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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국(耽羅國), 紀元前(기원전) 2337年(년)? ~ 1404年(년)은 濟州島(제주도)의 王國(왕국)이었다.
耽羅國(탐라국)의 始祖(시조) 良(양) · 高(고) · 夫(부)씨 三姓穴(삼성혈)에서 湧出(용출).
碧浪國(벽랑국) 세 公主(공주) 맞아 3分轄(분할) 支配(지배) 耽羅國(탐라국) 基礎(기초) 마련.
火山(화산)섬 濟州島(제주도)는 獨特(독특)한 自然(자연)環境(환경)으로 因(인)해 많은 內外國人(내외국인)이 찾는 觀光地(관광지)이다. 많은 觀光地(관광지) 中(중) 濟州島(제주도)를 象徵(상징)하는 三姓穴(삼성혈)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耽羅國(탐라국)이라는 名稱(명칭)으로 獨立國(독립국)을 維持(유지)했던 濟州島(제주도)의 開國(개국) 神話(신화)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濟州市(제주시) 삼성로 22番地(번지)에 所在(소재)하고 있는 三姓穴(삼성혈)은 말 그대로 세 사람의 구멍이라는 뜻이다. 濟州(제주)에는 유독 梁氏(양씨), 高氏(고씨), 夫氏(부씨)가 많은데 이들은 現在(현재) 3個(개)의 구멍이 있는 毛興穴(모흥혈) 卽(즉) 三姓穴(삼성혈)에서 태어났다는 神話(신화)가 傳(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在(재) 梁(양). 高(고). 夫(부) 三聖史財團側(삼성사재단측)의 神話(신화)에 따르면 濟州(제주)는 太初(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옛 記錄(기록)인 東文選(동문선), 高麗史(고려사), 瀛州誌(영주지)는 奇異(기이)하게 빼어난 山(산)이 있는데 漢拏山(한라산)이라 한다. 구름과 바다가 아득한 위에 完然(완연)히 있는데 主山(주산)인 漢拏山(한라산)이 그의 神靈(신령)한 和氣(화기)를 내려 北(북)쪽 기슭에 있는 毛興(모흥)이라는 곳에 삼신인(三神人)을 同時(동시)에 誕降(탄강) 시켰으니 只今(지금)으로부터 약 4,300여 年(년) 前(전)의 일이다.
統一新羅(통일신라)때까지 韓半島(한반도)의 나라들과 交流(교류)를 하고 後三國(후삼국) 時代(시대)에 高麗(고려)가 分裂(분열)된 三國(삼국)을 統一(통일)한 뒤 縣(현)으로 服屬(복속)되었다가, 15世紀(세기) 初盤(초반)에 朝鮮(조선)의 太宗(태종) 時期(시기)에 完全(완전) 倂合(병합)되었다.
탐모라국(耽牟羅國) 또는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指稱(지칭)되었으며, 《三國志(삼국지)》 東夷傳(동이전)에서는 주호(州胡)라고 적고 있다.
耽羅國: 탐라국[耽 즐길 탐. 羅 벌일 라(나)/그물 羅(라)(나). 國 나라 國(국). 삼국(三國) 시대(時代)에 제주도(濟州道)에 있었던 나라. 시조(始祖)는 삼성혈(三姓穴)에서 나온 고(高), 부(夫), 양(良) 삼신(三神)이라고 전(傳)해진다. 백제(百濟), 신라(新羅), 고려(高麗)의 각조(各朝)에 복속(服屬)하다가 고려(高麗)15대 숙종(肅宗)10年(년)(1105年(년)에 고려(高麗)의 漢郡縣(한군현)이 되고, 탐라(耽羅) 동영주(東瀛州)가 되었다.
耽津: 탐진 耽 즐길 탐. 津 나루 진.
뜻풀이 : 1. 현(縣) 이름. 只今(지금)의 全羅南道(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地域(지역)에 있었다. 本來(본래) 百濟(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新羅(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耽津縣(탐진현)으로 고쳐 양무군(陽武郡)에 붙였으며, 高麗時代(고려시대)에 영암군(靈巖郡)으로 옮겨 붙였다가 뒤에 장흥부(長興府)로 移屬(이속)시켰고, 朝鮮(조선) 태종(太宗) 17年(년)(1417年(년)에 도강현(道康縣)과 合(합)하여 康津縣(강진현)이라 하였다.
開國(개국)의 淵源(연원)
탐라국(耽羅國)은 良乙那(양을나), 高乙那(고을나), 夫乙那(부을나) 參乙羅(삼을나)가 濟州島(제주도)에 세운 古代王國(고대왕국)이다. 탐라국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依(의)하면 紀元前(기원전) 2337年(년) 경이라 하였다.
人口(인구)
傳(전)해진 바에 依(의)하면 耽羅國(탐라국)의 人口(인구)는 10萬(만)名(명)이었다고 한다.
文獻資料(문헌자료)~中國(중국)
진수(陳壽, 233年(년) ~ 297年(년)의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한(韓)에 따르면. 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주호재마한지서해중대도상) 주호(州胡)가 있는데, ‘馬韓(마한)’ 西(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배를 타고 往來(왕래)하며, ‘한중(韓中)’과 交易(교역)한다.]
—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 한(韓)수서(隋書) 권(卷)81 열전(列傳) 제(第)46 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권(卷)03 수(隋) 에 依(의)하면 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기남해행삼월유모나국 남북천여리 동서수백리 토다장록 부용어백제 백제자서행삼일 지맥국운)
歷代(역대) 國王(국왕)·城主(성주)
부족국가(部族國家) 良乙羅王(량을나왕) (高乙那王) (기원전 2337년 ~ 2206년)
건왕 (建王) 紀元前(기원전) 2206年(년) ~ 1767年(년)
삼계왕(三繼王) 紀元前(기원전)1767年(년)~ 1123年(년)
일망왕(日望王) 紀元前(기원전)1123年(년) ~ 935年(년)
도제왕(島濟王) 紀元前(기원전) 935年(년) ~ 771年(년)
언경왕(彦卿王) 紀元前(기원전) 71年(년) ~ 619年(년)
보명왕 (寶明王) 紀元前(기원전) 619年(년) ~ 520年(년)
행천왕(幸天王) 紀元前(기원전) 520年(년) ~ 426年(년)
환왕 (歡王) 紀元前(기원전) 426年(년) ~ 315年(년)
식왕 (湜王) 紀元前(기원전) 315年(년) ~ 247年(년)
욱왕 (煜王) 紀元前(기원전) 247年(년) ~ 207年(년)
황왕 (惶王) 紀元前(기원전) 207年(년) ~ 157年(년)
위왕 (偉王) 紀元前(기원전) 157年(년) ~ 105年(년)
영왕 (榮王) 紀元前(기원전) 105年(년) ~ 58年(년)
고대국가(古代國家)후왕 (厚王) (紀元前(기원전) 58年(년) ~ 7年(년)
두명왕 (斗明王) 紀元前(기원전) 7年(년) ~ 紀元後(기원후) 43年(년)
선주왕 (善主王) 紀元後(기원후) 43年(년) ~ 93年(년)
지남왕 (知南王) 紀元後(기원후) 93年(년) ~ 144年(년)
성방왕 (聖邦王) 紀元後(기원후) 144年(년) ~ 195年(년)
문성왕 (文星王) 紀元後(기원후) 195年(년) ~ 243年(년)
익왕 (翼王) 紀元後(기원후) 243年(년) ~ 293年(년)
지효왕 (之孝王) 紀元後(기원후) 293年(년) ~ 343年(년)
숙왕 (淑王) 紀元後(기원후) 343年(년) ~ 393年(년)
현방왕 (賢方王) 紀元後(기원후) 393年(년) ~ 423年(년)
기왕 (璣王) 紀元後(기원후) 423年(년) ~ 453年(년)
담왕 (聃王) 紀元後(기원후) 453年(년) ~ 483年(년)
지운왕 (指雲王) 紀元後(기원후) 483年(년) ~ 508年(년)
서왕 (瑞王) 紀元後(기원후) 508年(년) ~ 533年(년)
다명왕 (多鳴王) 紀元後(기원후) 533年(년) ~ 558年(년)
담왕 (談王) 紀元後(기원후) 558年(년) ~ 583年(년)
체삼왕 (體參王) 紀元後(기원후) 583年(년) ~ 608年(년)
성진왕 (聲振王) 紀元後(기원후) 608年(년) ~ 633年(년)
홍왕 (鴻王) 紀元後(기원후) 633年(년) ~ 658年(년)
처량왕 (處良王) 紀元後(기원후) 658年(년) ~ 683年(년)
원왕 (遠王) 紀元後(기원후) 683年(년) ~ 708年(년)
표륜왕 (表倫王) 기원후 708년 ~ 733년)
형왕 (逈王) 紀元後(기원후) 733年(년) ~ 758年(년)
치도왕 (致道王) 紀元後(기원후) 758年(년) ~ 783年(년)
욱왕 (勖王) 紀元後(기원후) 783年(년) ~ 808年(년)
천원왕 (天元王) 紀元後(기원후) 808年(년) ~ 833年(년)
호공왕 (好恭王) 紀元後(기원후) 833年(년) ~ 858年(년)
소왕 (昭王) 紀元後(기원후) 858年(년) ~ 883年(년)
경직왕 (敬直王) 紀元後(기원후) 883年(년) ~ 908年(년)
민왕 (岷王) 紀元後(기원후) 908年(년) ~ 933年(년)
자견왕 (自堅王) 紀元後(기원후) 933年(년) ~ 938年(년)
성주시대(星主時代 고말로성주(髙末老星主)
對外關係(대외관계)~百濟(백제)와의 關係(관계)
지운왕(指雲王, 483年(년) 508年(년) - 8月(월), 百濟(백제), 耽羅(탐라)를 치려고 무진주[(武珍州 : 광주(光州)]까지 내려옴. 耽羅(탐라), 使臣(사신)을 보내 화의(和議)하고 百濟軍(백제군)을 회군(回軍)시킴. 耽羅(탐라), 百濟(백제)의 干涉(간섭)으로 新羅(신라) 및 高句麗(고구려)와 交易(교역)을 中斷(중단)함. 百濟(백제)의 내법좌평(內法佐平) 고진노(髙眞老), 耽羅(탐라)의 山川地形(산천지형)을 視察(시찰)함.
다명왕(多鳴王, 533年(년)~558年(년) - 10月(월), 百濟(백제), 新羅(신라)에 反擊(반격)하기 위하여 탐라군(耽羅軍)의 出兵(출병)을 要求(요구)함.
