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권호만barnabak
종말을 사는 성도의 합당한 삶
빌립보서 4:4-7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핵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류에게 핵위협을 경고하기 위하여 고안한 종말시계(doomsday clock)라는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핵 위협을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1989년부터는 환경문제가 종말시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데요,
이 시계는 지구 종말의 날을 자정으로 보면서 그때까지 남아있는 종말의 시간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인 1947년의 시계는 23시 53분이었습니다.
종말이 7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계는 인류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는데요,
1953년 미국이 수소폭탄 실험을 했을 때 2분 전으로 자정에 가장 가깝게 다가갔고,
미·소의 대립이 심해졌던 1984년에는 3분 전까지 임박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7년 미·소 정상회담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되자 6분 전으로 되돌아갔고
미·소의 냉전이 종식되자 1990년 4월에는 10분 전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최근의 시계는 몇 시를 가리키고 있을까요?
2020년에는 23시 58분 20초였습니다.
이 시간은 종말시계가 만들어진 후에 가장 자정에, 종말에 근접한 시간이었는데,
종말이 1분 40초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 종말 시계는 인류에게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종말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세상의 과학자들도 인류의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경고하면서 종말을 뒤로 미루기 위한 노력을 온 인류가 함께 경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종말에는 종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떻게 종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웠으니 너희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으로 대하면서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자세는 비단 관용만이 아닙니다.
본문 4절부터 7절까지는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전제하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이 가깝다는 것은 종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종말이 가까웠다는 생각을 갖고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종말이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그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세상에 빠져 살다가 종말을 준비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런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심판입니다.
노아시대는 홍수의 심판을 받았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는 영원한 고통 속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대림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살아가는 절기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과연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은 무엇일까요?
데살로니가 교인들처럼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입니까?
예전에 한참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처럼 기도원이나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재림을 잘 준비하는 삶입니까?
재림을 잘 준비한다는 말은 결코 특별한 삶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재림을 잘 준비할 수 있고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종말에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서 재림을 잘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먼저는,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4절 말씀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종말의 시대에 합당한 삶으로 제일 먼저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기쁨이 종말의 시대에 합당한 삶이겠습니까?
신앙적으로 볼 때 주님의 재림은 가장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역사가 완성되면서 믿는 성도들이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 주님과 함께 살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슬프고 안타까운 날일지언정 믿는 자들에게는 이날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날이 없습니다.
이런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기쁨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것과,
‘주께서 곧 오신다. 그때는 우리가 주님의 신부가 되어 영생의 삶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요, ①하나는 명령이라는 특징입니다.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감정으로는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쁠 때보다는 슬프고 괴롭고 힘들다고 느낄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쁨의 삶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기뻐하겠다. 누가 뭐래도 나는 기쁨으로 살겠다.’고 기쁨을 선택할 때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유명한 심리학자인 레오 버스카글리아(Leo Buscaglia)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어머니에 대해서 이런 추억을 소개합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가 사업의 파산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자기가 지닌 보석 목걸이를 팔아서 그날 저녁 성대한 저녁 잔치를 여셨습니다.
나중에 이 소식이 친지들에게 알려지면서 어머니를 비난하는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어려운 순간에 먹는 것에 돈을 낭비하느냐는 비난이었겠지요.
이런 비난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이야말로 우리 가족에게는 다른 어떤 때보다 기쁨이 필요했던 저녁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소감을 물었을 때 아버지는,
“네 어머니는 자신의 보석보다 우리 가족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고,
나는 그날 소중한 가족을 위해 다시 용기를 갖고 내 인생에 도전하기로 결심하였다.” 고 말하였습니다.
이 어머니는 가장 우울하고 낙심이 될 때 가장 필요하고 합당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 삶을 실제로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기쁨은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의지의 선택입니다.
파산을 선언할 때 모두가 느끼는 감정은 슬프고 우울하고 앞날에 대한 걱정이 몰려오면서 깊은 낙심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자연적인 감정을 물리치기 위하여 어머니는 기쁨을 선택하였습니다.
기쁨은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주어집니다.
내가 기쁨으로 살기로 선택하면 언제나 항상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어떤 환경에서도 기쁨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애용구인데요, 우리가 주 안에 있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주님의 자녀요 자녀 된 우리를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신다는 말입니다.
주님 안에서 구원받고 의롭다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환경과 조건 안에서 기뻐하려고 하면 절대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못한 환경이, 조건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기뻐하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도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거하시는 성도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어떤 조건에서도 항상 기뻐하며 살기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기쁨의 선택이 여러분을 항상 기쁘게 할 것이며 재림을 준비하는 합당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관용을 보여야 합니다.
5절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했습니다.
관용이라는 말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관용의 전제는 상대방이 내 생각과 다르고 나에게 잘못하고 나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그럽게 대하고 용서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좋은 말, 좋은 평가, 좋은 칭찬을 들을 때는 관용할 것도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관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관용의 전제는 주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가 가까워옵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축복받고 가장 출세한 사람이 됩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넓은 마음으로 관용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관용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자기를 사울을 이을 왕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관용하고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관용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자기를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삼아주셨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 전해 오는 이야기입니다.
농촌에서 성실하게 사는 젊은 부부에게 하루는 꿈속에서 나타난 한 노인을 통하여 무슨 소원을 빌어도 다 들어주는 금반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금반지를 놓고 집을 달라고 할까, 소를 달라고 할까, 땅을 달라고 할까,
돈을 달라고 할까를 의논하다가 그런 것은 열심히 일하면 얻을 것이니
금반지를 잘 보관하고 열심히 일하자고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소원도 들어준다는 반지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고, 든든한지,
이 부부는 걱정 없이 열심히 일하였고 그 결과 땅도 사고 논도 사고 소도 샀습니다.
이런 동안 소원을 들어주는 반지보다 더 귀한 것이 희망과 사랑, 성실과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아들들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다가 평화롭게 숨졌습니다.
여러분, 희망은 그 자체가 일종의 행복이며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큰 기쁨입니다.
즉 희망이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면 주님의 신부가 되고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시면서 열심히 사시기 바랍니다.
속상하고 억울할 때마다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시면서 관용하시고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승리자가 되며, 문제는 다 해결될 것이며,
억울한 일은 다 풀릴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쁨과 관용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생활입니다.
6절 말씀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은 기도와 간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깨어있는 삶을 설명할 때 항상 기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8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로새서 4장 2절에 보면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했고
베드로사도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기도가 깨어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기도는 성도의 생명 줄과 같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아이를 잉태하면, 그 아이는 엄마 배 속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엄마와 탯줄로 연결된 아이의 생명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스스로 살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자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탯줄이요 젖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이끄는 비밀 통로요,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파이프입니다.
저수지의 물이 밭으로 통하는 수로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할 수 있는 대로입니다.
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줄 압니다.(하용조 목사 인용)
이런 기도 없이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기도가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합당한 삶인 줄 믿습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기도에 깨어있어야 하고 기도에 깨어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악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에 깨어있음으로 세상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와 간구로 깨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을 사시고 주님의 재림을 잘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