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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목요일, - 이런 사람이고 싶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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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이런 사람이고 싶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기쁨과 헤어지니
기뻐하는
사람 아니라
기쁨과 헤어지니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슬픔을 만나니
기뻐하는
사람 아니라
슬픔을 만나니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하여
참으로 슬퍼하는
사람이고 싶다
기쁨을 만나니
슬퍼하는
사람 아니라
기쁨을 만나니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슬픔과 헤어지니
슬퍼하는
사람 아니라
슬픔과 헤어지니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하여
참으로 기뻐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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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부님께서 5월 6일 강론글 말미에 아래와 같이 알려 주셨습니다.
- 앞으로 한 주간 강론을 올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또 죄송합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나 화요일부터 다시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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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쇠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니다.^♡^ <성체경배 순례자>
23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주님은 우리 기쁨의 바위)
http://www.ofmkorea.org/526610
22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과 기쁨 그리고 신앙적인 근심)
http://www.ofmkorea.org/489065
21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바람처럼 성령처럼)
http://www.ofmkorea.org/407284
20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한가함과 게으름을 경계하며)
http://www.ofmkorea.org/353062
19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으로 끝나는 근심과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
http://www.ofmkorea.org/222478
18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이 기쁨으로 바뀌려면)
http://www.ofmkorea.org/122047
17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조금?)
http://www.ofmkorea.org/104058
16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이유들)
13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근심과 기쁨의 관계)
12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책임 종결)
11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조금 있으면"을 잘 살아야!)
10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관상의 회개)
09년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감각, 무감각, 초감각)
===위에서 2019년도 강론글 옮깁니다.===
김레오나르도 2019.05.30 04:43
부활 6주 목요일-근심으로 끝나는 근심과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거라고 하시는데
제 생각에 모든 근심이 다 기쁨을 바뀌지 않습니다.
근심으로 끝나는 근심이 있고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심으로 끝나는 근심은 어떤 근심이고
기쁨으로 바뀌는 근심은 어떤 근심입니까?
하나마나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근심꺼리가 사라지지 않아
근심이 근심으로 끝나는 것이고, 암으로 치면
암 덩어리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이 근심으로 끝나지 않고 기쁨으로 바뀌려면
이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겠지요.
문제는 이 암 덩어리를 누가, 어떻게 제거하느냐 그것입니다.
끌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노상 끌탕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끌탕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실 근심이란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근심을 하는 것인데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놓지 않고
계속 거기에 마음을 두고 끌탕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근심들이 마음을 놓지 않아 놓이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마음을 놓으면 마음이 놓이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요즘 작은 근심이 끊이지 않습니다.
바로 컴퓨터 자판 때문인데 어떤 때는 자판이 1시간 넘게 먹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계속 컴퓨터에 마음이 가고 신경이 쓰이며
내일 강론까지 생각하면 걱정이 됩니다.
그런데 우습잖아요?
고치면 되잖아요? 고치겠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안 쓰면 되잖아요?
고치면 되고 고치지 않을 거면 마음을 쓰지 않으면 되는데
고치지도 않고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근심들이 이렇게 쓸 필요가 없는 것에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근심의 바탕에 <없기를 바라는 마음>과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나쁜 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과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죠.
그런데 어떻게 우리 인생이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으며,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요.
그러려니 할 때 마음을 안 쓰고 근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식의 근심퇴치법이라면 이제 예수님의 근심퇴치법을 봐야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근심퇴치법은 역시 하느님의 근심퇴치법입니다.
하느님이 계시면 근심이 없고 하느님이 안 계실 때 근심이 일어나는 겁니다.
오늘 주님 말씀도 당신이 돌아가시면 제자들이 슬픔과 근심에 싸이겠지만
조금 있으면 당신이 오시기에 근심은 사라지고 기쁨에 싸일 거라 하십니다.
근심꺼리가 있어도 아버지가 있으면 다 해결해주실 거라고 생각하면 근심을
하지 않게 되듯 해결사요 구원자이신 주님만 계시면 마음 놓으셔도 되지요.
그러니 주님이 안 계신 것이 근심이지 다른 것은 근심꺼리가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전념했다는 것은 이런 경지의 표현입니다.