百濟(백제) 동성왕(東城王)(479年(년)~501年(년)- 耽羅國(탐라국)을 服屬(복속)시켰다. (498년)
高句麗(고구려)와의 關係(관계)
耽羅(탐라) 27代王(대왕). 지운왕(指雲王, 483年(년)~508年(년)- 特産物(특산물) 가[(珂 : 진주(珍珠)를 高句麗(고구려)에 보냄.
新羅(신라)와의 關係(관계)
후왕(髙厚王, 在位(재위): 紀元前(기원전) 58年(년) ~ 7年(년)은 新羅(신라) 初期(초기) 耽羅國(탐라국)의 國王(국왕)이다. - 고후(髙厚), 고청(髙淸), 고계(髙季) 參兄弟(삼형제) 新羅(신라)에 입조(入朝)하여 성주(星主), 왕자(王者), 도내(徒內) 爵號(작호)를 받음.
西紀(서기)454年(년), 甲午年(갑오년), 耽羅(탐라) 聃王(담왕)1年(년)新羅(신라) 訥祗王(눌지왕)38年(년), 高句麗(고구려) 長壽王(장수왕)42年(년), 百濟(백제) 비유왕(毗有王)28年(년)
○ 26世(세) 고 담(髙聃)王(왕) 卽位(즉위)함.
西紀(서기)459年(년), 乙亥年(을해년), 耽羅(탐라) 聃王(담왕)6年(년), 新羅(신라) 慈悲王(자비왕)2年(년), 高句麗(고구려) 長壽王(장수왕)47年(년), 百濟(백제) 蓋鹵王(개로왕)5年(년)
○ 新羅(신라)에 가는 耽羅(탐라)의 조공선(朝貢船), 가야포(伽倻浦)에서 가락군(駕洛軍)에게 掠奪(약탈)당함.
[그後(후) 검산포(劒山浦)에서는 백제군(百濟軍)에게 掠奪(약탈)당함]
○ 耽羅(탐라), 왜구(倭寇)의 侵入(침입)을 물리침.
西紀(서기)476年(년), 丙辰年(병진년), 耽羅(탐라) 聃王(담왕)26年(년), 新羅(신라) 慈悲王(자비왕)19年(년), 高句麗(고구려) 長壽王(장수왕)64年(년), 百濟(백제) 文周王(문주왕)2年(년)
○ 4月(월), 耽羅(탐라), 百濟(백제)에 사신(使臣)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 百濟(백제)는 耽羅王(탐라왕)에게 좌평(佐平), 使臣(사신)에게 은솔(恩率) 벼슬을 내림.
西紀(서기)480年(년), 干支(간지) 庚申年(경신년), 耽羅(탐라) 聃王(담왕)27年(년), 新羅(신라) 炤智王(소지왕)2年(년), 高句麗(고구려) 長壽王(장수왕)68年(년), 百濟(백제) 東城王(동성왕)1年(년)
○ 耽羅(탐라), 광순사(廣巡使) 양탕(良宕)과 순무사(巡撫使) 부계량(夫繼良)을 新羅(신라)에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담왕(聃王, 453~483) - 新羅(신라)에 가는 耽羅(탐라)의 조공선(朝貢船), 가야포(伽倻浦)에서 가락군(駕洛軍)에게 약탈당함. [그 後(후) 검산포(劒山浦)에서는 백제군(百濟軍)에게 掠奪(약탈)당함]
中國(중국)과의 關係(관계)
체삼왕(體參王, 583年(년)~608年(년) 수(隋)나라 戰艦(전함) 1척, 颱風(태풍)으로 耽羅(탐라)에 漂着(표착)함. 수(隋)나라의 戰艦(전함)과 兵士(병사)를 百濟(백제)를 經由(경유)하여 돌려보냄.
처량왕(處良王, 658~683) - 삼신인(三神人)의 고도지형(古都地形)을 당(唐)의 오도독부(五都督府) 유인원(劉仁願)에게 바침. 당(唐)의 진수사(鎭守使) 유인궤(劉仁軌)의 案內(안내)로 태산천제(泰山天祭)에 參席(참석)함.
왜(倭)와의 關係(관계)
익왕(翼王, 243~293) - 왜(倭) 使臣(사신) 갈나고(曷那古) 耽羅(탐라)에 옴.
처량왕(處良王, 658~683) - 667年(년) 7月(월), 왜(倭)에 使臣(사신)을 보냄, 이 무렵 탐라(耽羅)와 왜(倭)는 백제(百濟) 부흥운동(復興運動)에 協調(협조)하였다고 함.
高麗(고려)와의 關係(관계)
민왕(岷王, 908年(년)~933年(년) - 高麗(고려)에 使臣(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침.
자견왕(自堅王, 933~938) - 12月(월), 太子(태자) 고말로(髙末老)를 高麗(고려)에 입조(入朝)케함. 태조(太祖) 고말로(髙末老)에게 성주(星主), 왕자(王者) 爵位(작위)를 除授(제수)함. 궁실(宮室)을 성주청(星主聽)이라 改稱(개칭)함.
朝鮮(조선)과의 關係(관계)
성주 고봉례(星主 髙鳳禮, ?∼1411年(년) - 高麗末(고려말)에 耽羅(탐라)가 여러번 모반(謀反)하므로 이를 懷柔(회유)하려는 朝廷(조정)에 依(의)하여 1386年(년)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大護軍(대호군) 진여의(陳如儀)가 耽羅(탐라)를 慰撫(위무)하고 돌아올 때 함께 開京(개경)으로 들어와서 1388年(년) 濟州(제주)畜馬(축마) 兼(겸) 안무별감(濟州畜馬兼安撫別監)이 되었다. 太祖(태조) 때는 빈번히 軍馬(군마)를 바치는 等(등) 誠意(성의)를 다하였다. 1402年(년) 耽羅星主(탐라성주) 在職時(재직시)에 新羅(신라) 以來(이래)로 濟州(제주)를 支配(지배)한 고씨(髙氏)와 양씨(梁氏)가 世襲(세습)한 성주(星主)와 왕자(王者)의 名稱(명칭)이 分受(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改訂(개정)하여줄 것을 請(청)하여, 城主(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 王子(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改稱(개칭)되었다. 1407年(년) 5月(월)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 1410年(년)경에는 濟州(제주)按撫使(안무사)가 되었다. 1411年(년) 8월 아들 상온(尙溫)에게 세직(世職)인 제주도주관좌도지관(濟州都州官左都知管)을 承襲(승습)시켜 줄 것을 請(청)하여 承繼(승계)시키고 漢城(한성)에서 돌아가셨다. 高麗末(고려말)과 朝鮮初(조선초)에 濟州(제주)를 按撫(안무)함에 큰 功(공)이 있었고, 태종(太宗)의 至極(지극)한 恩寵(은총)을 받았다.
歸屬(귀속)
BC紀元前(기원전)58年(년)~BC紀元前(기원전)7年(년), 고후(髙厚), 고청(髙淸), 고계(髙季) 參兄弟(삼형제)가 新羅(신라)에 입조(入朝)하였다. 476년年(년) 百濟(백제) 문주왕(文周王) 때 朝貢(조공)하였다.
498年(년) 百濟(백제) 東城王(동성왕) 때 百濟(백제)의 屬國(속국)이 되었다.
662年(년) 탐라국주(耽羅國主) 徒冬音律(도동음률)이 新羅(신라)에 내항(來降)하였다.
938年(년) 高麗(고려) 太祖(태조)(938年(년)에 服屬(복속)되었다.
高麗(고려) 末期(말기) 元(원)의 耽羅(탐라) 摠管府(총관부) 設置(설치), 元(원)나라의 影響權(영향권)에 編入(편입).
1402年(년) 朝鮮(조선) (太宗(태종) 2年(년) 10月(월), 耽羅(탐라) 성주(星主), 왕자(王者)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改稱(개칭), 城主(성주) 고봉례(髙鳳禮), 인부(印符 : 朱記(주기)를 王(왕)에게 返納(반납).
遺跡發掘(유적발굴)
1997年(년) 耽羅國(탐라국) 形成期(형성기) 집터.돌 담장 發掘(발굴).
2011年(년) 濟州(제주)海軍基地(해군기지) 現場(현장)서 松菊里形住居地(송국리형주거지) 等(등) 發掘(발굴) 濟州海軍基地(제주해군기지) 建設(건설) 現場(현장)에서 耽羅國時代(탐라국시대) 成立期(성립기)에 形成(형성)된 松菊里形住居地(송국리형주거지)와 遺構(유구) 等(등)이 大量(대량) 發掘(발굴)됐다.
2012年(년) 文化財廳(문화재청)(廳長(청장) 金讚(김찬)은 26日(일) 濟州特別自治道(제주특별자치도) 濟州市(제주시) 龍潭洞(용담동) 2696-2番地(번지) 一帶(일대) 先史遺蹟地(선사유적지)와 支石墓 (支石墓(지석묘) 3基(기)를 包含(포함)한 21筆地(필지)(10,279m2)의 ‘濟州(제주) 龍潭洞(용담동) 遺蹟(유적)’을 國家(국가)指定文化財(지정문화재)인 史跡(사적)으로 指定(지정) 豫告(예고)한다고 밝혔다.
제주도(濟州道)가 탐라국(耽羅國)이라는 나라 이름의 由來(유래)
삼국(三國)시대에 新羅國(신라국)에 入朝(입조)하여 星主王子(성주왕자)의 벼슬을 받고, 바다를 건너올때 全羅南道(전라남도) 只今(지금)의 康津郡(강진군) 下流(하류)에 있는 耽津江(탐진강) 下流(하류)에서 배를 碇泊(정박)하여 新羅(신라)에 朝會(조회)하였던 緣故(연고)로 나라, 이름을 耽津江(탐진강)의 첫字(자) 耽(탐)에다가 新羅(신라)의 羅(나)를 붙쳐서 耽羅(탐라)라 불렀다고 傳(전)해 옵니다.
南原(남원) 梁氏(양씨)의 起原(기원).
우리 梁氏(양씨)의 始祖(시조)인 良乙那(량을나)께서 濟州島(제주도)에 耽羅國(탐라국)을 세우시고 임금이 되신후 數千年(수천년)동안 내려온 歷史(역사)의 文獻(문헌)이 없어서 그 中間(중간) 繼代(계대)를 考證(고증)할길이 없으므로, 惑(혹)은, 관(貫)을, 달리하고, 各派(각파)가, 派祖(파조)를, 달리하고, 있읍니다.
우리 南原(남원) 梁氏(양씨) 兵部公派(병부공파)도 高麗(고려) 六代(6대) 임금이신 成宗[성종: 西紀(서기) 982年(년) 壬午年(임오년)-西紀(서기) 997年(년) 丁酉年(정유년)때인. 中國(중국)의 北宋(북송) 시대(時代)]때에 中奉大夫(중봉대부)이시며, 兵部郞中 東宮內侍講學士(병부랑중 동궁내시강학사)를 지내시던 能字讓字(능자양자)할아버님을 一世祖(일세조)로 모시고 代代(대대)로 이어 내려 오고 있읍니다.
