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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우린 너무 몰랐다』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 의식에 던져지는 방할(棒喝)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어지는 깨달음을,
그 잊혀진 역사를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 본문에서
약간? 선동적이기도 한 것 같은 도올이 쓴 책이라 조금 겁나지만, 그래도 만나보기로 한다. 『우린 너무 몰랐다』고 하는 이 책은 2019년 1월 초판이 나왔고, 부제에서 보듯이‘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기에 그 시대 역사를 잘은 모른다. 하지만 역사는 꼭 체험해야 아는 것은 아니다. 저자도 직접 경험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도 그는 경험한 듯이, 가감 없이, 솔직히 그 시대를 관조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도올, 스무 살 반야심경에 미치다〉에 이어 만나는 신작이 이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도올의 말이니 믿을만하다거나 믿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도올만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는 이 시대 석학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성경’은 본래 ‘성인의 경전’이라는 뜻으로 유교경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성경』은 기독교가 유교 사회에 침투하기 위해 유교 경전 못지않은 경전이라는 뜻으로 그 개념을 도용한 것이다. 『성경』은 ‘바이블’이 그 원음인데 이는 희랍어 ‘비블리온’에서 온 것으로 바이블은 그냥 ‘종이’라는 뜻이다. 더 나아가 ‘책’또는 ‘두루마리 권(卷)’을 의미하기도 한다. ‘바블로스’라는 항구도시가 레바논에 있다. 옛날부터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희랍세계에 수출하던 곳이었다. 바이블은 바블로스에서 따온 말로 ‘파피루스’가 변형된 것이다.‘바이블’은‘성경’이 아니라 ‘성서(聖書)’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일본은 ‘성서’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고, 우리나라 카톨릭에서도 성경보다 성서라는 원의를 고집한다.
그전에 유교에서도 경(經)이라는 말로 권위를 갖게 된 것은 후대의 일이다. 그것은 불교의 ‘수트라’가 ‘경’으로 번역된 이후로, 오래된 경전에서도 경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냥 시·서·역이었고 이를 시경·서경·역경이라고 하지 않았다. 유교경전 중 유일하게 경이 붙은 책은 효경(孝經)이었는데, 이것은 한(漢)대에 성립한 것으로 효경도‘효의 벼리를 기록한 책’이라는 뜻이지 특별히 높인다는 의미는 없었다.
‘역사 왜곡’이라고 하면 흔히, 보통 「일본사기」를 떠올리거나, 중국의 동북공정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무수히 많은 역사 왜곡을 저질렀고 또 저지르고 있다. 만약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과 관련된 사업이 아니면서 수천 명이 참여하는 ‘문화프로젝트’를 만들려고 했다면, 미국 정도의 국력이 아니면 그것을 할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어땠는가? 몽골이 침입해왔을 때‘고도의 문화 수준을 전제로하지 않으면 해인사 대장경판은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것이 도올의 생각이다. 그는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이 강화도에서 조조됐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해인사 주변의 여러 분국에서 동시적으로 진행된 전국가적 문화사업이었다. 그것은 고려제국 전체의 문화수준, 지방 고을마다 축적된 어떤 지적 자원의 축적태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했다. 강화도 등에서 만들어져 옮겨졌다는 것은 『고려사』의 왜곡이라고 했다.
고려 당대에 기술된 『고려제국실록』을 이용해 최초로 전조사(前朝史)를 쓴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37권의 고려 실록을 지어, 태조 4년 정월에 찬진(撰進-임금께 올림)하였다. 그것이『고려국사』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 때 하륜(河崙)이 『고려사』를 지었지만, 세종이 만족하지 않아 유관(柳觀), 변계량(卞季良)등이 개수하였다. 하지만 세종은 이 또한 만족하지 않았다. 세종처럼 주체의식과 날카로운 역사 인식을 가진 군주에게는 『고려사』의 히스토리오그라피가 본질적으로 자기 뿌리에 대한 왜곡이라고 느낀 때문이었을 것이다. 결국 세종 31년 김종서(金宗瑞), 정인지(鄭麟趾)등에 의해 기전체* 양식으로 써졌는데, 세종은 완성을 보지 못했고 문종 원년(1450)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종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다가 단종 2년 정인지 이름으로 인쇄·반포된 것이 지금의『고려사』다.