쓸 데 없는 데 마음을 쓰지 않고 말씀 전파에만 전념한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나가라고 하니 발에 먼저 털고
아무 미련 없이 떠나가고요.
미움, 분노의 감정도 근심, 걱정, 아쉬움과 같은 마음도 없습니다.
전념, 마음을 오직 한 곳에 다 쏟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 주님 때문에 바오로처럼
근심을 털어놓고 다함께 차차차!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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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 출신의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수필가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스물여덟에 윌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이곳 생활을 통해 나온 그의 사상은 많은 이에게 영향을 미쳤지요.
그의 책 중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유명한 ‘윌든’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1800년대 당시에는 이 책이 사람들에게 전혀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윌든’은 소로의 두 번째 책인데, 1854년 출간 당시 총 7권이 팔렸다고 합니다. 팔린 책도 그의 어머니가 산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렇다면 첫 번째 책은 어떠했을까요? 1,000권을 인쇄해서 총 219권이 팔렸는데, 후에 나머지 책은 다락방의 단열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사상에 감명받은 사람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법정 스님이,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도,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등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던 시대에서는 이해해 주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자기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소로의 모습에서 자기 삶을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남들처럼 살고, 남들 눈치를 보고, 남들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나만의 삶을 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남처럼 살기를 하느님께서 원하셨다면 우리를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심지어 외모로 거의 같은 쌍둥이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이것만 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나답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겪을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십니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당혹스러워하지요. 우선 알아듣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고난이 예수님을 덮쳐서도 안 되고, 또 그런 일이 생기게 되면 울며 애통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런 말씀을 미리 해 주셨습니다. 왜일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나’답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는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나’가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알려 주시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의 뜻을 잊지 않고 성실하게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나’가 될 때, 우리가 가졌던 모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반대되는 ‘나’가 된다면, 우리의 근심은 커다란 아픔으로만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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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나는 병을 통해 나의 철학을 얻어냈다(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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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막바지에서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며, 우리의 길이 됩니다. 그분의 삶의 마감은 끝이 아니라 끝에서 오히려 길이 됩니다. 그분의 떠남은 떠남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길이 됨을 밝혀줍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앞 구절>의 “조금 있으면”이란 단어는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짧은 시간’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임박성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뒤 구절>의 “조금 더 있으면”이라는 단어는 부활하신 후에서 승천까지, 혹은 재림의 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곧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토록 당신의 죽음을 준비시키고자 애쓰시건만, 정작 제자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근심과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이는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근심이나 슬픔이 지나가면 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혹은 ‘슬픔이나 근심 대신에 기쁨이 주어진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기쁨으로 변하리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격고 있을 때는 아픔이었지만, 뒤돌아보니 그것이 은총이었구나!’ 하고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이 열리면, 신비롭게도 슬픔이 곧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슬픔인 예수님의 죽음이 사실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슬픈 일 자체’가 기쁜 일로 바뀐다는 이 사실, 곧 슬픔은 슬픔이 아니라는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서 이미 기쁨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고, 성령이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여전히 근심과 슬픔에 젖어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근심과 슬픔 속에 깃들어 있는 ‘이미 베풀어진 자비’를 관상하고, ‘여전히 베풀어지고 있는 사랑의 선사’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이미 우리 안에 들어 와 있는 “기쁨”을 덮어버리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그 어떤 근심과 슬픔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빼앗기지 않는 기쁨”(요한 16,22)이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그렇습니다. 주님!
근심이 지나고 나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근심, 바로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바람은 근심도 기쁨도 떠나와, 떠남도 머물음도 떠나와,
불고 싶은 대로 불고,
그 속에서 열매는 싹으로 바뀌고, 죽음은 생명으로 바뀌고,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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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근심과 걱정거리를 안고 다닙니다. 아마도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도 안고 갈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마리아 임금 아합왕은 자신의 요구가 거절당해서 근심합니다. 궁전 곁에 있는 포도밭을 정원으로 사용하고자 이즈르엘 사람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밭을 줄 것을 약속하며 포도밭을 달라고 합니다. 나봇이‘조상으로 물려받은 포도원을 임금께 드릴 수 없다.’고 거절하자 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음식도 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1열왕21,3-4).