濟州道(제주도)를 가면 史蹟(사적) 第(제) 134號(호)로 指定(지정)하여 다음과 같이 啓示(계시)하고있읍니다.
1978年(년) 무오년(戊午年) 12月(월) 12日(일)부터 14日(일) - 濟州島(제주도) 一周(일주) 답사(踏査)한 筆者(필자) 梁芳秀(양방수)
1978年(년) 무오년(戊午年) 12月(월) 12日(일)부터 14日(일) - 濟州島(제주도) 一周(일주) 답사(踏査)한 筆者(필자) 梁芳秀(양방수)
1978年(년) 무오년(戊午年) 12月(월) 12-13-14日(일) 濟州島(제주도)를 一周(일주)하면서 撮影(촬영):梁芳秀(양방수).
始祖(시조)의 子孫(자손)인 梁(양), 高(고), 夫(부), 세 姓氏(성씨)는 繁盛(번성)하여 여전히 每年(매년) 春秋大祭(춘추대제)를 奉養(봉양) 하고있다 라고 記錄(기록)하고 있읍니다.
三性穴(삼성혈)은 濟州道(제주도) 原住民(원주민)의 發祥地(발상지)로서 三神人삼신인,良乙那(량을나) 高乙那(고을나) 夫乙那(부을나)이 이곳에 태어나 狩獵生活(수렵생활)을 하다가 五穀(오곡: 다섯가지 穀食(곡식)인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種子(종자)를 가지고온 碧浪國(벽랑국)의 3公主(공주)를 맞이하면서부터 農耕生活(농경생활)이 비롯되어 삶의 터전을 開拓(개척)하였다고 傳(전)합니다. 이분들의 生活共同體(생활공동체)는 그후 耽羅王國(탐라왕국)으로 發展(발전) 하였읍니다.三姓穴(삼성혈)은 先史時代(선사시대)末(말) 耽羅(탐라) 始祖(시조)의 聖誕地(성탄지)로 聖域(성역)시 되어왔고, 儒敎(유교) 國是(국시:나라의 根本(근본)이 되는 方針(방침)의 朝鮮王朝(조선왕조)에 와서는 朝廷(조정)의 恪別(각별)한 配慮(배려)와 歷代(역대) 牧使(목사)들의 숭조치적 (崇祖治績:祖上(조상)을 崇拜(숭배)하는 政治(정치)의 功績(공적)으로 더 한층 聖域地(성역지)로 尊嚴(존엄) 되어왔다.고 三姓穴(삼성혈)에 啓示(계시)하고 있습니다.
탐라고기(耽羅古記) 문헌(文獻) 1-2-3절(節)
옛 文獻(문헌)에 이런말이 쓰여 있다. 太初(태초)에는 사람도 물건도 없었는데, 세 神人(신인)이 처음 漢拏山(한라산) 北(북)쪽 기슭의 넓은 땅, 毛興穴(모흥혈)에서 나왔다.
州(주)의 南(남)쪽 三里(삼리)에 있다) 어떤이는 말하기를乙字(을자)위에 三字(삼자)를 더하면 毛字(모자)가 되는 까닭에 三乙那(삼을나)가 나온 구멍을 毛興穴(모흥혈) 이라 하였다. 하고 첫째는 장(長) 良乙那(량을나)요. 둘째는 高乙那(고을나)이며, 셋째는 夫乙那(부을나)였다. 어떤이는 사람이 말하기를乙(을)은 乙巴(을파)의 類(류)요, 那(나)는 居西那(거서나)의 類(류)와 같은 것으로 임금을 높혀서 부르는 稱號(칭호)다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乙那(을나)는 新羅(신라)의赫居世(혁거세)의 類(류)와 같은 것으로 대체로 우리말의 王(왕)이다라고 했고, 宋 尤菴 時烈(송 우암, 시열)은 말하기를 三神人이 耽羅國(탐라국)의 漢拏山(한라산)에 誕降(탄강)하여 나누어서 한섬의 長(장)이 되었고, 新羅(신라)에 이르러 通交(통교)하였다고 하였다.
金 楓鼻 祖淳(김 풍비, 조순)이 말하기를 良乙那(량을나)는 漢拏山(한라산) 石窟中(석굴중)에서 誕生(탄생)하여 檀君(단군)과 같은 때에 開國(개국)했었다.
그 뒤 梁 宕(양탕)이 처음으로 新羅(신라)와 通(통)하였다라고 하였다.
地志(지지)에 말하기를 三性(삼성)이 나온 것은 바로 九韓時節(구한시절)에 該當(해당)한다하였다. 세 사람이 거칠고 窮僻(궁벽)한 곳에서 遊獵(유렵)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아왔다. 어느날 그들은 붉은 진흙으로 木函(목함)을 봉한것이 東海(동해)쪽에서 떠오는것을 보았다. [世上(세상)에 傳(전)해오기를 三乙那(삼을나)가 開國(개국)할때 碧浪國(벽랑국)의 使者(사자)가 세 神女(신녀)을 모시고와 延婚浦(연혼포)에 다았는데 只今(지금)의 旌義(정의)의 閱雲里(열운리)가 그곳이라고 했다. 가서 函(함)을 열어보니 안에 石函(석함)이 있었고, 붉은 띠를 띤 붉은 옷을 입은 使者(사자)가 따라왔다.
원본(原本) 문헌(文獻) 2절(節)
번역문(飜譯文) 2절(節)
石函(석함)을 여니 푸른옷을 입은 處女(처녀) 세사람과 망아지 송아지 五穀種子(오곡종자)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使者(사자)가 말하기를나는 바로 碧浪國(벽랑국)의 사신(使臣)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이 세따님을 낳으시고 말하옵기를 西海(서해)의 가운데, 山(산)에 神子(신자) 三人(삼인)이 誕降(탄강)하시여 앞으로 開國(개국)하고자 하나 配匹(배필)이 없다. 하시고 이에 臣(신)에게 命(명)하여세 따님을 모시고 가서 배필(配匹)을 지어줌으로써 大業(대업)을 이루게 함이 옳겠다. 하였읍니다 하고 말이 끝나자, 使者(사자)는 문득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三人(삼인)이 나이 順序(순서)로 하나씩 나누어 丈家(장가) 들고 샘물이 달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아가 활을 쏘아 살땅을 골라 잡았다.
三射石(삼사석)은 州(주)의 東(동)쪽 十里(십리)에 있는데 州人(주인) 梁 宗昌(양종창)이 石室(석실)을 지어 간직하였다. 牧使(목사) 金정[(인(亻)변에政 자(字)]이 銘(명)을 지어 말하기를 毛興穴(모흥혈)은 오랬으나, 矢射石(시사석)은 남아있네, 神人(신인)의 다른 紫翠(자취) 千秋(천추) 異域(이역)이여 빛나네하였다. 良乙那(량을나) 사는곳을 第一徒(제일도)라,하고 徒(도)는 史記(사기)에는 都(도)로 되어 있는데 아래것도 모두 같다.
高乙那(고을나) 사는곳을 第二徒(제이도)라 하고 夫乙那(부을나) 사는 곳을 第三徒(제삼도)라 하였다. 三性(삼성)이 三徒(삼도)로 나누어 占領(점령)하고 北斗(북두)의 形態(형태)를 模倣(모방)하여 石臺(석대)를 쌓아올려, 그곳에 依據(의거)한 까닭에 州城(주성)안에 七星圖(칠성도)가있다. 처음으로 五穀(오곡)種子(종자)를 뿌리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치게되니 날로 나라가 富强(부강)하여지고 百性(백성)많게 되었다. (耽羅誌(탐라지)
원본문헌(原本文獻) 3절(節)
耽羅(탐라)는 나라 이름이니 本來(본래) 九夷(구이)의 하나이다.
또 九韓(구한)의 하나 라고도 한다. 禹貢(우공) 楊州(양주)의 東(동)쪽 渤海(발해) 가운데 있는데 幅圓(폭원)이 五百餘里(오백여리)로, 只今(지금)의 朝鮮(조선) 全羅道(전라도)의 濟州島(제주도)가 바로 그 땅이다. 그 땅을 옜날에 있어서는 或(혹)은 島夷(도이)라고도 했다.
中國(중국)의 史記(사기)에 夏(하)나라 禹王(우왕)이 九州(구주)를 平定(평정)하니 모두 그職(직)을 가지고 와서 朝貢(조공)하였는데 荒服(황복)까지도 이르렀다.
北(북)쪽으로 山(산) 發(발) 息愼(식신)을 어르 만져주니 東(동)쪽의 君長(군장) 鳥夷(조이)도 다 帝舜(제순)의 功(공)을 떠 받들었다. 正義(정의)를 按擦(안찰)하니 鳥夷(조이)는 或(혹) 島夷(도이)로 되어있는데, 百濟(백제) 西南海(서남해) 가운데의 여러섬을 가르킨것으로 島夷(도이)란 말은, 곧 耽羅國(탐라국)을 가르킨 것으로 여겨진다 尙書(상서)에 楊州 東夷卉服(양주동이훼복)이라 한다. 括地志(괄지지)를 考察(고찰)하니 말하기를 百濟國(백제국)의 西南(서남)쪽 渤海(발해)가운데 큰 섬 15個所(개소)가 있어 모두 邑落(읍락)이있고 사람이 살고있다.
百濟(백제)에 屬(속)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楊州(양주)의 東(동)쪽 島夷(도이)이다.
탐라국(耽羅國)의 발상지(發祥地) 유적(遺蹟)
삼성혈(三姓穴)
國家(국가)指定文化財(지정문화재) 史蹟(사적)134號(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三姓穴(삼성혈)은 良乙那(양을나), 高乙那(고을나), 夫乙那(부을나) 參姓氏(삼성씨)의 誕生說話(탄생설화)가 傳(전)해지는 곳으로 只今(지금)도 품자(品字) 形態(형태)의 3個(개) 穴(혈)이 남아있습니다. 이곳은 萬(만)여평의 鬱蒼(울창)한 숲속에 穴團(혈단)을 中心(중심)으로 三聖殿(삼성전)과 三聖門(삼성문)焚香所 (焚香所(분향소))·, 祭享(제향)을 받드는 典祀廳(전사청), 書院(서원)이었던 崇報堂(숭보당)等(등)이 있습니다. 每年(매년) 4月(월) 10日(일)과 10月(월) 10日(일)에 春秋大祭(춘추대제)를 後孫(후손)들이 奉養(봉양)하고, 12月(월) 10日(일)에는 乾始大祭(건시대제)를 穴團(혈단)에서 지내는데, 濟州特別自治際(제주특별자치제)로 奉養(봉양)되고 乾始大祭(건시대제)의 初獻官(초헌관)은 濟州特別自治道知事(제주특별자치도지사), 亞獻官(아헌관)과 終獻官(종헌관)은 地域(지역) 有志中(유지중) 推薦(추천)됩니다. 三神(삼신)이 나왔던 穴(혈)은 품자형(品字形)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이 穴(혈)속에는 빗물이나 눈이 스며들지 않으며, 周邊(주변) 나무둘이 穴(혈)을 向(향)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三神人(삼신인))에게 절을 하고 있는 모습과 같아 訪問客(방문객)들의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展示館(전시관)에는 關聯(관련) 遺物(유물)을 展示(전시)하고 있으며 映像室(영상실)에서는 三姓穴(삼성혈)의 神話(신화) 애니메이션(animation)을 4個(개) 國語(국어)로 無料(무료)로 上映(상영)하고 있습니다.