역사서술 방식에는 기전체(紀傳體)와 편년체(編年體)가 있었는데, 『춘추』,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로서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기전체의 대표적 사서는 『사기』로, ‘전’은 ‘열전’을 말하지만, ‘기’는 ‘본기(本紀)와 세가(世家)’를 압축한 것, 본기와 세가를 합친 기록이라는 것이다. 본기는‘천자국의 역사’, 세가는‘제후국의 역사’이다. 노나라, 제나라의 역사는 본기가 될 수 없고, 세가다.
『고려사』에서 충격적인 사실은 고려제국 전체가 본기에 들어가지 않고, 세가로 처리되었다는 것이다.『삼국사기』에는 신라본기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온다. 『삼국사기』의 편찬 책임자 김부식을 아무리 사대주의자 운운해도 그는 최소한 신라, 고구려, 백제를 제후의 나라가 아닌 천자의 나라로 보았다. 그것은 그가 고려제국 사람이었기 때문에 삼국을 본기라는 카테고리에 넣은 것으로, 너무도 자연스런 인식체계였다. 스스로 자신의 뿌리를 제후국으로는 인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고려사』편찬자들은 막대(고려를 한반도에다 우그려 쳐넣은 것은 이병도사학류의 실책이다-도올)하고, 막강한 고려제국을 변방의 일개 제후국으로 전락시켰다. 고려가 ‘세가’에 든다면, ‘본기’는 무엇일까? 고려를 세가에 넣은 조선건국 당시 유학자들의 속셈은 새로 건설한 조선왕조가 철저히 천자국 명(明)나라를 섬기는 나라라고 한 것이다.
이 책과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먼저 한 것은 두 사건(제주4.3, 여순사건)을 살피기 위한 전제라고 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뉴멕시코 로스알라모스 실험실에서 독일과학자 오펜하이머(1904∼1967)는 최초로 핵실험에 성공한다. 그것을 다음 달 6일 히로시마에, 9일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져 14만 6천 명과 8만 명이 죽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는 안 봐도 명약관화하다. ‘악독한 놈들, 죽어 마땅한 놈들’그래서 잘된 일이었을까? 오펜하이머는 말했다. “나는 죽음이 되었다. 세계들의 파괴자인 그 죽음이 되었다”여기서 죽음은 죽음의 신을 의미한다고 한다.
패망해 가던 일본을 그런 식으로 패배시키고, 무고한 인민을 무차별하게 죽인 것은 또 다른 전쟁 페러다임이 되었다. 원폭 소식을 접한 광복군들은 서안(西安)에서 미군 OSS(CIA전신)들과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이때 광복군의 희비는 엇갈렸다고 한다. 미군은 전쟁이 끝났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파티를 열었지만, 광복군은 풀이 죽어 눈물을 흘렸다. 우리 힘으로 주체적 해방을 위한 광복군의 소명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빨갱이’혹은‘인민’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리는 ‘좌빨’ 혹은 ‘좌익’ 아니면 공산주의자라는 터무니 없는 망념에 사로잡히고 온갖 부정적 의미를 씌워 규정한다. 그러나 해방 이후 당시 공간에서는 ‘인민’이란 말은 전혀 그러한 색조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 제3조에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급及 빈부의 계급이 무無하고 일체 평등함”이라고 했다.