욥(3,23-26)은 시련을 견딜 수 없어서 두려움에 근심했고, 잠언(10,1)에서는‘어리석은 자녀를 두는 것은 어미의 근심거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거리도 많아지고 근심거리가 느는 법’이라고 코헬렛서(1,18)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이 위태로워서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마태8,23-25).하였습니다. 마르타는 너무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다가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라는 예수님의 충고를 들었습니다(루카10,41-42).
근심 걱정거리는 이렇게 다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 중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가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반대자들은 큰 승리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 앞에 넋을 잃었습니다. 너무 큰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그 근심과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해산의 진통을 앓듯 고통의 긴 터널을 지나 마침내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기쁨의 원천이 되셨습니다. 믿고 기다리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만나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간절함을 지니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너희의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14,1.27). 바오로 사도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4,6).하고 선언했습니다. 시편을 보면,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인의 흔들림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시편55,23).하고 노래했습니다.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고 큰 기쁨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시련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조금 있으면”해결되고 풀어지며 좋아지리라 믿습니다. ‘실패는 미루어진 성공일 뿐’입니다. 등산할 때 많은 사람은 이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조금만 가시면 됩니다.” 아직 한참을 가야 하는 데 지치지 말라는 희망을 주는 위로의 말입니다. 조금 더 힘을 내라는 동료애의 표현입니다. 이 위로를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렇듯이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사랑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대의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 안에 두십시오”(오상의 비오). 지금의 근심 걱정이 하느님 안에 있다면 그것이 기쁨의 바탕임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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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뿔이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울다가 웃으면 약간 실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울다가 웃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사고로 죽은 줄 알았는데, 그래서 식구들이 슬퍼서 울고 있었는데 다행히 살아 돌아왔다면 울다가 기쁨으로 웃게 됩니다. 본당에서도 울다가 웃는 때를 본 적이 있습니다. 5년간 정들었던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면 아쉬움과 슬픔에 눈물을 보입니다. 곧 새로 부임하는 사제가 오면 환한 웃음으로 맞이합니다. 웃다가 슬퍼서 울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10년 전입니다. 진도 앞바다에 배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었고, 구조대가 올 시간도 충분했습니다. 잠시나마 텔레비전에서 전원 구조되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학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 국민이 함께 아파했던 ‘세월호’의 슬픔입니다. 저도 울다가 웃었던 때가 있습니다. 31년 전입니다. 건강검진을 했는데 위에 이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인데 걱정이 되었습니다. 정밀검사를 받고, 위내시경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큰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이 덜컹했었지만,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한 형제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난은 고난을 몰고 다닌다는 말처럼, 형제님은 한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잘 되던 사업은 IMF의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접어야 했습니다. 큰 결심으로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첫 사업이 사기를 당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는 우울증이 생겨서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삶의 큰 의지가 되었던 아내가 아프니 형제님도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부모 몰래 신청해서 군인이 되었는데, 당시 전쟁이 시작되었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울며 전화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마음이 무너지는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아내의 우울증, 전쟁터에 있는 아들까지 정말 고난은 고난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성당에서 큰 위로를 받았는데 그것은 시편의 말씀을 들었을 때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도 무사히 돌아왔고, 성당에서 결혼해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아내도 우울증에서 벗어나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형제님도 하루하루 감사드리며 지낸다고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은 형제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 새롭게 조성된 성지가 있습니다. 기존의 성지는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회당, 베드로의 집터, 참된 행복 성당, 오병이어 성당, 베드로 수위권 성당’이 가파르나움을 중심으로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 온 사제가 성지순례를 왔다가 호수 반대편을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텅 빈 터가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곳에 순례자들을 위한 피정의 집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곳의 이름은 ‘미그달’이었습니다. 바로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고향 근처였습니다. 피정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공사를 하던 중에 가파르나움에 있던 회당보다 더 오래된 회당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 있었던 어부들의 마을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회의 관심과 이스라엘 정부의 도움으로 피정의 집보다 먼저 성당이 생겼습니다. 성당의 이름은 ‘더 깊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였던 베드로 사도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새롭게 조성된 ‘막달레나’ 성지를 보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리니 너희 마음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당시 강대국이었던 로마는 막달레나에 있던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도 로마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마을은 2000년이 지난 지금 한 사제의 ‘꿈’에 의해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잡풀밖에 없었던 텅 빈 곳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 사도의 손을 잡아 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일곱 마귀를 쫓아내시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여인들과 대화하는 모습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은 ‘더 깊이’ 그물을 던지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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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제자들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사실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은 역사의 한 인물로 기록될 수는 있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없었습니다.