삼성전(三聖殿)에서 해마다 봄春(춘)(4月(월) 10日(일))과 가을秋(추)(10月(월) 10日(일))에 삼성후손(三姓後孫)들이 제사(祭祀)를 모신다. 지난 10月(월) 10日(일) 濟州市(제주시) 三姓穴(삼성혈)에서 濟州(제주)의 옛 이름인 耽羅國(탐라국)을 創始(창시)한 梁氏(양씨),高氏(고씨),夫氏(부씨) 三姓(삼성) 始祖(시조)에 대한 春期(춘기)釋奠大祭(석전대제)가 열렸다.三姓(삼성)의 後孫(후손)인 三獻官(삼헌관)(初獻官(초헌관) 양휘석, 亞獻官(아헌관) 부인상, 終獻官(종헌관) 고인훈)이 參拜客(참배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祠堂(사당)으로 移動(이동)하고 있다.
삼성전(三聖殿) 삼신인(三神人) 서열(序列) 신위(神位)
서열(序列)은 좌(左)로 부터 량을나(良乙那),고을나(高乙那),부을나(夫乙那)이다
우리나라 古代社會(고대사회)의 開國(개국)을 둘러싼 神話(신화)는 대충 다섯가지 정도로 區分(구분)된다. 天神族說(천신족설), 天地兩神族說(천지양신족설), 外來族說(외래족설), 卵生說(난생설)이 그것이다. 桓雄(환웅)의 경우는 天神族說(천신족설) 이라면, 濟州(제주) 三姓穴(삼성혈)의 경우는 땅에서 솟아 오랐기 때문에 地神族說(지신족설)이라고 보아야 될것 같다.
어쨌던 세 神人(신인)은 只今(지금)의 城山面(성산면) 溫坪里(온평리) 바닷가 황새개에 漂着(표착)한 碧浪國(벽랑국)의 세 王女(왕녀)를 配匹(배필)로 맞아 오늘을 여는 祖上(조상)으로 됐다.
良高夫(량고부) 아래에 붙은 乙那(을나)는 “얼라” 또는 “알라”의 現地語(현지어) 童子神(동자신)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하고, 氏族(씨족)의 長(장)을 뜻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그곳 地名(지명)으로 남아있는 我羅童(아라동) 吾羅童(오라동)과 聯關(연관)지어 볼만하지만, 事物(사물)의 根本(근본) 始作(시작) 核(핵)을 뜻하는 우리옜말 []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싶다.
三姓(삼성)에 관한 記錄(기록)으로는 瀛州志(영주지) 東文選(동문선)등 近者(근자)에 나온것 까지, 합치면 40여 種類(종류)가 각기 序列(서열)을 다르게 적고있어 말썽인데, 옛날 文獻(문헌)만 놓고 볼때 高夫良(고부량)이 7종, 高良夫(고량부)가 15종, 良高夫(량고부)로 記錄(기록)한 것이 10가지라고 濟州道誌(제주도지 : 1982年刊(년간)에 밝히고 있는데, 붓대를 잡은 사람의 뜻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記錄(기록)했다.
사시장올악(射矢長兀岳) 삼사석(三射石) 濟州島(제주도) 濟州市(제주시) 용강동 山(산)14-2番地(번지) 地方文化財(지방문화재) 記念物(기념물) 第(제)4號(호)로 삼신인(三神人)이 도읍(都邑)을 定(정)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各各(각각) 화살을 쏘아 화살이 떨어진 곳으로 居住地(거주지)를 定(정)하였다고 傳(전)해 집니다.
삼사석(三射石) 濟州島(제주도) 濟州市(제주시) 화북동 1380番地(번지) 이곳에서 狩獵(수렵)生活(생활)을 하던 삼신인(三神人)이 碧浪國(벽랑국) 삼공주(三公主)를 맞이한 後(후) 漢拏山(한라산) 기슭에서 居住地(거주지)를 定(정)하였는데, 이 三射石(삼사석)은 그때 화살맞은 돌로 傳(전)해지고 있다.
세 神人(신인)이 활을 쏘아 1,2,3,都(도)를 定(정)했다는 것만해도 記錄(기록)에 따라 달라졌다.
1730年(년) 庚戌年(경술년-英祖(영조) 8年(년)에 김정 牧使(목사)가 그 傳說(전설)과 遺跡(유적)을 돌아보고 ‘三射石碑(삼사석비)’를 세웠다고 傳(전)한다.
그날 활을 쏘았다는 三射石(삼사석)은 지금도 남아있지만, 三射石(삼사석)이 어찌 말하랴 !? 三姓穴(삼성혈)의 神話(신화)를 잠깐 젖혀두고 생각 한다면 세 神人(신인)은 兄弟(형제)거나 親(친)한 사이로 어떤 계기로 함께「 漂流(표류)한 것인지, 只今(지금)에 와서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 글자가 다르다 해도 兄弟(형제) 못잖은 사이가 아닌가 ? 더욱기 同性同本(동성동본)을 認定(인정)하고 婚姻(혼인)도 할수 없는 사이가 아니든가!?
따지자면 肅宗朝(숙종조) 1702年(년) 壬午年(임오년) 三姓廟(삼성묘)를 創建(창건)할때 古籍(고적)과 國史(국사)를 上考(상고)하여 그 順位(순위)를 長(장) 良乙那(량을나) 次(차) 高乙那(고을나) 三(삼) 夫乙那(부을나)의 順位(순위)를 定(정)하고 祭祀(제사)를 올려왔는데, 三聖殿(삼성전) 祭享笏記(제향홀기)와 祝文(축문)에 적지 않은것과 相聖殿內(삼성전내)의 三聖神位(삼성신위)를 아예 움직이지 못하도록, 固定(고정)시켜 놓지않는 것을 奇貨(기화)로 마치 獨島(독도)가 자기땅 이라고 틈만 있으면 主張(주장)하는 倭人(외인)들과 같이 툭하면 自己(자기)들이 首位(수위)라고 우기는 그 못된 俗性(속성)은 寒心(한심)하다.
그 것은 高 允奎(고윤규)라는 사람이 三聖祠(삼성사) 文蹟(문적)이 火災(화재)로 불타 버린것을 奇貨(기화)로 삼아서, 自己(자기)들의 族譜(족보) 序文(서문)에 三聖祠(삼성사) 三神人의 位牌(위패) 順序(순서)가 1710年(년) 庚寅年(경인년)에 崔 牧使(최목사)가 首位(수위)를 바꾸었다고 主張(주장)하여 英祖(영조) 27年(년) 1751年(년) 辛未年(신미년)에 牧使(목사) 尹 九淵(윤구연)이 濟州島(제주도)에 사는 高 尹奎(고윤규)의 誣告(무고)를 上奏(상주)하여 國史(국사)에 따라 處理(처리)하라는 下命(하명)으로 高 允奎(고 윤규)의 計劃(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牧使(목사) 尹 九淵(윤 구연)이 理解(이해) 關係(관계)없이 政事(정사)를 바로잡자는 意圖(의도)에서 임금에게 上疏(상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一部(일부) 高氏(고씨) 族譜(족보)에 位牌(위패)를 造作(조작)하고 高乙那(고을나) 位牌(위패)를 가운데 올려놓고 寫眞(사진)을 찍어 가운데가 主賓(주빈)이라고 자기들 族譜(족보)에 造作(조작)하여 만들어 둔것을 近來(근래)에 梁氏(양씨) 門中(문중) 여러 사람들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래서 結局(결국) 1983年(년) 8月(월) 15日(일)에 양씨(梁氏) 중앙(中央) 종친회(宗親會)에서 濟州道誌 批判誌(제주도지 비판지)를 刊行(간행)하게 되었고, 宗親會(종친회) 회장(會長) 양 준모(梁 俊模)씨와 양 승용(梁 承龍)씨가 訴訟(소송)까지 하게 되었던 理由(이유) 中(중) 하나다.
三聖祠(삼성사) 沿革(연혁:history)은 1507年(년) 丁卯年(정묘년)인 中宗(중종) 2年(년)에 三聖祠(삼성사)를 建立(건립)하고 1526年(년) 丙戌年(병술년)인 中宗(중종) 12年(년)에 李 壽童(이 수동) 濟州(제주) 府使(부사)가 三姓穴壇(삼성혈단) 둘레에 담을 치고 紅煞門(홍살문)을 세우고 床石(상석)을 마련하여 해마다 동짓달 中丁(중정)에 모든 濟州(제주) 道民(도민)들로 하여금 정성껏 祭祀(제사)를 올리도록 한것이 始初(시초)였고, 1698年(년) 戊寅年(무인년)인 肅宗(숙종) 24年(년)에 牧使(목사) 柳 漢明(유한명)이 三姓團(삼성단) 東便(동편)에 祠宇(사우)를 創建(창건)하고 每年(매년) 春秋大祭(춘추대제)를 올리도록 했다.
長興高氏(장흥고씨) 高 得宗(고 득종)은 1450年(년) 庚午年(경오년)인 世宗(세종) 32年(년)에 長興高氏(장흥고씨) 族譜(족보)를 編纂(편찬)할때에 분명히 長曰 良乙那(장왈 량을나)요, 次曰 高乙那(차왈 고을나)로 序列(서열)을 바르게 記錄(기록)하고, 景泰元年(경태원년) 庚午(경오) 正月 元日(정월원일) 崇祿大夫 行 吏部尙書 漢城 判尹 高 得宗 謹誌(숭록대부 행 吏部尙書(이부상서) 漢城(한성) 判尹(판윤) 高得宗(고득종) 近地(근지)라고 밝히고 있다.
漢城判尹(한성판윤)은 漢城府(한성부)의 으뜸 벼슬(正(정) 2品官(품관))로 오늘날의 서울 市長(시장)과 같은 높은 벼슬을 한 어른인데 어찌 祖上(조상)의 上下(상하)를 모르고 記錄(기록) 할 理由(이유)가 있겠는가?.