‘인민’이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과는 본래적으로 의미가 달랐다는 것이다. 임시정부 훨씬 이전 고대 맹자도 ‘인민’이란 말을 썼다. 맹자는 “통치자의 보배는 세 가지다. 토지와 인민과 왕도 정치가 그것이다”인민은 나라를 구성하는 3대 요소 중 하나라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인민은 『시경』『여씨춘추』『관자』『묵자』등에도 흔히 쓰였다. 해방 후 여운형이 주축이 되어 창설된 ‘인민위원회’는 이념적 색깔을 가진 조직체가 아니라, 자생적 ‘보통사람위원회’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위원회가 좌빨 혹은 빨갱이의 상징이 되고,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제주4.3과 여순사건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역사에 탄핵받은 대통령은 박근혜와 이승만인데, 해방 후 미군정은 이승만 귀국 사흘 만에 군정청 앞 광장(광화문광장)에서 군중 5만 명을 모아놓고‘연합군환영대회’라는 것을 열어 주었다. 이 대회는 이승만의 신화를 확고부동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군정청장‘하지’중장이 연단에 올라 말했다. “나는 조선이 영구히 자유로운 나라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런데 이 자유와 해방을 위해 일생을 바쳐 해외에서 싸우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지금 우리 앞에 계십니다. 이 성대한 환영회도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를 맞이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분은 압제자에게 쫓기어 조국을 떠났었지만, 그분의 세력은 큽니다. 그분은 개인적인 야망이라고는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살아서 지금 여기에 와 계십니다”
‘평생을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운 조선인, 위대한 조선의 지도자’라고 한 이승만은 환영대회가 있기 며칠 전에 맥아더가 보낸 전용기를 타고 일본에 가서 맥아더와 하지를 만났다. 이 만남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찬사였다. 다음으로 무대에 오른 70살 노인은 말했다. “이번에 내가 미국에서 온 것은 한 시민으로, 한 평민으로 온 것입니다. 나는 평민이 되기를 좋아합니다. 정부의 책임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며 지위와 권세 있는 자리보다는 자유를 더 사랑합니다. 나는 항상 우리 민족의 자유를 얻고자 애써 왔으며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오늘까지 싸워온 것입니다. ⵈ 나는 앞잡이로 나설 터이니 여러분도 다같이 나와 함께 나아갑시다.”
좌니 우니 하는 맥락보다 해방 후의 공간은 이미 새로운 냉전질서 속에서 조선의 해방이라는 공백은 미국과 소련이 나눠 먹도록 필연 지어져 있었다. 따라서 소련의 괴뢰 김일성과 미국의 괴뢰 이승만이 양쪽에서 제일 쎈 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민중의 입장에서는 이런 괴뢰들에 의한 분할통치는 절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우리는 6.25전쟁 이후의 분단상황에서 형성된 관념을 가지고 이전의 역사를 바라보는 오류를 종종 범한다’‘분단’이란 상식적인 관념에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단어였다. 분단이 곧 내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45년 11월 24일 김구가 상해에서 돌아오자, 이튿날 국내에서 활동하던 건준위원장 여운형은 독립운동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해 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 서대문에 있는 경교장으로 김구를 찾아갔다. 그러나 김구는 그를 만나주기는커녕 군복 입은 수위를 시켜 몸수색을 지시했다. 그 이후 몽양은 백범을 찾지 않았다. 역사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여운형의 입장에서 임시정부는 30년 동안 해외에서 지리멸렬했고, 국내에 기초가 없을 뿐 아니라 아무런 혁명공적이 없어므로 적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국내의 혁명세력을 분열시키는 것으로 보았고, 백범 역시 그가 그리고 있는 국가 비젼의 차별성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2월 16일, 미국·영국·소련 외무장관들이 모스크바에 모여서 ‘모스크바 삼상회의’라는 것을 열었다. 여기서 대한민국 독립문제를 논의했는데 미소 양국이 후견하는 조건 아래 남북이 ‘임시조선민주정부’를 수립키로 합의하였다. 이것은 미·소가 신탁통치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정부 수립을 위한 방법론이었다. 그렇지만 신탁통치를 찬성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로 갈라져 국론분열이 일어났고, 국론분열과 내전을 바라지 않는 민중의 열망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탁통치 문제로 전국은 들끓었다. 신탁통치를 찬성하면 나쁜 놈, 좌익, 공산주의자가 되고, 반대하면 좋은 놈, 우익, 민주주의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와중에 때려죽이거나 척결돼야 할 일제 잔존 세력이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12월 30일 진정한 민족 보수주의자이자 우익의 거두 한민당 대표, 동아일보사장을 지낸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해방 이후 최초의 정치범 알살 사건이었다.
여론은 암살 배후에 김구가 있다고 했지만, 김구는 자신의 배후세력이자 정치기반이 될 수도 있는 한민당의 최고지도자를 암살할, 그런 우매한 짓을 할 까닭이 없었다. 중경에서 돌아온 임정은 송진우의 죽음으로 정치적 후원자를 잃었다. 송진우의 죽음(1945.12.30) → 여운형의 죽음(1947.7.19.) → 장덕수의 죽음(1947.12.2) → 김구의 죽음(1949.6.26.)으로 이어진 이런 연쇄살인의 배후에는 상식에 속할 수밖에 없는 유기적인 맥락이 있었다. 여하튼 송진우 죽음의 최대 수혜자는 이승만이었다.