이 부활의 소식 때문에 모든 사람은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은 희망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이 어려운 사람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슬픔과 아픔의 연속에 놓여 있던 사람들, 어두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 모든 사람이 부활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저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이 기쁨의 소식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핵심.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세상은 그냥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보고 그분의 삶을 본받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주님의 모습,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라고 해도 하느님을 등지지 않는 모습 말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대는 물, 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는 모습. 그것이 자기 속옷을 빼앗아 가는 행위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실 사람들에게 근심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기 때문입니다. 봉사는 하는데 사랑하지 않습니다. 웃기는 하는데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손은 잡는데 용서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창조하신 사람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이 우리가 겪는 모든 근심은 당연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근심 속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근심하지만, 두렵고 아프지만, 사랑을, 이해를, 용서를 선택하는 용기 말입니다.
이러한 용기가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울 것입니다. 이러한 용기가 복음을 세상에 전할 것이고, 세상을 기쁨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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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사탕
매일은 아니지만 목 안쪽에 이물감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미사 직전이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이곳을 방문하셨던 수녀님께서 사탕 한 통을 주셨습니다.
사실 사탕을 받았을 때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탕 좋아할 나이는 지났는데….’
그 통에는 ‘도라지 사탕’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미사 전 고해성사를 들어가며 사탕 하나를 입에 넣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고해성사가 끝나고 미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목에 있던 이물감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 후부터 저는 도라지 사탕 애호가가 되었습니다.
저는 도라지 사탕을 입에 물 때마다 그 수녀님의 깊은 뜻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도라지 사탕을 입에 넣을 때마다 자신 있고 맑은 목소리를 기대하면서 말입니다.
그대에게는 도라지 사탕 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마음의 이물감을 없애주고 자신 있게 나를 만들어주는그런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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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과 만남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시편98.1)
하루하루가 주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어제 69년도 교대 입학동기의 부음訃音 소식을 들었고 이에 대한 댓글도 읽었습니다. 55년 전이니 반세기 전에 만나 공부했고 그 이후로는 한번도 못만난 동기입니다. 댓글의 내용입니다.
“입학해 같은 반 친구가 되어 이승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먼길을 떠났군요. 그 먼길 편안히 가시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이것이 인생이다.
태어날 때는 어느 곳에서 왔으며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나 생기는 것이 태어남이고
한조각 구름이 흩어지는 것이 죽음이다
구름은 본래 그 실체가 없듯이 태어나고 죽음도 이와 같구나.”
참으로 죽음을 대할 때 마다 삶의 여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날마다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과 더불어 하루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참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허무로 끝나는 여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 인생이요, 날마다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어제서야 1343쪽의 방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독료했습니다. 2020년 10월부터 틈틈이 읽었으니 거의 4년이 걸렸습니다. 성인은 “젊어서 착수했는데 늙어서야 끝냈다” 고백하는데 399-425까지 집필했으니 20년 이상 걸려 집필한 대작입니다. 책 마무리의 기도 내용이 마음에 와닿아 일부 내용을 나눕니다.
“주 나의 하느님, 내 유일한 희망이시여, 빌건데 내가 기진하여 당신을 탐구하기 싫어하는 일이 없게 하시고,
항상 열렬히 당신 얼굴을 찾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이해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께서 나를 온전히 고치시기까지 내 안에 이럴 능력들을 키워주십시오.
오로지 당신 말씀을 설교하고 당신을 찬미해서만 말을 하기가 소원입니다.
내 하느님 수다스러움에서 나를 구해주십시오.