처음에 肅宗朝(숙종조)에서 1702年(년) 壬午年(임오년)에 三姓廟(삼성묘)를 創建(창건)할때 東國通鑑(동국통감) 耽羅誌(탐라지), 與地勝覽(여지승람), 南槎錄(남사록) 高氏舊譜序(고씨구보서) 等(등) 古籍(고적)과 國史(국사)를 相考(상고)하여 그 順位(순위)를 良高夫乙那(양고부을나)의 位次(위차)를 定(정)하고 祭祀(제사)를 올려왔는데 三聖殿祭享笏記(삼성전 제향홀기)와 祝文(축문)에 적지 않은것을 奇禍(기화)로 마치 獨島(독도)가 자기내 땅이라고 우기는 日本人(왜놈)의 속셈과도 같다.
그것은 高 允奎(고 윤규)가 三聖祠(삼성사) 文籍(문적)이 화제로 불탄 機會(기회)를 노려 自己(자기)들의 族譜(족보) 序文(서문)에 三聖祠(삼성사),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 順序(순서)가 當初(당초)에 高乙那(고을나)가 首位(수위)인데 바꾸었다고 主張(주장)하였으나, 1751年(년) 英祖 辛未年(영조신미년)에 牧使(목사) 尹 九淵(윤 구연)이 濟州島(제주도)에 사는 高 允奎(고 윤규)의 誣告(무고: false charge : 없는일을 꾸며내어 고소 하는일.)를 上奏(상주 : report to the Throne : 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는 일.)했는데 國史(국사)에 따라 處理(처리)하라는 임금의 下命(하명)이 있어 高 允奎의 計劃(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近來(근래)에 와서 高氏族譜(고시족보)에 高乙那(고을나)가 首位(수위)라고 造作(조작)하고 있다. 三聖殿(삼성전)의 奉安位牌(봉안위패)를 品字形(품자형)으로, 만들어 몰래 寫眞(사진)을 찍어 풀이 하기를, 中央(중앙)이 主壁(주벽)이라고 하여 일부 高氏(고씨) 族譜(족보)에 실어 말썽이다. 當初(당초: beginning) 位牌(위패)가 우리나라의 風俗(풍속)의 慣例(관례)에 따라 定(정)해 놓았는데 그것을 造作(조작) 하고 있다.
우리나라 風俗(풍속)과 慣例(관례)는 議政府(의정부)의 最高官職(최고관직)으로 領議政(영의정) 다음 左議政(좌의정) 아래에 右議政(우의정)을 두고 文武百官(문무백관)을 統率(통솔)하고, 一般(일반) 政事(정사)와 外交(외교)등을 處理(처리)하는 官吏(관리)의 品階(품계)에 緣由(연유)하여 左(좌)를 右(우)보다 높혀 왔던 前例(전례) 때문에 良乙那(양을나)를 左(좌)로 모셨고, 다음은 高乙那(고을나)를 中央(중앙)에 夫乙那(부을나)를 오른쪽에 位牌(위패)를 各各(각각) 모셨는데 梁氏門中(양씨문중)의 與論(여론)이 두려운 나머지 이제는 品字(품자)형으로 造作(조작)하고 一部(일부) 高氏族譜(고씨족보)를 만들어 合理化(합리화)시키고 있다.
전(殿)을 向(향)하여 좌상(座上) 우하(右下) 또는 서상(西上) 동하(東下)의 順(순)으로 진좌(鎭坐) 하였다. 或(혹) 참배(參拜)하는 사람들이 中央(중앙)의 신위(神位)가 장(長)이 아닌가 오해(誤解)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향(祭享) 축문(祝文)도 아래와 같다. 모라시조(毛羅始祖) 량을나(良乙那), 복이(伏以), 일도공심(一徒功深), 만세영존(萬世永尊), 함은( )덕(含恩()德), 식진명천(式陳明薦 상향(尙饗) 후손(後孫)들은 알아야 되겠기에 여기 밝혀 둔다. 참고-( )는 亦(역) 아래에 心(심) 字(자)이다.
筆者(필자)가 한가지만 例(예)를 들자면 長興高氏 族譜(장흥고씨족보)를 살펴 보면 여기에 대한 確實(확실)한 解答(해답)을 얻을수 있다. 長興(장흥) 高氏(고씨) 가운데 高 鳳智(고봉지)의 아들 高 得宗(고득종)은 1450年(년)(世宗(세종)32年(년)에 長興(장흥)高氏(고씨) 族譜(족보)를 編纂(편찬) 할때에 分明(분명)이, 瀛州誌(영주지) 原本(원본)데로 序列(서열)을, 長曰(장왈) 良乙那(량을나)라고 記錄(기록)하고 族譜(족보) 끝 부분에 景泰元年(경태원년) 庚午(경오) 正月(정월) 元日(원일) 崇祿大夫(숭록대부) 行(행) 吏部尙書(이부상서) 漢城判尹(한성판윤) 高 得宗(고득종) 謹誌(근지)라고 記錄(기록)하고, 있어 事實(사실)을 事實(사실)데로 記錄(기록)하고 있다.
漢城判尹(한성판윤)은 漢城府(한성부)의 으뜸 벼슬로 正二品官(정이품관)으로 오늘날의 서울 特別市長(특별시장)과 같은 높은 벼슬을 한분이 祖上(조상)의 上下(상하)의 順序(순서)를 모르고 記錄(기록) 할리가 없지 않은가 ? 나라를 다스리는 官吏(관리)가 正直(정직)하지 못한다면 後代(후대)에 누가?
그를 바로 볼것인가를 알고, 族譜(족보)를 바르게 만든 先祖(선조)들의 良心(양심)을 高氏(고씨) 後孫(후손)들은 바로 보고 알아들어야 할것이다.
景泰元年(경태원년)은 西紀(서기) 1450年(년) 世宗(세종) 32年(년)이다.
탐라(耽羅) 개국(開國) 4339年(년). 천주강생(天主降生) 2006년 6월 3일. 양방수(梁芳秀)
天主降生천주강생) 20201년 1월 26일 火曜日(화요일) 梁芳秀(양방수).
▲ 耽羅(탐라)의 三神人(삼신인)이 碧浪國(벽랑국) 3公主(공주)와 新婚(신혼)방을 ▲ 三射石碑(삼사석비)에는 ‘모흥혈고(毛興穴古)차리고 自身(자신)의 터址(지) 定(정)하기 위해 화살을 쏘았 시사석류(矢射石留),신인이적(神人異蹟)습니다. 三射石(삼사석) 돌멩이에 그 痕迹(흔적)이 있습니다 교탄천추(交嘆千秋)의 글이 새겨져있다.
耽羅開國(탐라개국)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는 三姓祀(삼성사) 창건초부터 第一位(제1위)에 良乙那(양을나), 第二位(제2위)에 高乙那(고을나), 第三位(제3위)에 夫乙那(부을나) 次順(차순)으로 모셔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英祖朝(영조조)에 이르러 高乙那(고을나) 後孫(후손) 한 사람이 한때 高乙那(고을나)를 首位(수위)로 位牌(위패)를 바꾸어 놓아 큰 物議(물의)를 일으켰다. 분분한 世論(세론)속에 允九淵(윤구연) 牧使(목사)가 朝廷(조정)에 上疏文(상소문)을 올리고 그 眞相(진상)이 照査(조사)되어 王命(왕명)으로 良乙那(양을나)를 首位(수위)로 原狀還元(원상환원)된 事件(사건)이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이다. 事件(사건)의 內幕(내막)은 다음과 같다.
英祖(영조)27年(년)(1751年(년) 高乙那(고을나)의 後孫(후손) 高允奎(고윤규)가 奸計(간계)를 꾸며서 肅宗(숙종)36年(년)(1710年(년))에 崔啓翁(최계옹)牧使(목사)가 神位板(신위판)에 있는 『○○乙那府君』이라는 府君 두 글자를 빼고, 그냥 『乙那』로 고쳐쓴 바 있음을 奇貨(기화)로 崔牧使(최목사)가 位牌(위패)를 바꿔 놓았다 하여 第一位(제1위) 良乙那(양을나) 位牌(위패) 자리에 高乙那(고을나) 位牌(위패)를 바꾸어 모시고 말았다. 이 不當(부당)한 處事(처사)에 激奮(격분)한 允九淵(윤구연) 牧使(목사)는 이를 是正(시정)하기로 마음먹고 長文(장문)의 上疏文(상소문)을 朝廷(조정)에 올렸는데, 問題(문제)의 『卞正狀草(변정장초)』는 王朝實錄(왕조실록)에까지 記錄(기록)되어 오늘에 傳(전)해지고 있다. 歷史(역사)에 記錄(기록)된 允九淵(윤구연) 牧使(목사)의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를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 良高位次改換卞正狀草譯文(양고위차개환변정장초역문)
『양을라(良乙那)와 高乙那(고을라) 位牌(위패) 順位(순위)를 바꾸어 놓은 것을 바로잡아 주십시요』 하고 濟州(제주) 牧使(목사)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월이다.』
엎드려 올리옵니다.
이곳 濟州島(제주도) 사람들은 양을라(良乙那) 高乙那(고을라 夫乙那(부을라) 三神人(삼신인)의 後孫(후손)이 아닌 사람이 없는데 그 子孫(자손)된 者(자)가 어찌 감히 自己(자기) 始祖(시조)이신 신인(神人)들의 行跡(행적)에 망녕된 物議(물의)를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온데 어리석은 高允奎(고윤규)무리들이 위로는 임금님을 속이고 官家(관가)를 어지럽히고 있어서 그 大綱(대강)을 아뢰오려고 하옵니다.