이제 제주도로 가 보자. 신라시대 탐라는 신라를 위협하는 외적이었다. ‘탐라’가 ‘제주’로 변한 것은 공식적으로 고려 고종 때(1223년)였지만, 태조 왕건 때부터 육지에 복속되었다. ‘제주, 바다 건너의 주현(州縣)’이란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8도에 속하지 않았고 전라도에 편입되어 있었으므로 관찰사 아닌 목사(정3품 외관직)가 다스렸다. 제주목사는 전라관찰사(종2품 문관직) 소속으로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총 286명이 다녀갔다. 목사의 임기는 초기에는 30개월이었으나, 세종 이후에는 60개월이었다. 그러나 제주목사의 평균 재임기간은 20개월에 불과하였는데, 그만큼 서로가 편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제주목사는‘날강도놈들’이었다.
제주 사람들은 반란과 반역으로 좌절했거나, 망국의 설음을 안고 국가와 타협할 수 없었거나, 정의로운 주장을 하다가 유배되었거나, 백제의 부흥을 꿈꾸다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거나, 이성계 역성혁명에 불복해 귀양간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들의 저항은 대물린 되고, 이에 대처하는 목민관들은 점차 더 포악해져만 갔던 것이다.
제주 해녀를 생각하며 낭만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들이 해산물을 찾아 바다로 들어간 것은 수입을 올리거나 자신이 먹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궁정의 수라상에 올리기 위한 식자재를 찾아 바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처절한 사투였다. 추운 겨울 그냥 알몸으로 바다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무명천으로 만든 물소중이(물적삼)를 입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칠성판 짊어지고 혼백상자 머리에 이고ⵈ”등 해녀들의 노래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 따라다녔다. 지금 그들이 입고 있는 고무옷은 일제강점기에나 등장했던 것이다.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기념 제주도대회’가 제주 북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주민 3만여 명이 모였는데, 이는 강제동원으로 모인 숫자가 아니었다. 옥죄어 오던 인민위원회의 세를 과시하기 위해 자율적으로 모인 것이었다. 새 나라, 새 세상, 새 질서를 꿈꾸었던 사람들은 환희와 희망 속에 일본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미군정’이라는 전혀 다른 이질적 외재적 통치체제는 그들에게 절망감만 안겨주었다.‘3·1정신으로 안전한 통일과 온전한 독립을 쟁취하자! 외세는 물러가라!’고 외쳤다.
오후 2시 기념식을 마친 군중들은 가두시위로 이어졌고, 시위대가 관덕정을 빠져나갈 무렵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미안한 표시라도 해야 할 경찰의 태도가 거만 방자하자 군중들은 성이 났다. 흥분하여 돌을 던지며 항의하자, 제주경찰서 망루 위에서 군중을 향해 총을 쏘았다. 순식간에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당했다. 망대에서 총을 쏜다는 것은 상관의 고의적인 판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3월 19일, 경찰의 우두머리 조병옥은 경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하는 담화를 통해, 북조선의 통모로 사건이 발생하였다는 거짓말로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해 버렸다. 그후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때까지 그렇게도 울겨 먹은 ‘북풍’은 이때 시작되었다. 제주도민 70%가 좌익정당에 동조하거나 가입했다고 하고, 제주도를 좌익의 본거지로 규정했다. 제주도민의 선진적 자각의식을 이념의 굴레를 씌워 매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8년 4월 3일 이전까지 제주도에는 서청경찰(서북청년회 소속, 월급이 없는 불량배들로 임시 모집한 경찰) 760명이 투입되고, 조선경비대라는 이름으로 1,700명이 추가 투입되었다. 이들의 만행은 끔직 그 자체였다. 1947년 한 해 동안 2,500명을 검거했다. 결정적 사건은 1948년 3월 6일 서귀포 조천지서에서 조천중학생 김용철 군이, 14일에는 모슬포지서에서 청년 양은하가 고문치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4.19혁명’이 마산상고 김주열 군 주검, ‘6월항쟁’이 박종철 군 고문치사가 도화선이 되었듯이, 더이상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지경이 되었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비밀회의를 열어 무장투쟁키로 12:7로 가결하였다. 그리고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하면서 ‘4.3민중항쟁’은 시작되었다. 하루 동안에 경찰 사망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렇게 보면 제주4.3은 무장봉기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억눌린 민중이 소총 몇 자루로 경찰지서를 습격한 사건을 민중항쟁의 핵심적 사태로 인지하는 것은 전혀 오류에 속한다. 민중의 가냘픈 호소일 뿐이었다. ‘무장대’가 되려면 무력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는 루터가 확보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4.3사태 이후 토벌이라는 것은 무장 대 무장의 전쟁이 아니라 그냥 민간학살일 뿐이었다. 무장대가 산으로 들어간 것은 무장투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학살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다. 한 번도 제대로 싸워본 적이 없었다.