내 영혼 저 속 깊이에서 이 병을 앓고 있으며, 당신 면전에 너무도 가련하여 당신의 자비로 피난하는 영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인의 기도를 제 기도로 바치고 싶습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날마다 죽는 그날까지 늘 새롭게 주님을 만나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주님 말씀이 새롭게 들립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슬픔도 기쁨도 지납니다. 늘 주님과 함께 한다면 슬픔이나 기쁨에 일희일비함이 없이 묵묵히, 한결같이 하루하루의 여정에 충실할 것입니다. 마음속 깊이에서는 샘물이 솟듯 맑은 기쁨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의 꽃자리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담쟁이가 한창입니다. 26년전 담쟁이란 시가 여전히 좋습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 1998.6.3.
읽을 때마다 영적전의가 새로워집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이들이야말로 평생 주님의 학인이자 평생 주님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주님을 사랑하여 공부하는, 영원한 현역의 학인이요, 죽어야 제대인 평생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영적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어야 끝이라는 자각이 늘 깨어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결코 영적전의를 상실하거나 열정이 시드는 일이 있어선 안될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의 선교 여정중인 바오로야 말로 주님의 전사의 모범입니다. 파란만장한 삶중에도 열정이나 영적전의가 시드는 일이 없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언제 어디서든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라고 증언하면서 말씀 전파에만 전념합니다. 바오로의 굽이굽이 곡선인생여정중에도 하느님은 똑바로 당신 글자를 써내려 가십니다. 우리 매일 삶의 체험중에도 이런 하느님의 분명한 손길을 보도록 합시다.
바로 매일이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일희일비함이 없이, 각자 삶의 꽃자리에서 주님과 만남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며,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많이 기뻐하며 주님 앞에서 노래하며 춤추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멋지게 노래하며 춤추다 세상을 떠난 성인도 있다 합니다.
“온 세상아,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추어라.
즐기어라, 기뻐하라, 고에 맞춰 노래하라.”(98,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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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요한 16,16)
배반과 십자가 처형, 장례를 암시히는 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신께서 “잡히시던 날 밤" (1코린 11,23) 이므로,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그날 밤의 나머지 시간과 다음 날만 지나면 그들이 그분을 보지 못하게 될 시간이 올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날 밤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셨고, 다음 날 늦은 시간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내려진 다음 무덤에 모셔져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조금 더 있으면’ 그들은 그분을 다시 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 그들에게 나타나시어, 사십 일 동안 부활에 관한 많은 증거를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조금 있으면’ 그들이 당신을 보지 못하게 되고,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당신을 보게 되는 이유가 ‘내가 아벼지께 가기 때문’ 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이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나는 무덤에 갇혀 너희 눈에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음의 주권이 무너진 뒤 다시 조금 있으면, 내가 다시 너희에게 나타날 것이다. 이는 내가 사멸성을 취한 하느님의 계획이 이제 이루어졌으므로 내 부활의 승리를 안고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6 사람은 숭고하다
사람은 새로운 성전이다.
이 영혼의 불꽃은 하느님 안에 있다. 이 영혼의 불꽃 속에서 신적인 영혼과 신적인 지성이 서로 겹쳐진다. 영혼의 불꽃은 사람의 영과 하느님의 영이 하나가 되는 자리다. 여기서 원둘레의 점과 원의 중심점이 합일한다.
바로 여기서 영혼은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 원천으로부터 자신의 생명과 존재를 끌어낸다. 영혼의 생명과 존재는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안에는 우리 존재의 안쪽이 들어 있다. 이곳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을 가장 많이 닮는 곳이고, 하느님이 가장 생생히 그려지는 곳이다.
”영의 고차적 부분인 이 불꽃 속에는 하느님의 형상, 곧 지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영혼 안에는 “신적 본성, 신적 빛, 광선, 신적 본성의 흔적과 같은 불꽃이 들어 있다”고 엑카르트는 잘라 말한다.(16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읽는 법을 배워라”
1917년 가을 세 아이의 환경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두 번째 발현 때 귀부인께서 “읽는 법을 배우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루치아가 이미 이야기했는데 이 지방에 있어서 읽는 법을 배우라는 것은 학교에 다니라는 것을 뜻했다. 이야기가 이 대목에 이르자 상대방은 루치아의 말을 가로막고,
“아직도 학교에 안 가니? 그렇다면 성모 마리아께 순명한다고 할 수 없잖니?" 했다.
