돌고 있는 것을 설명한 것입니다.
성경을 읽거나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태양은 고정되어 있고 지구가 돌고 있다거나, 아니면 지구가 고정되어 있고 태양이 도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왔습니다만 성경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천체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서로 간에 연결되어 있으면서 계속 이동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주를 완벽하게 설명한 것은 성경 외에는 없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레위기 17장 15절과 16절에는 “죽은 짐승을 먹은 자는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한다. 빨지 않고 씻지 않으면 그 죗값을 져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감염으로 인한 피해의 예방에 대하여 밝힌 것으로 현대의 방역도 여기에 기초를 둔 법칙에 의한 것입니다.
이는 부패한 짐승의 병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하여 감염되어 피해를 입게 되는 치명적 결과를 설명한 것으로 루이 파스퇴르가 병원체에 의한 감염을 주장하기보다 수 천년을 앞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오묘한 진리를 담고 있음에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지구의 모양을 둥글다고 말하고, 병원체에 의한 감염을 말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면 현대과학은 성경 말씀을 증명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연계는 하느님께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만드신 법칙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과학은 그 법칙을 발견하려고 노력하는 학문입니다.
과학을 구실로 신앙을 부정하면 과학하는 길에서 이룰 수 없는 것과 이룰 수 있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처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야 말로 진정한 과학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