또 하나는 무장대 봉기를 남로당과 관련지었다는 것이다. 남로당은 1946년 11월 23일 창립된 ‘남조선노동당’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제주 4.3 민중항쟁에 그들의 지도부 몇몇이 헌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허구적인 정체성이었고 실제로 제주민중항쟁에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제주민중항쟁은 오직 핍박받던 민중이 피압박의 막다른 골목에서 분노를 표출한 사건일 뿐이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제주 민심이 점점 노골화되자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복무 경험이 있던 박진경 중령을 국방경비대에서 제9연대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박진경은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초토화진압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중산간 마을을 누비고 다니면서 마구잡이로 주민들을 잡아들였다. 5월 27일까지 3,126명, 6월에는 6,000명에 달했다. 불과 27일 만에 초토화진압작전의 성공적 추진을 인정받은 박진경은 1948년 6월 1일 대령으로 진급했다. 6월 17일 박진경의 대령진급 축하연이 제주‘옥성정’에서 있었고, 박진경은 6월 18일 새벽 1시에 귀가하여 부대 내 숙소에서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 3시 15분 단 한방의 총성이 그의 방에서 들렸다.
박진경의 도민학살을 보다 못해 암살을 기획한 것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였다. 문상길은 충청도 사람으로 육사3기, 손선호는 연대장 숙소를 관리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그들은 도망할 수도 있었으나 도망가지 않았고, 당시 22세, 20세였던 둘은 1948년 9월 23일 상관 살인죄로 처형되었다. 좀 길 수도 있겠으나 그들의 최후 진술을 들어보자. “스물 두살의 나이를 마지막으로 나 문상길은 저세상으로 떠나갑니다. 여러분은 한국의 군대입니다. 매국노의 단독정부 아래, 미국의 지휘하에 한국민족을 학살하는 한국군대가 되지 말라는 것이 저의 마지막 염원입니다. 이제 여러분과 헤어져 떠나갈 사람의 마지막 바람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박대령을 암살하고 도망갈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이므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받겠다.”
4.3의 정신은 봉기한 사람들이 도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매국, 단선(단독선거), 단정(단독정부)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해방을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를 반대한 것이다. 한 달 후에 5.10제헌 국회의원 선거가 이루었다. 하지만 제주도민은 선거를 보이콧 했다. 2개의 선거구에서 투표율 미달로 투표가 무효처리되었다.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정당성이 근원적으로 깨진 것으로, 선거자체가 제주도에서는 무효된 것이다. 양심 있는 인물이라면 여기서 사퇴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학살로 대응했다.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박진경은 이승만에 의해 준장으로 추서되고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육군장 제1호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1952년 11월 7일 30만 제주도민과 군경원호회 명의로 ‘박대령순직충혼비’라는 것이 제주에 세워졌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고향 남해에도 그를 기리는 동상이 1990년에 세워졌다. 발치산도벌작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장렬하게 산화한 영웅으로 숭배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 공비소탕에 불철주야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으로 선두에서 지휘하시다가 불행히도 단기 4281년 6월 18일 장렬하게 산화하시다’고 한 비문을 30만 도민의 이름을 도용하여 ‘추모의 뜻을 천추에 기리 전하다’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주도민은 아직도 부당한 공권력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제주 민중항쟁과 같은 맥락이라고도 볼 수 있을 여순사건은 어땠을까? ‘여순반란’으로 알려진 사건은 1948년 5월 4일 창설된 육군 14연대 소속 군인 ‘지창수 상사 등 빨갱이들이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도올은‘그것은 반란이 아니라, 제주도에서 서청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고 진압하는데 병력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데려가려고 하자, 14연대 지각 있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여 시가전을 벌였고, 결국 쫓기게 되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사건은 반란이 아니라,‘항명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해방 전후사를 다시 연구한 지금,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도올은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수 하면 여수산단, 여수엑스포, 정원, 여수 밤바다 등을 생각하겠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이순신을 빼고 생각할 수 없는 곳이 여수다. 