가엾은 루치아는 그럴 적마다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설령 그것이 잘못이라 해도 부모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원래가 그녀 자신이 양을 더할 나위 없이 좋아했고 신선한 푸른 산기운이 퍼져 있는 언덕에 최상의 동경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심술궂은 학교 아이들의 놀림감이 될까 봐 아주 두려워했다.
결국 이 사정에는 섭리의 손길이 뻗쳤다.
올린뼈아는 자기네 아이들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의 소망을 들어 주기 위해 항상 누군가를 심부름 보내야 하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8월 말경 드디어 양치는 것을 아들 요한에게 맡기고 두 아이를 집에 남아 있게 하였다. 히야친타는 집에 있으면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이 변경을 싫어했다.
마리아 로사는 루치아를 위해 이것과는 다른 해결책을 세웠다. 즉 날마다 루치아가 양떼를 데리고 갈 장소를 정해 주였다. 이렇게 하면 루치아를 만나고 싶은 사람이 왔을 때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서 루치아의 어머니도 딸들도 그녀를 찾으러 가야 했고 더구나 다른 한 사람이 대신 일을 보지 않으면 안 되었기에 결국 9월 중순에 루치아의 양떼 지키는 일은 중단되었다.(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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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9.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16,16. 20)
천년도 하루 같이 느껴지실 하느님에게서의 ‘조금’과 시공의 제약을 받는 우리에게서의 ‘조금’은 비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조금만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16,16)하는 말씀을 시공간적 측면에서 이해할 수 없고 영적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예전 엄마가 이웃집에 볼일 보러 가시면서 ‘엄마 얼른 갔다고 올게!!’라고 했을 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그 시간은 왜 그렇게도 길게만 느껴졌던지. 시간의 흐름은 항상 일정하고 규칙적입니다. 하지만 사랑할 때나 고통 중에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그 상태에 따라서 평소와 다르게 느낄 것입니다. 사랑할 때는 시간이 흐름이 빠르게 느껴지지만, 고통 중에는 그 시간이 흐름이 느리게 간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어 고향을 찾아가서 예전 국민학교 시절 소풍 갔던 곳이 사실 별로 멀지 않고, 뛰놀던 운동장이나 교실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잖아요. 어쩌면 세월을 통해 우리 마음의 크기 혹 넓이가 그만큼 확대되었기에 그렇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는 의미도 그렇지만 ‘근심이나 기쁨’도 지나고 보면 한순간이듯이 그것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느껴집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듯’ 그렇게 시간을 지날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 지금 겪고 있는 슬픔은 ‘조금 있으면’, ‘곧 멀지 않아’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당부에 화답하는 상태를 유지하는 최선책은 一切唯心造 곧 만사는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이런 마음 먹기의 대표적인 시조가 바로 정조 때의 ‘여선덕의 5刑論’에 반론으로 쓴 「심노숭의 5樂論」에 잘 드러납니다. 『잘 보이지 않으니 눈감고 정신 수양을 할 수 있고, 이가 빠져 연한 것밖에 먹을 수 없으니 위가 편해서 좋다. 다리 아파 못 걸어 집에 편안히 있게 돼 힘 아껴서 좋으며, 귀가 어정쩡해 나쁜 소식 못 들으니, 마음이 고요해 좋다.』
코린토에서 바오로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끊임없이 복음을 선포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때론 거부와 모독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유스토스와 같은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고 세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에는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이 늘 교차하기에 그것에 연연하지 않고 다만 자기 일에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조금 있으면” (16,16~19) 이라는 표현을 무려 7번이나 언급합니다. 주님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조금 있으면’과 제자들이 느끼는 ‘조금 있으면’의 시간에 대한 느낌도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떠나가실 예수님과 기다리는 제자들의 다른 시선과 자리의 차이로 시간의 흐름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으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조금 있으면’이란 의미는 글자 그대로 짧은 순간일지 모르지만, 주님을 떠나보내고 남아 있을 제자들에겐 ‘부활’이란 상상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조금 있으면’은 정말이지 길고도 아주 긴 시간이었으리라 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제자들의 슬픔과 절망의 깊이는 비례했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믿음이요 신앙이기에 제자들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처럼 ‘죽음의 시간과 부활의 시간’, ‘이별과 재회’라는 상반적이고 대조적인 시간과 삶의 이중성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차하는 삶의 상황에서 저희가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을 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고 떠난다면 더 이상 인간의 肉眼으로 그분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예전처럼 육안으로 볼 수 없고 그분을 볼 수 있는 눈은 오직 믿음의 눈, 영적인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보지 못함과 다시 봄’의 대조는 곧 ‘떠남과 다시 오심’, ‘부재와 현존’을 내포하고 있고 이런 대조는 곧 삶의 양면성과 이중성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비움이 곧 채움이며, 떠남이 다시 만남이며, 죽는 게 사는 것, 이라는 저 삶의 파라독스! 