숙종조 임오년(肅宗 壬午年 西紀(서기)1702年(년)에 三姓廟(삼성묘)를 創建(창건)할 때 고적(古籍)과 국사(國史)를 詳考(상고)하여 그 順位(순위)를 양을라(良乙那) 高乙那(고을라), 夫乙那(부을라)의 順序(순서)로 決定(결정)하고 祭祀(제사)를 올리어 온지가 벌써 오십년(50年(년)이라는 歲月(세월)이 흘렀사온데 오늘날에 와서 高允奎(고윤규)라는 者(자)가 모든 三聖祠(삼성사) 文籍(문적)이 火災(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機會(기회)로 삼아서 自己(자기)들의 族譜(족보) 序文(서문)에 『三聖祠(삼성사)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 順序(순서)가 當初(당초)에는 高乙那(고을라)가 수위(首位)에 있던 것을 庚寅年(경인년)에 崔(최) 牧使(목사)가 양을라(良乙那)를 首位(수위)로 造作(조작)하여 놓았다』고 써 놓고 또 濟州島(제주도) 道內(도내)를 돌아 다니며 헛된 소리를 퍼뜨려서 百姓(백성)들을 꾀여 衝動(충동)하기를 『崔(최) 牧使(목사)가 三聖祠(삼성사) 神位(신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凶年(흉년)이 든다고 煽動(선동)하는 한편 고후익(高厚益)이라는 사람을 시켜서 거짓을 꾸며 上疏(상소)를 하고 또 陸地(육지)에서 고 한주(高 漢柱)라는 者(자)를 끌여 들여서 三神人(삼신인)의 位牌(위패)를 바꾸어 놓는 駭怪(해괴)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三姓廟(삼성묘) 建築(건축) 當時(당시) 三神人(삼신인)의 위차(位次)를 定(정)할 때 詳考(상고)한 國史(국사)와 古蹟(고적)은 동국통감(東國通鑑)과 탐라지(耽羅誌), 여지승람(與地勝覽), 남차록(南사錄), 고씨 구보서(高氏舊譜序) 等(등)의 柵(책)들이온데, 그 詳考(상고)한 文籍(문적)이 이러하올진대 이와같은 事跡(사적)을 無視(무시)하고 位牌(위패) 順位(순위)를 다툰다는 일은 虛妄(허망)된 일이옵니다. 그리고 또 三姓廟(삼성묘) 建築(건축) 當時(당시) 그 歷史(역사)를 맡아 監督(감독)한 責任者(책임자) 中(중)에는 高氏(고씨)가 많았었고, 그 高氏(고씨)들은 바로 自己(자기)들의 할아버지이며 아버지들인데 그분들이 定(정)하여 놓은 것을 어떻게 그 子孫(자손)들이 뜯어 고치려고 하옵니다.
이것은 바로 自己(자기)들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을 詰難(힐난)하는 일이옵니다.
그리고 또 崔(최) 牧使(목사)가 바꾸어 놓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때 位牌(위패)에 쓰인 『부군』(府君)이라는 두 글자 만을 『을라(乙那)』로 고쳐 썼다는 記錄(기록)이 남아 있는 즉 비록 지난 날의 官長(관장)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헐뜯을 수는 없습니다. 또 神位(신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凶年(흉년)이 든다는 煽動(선동)인즉 임오면(壬午年)以後(이후)로 오히려 해마다 豐年(풍년)이 들었으며 뿐만 아니라 년사의 豐凶(풍흉)은 自然(자연)의 調和(조화)인데 앞으로의 豐凶(풍흉)을 自記(자기)들이 어떻게 豫言(예언)할 수 있겠사옵니까? 無識(무식)하기 이를데 없는 짓이옵니다.
생각하옵건데 양씨(梁氏)이건 고씨(高氏)이건 양(梁) 고(高) 두 을라(乙那) 할아버지는 두 성(姓)의 祖上(조상)이온즉 이랬으면 어떻고 저랬으면 어떠하오며 또 누구가 꼭 위가 되고 누구가 꼭 아래이어야 한다고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
까마득하게 오래 되는 신인(神人)의 行跡(행적)을 어리석은 百姓(백성)들이 臆測(억측)할 수 없는 일이옵기에 그 當時(당시) 國史(국사)에 依憑(의빙)해서 위차(位次)를 定(정)하였던 것이온데, 高允奎(고윤규) 무리들이 『高氏(고씨)가 임금이었으니까 位牌(위패)가 位(위)에 있어야 한다』는 광언망설(狂言妄設)이 이를데 없아옵니다. 삼신인(三神人)이 耽羅國(탐라국)을 처음으로 創建(창건)하였을 때 군신지의(君臣之義)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헤아릴 바 없사오나 事跡(사적)에 양을라(良乙那)가 장(長)이고 高乙那(고을라)가 다음이라고 記錄(기록)에 남아 있아온즉 장(長)과 차(次)의 順序(순서)는 嚴然(엄연)히 있었던 것으로 헤아리옵니다.
十五世(세) 後(후)에 내려와서 高氏(고씨)에 성주(星主)와 왕자(王子)의 벼슬이 있었으나 楊氏(양씨)에게도 꼭 같이 城主(성주)와 王子(왕자)의 벼슬이 있었아온즉 가사(假使) 後世(후세)에 와서 군신(君臣)의 지위(地位)를 保存(보존)하지 못하였다고 치더라도 어떻게 그것을 理由(이유)로 삼아서 시조(始祖)의 사적(史蹟)을 疑心(의심)하여 高乙那(고을라)가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虛無孟浪(허무맹랑)한 말이온즉 이것은 변정(卞正)할 필요도 없이 물리쳐야 옳다고 헤아리옵니다. 또 앞서 아뢰온 바와 같이 三姓廟(삼성묘) 創建(창건) 當時(당시) 位牌(위패) 수위(首位)에 양을라(良乙那)를 모시었아온즉 只今(지금) 萬一(만일) 位牌(위패)를 바꾸어 奉安(봉안)한다면 이것은 또 王(왕)을 欺瞞(기만)하는 結果(결과)가 되옵니다.
國史(국사)가 있기 前(전)에 萬一(만일) 詳考(상고)할 根據(근거)가 있다면 高允奎(고윤규) 무리들이 어찌 감히 손을 뻗힐 수 있으며 國史(국사) 以前(이전)에 文籍(문적)이 없다면 高允奎(고윤규) 무리들은 王(왕)을 欺瞞(기만)한 罪(죄)를 容恕(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各別(각별)히 살피시여서 신(神)의 뜻을 便安(편안)히 하여 주시고 아울러서 紛糾(분규)를 막아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
結局(결국) 이 事件(사건)은 英祖大王(영조대왕)의 『使之一從國史(사지일종국사)에 따라 處理(처리)하라!』하라는 下命(하명)에 따라 高允奎(고윤규)의 罔計(망계)는 霧散(무산)되고 位牌(위패)의 順位(순위)는 原狀(원상)대로 還元(환원)되었지만 이 事件(사건)은 많은 敎訓(교훈)을 後世(후세)에 남겨 두고 오늘날 까지 傳(전)해 내려 오고 있는데도 近世(근세)에 와서도 그 無禮(무례)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實情(실정)이다.
그 後(후) 英祖(영조)48年(년)(1772年(년))에 良乙那(양을나) 後孫(후손) 양 세현(梁 世絢)이 濟州牧使(제주목사)로 赴任(부임)하여 三聖祠(삼성사)를 重修(중수)하고 三姓團(삼성단) 밑에 있는 民間(민간) 所有(소유)의 밭을 사들이고 담장을 改築(개축)하고 나무를 심었으며, 祭享(제향) 때에 잔을 올리는 先後(선후)問題(문제)로 일어나는 忿爭(분쟁)을 없이 하기 위하여 獻爵(헌작)을 한꺼번에 올리도록 하는 規約(규약)을 만들어서 紛糾(분규)를 解消(해소)시키는 契機(계기)를 만들었으나 『良高位次卞正』(양고위차변정)事件(사건)은 그 後遺症(후유증)이 아직까지도 完全(완전)히 가시지 않아서 삼성전 제향홀기(三聖殿 祭享忽記)와 축문(祝文)에 적지 않은 矛盾(모순)이 남게 되었고, 더욱이 遺憾(유감)스럽게도 '高·梁·夫(고량부)' 삼성(三姓)이니 '高夫梁(고부량)' 三姓(삼성)이니 하는 그릇된 삼성위차 호칭(三姓位次 號稱)을 間或(간혹) 듣고 또 冊子(책자)에서도 볼 수 있음니다. 그러나 歷史(역사)가 말합니다.
삼성사(三聖祠)
지난 2005年(년) 10일 午前(오전) 濟州市(제주시) 삼성혈(三姓穴)에서 耽羅國(탐라국)을 세운, 양(梁),고(高).부(夫)등 濟州(제주)의 삼성(三姓) 始祖(시조)인 삼을나(三乙那)의 偉業(위업)을 기리는 春期)大祭(춘기대제)가 열렸읍니다.
三姓(삼성)의 後孫(후손)인 부 두용 前(전) 西歸浦(서귀포) 市長(시장)(初獻官(초헌관)과 고 태호 삼도동 老人會長노인회장)(亞獻官(아헌관)과 양 태관 표고農場(농장) 代表(대표)(終獻官(종헌관)) 等(등) 三姓(삼성)의 後孫(후손)들이 三乙那(삼을라)가 태어났다는 三姓穴(삼성혈) 앞 三姓殿(삼성전)에서 傳統(전통) 祭禮(제례)에 따라 嚴肅(엄숙)히 祭(제)를 지냈읍니다.
이날 三姓穴(삼성혈)에는 700여 名(명)의 參拜客(참배객)과 觀光客(관광객)이 찾아 春期大祭(춘기대제)를 지켜봤다.
梁高夫(양고부)三聖祠(삼성사)財團(재단)은 梁氏(양씨), 高氏(고씨), 夫氏(부씨)의 始祖(시조)인 三乙那(삼을나)의 偉業(위업)을 기리고 유지를 받들어 三姓(삼성) 後孫(후손)은 물론 道民(도민)들의 繁榮(번영)을 빌기 위해 해마다 祭祀(제사)를 지내고 있읍니다.
삼성사(三姓祠)하면 곧 성지(聖地) 삼성혈(三姓穴)을 뜻한다.
우리나라 唯一(유일)의 사적지(史蹟地)로서 第(제)134號(호)로 指定(지정) 保護(보호)되고 있으며 탐라국(耽羅國)의 開拓者(개척자)이시고 이 땅의 主人(주인)이신 良,高,夫(량,고.부) 삼신인(三神人)의 발상지(發祥地)입니다.
아득한 옛날 이 땅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에 땅에서 良(양) 高(고) 夫(부)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 高麗史(고려사)를 비롯 王朝實錄(왕조실록), 東國通鑑(동국통감), 耽羅志(탐라지),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 南槎錄(남사록) 等(등) 古記(고기)와 正史(정사)에 長曰(장왈) 良乙那(량을나), 次曰(차왈) 高乙那(고을나), 三曰(삼왈) 夫乙那(부을나)의 次順(차순)하여 아득한 옛날 이 땅에 사람이 살지 않을 때에 땅에서 良(양) 高(고) 夫(부) 삼신인(三神人)이 용출(湧出)하여 狩獵生活(수렵생활)로 피의육식(皮依肉食)을 하다가 하루는 오곡(五穀)과 家畜(가축) 等(등)을 갖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三公主(삼공주)를 맞아 各其(각기) 배필(配匹)로 삼으심으로써 이 땅에 처음으로 農耕生活(농경생활)을 비롯한 삶의 터전을 마련, 數千年(수천년)의 歷史(역사)를 이어 오면서 오늘의 發展(발전)을 있게 하였읍니다.