진남관에 앉아보면 그의 위용이 되살아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순신은 서애 류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라 했는데,‘만약 호남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는 말이다. 여기 호남은 구체적으로 여수를 말한다. 이순신은 종6품 정읍현감에서 갑자기 종4품 진도군수가 되고, 부임도 하기 전 가리포 수군첨절제사(종3품)가 되었다가 역시 부임하기 전에 전라좌수사(정3품)로 임명된다. 7품계를 뛰어오른 고속승진이기는 해도, 공직생활 14년, 그의 나이 47살, 돌아보면 그렇게 자랑만할 고속승진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순신이 제아무리 덕장, 용장, 지장, 맹장이라고 해도 바닷가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한 번도 바다에서 근무해 본 적도 없는 그가 어떤 역량으로 백전백승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세계해전사에서 그처럼 빈곤한 병력으로 끝까지 완벽한 승리를 기록한 유래는 없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맹자가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했듯이 이순신은 여순지역 사람들의 민심을 얻어 인화를 도모했던 것이 첫 번째 승리 요인이었고, 다음은 판옥선과 거북선 그리고 주력 무기인 총통 때문이었다.
판옥선은 앞쪽이 날렵하고 뽀족한 일본배와 달리 사각으로 우직한 평저선인데 소나무로 만들어졌고, 좌우의 방패막이는 전나무를 대 활과 조총으로는 뚫을 수 없었다. 판옥선의 유래는 모래사장이 거의 없는 제주도에서 현무암 바위 면에 접안 하기 위해 뱃머리를 튼튼하게 만든 데서 유래한다. 덕판배, 당도리배, 싸움판배라고도 하는 이 판옥선을 전투용으로 개량하고 또 뚜껑을 씌워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나주사람 나대용이란 장인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여수에 축적된 조선기술의 창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란 역사가의 기술(記述)로 인해 이렇게도 저렇게도 바뀐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데, 우리는 임진왜란만을 알고 정유재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는 임진왜란은 왜란의 서막이었고, 진면목은 정유재란에 있었다. 우리의 피해도 정유재란 때 극상에 달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분노쿠노에키(文祿의 役), 정유재란을 케이쵸오노에키(慶長의 役)라고구분하고 있다.
왜적의 거짓 정보에 놀아나 이순신이 싸우지 않는다는 죄목을 씌워 서울로 압송하고, 지휘관으로 자격과 인성이 미달인 원균이 칠천량에서 왜군을 맞아싸웠으나 대패해 수군 2만과 거북선 3천, 판옥선 110척이 침몰당하자 일본군은 본격적으로 전라도에 대한 전면공세를 펼쳤다. 수군은 여순으로 상륙해 공격하고, 육군1대는 사천·하동·구례로, 2대는 함양을 거쳐 운봉을 휩쓸었다. 1597년 8월 16일 남원성이 함락된 데 이어, 전라도 수부(首府)인 전주성까지 점령당했다. 남해안 각지에서 살육이 자행되고 관청과 민가를 불태우는 등 약탈과 잔혹함은 임진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우스키성 성주를 따라온 안요오지(安養寺)주지 케이넨(慶念)은 이때의 참혹함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산도 들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 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 온 것 같다.”특히 남원성 함락 후에는 “성내의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사람이 없다.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라고 했다.
몇 년 전에‘서생왜생’답사갔을 때 현장조사를 나온 공무원이 “귀중한 문화재니 잘 보존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씁쓸함을 느낀 적이 있는데, 아마도 남해 일대에 지어진 왜성(기록은 32개이나 실제로는 28개만이 남아 있음) 가운데 순천왜성이 가장 완벽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성은 남해안 일대를 오래도록 지배할 요량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1597년 9월부터 약 3개월 동안에 쌓은 성이다. 고니시는 이곳에서 북부 금구, 김제와 고부, 나주, 해남, 사천 지역 및 강진과 유기적 협력체제 구축을 꽤했다. 순천왜성 – 남해왜성 – 사천 선진리왜성 – 고성왜성 – 창원(웅천)왜성 – 양산(증산)왜성 – 서생왜성 – 울산왜성과 상호협력체계가 구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1948년 5월 10일에 있은 소위 ‘5.10총선거’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여기서 뽑힌 국회의원들이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선거가 얼마나 우여곡절과 부정부패가 많았는지 잘 모른다. 나중에 3.15 부정선거에 대해 배우기만 할 뿐 이때의 부정선거는 배우지 못했다. 5.10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지 않으면 이승만은 제헌의원으로 선출되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이 출마한 동대문 갑구에 최능진이란 사람이 출마했다. 그러자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휘 아래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온갖 방해 공작을 펼쳐 최능진의 후보등록을 취소시켰는데, 최능진은 온갖 사선을 뚫고 후보등록에 승공했고, 추첨에 의해 기호 1번이 되었다.