이러한 모순성을 알아듣고 제대로 보기 위해서, 이 양극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파스카 여정이 단지 예수님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그와 유사한 내적 태도와 인식의 전환을 위한 건너감이 요구됩니다. 단지 외적인 시간의 흐름만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 우리의 인식 전환을 위한 ‘영적 죽음과 비움’을 체험하고 통과할 때 비로소 그 시간이 왜 그분에게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과정인지를 알게 되리라 봅니다. 이 체험은 어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체험하지 못했기에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충분히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의문을 주님께 직접 묻기보다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의 문제를 공유하며 나눕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반응할 때가 많습니다. 당혹감을 함께 공유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안을 느낄 수 있겠지만, 그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근심과 불안을 직시하거나 직면하지 못할 때 몰이해는 더 깊은 어둠으로 절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인생살이에서 꼭 해답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마치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도 좋지만 목적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또한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입니다. 해답을 찾지 못해도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직시하고 직면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버려짐, 남겨짐’의 시간이 참으로 유익하고 성숙할 수 있는 가장 의미로운 시간으로 다가오리라 봅니다. 삶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 여정은 ‘오름과 내림’, ‘충만과 텅빔’, ‘낮아짐과 들어 올림’, ‘죽음과 부활’, ‘부재와 현존의 순간’이 교차해서 다가옵니다. 이런 상반성은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고, 함께 얽혀 있고 함께 어울려 있다고 봅니다. 신앙생활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나 시간 속에서 무엇보다도 주님의 말씀에 신뢰하면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림을 배워야 합니다. 그 부재의 순간이 가장 강력한 현존의 순간일 수 있고, 죽음의 순간이 곧 부활을 위한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그런 내적 태도를 형성하도록 도와줍니다.
“너희는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슬퍼함은 슬퍼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슬퍼한 만큼 그 기쁨 또한 강하리라 봅니다. 주님은 남겨질 제자들이 애통해하고 슬퍼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다시 올 수 없고, 죽지 않으면 부활이 없기에 떠나야만 했습니다. 사랑하기에 떠나갑니다. 애통해하고 슬퍼하는 제자들과 달리 세상은 기뻐할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된다, 는 표현처럼 제자들과 달리 당대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의 위협적인 존재요 적대자였던 주님의 죽음을 통해 잃었던 백성들의 지지와 세속적인 권위와 권력을 다시 회복할 기회였기에 얼마나 좋아하고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세상 이치가 한쪽이 밝으면 한쪽은 어둡기 마련이고, 한쪽이 웃으면 한쪽은 울게 되었습니다. 진리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 정의와 자비가 숨 쉬는 세상을 고대하던 제자들에겐 낡은 기득권 세력의 득세는 곧 그들을 더욱 주님의 죽음과 함께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슬펐을 것이고 애통했으리라 봅니다. 다시 어둠과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고 생각할 때 그들의 절망과 슬픔의 느낌이 어떠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세상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으니, 부활이라는 새로운 현실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으니, 부활은 멋진 반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게 바뀌는 역전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드러난 예언의 성취요 실현입니다. 슬퍼하라, 그러면 기뻐할 것이다. 기다려라, 그러면 다시 볼 것이다. 오늘 예상하지 않은 슬픔이나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부디 기뻐하시고 기쁨이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가길 바랍니다. “주님을 다시 볼 날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곧 희망이며 믿음이고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저희의 기다림을 헤아려 주십시오. 지체하지 마시고 사뿐히 다시 오시는 당신을 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기다리겠습니다. 아멘.”
출처: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2&id=2093330&menu=4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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