혈단(穴壇) 내에 있는 3個(개)의 혈(穴)은 오랜 歲月(세월)이 흐름에 따라 상당부분 埋沒(매몰)되고 있으나 事跡地(사적지)로서의 歷史的(역사적) 價値(가치)가 더욱 認定(인정)되어 最近(최근)에는 해마다 50萬(만)名(명)에 이르는 많은 內外(내외) 觀光客(관광객)이 이곳을 다녀가고 있는 實情(실정)이다. 삼성사(三姓祠)에서는 해마다 세번에 걸쳐 祭祀(제사)를 모시고 시조(始祖)의 높은 뜻과 그 얼을 기리고 있는데 이 곳이 성지(聖地)로 指定(지정)된 後(후) 오늘에 이르는 연혁(沿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1525年(년)(朝鮮(조선) 中宗(중종)21年(년) 濟州牧使(제주목사) 李壽童(이수동)이 三姓穴(삼성혈) 穴團(혈단) 둘레에 담을 치고 홍살문(紅煞門)을 세우고 상석(床石)을 마련하여 해마다 동지달 중정(中丁)에 全(전) 濟州道民(제주도민)들로 하여금 정성껏 祭祀(제사)를 올리도록 한 것이 삼성사(三姓祠)의 시초(始初)입니다.
▶ 1698年(년)(肅宗(숙종)24年(년) 유 한명 牧使(목사)가 三姓團(삼성단) 東便(동편)에 祠宇(사우)를 創建(창건)하고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씩 祭祀(제사)를 올리도록 함으로서 건시대제(乾始大祭)까지 年(년) 3回(회)의 祭祀(제사)를 지내게 되었읍니다.
▶ 1699年(년)(肅宗(숙종)25年(년) 대정현감(大靜縣監) 안 래백(安來栢)이 三姓穴(삼성혈) 곁에 다시 삼성사(三姓祠)를 創建(창건)하고 上樑文(상량문)과 삼성단사우기 (三姓壇祠宇記)를 썼읍니다.
▶ 1702年(년)(肅宗(숙종)28年(년) 牧使(목사) 이 형상(李衡祥)이 가락천(嘉樂川) 東便(동편)으로 삼성사우(三姓祠宇)를 옮겨 짓고 상량문을 썼읍니다. 이때 사우(祠宇)를 完成(완성)하고 삼신인(三神人)의 위패(位牌) 順位(순위)를 定(정)함에 있어서 삼성신인 강생(三姓神人 降生)의 事跡文獻(사적문헌)과 國史(국사)를 널리 상고(詳考)한 끝에 양을나(良乙那)를 좌편(左便) 第(제)1位(위)에 모시고 고을나(高乙那)를 第(제)2位(위)에, 부을나(夫乙那)를 第(제)3位(위)로 決定(결정)한 後(후) 제문(祭文)을 지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祭祀(제사)를 올리었읍니다.
▶ 1710年(년)(肅宗(숙종)36年(년) 牧使(목사) 최 계옹(崔 啓翁)가 신위판(神位板)에서 부군(府君)이라는 두 글자를 빼고 을나(乙那)라고 고쳐 썼읍니다.
▶ 1740年(년)(英祖(영조)16年(년) 庚申年(경신년) 3月(월) 목사(牧使) 안 경운(安慶運)이 삼성사 수호책(三姓祠 守護策)으로 수직생(守直生) 48名(명)을 뽑아서 交代(교대)로 수직(守直)하게 하고 道民(도민) 中(중)에서 名望(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제장(齊長)을 삼고 장의(掌議) 한사람과 유사(有司) 세사람을 두는 制度(제도)를 만들었으며 재생설치(齋生設置) 기문(記文)을 지었읍니다.
▶ 1751年(년)(英祖(영조)27年(년) 牧使(목사) 윤 구숙(尹 九淑)이 양고위차개환(梁高位次改換)에 대한 上疏文(상소문)을 나라에 올렸읍니다.(門中(문중)資料室(자료실) 梁高夫(양고부) 序列(서열) 參照(참조) 양고위차개환(梁高位次改換)이라는 것은 고을나(高乙那) 後孫(후손) 몇사람이 좁고 어리석은 所見(소견)에서 三聖祠(삼성사)에 奉安(봉안)하는 良乙那(량을나), 高乙那(고을나), 夫乙那(부을나), 삼신(三神)의 位牌(위패) 順序(순서)를 뒤바꿔 놓은 事件(사건)을 말합니다.
卽(즉) 第(제)1位(위)가 양을나이며 2位(위)가 高乙那(고을라) 3位(위)가 夫乙那(부을라)로 三聖祠(삼성사) 創建(창건) 當時(당시) 여러 事跡(사적)을 詳考(상고)하여서 定(정)하고 每年(매년) 享祀(향사)하여 왔는데 그로부터 50年(년) 後(후)인 1751年(년)(英祖(영조) 辛未年(신미년)에 所見(소견)없는 몇사람이 自己(자기)들의 祖上(조상)인 '高乙那(고을라) 神主(신주)를 1位(위)에 모신 '良乙那(양을나)'의 位牌(위패)와 바꾸어 놓았던 事件(사건)입니다.
그래서 그 當時(당시) 濟州(제주)에 赴任(부임)하여 있던 윤구연 濟州牧使(제주목사)가 이 事實(사실)을 나라에 上疏(상소)하였고 英祖大王(영조대왕)께서는 어명(御命)을 내리시어 本來(본래)대로 還元(환원)시켜 놓았던 事實(사실)을 양고위차개환(梁高位次改換)事件(사건)이라고 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位牌(위패)의 順位(순위)는 還元(환원)되었으나, 이 위차개환(位次改換)의 餘波(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그 餘韻(여운)이 사라지지 않고 있어 問題(문제)입니다.
매우 遺憾(유감)스러운 일이지만, '高·梁·夫(고량부)' 三姓(삼성)이니, '고(高),부(夫),량(良)' 三姓(삼성)이니 하는 그릇된 삼성위차 호칭(三姓位次 號稱)을 間或(간혹) 듣고, 또 冊子(책자)에서도 볼수있는데, 間或(간혹) 無知(무지)하게도 “가나다” 順序(순서)에 依(의)해서 高夫梁(고부량)이 되었다는 憶持(억지)를 쓰는데, 이조(李朝)때 위패(位牌) 순위(順位)를 “가나다” 順序(순서)로 順位(순위)를 定(정)할수 있었다고 하는것은, 나는 바보요 하는 소리와 같읍니다. 이것은 無識(무식)한 所致(소치)일 뿐만 아이라 歷史(역사)를 잘 모르고, 오도하는 結果(결과)가 된 글을 쓰는 사람이나 말을 하는 사람들은 바르게 쓰고 傳(전)해야 옳을 것입니다.
▶ 1772年(년)(英祖(영조)48年(년) 문양공(文襄公)의 後孫(후손) 양 세현(梁 世絢)이 濟州牧使(제주목사)로 계실 때 三聖祠(삼성사) 담장을 새로 增築(증축)하고 전사청(典祀廳)을 새로 짓고 나무를 심었으며 선흘(善屹) 조천(朝天) 와산(臥山) 等地(등지)에 있는 위토(位土)를 사들여서 鄕廳(향청)으로 하여금 그 소호와 祭祀(제사)를 主管(주관)토록 하였읍니다.
▶ 1785年(년)(正祖(정조)9年(년) 濟州(제주) 토인(土人) 양 경천(梁 慶天)이 상언(上言)하여 삼성조(三姓祖) 사액(賜額)을 청(請)하고 비변사(備邊司)가 조정(朝庭)에 여쭈어서 하교(下敎)에 依(의)하여 대신회의(大臣會議)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서 領議政(영의정) 서 명선(徐 命善)과 左議政(좌의정) 홍 낙성(洪 樂性)과 영돈녕(領敦寧) 정 존겸(鄭 存謙)과 판부사(判府事) 이 복원(李 福源) 等(등)이 말하기를 "이 일은 경솔히 할 일이 아니오나 양고부(梁高夫) 삼성(三姓)은 엣날 탐라(耽羅)를 개국(開國)한 神人(신인)이온 즉 다른 원(院)이나 사우(祠宇)와는 다르고 또 섬에 사는 百姓(백성)들이 그분들의 惠澤(혜택)을 思慕(사모)하여 廟宇(묘우)를 세우고 祭祀(제사)를 올려온지가 이미 오래이오니 삼자(三字)의 현찬 額字(액자)를 특별히 하사(下賜)하시어서 한 地方(지방)에 사는 모든 百姓(백성)들을 즐거웁게 하심이 바로 百姓(백성)들을 便安(편안)하게 다스리는 도리이온줄로 아옵니다" 하였다고 또 예조(禮曹)에서 아뢰옵기를 "大臣(대신)들의 決議(결의)대로 施行(시행)하시옵기를 바라옵니다" 그래서 允許(윤허)가 계시었고 王(왕)의 하명(下命)에 依(의)하여 예문관(藝文관)에서 액호(額號)를 삼성사(三姓祠). 삼을사(三乙祠). 삼영사(三靈祠)等(등)의 망기(望記)를 올렸더니 王(왕)은 三姓祠(삼성사)가 좋다고 分付(분부)하신 後(후) 예관(禮官)을 보내시어 사액치제(賜額致祭)하도록 命(명)하시었읍니다.
▶1849 年(년)(헌종(憲宗)15年(년) 牧使(목사) 장 인식(張寅植)이 三聖祠(삼성사) 域內(역내)에 숭보당(崇報堂)을 짓고 거재생(居齋生) 15名(명)씩을 두어 學問(학문)을 硏究(연구)하도록 하였읍니다.
▶1856年(년)(哲宗(철종)2年(년) 丙辰年(병진년)에 대정(大靜)에 사는 고성규(高成奎)가 비갈(碑碣)을 다시 세웠읍니다.
▶ 1865年(년)(高宗(고종)2年(년) 乙丑年(을축년) 濟州牧使(제주목사) 양 헌수(梁 憲洙)가 단내(檀內)에 나무를 많이 심게 하고 용담동(龍潭洞) 호박뇌(琥珀磊) 혈단문로(穴檀門路) 等(등)에 있는 위토(位土)를 사서 의손(義損)하였읍니다.
▶ 1871年(년)(高宗(고종) 8年(년) 辛未年(신미년) 조령(朝令)에 依(의)하여 사우(祠宇)가 철훼(撤毁)되었읍니다.
▶ 濟州(제주)에 유배(流配)왔던 최 익현(崔 益鉉) 等(등)이 三聖祠(삼성사)의 復舊(복구)를 상소(上疏)하였읍니다.