최능진은 독립운동경력과 친일경찰 처벌에 대한 요구 등으로 높은 지지를 얻었다. 그대로 가면 최능진이 당선될 것이 확실했다. 이승만은 동대문 갑구에서 국회의원 당선도 어려울 정도로 지지기반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승만에 대한 환상을 깨야 한다. 그를 옹립한 것은 국민이 아니라 소수 우파정객들이었다. 최능진은 이승만을 위협하는 정적으로 부각되어 국민의 기대가 높았다. 이에 동대문경찰서장 윤기병은 경찰을 동원하여 본인이 스스로 날인 하지 않았다는 ‘후보등록 추천인’들의 진술을 받아내 선거관리위원장 노진설 대법관을 찾아가 등록을 무효화시킬 것을 요구한다. 결국 선거 2일 전 선거관리위원회는 추천인 200명 중 27명이 본인날인이 아리라는 이유로 최능진의 입후보등록 취소를 통보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최능진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최능진이 군대조직을 동원하여 ‘혁명의용군사건’을 획책했다고 체포하여, 10년형을 받게했고 6.25로 5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51년 2월 11일 처형했다. 최능진을 제거하기 위해 야비한 수단으로 날조하다보니 14연대까지 꿰어진 것이다. 과연 이승만 그는 민족의 지도자 운운할 자격이 있는가?
앞서 여순사건을 주도한 인물로 지창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에 대해 좀 더 살펴보면, 그를 14연대 남로당 조직책으로 인식시킨 것은 여순사건 발발 19년 만이었다. 지창수를 반란의 지도자로 삼음으로써 여순민중항쟁 전체가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조직적 움직임인 것으로 인식체계를 덮어씌운 것이다. 일개 특무상사가 14연대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카리스마와 좌파반란의 리스십을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14연대의 제주도 출동명령은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로 예정된 것이지만, 실제 명령은 그전 10월 15일에 내려왔으므로, 이미 1개 대대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제주도 출동을 거부한 핵심그룹은 40여 명이었고 이들은 제주도와 지연, 혈연이 있거나 제주 4.3사태에 관해 충분히 이해가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여수시내 전역에 벽보와 삐라를 내 붙였는데 ‘애국인민에게 호소문, 우리는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 제주도 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내용이었다. 이들의 벽보와 삐라의 어느 구석에도 이념의 틀은 없다.
이승만은 여순사건 이후 담화를 냈다. ‘남녀아동까지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ⵈ’1만5천 명도 더 희생된 “여순민중항쟁으로 이승만은 강고한 우익체제를 구축했다. 예비검속, 연좌제를 실시했고, 보도연맹을 창설했다.(30만 이상 죽임)군대로부터 완벽히 좌익세력을 청산하는 숙군사업을 완성했으며, 반민특위활동에 밀린 친일경찰까지도 대거 군대로 들어갔다. 향토연대의 특성은 해체되었으며, 여순민중항쟁으로 손실된 병력공백에 우익청년단체들이 대거 입대하였다. 군대가 체제수호의 수단적 기구로 변모하여 부패하게 되자 박정희는 이런 군대의 부패를 청산하는 정풍운동의 리더로서 결국 쿠데타를 감행하기에 이른다. 대학에는 학도호국단이 창설되었고, 주한미군 철수는 6개월 연기되었으며,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경찰병력이 확대되면서 서북청년단원들은 대거 정규경찰화되었다.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감시체계를 강화했다. 이런 모든 변화를 구축하는 계기가 바로 여순민중항쟁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민중항쟁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공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불신감만을 키웠다. 우리는 너무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