▶ 1890年(년)(高宗(고종) 27年(년) 庚寅年(경인년) 정언(正言) 고경준(高景晙)이 梁高夫(양고부) 三姓(삼성) 後孫(후손)들과 協議(협의)하여 모흥단(毛興檀) 東(동)쪽에 사우(祠宇)를 새로 세우고 혈단비(穴壇碑)를 마련했읍니다. 이로써 삼성사(三姓祠)는 19年(년)만에 옛모습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삼을나(三乙那)의 신위(神位)를 환안(環安)하게 되었읍니다.
이에 앞서 양 성연(梁 成演), 고행(高行), 부 희노(夫 熙魯)등 삼성(三姓) 代表(대표)들은 三聖祠(삼성사) 再建(재건)을 위해 모든 精誠(정성)과 努力(노력)을 쏟았읍니다. 특히 양 성연(梁 成演)은 高宗(고종) 신미년(辛未年)에 書院(서원)撤廢(철폐)로 三聖祠(삼성사)가 훼철(毁撤)되자 위판(位板)을 祠堂(사당)에 뫼시고 있다가 그 後(후) 입사(立祠)시에 봉환(奉環)하는 큰 일을 했으며 부 희노(夫 熙魯)는 사우(祠宇)재건의 뜻을 끝내 굽히지 않다가 목사(牧使) 沈 賢澤(심 현택)에게 發覺(발각)되고 官衙(관아)에 끌려가 심한 매질을 당한 끝에 형독(刑毒)으로 別世(별세), 祖上(조상)을 위해 순사(殉死)하였읍니다(1884年(년)
▶ 1907年(년) (순종(純宗)元年(원년) 丁未年(신미년) 삼성사우(三姓祠宇) 守護(수호)와 享典(향전)을 郡廳(군청)에서 主管(주관)하게 되었읍니다.
▶ 1910年(년) 참사(慘事) 양 상용(梁 翔龍)이 三聖祠(삼성사) 管理權(관리권)을 郡廳(군청)에서 引繼(인계)받아 祠宇(사우)와 典祀廳(전사청), 崇報堂(숭보당), 守僕廳(수복청) 담장 等(등)을 다시 重創(중창)하고 나무와 꽃나무를 많이 심고 財團法人(재단법인) 認可(인가)를 받았으며 理事(이사) 3人(인), 監事(감사) 3人(인), 楚香 有司(초향유사) 1人(인)을 두어서 이때부터 三聖祠(삼성사) 聖域(성역)管理(관리)를 삼성신인(三姓神人) 후예(後裔)들이 直接(직접) 主管(주관)하게 되었읍니다.
1919年(년) 삼성(三姓)代表(대표)의 協議(협의)하에 사우(祠宇), 숭보당(崇報堂) 단직사(壇直舍)를 重修(중수)하기 始作(시작)하여 다음 해에 竣工(준공)하고 그 해 12月(월) 재단법인삼성시조제사재단(財團法人三姓始祖祭祀財團)이 正式(정식) 認可(인가)된 것은 1921年(년) 11月(월)10日(일)이었읍니다. 當時(당시) 認可(인가) 申請(신청) 名義人(명의인)은 양상용(梁 翔龍), 고 명우(高 命瑀), 부 지환(夫 智煥)이었읍니다. 이 때부터 三聖祠(삼성사)는 더욱 尊嚴(존엄)시되고 그 管理(관리)를 三姓(삼성)後裔(후예)들이 直接(직접) 맡게 되었읍니다.
※ 여기에서 향청(鄕聽)으로부터 군청(郡聽)에 주관권(主觀權)이 넘어간 涇渭(경위)와 그것을 본손(本孫)들이 다시 引繼(인계)받은 來歷(내력)을 簡略(간략)하게 적어 둡니다.
순종(純宗) 융희(隆熙) 년간(年間)에 향청(鄕聽)이 廢止(폐지)됨에 따라 삼성단(三姓壇) 管理(관리)와 향사지전(享祀之典)이 군청(郡聽)으로 넘어가게 되고 그後(후) 또 郡廳(군청)이 改革(개혁)됨에 따라 춘추제향(春秋祭享)도 아니올리고 管理(관리)와 수호(守護)도 유명무실(有名無實)하게 되어 단역(壇域)은 荒廢(황폐)하여지고 위토(位土)管理(관리)에도 所有權(소유권) 紛爭(분쟁)이 惹起(야기)되는 形便(형편)이었는데 구좌면 구리(舊左面 九里)소재(所在) 위토(位土)와 조천면 삼리(朝天面 三里), 대정현 하원(大靜縣 河源) 等(등)에 있는 위토(位土)를 소작인(小作人)들에게 빼앗기게 되었읍니다. 혹자(或者)는 구향청소유(舊鄕聽所有)를 主張(주장)하고 혹자(或者)는 세전기업(世傳基業)이라는 억지 진술(陳述)로 토지조사국(土地調査局)에 소송(訴訟)을 제기(提起)하는 者(자)가 수십백인(數十百人)에 이르렀읍니다.
이 때 참사(參事) 양 상용(梁 翔龍) 공(公)이 數百代(수백대) 傳(전)해 내려오는 기업(基業)을 이렇게 虛無(허무)하게 잃어버리면 무슨 面目(면목)으로 地下(지하)에서 조종(朝宗)을 뵈옵겠는냐? 하고 발분망식(發憤忘食)으로 부성찬공(夫聖贊公)과 협심합력(協心合力)하여 빙고증금(憑古證今)으로 관아(官衙)에 하정(下正)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여서 마침내 많은 위토(位土)를 다시 찾게 되었으니, 그 공적(功績)은 자못 크다 하겠으나, 사미반성(事未半成)으로 中途(중도)에서 그분이 작고(作故)하게 된 것은 슬픈 일이며 성역(聖域)의 관리권(管理權) 인수(引受)와 위토회복(位土回復), 중창재단완성(重創財團完成) 等(등)의 거역(巨役)은 실로 상용(翔龍)공(公)의 성력(誠力)에 연유(緣由)한 것이라 하겠기에 여기에 그 전말(顚末)을 약술(略述)하여 둡니다.
▶ 삼성혈(三姓穴)이 文敎部(문교부)指定文化財(지정문화재)(事跡(사적)134號(호))로 正式(정식) 指定(지정)된 것은 1964年(년) 6月(월)23日(일)이었읍니다. 1970年(년) 경술년(庚戌年)에는 정부예산(政府豫算)과 삼성후예성금(三姓後裔誠金)으로 사우(祠宇)와 부속건물 중건(重建) 역사(役事)를 始作(시작)하여 그 이듬해 신해(辛亥年(신해년) 4月(월)10日(일) 춘제시(春祭時)에 예성(禮成)하였읍니다.
▶ 근년(近年)에 와서는 三聖祠(삼성사) 運營(운영)이 나름대로 健實(건실)해지면서 경외(境外: 濟州市(제주시) 이도동)에 規模(규모)있는 삼성회관(三姓會館)까지 建立(건립), 會議室(회의실)과 삼성(三姓)의 도(道)宗親會(종친회) 事務室(사무실)에 共有(공유)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1983年(년) 梁 太一(양 태일) 財團(재단)理事長(이사장) 在任時(재임시)에 三姓(삼성)後裔(후예)들에 대한 英才(영재)養成(양성)의 必要性(필요성)을 痛感(통감)하여, 『三姓獎學事業(삼성장학사업)』制度(제도)를 마련 그 基礎(기초)를 다진 것은 매우 鼓舞的(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읍니다. 그로부터 해마다 많은 三姓(삼성)後裔(후예)들이 獎學金(장학금) 惠澤(혜택)을 받고 있는 터입니다.
이렇듯 三聖祠(삼성사)는 이제 境內(경내) 노목(老木)의 保護(보호)管理(관리)와 편리시설 擴充(확충) 等(등) 內實(내실)을 기하면서 어려운 處地(처지)에 있는 後孫(후손)들의 人才(인재)養成(양성)分野(분야)에 이르기까지 發展(발전)에 發展(발전)을 더해 가고 있읍니다.
▶ 年(년)3回(회)에 걸쳐 모시는 祭祀(제사)로서는 4月(월)10日(일) 춘계대제(春季大祭), 10月(월)10日(일) 추계대제(秋季大祭), 12月(월)10日(일) 건시대제(乾始大祭)인데 춘추(春秋) 2回(회)의 대제(大祭)는 後孫(후손)들이 모시고 건시대제(乾始大祭, 穴祭)는 도지사(道知事)를 초헌관(招獻官) 그밖에 기관장(機關長)과 도민(道民)代表(대표)를 아헌(亞獻), 종헌관(終獻官)으로 하여 봉제(奉祭)하고 있읍니다. 삼성혈(三姓穴)은 실로 世界(세계)속의 사적(史蹟)입니다.
삼성혈(三姓穴) 全景(전경)
(1) 婚姻地(혼인지) - 西歸浦市(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2) 三姓穴(삼성혈) - 秋期(추기)大祭(대제) 2002年(년) 10月(월) 10日(일)
(1) 三姓穴(삼성혈)에서 나온 三神(삼신)과 碧浪國(벽랑국)의 세 公主(공주)가 婚禮(혼례)를 올린 800여평의 연못인 婚姻地(혼인지)는 地方(지방)記念物(기념물) 17號(호)입니다. 東(동)쪽 바닷가에서 나무함이 떠밀려와 열어보니 또 石函(석함)이 있었습니다. 나무함 속에서는 망아지 및 五穀(오곡)의 씨앗이 나왔는데. 세 神人(신인)은 세 處女(처녀)들을 아내로 맞아 물 좋고 기름진 땅을 골라 터전을 마련하여 살았다는 傳說(전설)이 傳(전)해져 옵니다. 이때부터 濟州(제주)에서는 農耕(농경)生活(생활)이 始作(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 三姓穴(삼성혈) 秋期(추기)大祭(대제)가 10日(일) 梁高夫(양고부) 三姓穴財團(삼성혈재단) 主催(주최)로 諸族(제족)과 各級(각급) 團體長(단체장) 等(등) 500여명이 參席(참석)한 가운데 三姓殿(삼성전)에서 열렸습니다. 이날 初獻官(초헌관)과 亞獻官(아헌관)은 양성후·부두성氏(씨), 終獻官(종헌관)은 고성화씨가 맡아 大祭(대제)를 擧行(거행)했읍니다.
같이 보기
百濟(백제)
新羅(신라)
高麗(고려)
朝鮮(조선)
耽羅摠管府(탐라총관부)
皇龍寺(황룡사)
碧浪國(벽랑국)
이어도(濟州島(제주도) 最南端(최남단)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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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수 2021-01-27 오후 6:57~ 참 좋은 자료 잘봣습니다. 청춘시절의 양 선생님 사진 배우같습니다.